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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장흥자생수목원(홈피) | 양주별산대놀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양주세계민속극축제2008 |
1) 오봉산
오봉산(五峰山)은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에 있다. 봉우리가 다섯 개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오봉산 아래 살았던 어떤 부자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다. 하루는 이 고을에 새로운 원님이 부임해 왔다. 원님에게 무남독녀의 딸 하나가 있었는데, 마침 다섯 형제 모두 이 처녀에게 장가들고 싶어했다. 난처해진 원님은 산 위에 가장 무거운 바위를 올려놓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했다. 다섯 형제가 일제히 산 위에 바위를 올려놓는 시합을 해서 다섯 개의 봉우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넷째 아들은 바위를 산 위에 올려놓지 못하였으므로 지금도 넷째 봉우리에는 바위가 없다고 한다.
다섯 형제가 부모의 재산상속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여, 누가 돌을 멀리 던지는가를 시합했다는 말도 있다. 둘째만은 봉우리 위에 돌을 던지지 못했다. 지금도 둘째 봉우리에는 바위가 없고, 봉우리 밑에 있다고 한다.
어느 부인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간 선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과거합격을 기원하며 정성을 다하여 치성을 드리던 부인은 남편이 돌아올 때가 되자 밤마다 불을 밝히고 기다렸다.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밝혀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집에 있는 장작이 다 타버려서 더 이상 불을 지필 것이 없게 되니, 부인은 다섯 손가락에 차례로 불을 붙여 선비가 돌아올 길을 비추었다고 한다. 이때 이변이 일어났으니 부인이 손가락에 불을 밝힐 때마다 산봉우리가 하나씩 만들어졌다고 한다.
=> 오봉산 다섯 봉우리가 생긴 이유를 갖가지로 말한다. 독립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2) 임꺽정
조선 중기 양주(楊州)의 백정(白丁) 임꺽정(林巨正, 林巨叱正)은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았다. 이후 명종 대의 정치 혼란과 계속된 흉년으로 관리의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 행각을 벌였다. 이들의 행각에 백성들이 호응하면서 관군의 토벌이 있을 경우 미리 정보를 알려주어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559년(명종 14)에는 개성(開城)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자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사를 거느리고 소굴을 소탕하러 갔다가 오히려 살해되기도 했다. 이듬해 8월에는 일당이 서울까지 출몰하였다가 장통방(長通坊, 지금의 종로 2가 부근)에서 아내와 부하들이 체포되었고, 12월에 서울 전옥서에 갇힌 아내와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다가 숭례문 밖에서 참모 서림(徐林)이 체포되었다. 이어 황해도에서 형 가도치(加都致)가 순경사 이사증(李思曾)에게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1561년에는 임꺽정 일당을 잡기 위해 경기도 · 강원도 · 평안도 · 함경도 · 황해도의 군졸들이 대거 동원되어 소탕작전을 펼쳤다. 이들이 약간이라도 의심 가는 사람이면 모두 잡아 가두어 심문을 벌이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정부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도적 체포를 일임하고 다른 군사들은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1562년 정월에는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이 구월산으로 도망간 임꺽정을 추격하여 체포했고, 서울로 압송해 사형했다.
임꺽정은 아버지가 백정이라 마을 사람들이 홀대하여 동네 우물물도 먹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임꺽정은 양주 불곡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먹고 자랐는데, 그 물에 광물질이 많아서 기골이 장대해졌다. 주변 사람들의 홀대를 참지 못해 열아홉 살에 의적이 되었는데, 얼굴에 털이 많아 털북숭이로 보였다.
평안도의 한 장사꾼이 수십 명의 짐꾼을 데리고 도적 산을 넘으려는데, 온 얼굴이 털북숭이인 임꺽정을 주막에서 보고 음식을 어떻게 먹나 궁금해서 국수를 사 주었다. 임꺽정은 수염을 양 갈래로 갈라서 두 귀에 걸치고 순식간에 국수를 먹어 치웠다. 장사꾼은 신기해하며 몇 그릇을 더 사 주었다.
도적 산을 넘어도 될 만큼 사람이 모여 장사꾼이 고개를 넘는데, 수십 명의 도적이 나타나 재물을 빼앗았다. 그런데 우두머리가 임꺽정이었다. 임꺽정은 음식을 사 준 장사꾼을 알아보고는 재물을 돌려주면서 재를 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임꺽정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홍명희(洪命憙)가 소설 <<임거정>>을 지어 임꺽정이 널리 알려졌다. 이 작품에 관해 <<한국문학통사>>에서 다음과 같이 고찰했다.
홍명희(洪命熹, 1888-1968)는 민족지사이고 사회운동가였으며 전문적인 작가가 아니었다. 평생토록 소설을 단 한 편만 쓴 것이 당대 최대의 장편이고 거듭 논의되는 문제작이다. <<임거정전>>(林巨正傳)을 <조선일보> 1928년 1월 21자부터 시작해서 1939년 3월 11일자까지 연재했으나 미완성이었다. <<조선일보>>가 폐간되어 잡지 <<조광>>으로 자리를 옮겨 1940년 10월호에 한번 실리고는 중단되었다. <<임거정>>이라고 한 단행본 다섯 권이 1939년에서 1940년까지 나오고, 광복 후인 1948년에 재출간되었으나, 연재한 것을 다 수록하지 않았다. 서두의 3분의 1 정도는 개작해 단행본에 넣을 작정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다룬 사건은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를 두었다. 조선왕조 연산군에서 명종 때까지의 사화, 명종 때 왜구가 대거 침입한 을묘왜변을 작품 서두의 배경으로 했다. 임꺽정이 거느린 도적의 무리가 강성하여 조정에서 가까스로 토벌한 경과가 왕조실록에도 올라 있다. 그렇게 이어지는 사건은 조선왕조의 통치체제가 무력하게 된 것을 뜻하고, 이어서 임진왜란이 닥쳐오자 관군은 방어력을 잃었던 원인과 관련된다. 경색된 국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인재가 하층에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쓰이지 못했다.
그런 범위 안에 드는 소재를 많은 기록을 보고 모으고 구전도 다채롭게 활용했다. 전통사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고 풍부한 어법과 어휘를 구사해 백과사전이라고나 할 수 있는 풍부한 내용을 갖추었다. 비슷한 말을 이것저것 열거해 묘사를 다채롭고 생동하게 하고 흥미를 돋우는 엮음의 수법을 판소리나 사설시조에서 물려받아 적극 활용했다. 소리패나 이야기꾼의 능란한 솜씨를 있는 대로 다 보여주는 것 같은 도도한 흐름으로 대장편을 이루었다.
서두에서는 연산군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관원이 함경도 땅에서 백정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고 한, 널리 알려진 야담을 거의 그대로 수록했다. 그 인물이 백정 사위가 되어 겪은 집 안팎의 모멸을 아주 자세하게 다루어, 하층민 생활을 이해하게 하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 다음 대목에 등장하는 갖바치는 놀라운 식견을 가지고 나라 일을 장래까지 알았어도 신분이 미천해서 쓰이지 않았다 하면서, 이인전설의 정수를 이었다.
갖바치 이인이 제자 임꺽정을 데리고 전국 명산을 편답해 큰 인물이 될 수 있게 하면서도 학문은 전수하지 않았다. 도승의 가르침을 받은 영웅이 세상에 나가 천하를 호령하고 나라를 얻는다는 환상은 가지지 않게 해서 영웅소설과 결별했다.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임꺽정을 비롯한 하층의 여러 영웅이 출전해 왜적을 무찔렀으나, 공을 앗기고 도리어 효수를 당할 뻔했다. 미천한 영웅은 용납되지 않아 결국 도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임꺽정은 백정이다. 이봉학은 양반의 서자이다. 박유복은 무고로 죽은 상민의 유복자이다. 배돌석은 역졸 신분의 싸움패이다. 황천왕동은 백두산으로 간 도망꾼의 자식이며 사냥꾼 노릇을 하고 살았다. 곽오주는 머슴이다. 길막봉이는 소금장수이다. 의형제를 맺는 일곱 장사들의 면모가 이와 같다. 힘이 세고, 병장기를 하나씩 잘 다루는 재주가 있어 관군이 범접하지 못하는 도적이 되었다는 것은 근대소설다운 설정이 아니다. 국내의 여러 원천과 풍부하게 연결되어 흥미를 자아낼 뿐만 아니라, <<수호전>>(水滸傳)의 영향도 쉽사리 확인된다.
그러나 용력을 자랑하는 군담의 과장된 수법을 버리고, 출신 성분이 다양한 하층민이 각기 어떻게 살아가는지 자세한 형편을 서술하고. 어떤 곤경 때문에 도적이 되었던가 납득할 수 있게 밝히는 데 힘썼다. 배돌석이 을묘왜변에서 공을 세우고도 헛되이 고향에 돌아가 양반집 비부쟁이로 연명하고, 타향에 가서 역졸 노릇을 하기도 한 내력에 악착같이 살고자 해도 떠돌이가 되고 마는 밑바닥 인생의 쓰라림이 나타나 있다. 곽오주가 머슴살이를 하면서 주인을 위해 업어온 과부를 데리고 살다가, 어미 잃고 보채는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는 미칠 지경에 이른 것은 더욱 처참하다. 그렇지만 그런 극단에 이르지 않고 여유 있게 펼쳐지는 세태 묘사가 아주 많아, 작품이 길어졌다.
임꺽정의 무리가 의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의로운 일을 하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움직인 것은 아니다. 관군의 토벌을 몇 차례 격퇴한 다음에는 하는 이렇다 할 일이 없이 한가하게 지내고 있을 때 문제가 생겼다. 포흠을 내고 도당에 가입한 아전 출신 모사 서림이 관가에 잡혀 전향을 하고 토벌대의 길잡이가 되었다. 평산 싸움에서 관군을 크게 물리쳤으나 불안이 씻어지지 않았는데 작품이 미완으로 끝났다. 갖바치 이인이 임꺽정에게 유언으로 남긴 시가 무슨 뜻인지 밝혀지지 않아 궁금증이 생기고 임꺽정의 아들이 병사나 수사가 될 기상이라고 한 말도 기대를 가지게 하지만 결말이 없다.
이 작품은 영웅소설의 확대판이라 할 수 있다. 영웅을 위인이나 범인으로 바꾸지 않았으며, 도적을 영웅이라 한 점에서는 윤백남의 소설과 상통한다. 그러나 도적인 영웅이 큰 뜻을 품고 반역을 꾀했다고 비약하지 않고, 여러 인물이 벌이는 많은 사건에서 생활의 다양한 국면을 보여주는 데 힘쓴 점이 당시에 유행하던 세태소설과 같다. 세태의 여러 국면에 대한 부분적인 인식을 합쳐서 사회 전체, 역사의 총체를 제시하는 통찰력을 보여주지 않아 독자가 헤매게 한다.
=> 임꺽정에 관한 사실ㆍ전설ㆍ소설은 같으면서 다르다. 하나씩 고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총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전설은 다른 지방에도 있어 자료의 확대가 필요하다. 임꺽정이 의적이라는 것은 소설에서도 하지 않는 말인데 널리 퍼져 있다. 사실ㆍ전설ㆍ소설로 구체화되지 않은 무형의 창조도 계속되므로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3) 양주별산대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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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별산대놀이 중 파계승놀이, 신장수놀이, 상좌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양주별산대놀이는 주내면 유양리에서 전승하고 있는 탈춤이다. 주요무형문화재 제2호이다. 봉산탈춤과 함께 가장 발전되고 내용이 풍부한 탈춤이다.
별산대(別山臺)라고 하는 것은 서울 본산대(本山臺)의 분파라는 말이다. 해마다 사월 초파일과 오월 단오날에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해다가 탈춤을 공연했는데, 그쪽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이 빈번해서 분개한 끝에 자기네가 탈춤 공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양주는 새로 일어난 상업도시였다. 그런 곳에서 독자적인 공연물을 만들어 우세한 재력으로 육성하자 별산대놀이는 타격을 받아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
본산대놀이패가 어느 시기에 이르자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은 그 때 갑자기 인성이 나빠졌기 때문이 아니다. 초청 경쟁이 벌어진 것이 그 이유이다. 상업도시가 여럿 성장해 그런 일이 생겼을 것이다. 본산대를 초청하지 않고 독자적인 탈춤을 마련한 시기는 18세기 중엽이라고 한다. 그 때 상업의 역사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서울의 특권적인 상인에게 대항하는 이른바 사상도고(私商都賈)가 지방의 물산이 서울로 들어가는 곳에 자리를 잡고 서울의 상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커다란 분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마침내 1791년(정조 15) 신해통공(辛亥通共)의 조처에 의해 특권적 상인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철폐하는 데 이르러서 상업의 발달에 획기적인 전환이 생겼다. 양주와 송파는 바로 사상도고가 자리를 잡은 신흥 상업도시여서 축적된 역량으로 독자적인 탈춤인 별산대놀이를 키워나갔다. 본산대가 쇠퇴하고 별산대가 흥기한 것은 상업사의 전환과 직결되는 변화였다.
양주는 양주목사가 자리를 잡은 행정중심지이고, 서울 북쪽 교통의 요로여서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이속들을 중심으로 해서 관아가 있는 동네 본바닥 사람들만 연기자로 나서서 고도의 기능을 전수해왔다. 평소에는 당집에 모셔놓았던 탈을 내려서 쓰고 탈춤 공연자들이 놀이판으로 갈 때 길놀이를 야단스럽게 벌이고, 공연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고사를 지내는 절차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것은 농촌탈춤의 뿌리가 있어 도시탈춤이 성장한 증거이다.
양주의 별산대놀이는 춤사위가 수십 가지로 세분화되어 있으며 과장 구성이 복잡하다.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사리 알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고, 형성시기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들이 몇 가지 첨가되어 있다. 전국 여러 곳의 탈춤 가운데 농촌탈춤의 단순한 형태에서 가장 멀어진 예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본산대놀이가 놀이 기술의 세련화에 힘썼던 전통을 받아들여서 사회 변혁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게 개조해 그런 특징을 지니게 되지 않았는가 싶다. 얼핏 보면 춤 자랑이고 말싸움 같은 장면에 기존의 가치관을 뒤집어놓고자 하는 주장이 까다롭게 뒤틀린 형태로 나타나 있다.
<양주별산대놀이> 서두의 몇 과장은 무슨 뜻을 지니는지 알기 어려운데, 하잘것없는 이익이라도 끝까지 다투는 세태를 보여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극중극인 침놀이 대목에서는 죽음을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자는 충동을 상징적인 수법을 써서 표출시켰다. 목중들이 왜장녀가 데리고 나온 창녀 애사당과 놀아나는 대목에서는 계율에 대한 본능의 우위를 거듭 강조했다.
노장과장과 양반과장은 다른 데서 볼 수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게 전개되지만, 양반과장에 포도부장놀이가 첨부되어 있다. 양반 샌님이 첩을 얻어 좋아하고 있는데 서리인 포도부장이 나타나 첩을 빼앗아가는 것으로 설정한 포도부장놀이는 노장ㆍ소무ㆍ취발이의 관계에 비추어보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신할애비와 할미가 다투는 과장에서는 할미가 죽고 난 다음에 아들인 도끼와 딸인 도끼 누이가 등장해 어머니에 대한 육친의 정을 깊이 확인하면서 아버지의 권위를 하나 남김없이 부정한다.
=> 이에 관한 논의가 더욱 진전되어야 한다. 자료 확대에 기대를 걸지 말고 이해의 심화에 힘써야 한다.
한국, 신명나라
韓國, 別有天地
Korea, Wonderland
* 양주별산대놀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2008년 세계민속극축제
* 2008년 세계민속극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