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허재성 기자> | “등반은 끝이 없는 여정인 것 같아요”
소속
보성고 OB
서울등산학교 교장
등반경력
72~74년 설악산 울산암, 곰길, 장군석봉, 장군봉, 치마바위 개척등반
79년 아이거 북벽 등반
80년 몽블랑·마터호른·그랑조라스 등반
81년 바인타브락2봉 원정
82년 마칼루 원정
미국 요세미티, 조수아트리 등반
85년 남극 빈슨매시프 등정
|
2006년 레이디핑거 등반. C1에서 등반조와 무전교신을 하고 있다. | 06년 레이디핑거 등반
허욱씨(許栯·56·서울등산학교 교장)는 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클라이머였다. 그는 고교시절 이미 인수봉과 선인봉 일원의 루트를 섭렵하고, 72년부터 74년까지는 설악산 곳곳에 바윗길을 냈다. 79년, 80년 두 차례의 알프스 원정에서는 아이거·마터호른·그랑드조라스로 이어지는 알프스 3대 북벽을 한국 최초로 완등해내고, 81년에는 파키스탄 히말라야 첫 진출이자 히말라야 첫 거벽등반이라는 바인타브락2봉(6,960m) 원정에 참가한다. 그리고 82년 세계 제5위 고봉 마칼루(8,463m) 원정에 이어 85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남극 탐험에서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4,897m) 정상에 올라섰다.
이렇게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등반을 펼친 그는 남극 원정을 끝으로 산악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일에 열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다시 얼굴을 드러낸 것이 쉰을 넘긴 2003년 봄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산에 대한 꿈도 저버리지 않았다. 게다가 후학들을 위한 교육에도 헌신적으로 나서고 있다.
“1,000m 벽에서 비박할 땐 정말 환상적”
4월 중순, 북한산은 신록에 환하게 빛났다. 햇살에 반짝이는 신록 숲길을 따라 하루재를 넘어 인수봉 대슬랩 밑에 도착했을 때는 오아시스 위쪽 몇몇 루트에 클라이머들이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산만 안 변하는 것 같아요. 사람은 계속 나이 먹어가는데 말이에요.”
그는 산악계에서 욱이란 본명보다는 ‘까욱’이란 별명으로 통한다. 초교시절 하도 까불까불하다 하여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그의 이름 욱은 산앵두라는 뜻이다. 어린 시절 부친께서는 집 가까운 산자락 약수터에 6남매 중 유일한 아들 욱과 함께 가서 알콜버너에 라면 끓여 먹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런 성격과 환경 속에서 자랐으니 산이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어린시절엔 정말 말썽꾸러기였죠. 중학교를 4년이나 다녔다면 말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보성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봉천동 어딘가의 산중턱을 올랐을 때였다. 흰 눈 덮인 산을 바라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이후 어렴풋이 산을 동경해오던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산악부가 어떤 곳인가 기웃대다 부원들의 도봉산 오봉 산행에 동행했다. 오봉 기슭에 도착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발걸음이 바위로 향했다. 한 발 한 발 올라선 게 감투바위 꼭대기였다.
“동기고 선배고 모두 기가 팍 죽는 표정이었죠. 중학교 때 돈암동 집에서 혜화동 학교까지 매일 뛰어다녔어요. 거북이 같은 전차를 타느니 뛰어가는 게 빠르다 싶어서였죠. 철봉에 매달려 운동하는 것은 하루 일과 중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고요. 그러다 보니 힘이 좋을 수밖에 없었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수월하게 오를 수 있었던 거죠.”
오봉에서 내려오자마자 산악부에 입회한 그는 이후 졸업할 때까지 주말이면 산에서 살았다. 까칠까칠한 바위 맛에 빠져든 후 관심을 끄는 것은 암벽등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중학교 때 쌈박질하고 다니던 친구들과 교류도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졸업할 때까지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산에 갔어요. 인수와 선인의 모든 루트를 섭렵했으니까요. 선배가 앞장선 길은 며칠 뒤 다시 찾아가 선등으로 올랐어요. 자랑 같지만 그때만 해도 인수봉 취나드A나 선인봉 표범길을 선등하는 고교생은 없었어요.”
72년 경기대 입학 후에도 정신은 오로지 산에 가 있었다. 1학년 1학기 수강신청 이후 74년 여름 군입대할 때까지 그는 한 달에 대여섯 번 설악산을 찾을 만큼 설악산에 빠져 지냈다.
|
레이디핑거 등반중 후배의 확보를 보고 있는 허욱씨. | “설악산 곳곳에 바윗길을 내던 시절이었죠. 울산암을 등반해보니까 인수나 선인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예요. 그래서 시외버스 타고 10시간 넘게 걸리는 설악산까지 거의 매주 달려갔어요. 그때 마침 선배가 장수대에서 캠프장을 운영하고 계셨어요. 거길 베이스캠프 삼아 장수대에서 한계령 군사도로 주변에 있는 바위란 바위는 다 올라갔어요. 장군봉, 장군석봉, 치마바위가 다 그 때 길이 났으니까요.”
군복무를 마친 뒤 그에게 해외원정의 기회가 찾아왔다. 여권 만드는 것조차 쉽지 않던 시절인 데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던 클라이머들에게 해외원정을 나선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고교 선배인 이종건씨는 “악우회에서 아이거 북벽 등반을 하려는데 사람이 없다”며 동참을 요구했다. 고교 졸업 직후 이종건씨에게 악우회 창립에 동참하지 않겠냐 얘기를 들은 바 있던 허욱 역시 마땅한 후배가 없어 산행할 때마다 갑갑하던 터였다.
“평생 파트너인 윤대표(56·코오롱등산학교 대표강사)를 그때 만난 거예요. 먼저 악우회 멤버로 지내고 있었으니까요. 모질게 훈련했어요. 지구력과 인내심을 키우겠다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홍천에서 서울까지 걸어오기도 했으니까요. 아이거에 대한 정보란 게 정말 보잘 것 없었어요. 하인리히 하러의 ‘하얀거미’ 책 아시죠? 그 책 한 권에 일본 잡지에 나온 사진이 자료의 전부였어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아이거 북벽’ 영화의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아이거로 향했으니까요.”
6명의 대원 모두 현지어인 프랑스어나 독일어에 백지였다. 그렇다보니 현지인과 얘기를 나눌 때만 되면 벙어리 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즐거웠고 의욕이 넘쳐 있었다. 아이거 북벽아래 산악열차의 중간역인 클라이네 샤이덱에 도착해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이후 하산루트인 서릉부터 올랐다. 그리곤 미텔레기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올라선 다음 서릉으로 내려섰다.
“세 번이나 정상에 올라섰어요. 북벽 등반중 두 번 ‘백’했고요. 매번 붙자마자 온몸이 물에 젖어 버리는 거예요. 장갑은 물론이고, 내복에 남방과 스웨터를 껴입고 덧옷까지 입었는데 물이 스며들어 얼어버리면 움직일 때마다 버석거리는 거예요.”
같은 시기에 북벽을 등반한 아일랜드 클라이머 두 사람은 등반을 포기하면서 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고어텍스를 입으라는 거였다. 심의섭 대장은 인터라켄의 장비점으로 내려가서 코어텍스 재킷 두 벌과 침낭커버를 구해 가지고 왔다. 대장의 머릿속에 공격조는 5명 중 2명으로 굳어져 있었다. 허욱과 윤대표였다.
“대표가 앞장서고, 저는 짐을 잔뜩 짊어지고 뒤따라 올랐어요. 실력은 대표가 나을지 모르지만 힘은 아무래도 내가 좋았으니까요. 묘하더군요. 구름 속에서는 영상의 기온인데 구름 위로 고개를 내밀면 이빨이 맞부딪칠 만큼 추운 거예요. 고어텍스가 정말 좋긴 좋더군요. 물이 스며들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뽀송뽀송해졌으니까요.”
그는 “배낭 깔고 앉아 제2설원에서 비박할 때는 환상적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렇게 높은 곳은 처음이었다. 밑으로 1,000m, 위로 1,000m의 거벽이 솟아 있다 생각하면 마음이 그렇게 들뜰 수 없었다. 그것에서 영원히 머물렀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3박4일 걸렸어요. 혹시 싶어 4박5일치 식량을 챙겼더니 80리터 배낭이 꽉 차더군요. 힌토슈토이서 트래버스를 지나면 돌아올 수 없다 하여 예비 로프도 챙겼으니까요. 도중에 피켈을 떨어뜨려 황당했던 일, 얼음을 녹여 애써 끓여놓은 수프가 담긴 코펠이 넘어가는 바람에 허망했던 일 등등 우여곡절이 정말 많았어요. 엑시트 크랙을 돌파하고 정상설원 직전에 다 버렸어요. 하늘로 휙휙 날려보내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장비는 하나도 못 버렸어요. 대표가 장비는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거예요.”
그는 이듬해 80년 악우회 2차 알프스 원정대원으로서 마터호른과 그랑조라스 북벽까지 등반해내 알프스 3대 북벽 완등에 성공하고, 81년 카라코룸의 난봉 바인타브락2봉 원정에 나섰다.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이란 뜻의 오거(Ogre)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바인타브락 주봉(7,285m)은 77년 크리스 보닝턴이 이끄는 영국 등반대에 의해 초등되었지만, 2봉은 미등 상태였다.
“인도히말라야의 창가방과 파키스탄의 바인타브락이 막 초등되던 시절이었어요. 3대 북벽 등반 후 자신감이 넘쳐 있었죠. 그래서 우리의 상대도 그런 벽이어야 한다 생각했던 거예요.”
당시 알프스 3대 북벽 등반을 통해 호흡도 잘 맞고 기량도 절정에 올라 있던 허욱과 윤대표는 커니스 상 해발 6,300m 지점에 제3캠프 자리를 마련해놓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서고, 다른 조가 등반에 나섰다. 그런데 이들은 정상을 60m 남겨놓은 지점에서 고소증과 체력약화로 후퇴해야했고, 하산길에서 비극을 당하고 말았다. 심한 고소증에 체력까지 바닥난 이정대 대원이 뒤처져 내려오다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것. 그는 이 등반에 대해서는 말을 무척 아꼈다.
“캠프를 하나 더 구축하고 정상공격에 나서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냥 밀어붙였던 거예요. 등정도 중요하지만 안전한 하산을 위해 마지막 캠프를 최대한 올리고, 로프 또한 깔 수 있는 만큼 깔아야한다는 게 제 생각이자 원정대의 계획이었는데 말입니다. 정대는 정말 좋은 친구였어요. 대표에게는 오랜 산친구였고요. 그 사고 직후 악우회를 떠나게 된 거랍니다.”
|
인수봉. 50 중반의 나이에도 열정적인 등반을 하고 있다. <사진=허재성 기자> | “아이 엠 롱”, “아이 엠 욱”
82년 참가한 한국산악회 마칼루 등반대는 공개 모집 원정대였다. 훈련도 강하게 했다. 6개월 가까이 합숙훈련을 하고, 적설기 훈련 삼아 대승령에서 대청봉까지 직선등반을 하기도 했다. 가슴팍까지 차오르는 눈을 헤치며 9개 골짜기를 가로지르고, 8개 바위능선을 넘어서는 험난한 등반이었다.
그러나 막상 원정에 나섰을 때는 선박화물로 부친 장비와 식량이 인도 캘거타에 제 날짜에 도착하지 않는 바람에 초반부터 원정이 엉망이 되었다. 특단을 내린 게 신승모 부대장과 고교 후배인 이찬영 대원과 셋이서 먼저 출발, 캠프를 구축하면서 본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카트만두의 교민 집에서 고추장과 된장을 슬쩍 해 캐러밴에 나섰으니 정말 먹을 게 없었던 거죠. 이른 봄철이다 보니 눈이 많았어요. 캐러밴 상의 4,000m대 고개를 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그러고도 베이스캠프를 하루 남겨놓은 지점에 있는 돌집에 놓여 있는 통나무를 캠프로 옮겨가 식당용 의자로 쓰겠다고 짊어지고 갔으니 참 저도 대단했던 것 같아요. 십자가 짊어진 예수처럼 배낭에 얹고 가다가 지치고 안개 속에 길을 잃는 바람에 하루 뒤에 캠프에 들어갔답니다.”
그는 마칼루 원정에서 원 없이 등반했다고 회상한다. 로프를 깔아가면서 루트를 개척하고, 캠프를 하나 하나 설치, 해발 7,000m 지점의 안부에 캠프를 구축, 교두보 확보에 성공했다. 그러나 허욱의 등반은 그것으로 끝났다.
“좀 힘들었겠어요?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입에 단내가 나도록 등반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대장이 선발대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대원들의 슬리핑백을 갹출하지 뭐예요. 셰르파들이 써야한다면서 말이에요. 대원들은 거의 다 국가대표급이었어요. 셰르파 없이도 등정이 가능하다 자신했으니까요. 그러나 대장의 머릿속에 이미 정상에 올라갈 사람이 정해져 있었던 거예요. 그것도 딱 한 명으로요.”
그는 마칼루 베이스캠프에서 다짐한다. ‘이제부터는 가까운 선후배끼리 재미있는 등반만 하리라’고-.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게 그 해 여름에 나선 미국 요세미티 순례였다.
“허정식, 임병길, 기형희와 함께 나섰어요. 엘캡은 못 올랐어요. 대신 로열아치스를 등반했죠. 개인사정 때문에 한 명 한 명 빠지는 바람에 조수아트리는 저하고 임병길만 갔어요. 바위가 어찌나 까칠까칠하든지 하루 등반하고 나면 손가락에 지문이 다 없어지더군요. 그래도 즐거웠어요. 70년대 중반 산에서 어울려 지내다 미국에 이민온 친구들이 거의 매일 고기를 재 가지고 오는 덕분에 모처럼 럭셔리한 등반을 했으니까요. 존 롱(Jon Long) 아시죠. 유명한 클라이머죠. 어느 날 5.12급 볼더를 단번에 올라섰더니 6척 장신의 거구가 다가오더니 악수를 청하면서 ‘아임 롱(I’m Long)’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아임 욱(I’m Uk)’ 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가 그 유명한 존 롱이더군요.”
그는 술을 마실 때면 술잔을 입에 대자마자 탁 털어넣는다. 그것도 잔을 쪽 빠는 소리와 함께. 산을 그렇게 다니면서도 귀국하면 그 때마다 허무했다고 고백했다. 당시 그가 읽은 산악소설 대부분이 남자 클라이머는 산에 가면 죽고, 그를 사랑하는 여인은 불행하게 인생을 살아야한다는 식이었다.
“산에 가기 전에 인연을 끊으려고 까탈스럽게 놀았어요. 여자는 아예 사귀려 하지 않았고, 남자 친구도 멀리 했어요. 그러다 보니 산에 갔다 돌아오면 만날 사람도 별로 없고, 또 왠지 모를 허무함에 한동안 헤매곤 했어요. 그걸 달래는 방법이 술이었죠. 6개월 가까이 술독에 빠져 지낸 적도 있어요. 몸이 멀쩡할 리 있었겠어요. 체력은 형편없어지고, 수전증에 시달렸죠. 술을 털어넣는 것은 잔에 채운 술이 쏟아지기 전에 마시려고 하다보니 생긴 습관이랍니다(웃음).”
그렇게 몸이 엉망이 되어갈 즈음이면 또다른 산이 다가왔다. 그러면 다시 몸 만들기에 들어갔다. 술과 담배에 찌든 폐가 어느 정도 기능이 되살아날 즈음이면 다리가 말을 듣지 않고, 폐가 기능을 회복해 다리에 힘이 들어갈 즈음이면 다시 숨이 찼다. 그러다 폐가 다시 한 번 더 뚫리면 더욱 강도를 높였다. 매번 이런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는 다른 사람 같으면 술에 망가져도 벌써 망가졌을 텐데 이렇게 멀쩡한 것을 보면 부모님께서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것 같다고 말한다.
“마터호른 등반 때는 정말 천우신조로 사고를 피했던 것 같아요. 한참 오르다 위쪽을 쳐다보니까 정상에서 작은 점이 떨어지는 거예요. 점점 커지지 뭐예요. 낙석이다 싶어 바일 두 자루 모두 얼음에 찍고 벽에 바짝 기댔어요. 정말 총알 지나가는 소리 같더군요. 왼쪽 헬멧을 스쳤어요. 그런데 귀퉁이가 칼로 잘라낸 듯 깨져나가고, 어깻죽지의 옷이 다 터져나갔지 뭐예요. 실크 내복만 남겨놓고 말이에요. 나중에 보니까 어깻죽지가 시커멓게 멍들어 있더군요. 안경테를 스칠 정도였으니 한 5mm만 더 가까이 다가왔다면 아마 지금 이렇게 얘기를 나주지도 못했을 거예요.”
미국 암장순례 후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 원정에 나설 때마다 목표로 삼은 봉우리에 올라서면 끝이 보일 줄 알았다. 그러나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이렇게 살다 보면 다른 것은 전혀 못해보고 죽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와 더불어 부모형제와 주변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
등반 준비. / 후배 진명식씨와 함께. | “군대 시절 후배 병사 한 명이 부식 수령하러 갔다오다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부대원 모두 비통해했죠. 영안실에서 술에 취해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나보니 가족들이 울고 있지 뭐예요. 왜 우나 싶어 울지 말라고 소리를 치려는데 입 밖으로 말이 새나가지 않더군요.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사람이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그 전까지만 해도 내가 좋아하는 바위 타다 죽는 게 최고의 행복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저만 생각하면서 살아온 것 아닌가 싶더군요.”
83년 뉴코어백화점에 입사한 이후 그는 딱 한 번의 원정 이외에는 산을 찾지 않았다. 85년 한국해양소년단이 주최한 남극 빈슨매시프 원정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남극조약에 가입하기 위해 남극탐험의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스폰서 문제로 2년 늦게 추진된 원정이었죠. 사실 빈슨매시프 등반보다 귀국길에 오랜세월 머릿속에서 그려오던 세로토레를 볼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고 나선 등반이었습니다. 그 동안 해왔던 원정 중 가장 즐겁고 신나는 원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 맞는 선후배들과 함께 했으니까요.”
허욱은 당시 3년간 산에도 다니지 않고 운동도 전혀 하지 않은 상태로 원정에 나섰다. 그런데도 허정식, 이찬영씨와 함께 남극 최고봉 정상에 오르고 말았다.
“남극의 화이트아웃은 정말 무서워요. 하늘은 하얗고 설사면은 굴곡이 전혀 없어요. 우리가 서로 몸을 연결한 로프만 겨우 보일 정도니까요. 날씨는 어찌나 춥던지 눈을 감으면 눈꺼풀이 달라붙어 잘 떠지지 않는 거예요. 마지막 캠프에 대원 5명이 전원 정상으로 향했어요. 그러나 한 명 한 명 포기하고 두어 시간 지나고 나니까 이번에 내가 지치기 시작하더군요. 정식이와 찬영이는 20m쯤 앞에서 기다리다 내가 다가서면 쭉 빼는 거예요. 평소 제가 후배들에게 했던 그대로 말이에요. 그 간격이 점점 벌어졌죠. 막판에 정말 기어서 올라갔어요. 정상에 도착하니까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군요. 젖 먹던 힘까지 쏟아부었더니 서러웠던가 봐요. 그런데 기대했던 세로토레는 들르지 못했어요. 성공하니까 주최측에서 빨리 귀국하라고 재촉했던 거죠.”
그는 85년 남극 빈슨매시프 등반 이후 2003년 초까지 바위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사회생활과 등반을 병행하다보면 둘 다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기업인 뉴코어에서 수습사원으로 출발해 스포츠레저 사업부 담당 이사까지 올라섰으면 셀러리맨으로선 성공한 축에 들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가 무너지는 바람에 50대 초반 직장생활을 접어야했다. 그가 인수봉으로 돌아온 것은 그 직후인 2003년 봄이었다.
“산에 가고픈 마음에 갈등이 많았어요. 정식이가 회사에 찾아온 날은 꼭 술독에 빠졌어요. 한 5년 참으니까 괜찮더군요. 아무튼 한 20년만에 다시 산을 찾았을 때는 심란하더군요. 인수봉은 그대론데 사람이 많이 변한 거예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요. 그래서 혹시 하는 마음에 두리번거리는데 아는 사람 목소리가 들리지 뭐예요. 그래서 저기 보이는 오아시스 쪽을 향해 소리쳤어요. 대표야! 대표야! 하고 말입니다. 아시죠, 그 친구 술 한 잔 안 하는 거. 그런 친구가 그 날 3차까지 마시고, 밴드 불러놓고 춤까지 추었답니다. 대표 그 친구가 남아 있기에 다시 산에 다닐 수 있었던 듯싶어요.”
“큰일이에요. 힘도 좋아지고, 집중력도 나아지니”
그 날 이후 옛 자취를 하나 하나 되찾고 있다는 허욱씨는 2006년 가을부터 서울등산학교를 통해 등산 교육에도 매진하고 있다. 그는 “졸업 후 6개월만에 5.13급에 오른 귀신같은 친구도 있지만 학생들에게 추억을 남겨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고교시절 선배들에게 배웠던 식으로 교육해요. 사패산 암장, 백운대 슬랩, 노적봉, 선인봉, 인수봉 순으로 바위를 오르는 거예요. 코스 하나를 오르면서 기술을 습득하는 거예요. 실전교육이죠. 큰 바위 올랐다는 자부심과 평생 남을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등산학교를 마친 뒤 산에 다니지 않더라도 멀찌감치서 인수봉이나 선인봉을 바라보면 뿌듯해지게 말입니다.”
83년 결혼한 최순복씨(50)와 두 딸 난(24), 영(21)과 단란한 가정을 이끌어오고 있는 그는 “한 5년 푹 쉬었으니까 곧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할 것 같다”면서도 산에 대한 꿈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좌절도 여러 차례 했고, 돈이 없어 제대로 해보지 못한 것도 많아요. 그래도 제 나름대로 자부심은 있어요. 한국 산악인들에게 알프스의 문을 열었고, 바인타브락 원정은 파키스탄 히말라야 첫 진출이자 히말라야 첫 벽등반이었으니까요. 그래도 못해본 게 많아요. 창가방이나 세로토레, 배핀아일랜드 같은 곳은 꼭 가고 싶었어요. 새 길도 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어쨌든 허정식과 약속한 파타고니아는 나이를 더 먹더라도 꼭 갈 거예요.”
그에 앞서 5월 말 훈자의 레이디핑거에 재도전한다. 2006년 보성 창학 100주년을 기념해서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봉이다.
“가려고 마음을 먹기는 했는데 걱정이에요. 마땅한 파트너가 없어서 말이에요. 내년엔 매킨리와 요세미티에 가고, 아콩카구아와 꿈에 그리던 피츠로이를 등반했으면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네요. 벌써 50대 중반을 넘어섰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힘도 나아지고 집중력도 좋아지는 것 같아 큰 일이에요.”
[출처]SCS고스락산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