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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즉위년 무자(1468,성화 4) 10월25일 (신해)
편전에 나아가 조영달·박자하·장계지 등에게 남이의 역모 사실을 묻다
임금이 편전(便殿)에 나아가서 조영달(趙穎達)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남이와 더불어 같은 마을에서 날마다 놀고 희롱하였을 뿐이며, 모역(謀逆)하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박자하(朴自河)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남이의 집에 이르니 남이가 사람을 시켜 갑옷을 수리하는데, 신에게 경계하기를, ‘이제 국상이 있는데 아무 연고 없이 갑옷을 수리하면 남이 듣고 반드시 이상하다고 할 것이니 너는 누설하지 말라.’고 하였고, 모역하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장계지(張戒之)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이가 일찍이 신에게 묻기를, ‘용력(勇力)이 있는 이가 누구냐?’고 하기에 신이 모른다고 대답하였고, 남이가 또 말하기를, ‘이제 성변(星變)이 있어 야인이 반드시 일어날 것인데, 내가 마땅히 쳐서 평정시키겠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이 말뿐이었습니다.”
하고, 강이경(姜利敬)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남이와 계(契)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묻기를, “네가 남이와 서로 만난 것이 며칠이 되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이제 겨우 5, 6일 되었습니다.”
하였다. 무슨 말을 하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이가 말하기를, ‘네가 임소(任所)에 어느 날 가느냐?’고 하기에, 신이 근일에 간다고 대답하였더니, 남이가, ‘그때에 서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때 강이경이 군위 현감(軍威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었다. 변영수(卞永壽)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의술(醫術)로서 남이를 보았을 뿐입니다.”
하고, 아울러 그 아들 변자의(卞自義)를 매질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이중순(李仲淳)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이가 말하기를, ‘내가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김국광·노사신·한계희가 주상께 아뢰어 옮겼다. 저 사람들은 재물을 탐하여 본디 나와 더불어 좋지 아니한 자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단지 이 말만 들었습니다.” (이형순 써넣음 =이중순:평간공 二子 이윤의 五子중.二子임)
하고, 또 문치빈(文致彬)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겸사복(兼司僕)으로 입번(入番)하니 남이도 사복장(司僕將)으로 입직하였는데, 신이 남이의 숙직하는 곳에 나아가자 남이가 바야흐로 이지정(李之楨)과 더불어 바둑을 두고 있었습니다. 남이가 상소의 초안을 가지고 신에게 교정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글에 있기를, ‘정병(正兵)은 모두 절을 짓는 역사(役事)에 나가서 병위(兵衛)가 허술하다.’고 하였고, 또 ‘석씨(釋氏)의 일은 그 영묘(靈妙)함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여 불공(不恭)한 말이 많아서 신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장차 고치고자 하였는데, 미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정숭로(鄭崇魯)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이가 일찍이 활을 만들 힘줄을 구하였는데, 신이 가지고 남이의 집에 이르자 마침 선전관(宣傳官) 이계명(李繼命)이 표신(標信)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내가 분경(奔競)을 금하라는 명을 받고 왔다.’고 하기에, 신이 드디어 작별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계명이 입시하였으므로 곧 쇄항(鎖項)하도록 명하였다. 이계명이 남이의 집에 갔을 때에 남이가 말하기를,
“네가 이제 전지를 받들고 왔는데, 내가 만약 네 머리를 쳐부수면 주상이 나를 어떻다고 하겠느냐?”
하였는데, 이계명이 듣고도 꺼리지 아니하였다. 또 탁문아(卓文兒)에게 물으니, 남이가 국상(國喪)의 성복(成服) 전에 육식(肉食)한 일을 다 말하였다. 남이가 처음 붙잡힐 때에 쇠고기 수십 근이 부엌에 있었는데, 남이에게 묻기를,
“네가 비로소 고기를 먹은 것이 어느 날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병이 있어 국상(國喪) 7일 뒤에 어미의 명으로 먹었습니다.”
하였다. 이침(李琛)·이부(李溥)·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조석문(曹錫文)·박원형(朴元亨)·이극증(李克增) 및 형조 판서 강희맹(姜希孟)이 의금부(義禁府)·대간(臺諫)과 같이 잡치(雜治)하였으나, 남이 등이 그래도 승복(承服)하지 아니하였다. 겸사복(兼司僕) 향화인(向化人) 동청주(童淸周)가 계달하기를,
“신정보(辛井保)가 홍원곶이[洪原串]에 가는데 남이가 말하기를, ‘산릉(山陵)에 나아갈 때에 미쳐서 돌아오겠느냐?’라고 하니, 신정보가 대답하기를, ‘미쳐서 올 수 있습니다.’고 하자 남이가, ‘속히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향화인(向化人) 이거을가개(李巨乙加介)가 또 아뢰기를,
“김계종(金繼宗)이 홍주(洪州)에 가는데 남이가 말하기를, ‘산릉에 나아갈 때에 미쳐서 돌아오겠느냐?’라고 하니, 김계종이, ‘미쳐서 올 수 있습니다.’고 하자 남이가, ‘속히 돌아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므로, 곧 의정부에 명하여 신정보·김계종을 나치하도록 하였다.
【원전】 8 집 286 면
【분류】 *변란(變亂)
[주D-001]석씨(釋氏) : 부처.
[주D-002]잡치(雜治) : 나라에서 중죄인(重罪人)을 심문할 때 대간(臺諫)의 관원과 육조(六曹)의 관원이 합동으로 심문하던 일.
예종 즉위년 무자(1468,성화 4) 12월19일 (을사)
난신의 집을 최 소훈·노희숙·권 소훈 등에게 내려 주다
난신(亂臣) 변영수(卞永壽)의 집을 최 소훈(崔昭訓)에게, 오치권(吳致權)의 집을 노희숙(盧熙叔)에게, 고복로(高福老)의 집을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보모(保母)에게, 민서(閔敍)의 집을 권 소훈(權昭訓)에게, 조순종(趙順宗)의 집을 신 소훈(愼昭訓)에게, 이철주(李鐵柱)의 집을 유경생(柳更生)의 처(妻)에게, 이중순(李仲淳)의 집을 이희(李喜)의 처에게, 노수동(盧守同)의 집을 엄경지(嚴敬之)에게, 정숭로(鄭崇魯)의 집을 모씨(毛氏)의 어미에게, 진소근지(陳小斤知)의 집을 내은이(內隱伊)에게 내려 주었다.
【원전】 8 집 315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변란(變亂)
예종 1년 기축(1469,성화 5) 1월13일 (무진)
난신의 처첩과 자녀를 공신에게 노비로 내려 주다
난신(亂臣) 강순(康純)의 아내 중비(仲非)와 민서(閔敍)의 첩(妾)의 딸 민말금(閔末今)을 유자광(柳子光)에게 내려 주고, 강순의 첩 월비(月非)와 변자의(卞自義)의 첩 딸 변소앙가(卞召央加)를 신숙주(申叔舟)에게 내려 주고, 남이(南怡)의 딸 남구을금(南求乙金)과 홍형생(洪亨生)의 첩 약비(若非)를 한명회(韓明澮)에게 내려 주고, 남이의 첩 탁문아(卓文兒)를 신운(申雲)에게 내려 주고, 강순의 첩 심방(心方)을 한계순(韓繼純)에게 내려 주고, 남이의 첩 이덕(李德)을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에게 내려 주고, 민서의 첩 중비(仲非)를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에게 내려 주고, 노수동(盧守同)의 첩 호근장(好斤莊)을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에게 내려 주고, 최원(崔瑗)의 아내 권비(權非)를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에게 내려 주고, 이중순(李仲淳)의 아내 금광(金光)을 심회(沈澮)에게 내려 주고, 변영수(卞英守)의 아내 석비(石非)를 박원형(朴元亨)에게 내려 주고, 〈변영수의〉 첩 칠월(七月)을 정현조(鄭顯祖)에게 내려 주고, 홍형생(洪亨生)의 아내 복비(卜非)를 거평군(居平君) 이복(李復)에게 내려 주고, 남유(南愈)의 아내 근비(根非)를 이극증(李克增)에게 내려 주고, 문효량(文孝良)의 아내 덕이(德伊)를 박지번(朴之蕃)에게 내려 주고, 이철주(李鐵柱)의 아내 효도(孝道)를 정인지(鄭麟趾)에게 내려 주고, 조영달의 아내 중이가(仲伊加)를 정창손(鄭昌孫)에게 내려 주고, 조영달의 첩 자근덕(者斤德)을 조석문에게 내려 주고, 김창손(金昌孫)의 아내 금란(金蘭)을 한백륜(韓伯倫)에게 내려 주고, 조숙(趙淑)의 아내 동질이(同叱伊)를 한계희(韓繼禧)에게 내려 주고, 맹불생(孟佛生)의 아내 허비(許非)를 노사신(盧思愼)에게 내려 주고, 박자전(朴自田)의 첩 매읍가(每邑加)를 박중선(朴仲善)에게 내려 주고, 진자근지(陳者斤知)의 아내 마금(麻今)을 홍응(洪應)에게 내려 주고, 노경손(盧敬孫)의 아내 성구지(性求之)를 강곤(康袞)에게 내려 주고, 오치권(吳致權)의 아내 효비(孝非)를 조득림(趙得琳)에게 내려 주고, 김원현(金元賢)의 첩 백덕(白德)을 신승선(愼承善)에게 내려 주고, 조순종(趙順宗)의 아내 간아지(干阿之)를 권감(權瑊)에게 내려 주고, 조경치(趙敬治)의 아내 효양(孝養)을 어세겸(魚世謙)에게 내려 주고, 강이경(姜利敬)의 아내 말비(末非)를 윤계겸(尹繼謙)에게 내려 주고, 문치빈(文致彬)의 아내 은비(銀非)를 정효상(鄭孝常)에게 내려 주고, 고복로(高福老)의 첩 아지(阿只)를 안중경(安仲敬)에게 내려 주고, 문치빈의 첩 천년(千年)을 권찬(權攅)에게 내려 주고, 강순(康純)의 첩 딸 귀덕(貴德)을 조익정(趙益貞)에게 내려 주고, 강석손(康石孫)의 아내 흔비(欣非)를 서경생(徐敬生)에게 내려 주고, 조윤신(曹閏身)의 첩 의비(義非)를 유한(柳漢)에게 내려 주었다.
【원전】 8 집 318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변란(變亂) / *신분-천인(賤人)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예종 1년 기축(1469,성화 5) 2월3일 (무자)
난신의 처첩과 자녀들을 노비로 영속시키다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난신(亂臣) 강순(康純)의 아내 부귀(富貴)를 곤양(昆陽)에, 그 첩(妾) 춘월(春月)을 웅천(熊川)에, 아우 강말생(康末生)을 해남(海南)에, 서얼(庶孽) 아우 강춘주(康春住)를 고성(固城)에, 아들 강석손(康碩孫)의 첩 옥금(玉今)을 하동(河東)에, 첩 관음비(觀音非)를 사천(泗川)에, 오치권(吳致權)의 어미 복지(卜之)와 누이 오음죽(五音粥)을 무장(茂長)에, 민서(閔敍)의 아내 석비(石非)를 김해(金海)에, 서얼(庶孽) 아우 민오을미(閔吾乙未)를 흥양(興陽)에, 박자하(朴自河)의 형 박자강(朴自江)을 하동(河東)에, 변자의(卞自義)의 아내 종생(終生)을 고성(固城)에, 조경치(曹敬治)의 계모(繼母) 종금(終今)과 서얼 형 조중생(曹仲生)·조계생(曹繼生)·조말생(曹末生)을 장기(長鬐)에, 이지정(李之楨)의 아비 이작(李灼)을 영해(寧海)에, 노수동(盧守同)의 아비 노우(盧祐)를 창원(昌原)에, 최계지(崔戒之)의 아내 경순(敬順)을 삼원(三元)에, 첩 유이(流伊)와 금음덕(今音德)을 곤양(昆陽)에, 장익지(張益之)의 아내 보덕(甫德)과 첩 자망금(子亡金)·금음동(今音同)을 고성(固城)에, 장순지(張順之)의 아내 양비(陽非)와 첩 용비(龍非)를 영덕(盈德)에, 장서(蔣西)의 아내 중금(仲今)과 첩 개덕(介德)·연비(延非)를 기장(機張)에, 신정보(辛井保)의 아내 소사(召史)를 영해(寧海)에, 김실(金實)의 아비 김연선(金憐先)과 아내 권월(權月)·후처(後妻) 선장(善莊)을 진해(鎭海)에, 조윤신(曹允信)의 아비 조몽휘(曹夢暉)와 문치빈(文致彬)의 아비 문욱(文郁)을 흥양(興陽)에, 첩 눌가이(訥加伊)와 성비(性非)를 광양(光陽)에 영속(永屬)시키고, 오치권(吳致權)의 서얼(庶孽) 삼촌숙(三寸叔) 오가팔리(吳加八里)와 오복중(吳卜仲)을 무장(茂長)에, 민서(閔敍)의 첩의 사위[女壻] 이옥산(李玉山)과 삼촌질(三寸姪) 민신동(閔信同)을 창원(昌原)에, 삼촌질 민을동(閔乙同)을 흥해(興海)에, 박자하(朴自河)의 삼촌질 박의종(朴義宗)을 하동(河東)에, 조경치(曹敬治)의 서얼(庶孽) 삼촌숙(三寸叔) 조중이(曹衆伊)를 고성(固城)에, 조자을미(曹者乙未)·조간마(曹干麽)와 서얼 삼촌질 조가사(曹加沙), 아우 조마정(曹麻丁), 이복 아우 조개동(曹介同)을 영해(寧海)에, 홍형생(洪亨生)의 형 홍이생(洪利生)을 옥구(沃溝)에, 이복 아우 홍이수(洪利壽)를 영덕(盈德)에, 삼촌질 홍계손(洪季孫)·홍철손(洪哲孫)을 해남(海南)에, 이지정(李之楨)의 아우 이지알(李之斡)과 서얼 형 이순생(李順生)을 연일(延日)에, 강이경(姜利敬)의 형 강이성(姜利誠)을 순천(順天)에, 노수동(盧守同)의 아우 노수강(盧守剛)과 삼촌숙 노희정(盧禧禎)·노지기(盧祉祈)를 고성(固城)에, 아우 노수성(盧守城)을 창원(昌原)에, 신정보(辛井保)의 형 신정보(辛鼎保)와 삼촌질 신집(辛緝)·신수(辛繡)·신양(辛樑)·신계(辛繼)·신서(辛緖)를 동래(東萊)에, 형 신익보(辛益保)와 서얼 삼촌질 신복지(辛卜只)·신동옥(辛同玉)을 하동(河東)에, 서얼 형 신존자(辛存者)를 영해(寧海)에, 서얼 삼촌질 신건지(辛巾之)·신달망(辛達亡)·신내은동(辛內隱同)을 양산(梁山)에, 조윤신(曹允信)의 형 조윤옥(曹允屋)과 삼촌숙 조중수(曹仲收)·조경명(曹景明), 삼촌질 조가박(曹加朴)을 부안(扶安)에, 문치빈(文致彬)의 형 문유빈(文有彬)을 나주(羅州)에, 노경손(盧敬孫)의 아우 노신손(盧信孫)을 무안(務安)에, 이철주(李鐵柱)의 형 이검주(李鈐柱)와 아우 이석주(李石柱)를 해남(海南)에, 조순종(趙順宗)의 서얼 삼촌숙 조안수(趙安守)를 순천(順天)에, 조영달(趙永達)의 아우 조영철(趙永哲)을 진해(鎭海)에, 이중순(李仲淳)의 아우 이숙순(李叔淳)을 장기(長鬐)에, 김창손(金昌孫)의 아우 김광손(金廣孫)을 영덕(盈德)에, 최완(崔緩)의 서얼 삼촌숙 최도치(崔都致)를 곤양(昆陽)에 각각 안치(安置)하여 노비(奴婢)로 삼고, 오치권(吳致權)의 딸 오비(吳非)를 외조(外祖)인 중화(中和)에 사는 갑사(甲士) 양효순(楊孝順)에게, 민서(閔敍)의 딸 민중비(閔仲非)를 김해(金海)에 정역(定役)된 어미 석비(石非)에게, 홍형생(洪亨生)의 손자 홍방마적(洪方麽赤)을 안악(安岳)에 사는 종조모(從祖母)인 화자(火者) 나우명(羅友明)의 아내 칠보(七寶)에게, 최계지(崔戒之)의 아들 최삼형(崔三亨)·최삼리(崔三利)를 곤양(昆陽)에 정역(定役)된 어미 경순(敬順)에게, 장익지(張益之)의 아들 장잉질동(張芿叱同)·장만동(張萬同)을 고성(固城)에 정역된 어미 보덕(甫德)에게, 장서(蔣西)의 아들 장석을이(蔣石乙伊)를 기장(機張)에 정역된 어미 중금(仲今)에게, 첩의 아들 장철동(蔣哲同)·장철산(蔣哲山)을 기장(機張)에 정역된 어미 개덕(介德)에게, 김실(金實)의 아들 김승손(金升孫)을 진해(鎭海)에 정역된 어미 권월(權月)에게, 문치빈(文致彬)의 첩의 아들 문망오지(文亡吾之)를 광양(光陽)에 정역된 어미 성비(性非)에게, 이하(李夏)의 아들 이정수(李正守)·이목수(李木守)를 유한(柳漢)에게 내려 준 종[婢]인 어미 만비(萬非)에게 보수(保授)하였다가 모두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영속 노비(永屬奴婢)로 삼고, 강순(康純)의 삼촌질 강금무적(康金無赤)을 남포(藍浦)에 사는 어미 복수(卜守)에게, 강아지(康阿只)를 담양(潭陽)에 사는 어미 명근(命斤)에게, 민서(閔敍)의 삼촌질 민석동(閔石同)을 연산(連山)에 사는 어미인 민발(閔發)의 아내 이씨(李氏)에게, 서얼(庶孽) 삼촌질 민산이(閔山伊)를 보은(報恩)에 사는 어미 내은이(內隱伊)에게, 홍형생(洪亨生)의 삼촌질 홍충개(洪蟲介)를 이산(尼山)에 사는 어미 단봉(丹奉)에게, 홍현석(洪玄石)·홍석을석(洪石乙石)을 이산(尼山)에 사는 어미 팽비(彭非)에게, 홍효석(洪孝石)을 이산(尼山)에 사는 어미 윤덕(允德)에게, 이지정(李之楨)의 서얼 삼촌질 이순동(李順同)을 성주(星州)에 사는 어미 소사(召史)에게, 강이경(姜利敬)의 삼촌질 강명중(姜命重)을 외조(外祖)인 순안 현령(順安縣令) 김효진(金孝振)에게 보수(保授)하였다가 모두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안치(安置)하라.”
【원전】 8 집 325 면
【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성종 4년 계사(1473,성화 9) 7월18일 (정미)
흥안군 이제의 봉사(奉祀)를 잇게 하고 이숙·김효성·권개는 봉사를 끊게 하다
충훈부(忠勳府)에서 아뢰기를,
“개국 공신(開國功臣)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가 적장(嫡長)인 이맹순(李孟淳)의 모제(母弟)인 난신(亂臣) 이중순(李仲淳) 때문에 연좌(緣坐)되어 안치(安置)되었으니, 그 아들로 하여금 조상의 뒤를 잇게 하여 이제의 제사를 받들게 하며, 좌명 공신(佐命功臣) 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의 아들 이양(李穰)과 정란 공신(靖亂功臣) 연산군(延山君) 김효성(金孝誠)의 아들 김처의(金處義)와 좌익 공신(佐翼功臣) 복천군(福川君) 권개(權愷)의 아들 권맹희(權孟禧)는 모두 주살(誅殺)되었는데, 난신(亂臣)의 친부(親父)는 예(例)에 마땅히 연좌(緣坐)되니, 청컨대 이숙과 김효성과 권개는 그 봉사(奉祀)를 끊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9 집 39 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가족-친족(親族) / *풍속-예속(禮俗)
성종 6년 을미(1475,성화 11) 2월8일 (정해)
의금부에서 난신에 연좌되었지만 나이가 어렸던 사람들을 정역하기를 아뢰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사람으로 나이가 차지 아니하였던 자가 이제 이미 나이가 찼으니, 아래와 같이 정역(定役)하기를 청합니다. 민서(閔敍)의 서조카[庶姪] 민제동(閔梯同)은 보은(報恩)에, 이지정(李之禎)의 서조카 이내은산(李內隱山)은 성주(星州)에, 조원신(曹元信)의 조카 조구질달(曹仇叱達)은 옥구(沃溝)에, 조순종(趙順宗)의 조카 조창손(趙昌孫)·조두지(趙豆知)는 경산(慶山)에, 홍형생(洪亨生)의 손자 홍무충(洪無忠)·홍금질동(洪金叱同)은 안악(安岳)에, 변자의(卞自義)의 아들 변중생(卞衆生)은 밀양(密陽)에, 선효장(宣孝章)의 딸 선태비(宣太非)는 광주(光州)에, 조카이중순(李仲淳)의 이금손(李金孫)은 하동(河東)에 정역(定役)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9 집 193 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재정-역(役) / *가족-친족(親族)
성종 8년 정유(1477,성화 13) 윤 2월18일 (병진)
역적과 난신에게 연좌된 자를 법에 의해 구처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역적(逆賊)과 난신(亂臣)에게 연좌되어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아 그 친속(親屬)에게 보수(保授)한 자가, 지금 이미 나이가 찼으니, 법에 의해 마땅히 구처(區處)해야 합니다. 청컨대 역적 조완옥(趙完玉)의 삼촌질(三寸姪) 조막손(趙寞孫)은 사천(泗川)에 안치(安置)하고, 역적 박계춘(朴繼春)의 딸 박덕금(朴德金)은 하동(河東)에 정속(定屬)하고, 역적 이종양(李宗讓)의 아들 이유은(李有銀)은 해남(海南)에 정속하고, 역적 조벽(趙璧)을 허접(許接)한 서귀동(徐貴同)의 삼촌질 서계산(徐季山)은 함원참(咸原站)에 안치하고, 역적 엄흥손(嚴興孫)의 딸 엄하지(嚴下知)는 하동(河東)에 정속하고, 역적 이효순(李孝純)의 삼촌질 이건랑(李件郞)과 이지죽이(李只竹伊)는 해남에 안치하고, 이효달(李孝達)의 삼촌질 이말을산(李末乙山)은 사천에 안치하고, 역적 엄흥손(嚴興孫)을 허접한 이긍(李兢)의 딸 이동금(李同今)은 영동참(嶺東站)에 정속하고, 역적 조벽(趙璧)을 허접한 고순경(高順京)의 아들 고수점(高水點)은 함원참(咸原站)에 정속하고, 난신 변영수(卞英守)의 아들 변상좌(卞上佐)는 전주(全州)에 정속하고, 난신 최완(崔緩)의 아들 최승손(崔承孫)은 남평(南平)에 정속하고, 난신 남유(南愈)의 아들 남수천(南壽千)은 진잠(鎭岑)에 정속하고, 난신 장익지(張益之)의 아들 장잉동(張芿同)은 예천(醴川)에 정속하고, 난신 이주(李柱)의 아들 이곤옥(李崐玉)은 용안(龍安)에 정속하고, 난신 장서(蔣西)의 아들 장석이(蔣石伊)와 그 첩(妾)의 딸 장철비(蔣哲非)는 청도(淸道)에 정속하고, 난신 이중순(李仲諄)의 삼촌질 이말손(李末孫)은 하동(河東)에 안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9 집 431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재판(裁判) / *가족-친족(親族)
[주D-001]보수(保授) : 보석된 사람 또는 도피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유력자가 책임지고 맡는 것.
[주D-002]허접(許接) : 범인이 자기 집에 우거(寓居)하는 것을 허락함.
성종 12년 신축(1481,성화 17) 1월16일 (신묘)
의금부에서 역적에 연좌된 사람을 안치·정속시킨 숫자를 기록하여 아뢰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역적에 연좌된 사람들을 그 족친이 보수(保授)하고 있는데, 이제 나이가 찬 자는 안치(安置)를 시키든지 혹은 여러 고을에 정속(定屬)시켜야 하므로, 그 숫자를 모두 기록하여 아룁니다. 역적 이시애(李施愛)의 첩의 딸 이비(李非)는 진도(珍島)의 관비(官婢)로 정속시키고, 역적 이명효(李明孝)의 얼삼촌(孼三寸) 조카 막동(莫同)은 광양(光陽)에 안치시키고, 역적 이종양(李宗讓)의 얼매(孽妹) 사금(舍今)은 순천(順天)의 관비로 정속시키고, 역적 맹순인(孟順仁)의 첩의 딸 거부비(巨夫非)는 장기(長鬐)의 관비로 정속시키고, 역적 한혁(韓赫)의 딸 솔비(率非)와 귀금(貴今)은 하동(河東)의 관비로 정속시키고, 역적 장봉(張奉)의 아들 삼동(三同)은 진해(鎭海)의 관노로 정속시키며, 역적 이효순(李孝純)의 삼촌 조카 죽선(竹善)은 해남(海南)에 안치시키고, 역적 김척(金滌)의 아들 어오금(於吾金)은 곤양(昆陽)의 관노로 정속시키고, 역적 김성우(金成右)의 삼촌 조카 북간(北間)은 진해(鎭海)에 안치시키고, 역적 최윤손(崔潤孫)의 첩의 아들 회생(懷生)은 흥양(興陽)의 관노로 정속시키고, 역적 김치온(金致溫)의 삼촌 조카 북간(北間)은 거제(巨濟)에 안치시키고, 역적 최득경(崔得京)의 아들 벌응거(伐應巨)는 장기(長鬐)의 관노로 정속시키고, 역적 엄흥손(嚴興孫)의 딸 은비(銀非)는 하동(河東)의 관비로 정속시키고, 역적 조벽(趙璧)을 허접(許接)한 반자(班者)의 손자(孫子) 석을산(石乙山)은 함원(咸原)의 참노(站奴)로 정속시키고, 역적 조벽을 허접한 김걸명(金乞明)의 삼촌 조카 암회(巖回)는 함원의 참리(站吏)로 정속시키고, 역적 이효종(李孝宗)을 허접한 중이(衆伊)의 아들 동질수(同叱守)·김질동(金叱同) 및 쌍룡(雙龍)의 딸 매화(梅花)는 적생(積生)의 참노비(站奴婢)로 정속시키고, 난신(亂臣) 김창손(金昌孫)의 아들 옥산(玉山)은 김포(金浦)의 관노로 정속시키고, 난신 노경손(盧敬孫)의 아들 말동(末同)은 장흥(長興)의 관노로 정속시키고, 난신 최원(崔湲)의 아들 승동(承同)은 남평(南平)의 관노로 정속시키고, 난신 남유(南愈)의 딸 명복(命福)은 광주(廣州)의 관비로 정속시키고, 난신 장익지(張益之)의 아들 말동(末同)은 예천(禮泉)의 관노로 정속시키고, 난신 조순종(趙順宗)의 삼촌 조카 말손(末孫)은 여주(驪州)에 안치시키고, 난신 이계량(李季良)의 삼촌 조카 석을동(石乙同)은 교하(交河)에 안치시키고, 난신 신정보(辛井保)의 삼촌 조카 옥동(玉同)은 김해(金海)에 안치시키고, 난신 변자의(卞自義)의 첩의 딸 소사(召史)는 밀양(密陽)의 관비로 정속시키고, 난신 이중순(李仲淳)의 삼촌 조카 말치(末致)는 하동에 안치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10 집 187 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가족-친족(親族)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신분-천인(賤人)
성종 13년 임인(1482,성화 18) 2월5일 (갑진)
의금부에서 난신 역적에 연좌된 자로 이때에 성년이 된 자들을 노비 삼기를 청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난신 역적(亂臣逆賊)에 연좌(緣坐)된 자로서 나이 성년(成年)이 되지 못한 자들을 일찍이 족친(族親)들에게 보내 주었습니다만, 이제 그들의 나이가 성년이 되었으니, 그들을 여러 군읍(郡邑)에 예속시켜 노비(奴婢)로 삼아야 합니다. 강순(康純)의 조카 강아지(康阿只)는 담양(潭陽)에, 고복로(高福老)의 조카 고영동(高永同)은 대정(大靜)에, 김창(金昌)의 손자 김범이(金凡伊)는 순창(淳昌)에, 이지정(李之楨)의 조카 이순동(李順同)은 성주(星州)에, 최계지(崔戒之)의 아들 최삼리(崔三利)는 곤양(昆陽)에, 이중순(李仲淳)의 딸 이다파(李多波)는 대구(大丘)에, 이종근(李宗根)의 조카 이석을동(李石乙同)은 순천(順天)에, 최한종(崔漢宗)의 손자 최숙달(崔叔達)과 한계춘(韓繼春)의 딸 한정비(韓定非)와 이임(李林)의 아들 이동질금(李同叱金)과 엄흥발(嚴興發)의 아들 엄처지(嚴處智) 등은 하동(河東)에, 김옥생(金玉生)의 조카 김두응부(金豆應夫)·김동만(金童萬)은 장흥(長興)에, 이영발(李英發)의 아들 이은동(李銀同)은 강진(康津)에, 김하생(金河生)의 아들 김한동(金閑同)은 영일(迎日)에, 최득경(崔得京)의 조카 최여허(崔汝虛)는 장기(長鬐)에, 손전생(孫田生)의 아들 손정석(孫丁石)은 흥양(興陽)에, 흔만(欣萬)의 손자 손산(孫山)은 광양(光陽)에, 김한경(金漢京)의 딸 김귀진(金貴珍)은 함원참(咸原站)에 예속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10 집 295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가족-친족(親族) / *신분-천인(賤人)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