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 소집해제 후 (단기사병은 제대가 아니라 소집해제라고 한다) 나는 염창동지점으로 복직했다. 내가 근무했던 염창동지점은 염창역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 건물 위는 모텔이었고 아래는 목욕탕이 있었다. 모텔과 사우나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데 은행만 사라져 아쉽다. 이제 은행도 많은 점포가 사라지고 있다. 은행에 찾아가 업무를 보는 경우보다 집이나 직장에서 컴퓨터를 통해 거래하거나 핸드폰을 가지고 아무대서나 거래를 하는 시대로 변했다. 염창동지점에는 나 말고도 고등학교 동기동창 2명과 다른 학교를 나왔지만 입행동기인 다른친구까지 4명이 함께 근무를 했다. 내가 염창동지점에 근무할 때 목동아파트 입주가 시작되어 그 인근에 목동출장소가 개점되었다. 은행에서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시재(현금)을 맞추고 계산을 했다. 계산이란 그날 일어난 모든 전표를 모아 집계를 하고 대차변을 맞추는 일이었다. 대차변을 맞추고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를 작성해야 업무가 끝났다. 염창동지점은 일도 많고 직원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매일 정확한 계산을 맞추기기 쉽지 않았다. 셔터가 오후4시 30분에 내려가면 각자 자기가 받았던 입출금전표를 계산주임에게 넘기고 시재를 맞춰본다. 계산주임은 한 5시 30분쯤부터 전표를 집계하고 전체 합을 계산한다. 그러나 누군가 실수하는 직원이 있게 마련이었다. 툭히 3과 8으 숫자를 착오한다던지 5와 0 같은 숫자는 많이 틀리는 숫자였다. 이런 실수는 애교로 바줄수도 있으나 정말 문제는 "0" 한자리를 더 입금 시키는 일이다. 1000원을 입금해야 하는데 10,000을 입금한다, 5만원을 입금해야 하는데 500,000을 입금한다는 식이다. 그러면 그 잘못된 입금을 찾기위해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 또 그 착오를 발견하고 고객에게 연락하여 정정해야 되는 일도 발생한다. 은행은 돈을 다루는 직업으로 항상 예민하고 정확을 요하는 업무처리를 요구하지만, 쏟아지는 업무에 잠깐 방심하면 큰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거기다 목동출장소가 개점되어 출장소에서 발생한 거래의 집계도 염창동에서 모두 합산을 해서 맞춰야했기 때문에 매일매일이 야근이였고 심지어는 집에도 못들어가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보통 계산주임은 은행 연차가 낮은 사람들이 맡았고 나와 친구들이 번갈아 가면서 그 일을 배분받았다. 우리는 자기일이 끝났음에도 친구가 일이 끝나지 않으면 같이 착오를 찾아내려 노력했고 그러다보니 은행 숙직실에서 같이 잠을 잔적도 무척 많았다. 일이 저녁 10시~11시에 끝나면 집에 가도 되었지만 인천에서 출퇴근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당시 염창동에서 인천 계산동까진 대중교통이 좋지 않아 늦을경우 택시를 타고 다녀야 해서 택시비가 많이 들었다. 그보단 그냥 숙직실에서 자는 것이 돈도 덜 들고 편했다. 우리는 의리로? 그 친구가 집에 못가면 같이 남아 숙직실을 지켰고 마침 지점 위가 모텔이라 모텔에서 자는 경우도 부지기수 였다. 하루이틀 집에 가지않으면 어머니가 화를 내셨지만, 사흘나흘 가지 않으면 제발 좀 들어오라고 사정하셨다. 우리는 일을 끝내고 매일 술을 마셨다. 그 때는 술과 장미의 나날이었다. (아니 장미는 없었던가) 그러나 어쩐지 나는 조와울에 빠져있었다. 좋을때는 조그만 일에도 크게 웃고 고객들과 농담도 하고 싹싹하게 일하다가도 어떨땐 우울의 늪에 빠져 내가 왜? 이러고 살고 있나 싶었다. 나는 우울한 날엔 간혹 성산대교를 찾았다. 업무가 끝나고 늦은 저녁 성산대교를 찾아가면 그 초입에 전경이 지키고 있었다. 전경은 나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다리 중간으로 걸어갔다. 다리 중간쯤에 서서 한강물을 쳐다본다. 까만 물이 까맣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깊은 시름에 빠져 하염없이 강물을 쳐다보았다. "지금 내가 이 강물로 뛰어든다면 모든것은 끝나겠지, 이 시름과 이 우울도 나와 함께 강물로 떠나가겠지, 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산다는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붙잡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호각소리가 났다. 아까부터 나를 이상하게 지켜보던 전경이 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는 헉헉거리며 내 앞 까지 달려왔다. "왜? 젊은 아저씨가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여기 계시지 마시고 빨리 집으로 들어가세요" 나는 게면쩍게 웃으며 발걸음을 돌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불쑥불쑥 우울이 찾아 올 때 나는 성산대교에서 우울을 치유했다. 사춘기 시절 어려웠던 가정형편으로 아무도 모르게 사춘기를 지나온것이 지금 도지고 있는것 같았다. 나는 너무 외로웠고 나의 외로움을 누구하고도 나눌수 없었다. 술에 취해 거리를 무작정 거닐고 노래방을 찾아 목청것 노래해도 소용이 없었다. 직원들과 회식자리에서 웃고 즐기다가도 혼자 집으로 돌아갈때면 지치고 외로웠다. 나는 혼자였고 나를 위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나는 국민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종로에 있는 디스코텍에 놀러가 맥주한잔을 시켜놓고 마구 몸을 흔들어 댔다. 돈이 없던 우리는 입장료 5천원과 맥주 1천원을 시켜놓고 젊음들과 뒤엉켜 몸부림을 쳤다. 직원들과 회식이 끝나고 호텔 디스코장에 가서 신나게 춤을 춘적도 있다. 그 당시 존타라볼타의 "토요일밤의 열기"란 영화에 디스코가 나왔고 존트라볼타의 섹시한 디스코춤에 우리 모두는 정신이 홀렸다. 이은하의 "밤차"와 혜은이의 "제3한강교" 송골매의 "어쩌다마주친 그대" 등이 나오면 우리는 플로워를 미친듯이 비비며 마구 손가락을 찔러댔다. 술을 먹다 옆자리 사람들과 시비가 붙허 몸싸움을 버렸다. 싸우던 사람들을 피해 차가운 새벽길을 죽어라하고 달렸다. 삼청교육대에 사람들이 잡혀갔던, 아웅산에서 테러가 터졌던 나는 아무일도 없이 젊음과 술에 절어 하루하루 숙취에 시달렸다. 그 당시 은행원들은 가계수표를 발행할 수 있었다. 나는 돈이 없으면 가계수표를 쓰고 술을 먹었다. 월급날이 돌아오면 가계수표를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집아가씨가 은행카운타 앞에서 외상값을 받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술에 절어 아무의미 없이 살아 가는 삶, 그 시절 내 걸음은 환락에 빠져 휘청휘청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