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하시는 하나님
.전정하는 칼이 그대에게 올 때
강영은
아름답게 가꾸어진 꽃나무나 정원수 또는 아름다운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탐스러운 과목을 볼때 우리는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어쩌면, 아름답기도 해라!”
그러나 모든 사람으로부터 탄성을 자아내게 하며 사랑어린 손길과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아름다운 꽃나무나 과목이 되어 나오기 까지 나무는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힘든 과정들을 거치는지를 여러분은 혹시 생각해 보신적이 있으신지요. 성경 말씀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과실은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아버지 께서 이를 깨끗게 하시느니라.(요 15:2)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만 말 뿐인 가짜 신앙을 가진 외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생애에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기를 원하십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같은..... 그래서 넉넉하게 하늘 창고에 들여질수 있도록...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가 생애에 열리기 위해서는 아주 필수적인 조건들이 요구됩니다. 마치 나무가 아름답게 가꾸어지기 위해서 많은 과정을 겪어야 하듯이 그리스도인 생애에도 꼭 같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弩滑ㅣ .... 우리는 그 과정을 바로 弩滑ㅣ이라고 합니다. 잘라내고 꺾고 쳐내는 弩滑ㅣ 말입니다. 꽃나무나 과목을 가꾸는 농부의 예사롭지 않은 눈길과 손은 늘 바쁩니다. 지나치게 양분을 소모하는 쓸데없는 곁가지는 쳐져야 하고 쓸모없이 휘어지게 만드는 지나치게 무성한 잎들은 잘라내져야 합니다. 땅을 향하여 늘어진 가지들은 쳐내져야 하고 흙바닥에 들러붙은 쓸데없는 덩쿨손들은 가차없이 잘려져야합니다. 그것은 나무에게 있어서 힘들고 아픈 과정이지만 커다랗고 아름다운 꽃송이들을 피우기 위해서는, 탐스러운 과일을 많이 달리게 하기위해서는 이런 아픈 전정이 꼭 필요합니다.
“전정”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단련하십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히 12:6)는 성경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하늘의 친절한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정하시는 칼”의 쓰라린 시련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가지를 치는 일은 고통을 유발할 것이지만 칼을 대시는 분은 사랑의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난폭한 손으로나 무관심한 마음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것들이 우리 생애에서 잘려 나가야만 하는지를 잘 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생애에 있는 어떤 요소들이 영생에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는지를 잘 아십니다.
땅에 늘어지는 가지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줄기가 땅에 붙지 않도록, 땅에 속하지 않도록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은 하늘로 뻗어야 하며, 그들을 지탱해 주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과실에 전달 하여야 할 수액을 소모해 버리는 지나치게 무성한 잎들은 잘라 버려야 합니다. 너무 자란 것들은 잘림을 받아서 의의 태양이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쓸데 없는 많은 가지들이 있습니다. 교만, 욕심, 정욕, 급한 성질, 시기, 질투 등등의 쓸데없는 가지들이.... 또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늘로 올라가야 할 우리의 덩쿨 손들은 쓸데없이 땅 위에 단단히 붙어 있습니다. 재물을 의지하는 덩쿨 손, 명예나 지위에 의지하는 덩쿨손, 평판과 사람의 꾀에 의지하는 덩쿨손들 말입니다. 이렇듯 쓸모없는 가지와 해로운 덩쿨손들은 다 잘려 버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주 맛있고 탐스러운 과일이 많이 열리는 크고 좋은 나무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전정하시는 칼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전정하시는 칼”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요? 때로 그것은 생애의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하여, 또는 사람들을 통하여 옵니다.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말못할 슬픔과 아픔과 비애를 통하여 옵니다. 의지하고 있던 모든 것을 일시에 빼앗기는 기막힌 손실을 통하여, 또 육신의 약함과 질병과 고통을 통하여 옵니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즐겨쓰시는 “전정하는 칼” 즉 “전정 도구”로 쓰여지는데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보고 겸손해 지도록 만들며, 그리하여 영혼의 죄의 정욕의 발진들이 다 빠져 나가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법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는 시편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인생의 고난은 우리의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것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이들의 의해서 채석되고 깎기우고 끌로 새기어지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마친 거친돌을 회전 연마기 속에 넣고 돌리듯이....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간 돌은 하늘 성전의 한자리를 채우는데 부족함 없게 준비되어 나옵니다. 쓸모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십니다. 시련들은 품성의 완전을 위해서 하나님이 임명하신 그의 종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늘에 들어가려면 어디를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는지 아시고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시련의 풀무불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시련의 풀무불속에서 완전히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금을 정련해 내시는 연단자로서, 주님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 보일 때까지 그분의 자녀들을 순결케 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비록 고난의 불길이 우리 주위를 태우고 때로는 그 불이 우리를 완전히 삼키지나 않을까하여 두려워 할 때라도 지극한 관심과 주의를 가지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허락하시는 풀무불은 순결하고 세련되게는 하지만 삼키고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련과 시험의 “전정하시는 칼”의 과정을 겪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정금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전정하시는 칼”이 어떤 방법으로 찾아왔나요? 그 “전정하시는 칼”이 여러분의 삶의 한 부분을 잘라낼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상실과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크신 섭리의 길이 아무리 어둡고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 임을 알고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장차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련이 우리의 구원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겪은 고난의 경험들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렵고 가혹하게 보이는 시련이라도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축복 임이 판명되고, 세상의 쾌락을 앗아가는 혹독한 재난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고난과 시련의 풀무불이 올 때,
겸손히 그것을 받아들이며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지 않으시렵니까?
그 “전정하시는 칼”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모두 정금같이 되어 나올수 있도록....
모든것이 잘려 나간후
아름답고 큰 한송이 꽃을 피울수 있도록...
그리고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단
아름다운 과목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정하시는 칼이 우리에게 올 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