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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옥살이............
2019.03.14 최근 끊임없는 전직 대통령들의 재판.
최근 전두환 전대통령 이명박 전대통령 법정 출석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옥살이’가 주목받고 있다.
전직 대통령 중 피고인 조사를 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등
노무현 전 대통령은 조사 중 서거
이후 기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다.
전 씨와 노 씨는 문민정부 출범 후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에게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고소당했던 이후에
1995년 12월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 제정· 공포
이후 같은 해 12월 21일 나란히 구속 기소 되었다.
반란(내란) 수괴, 상관살해미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상 뇌물수수 등
10개 죄목으로 기소된 적 있었던 전 씨는
1996년 3월 첫공판 때 노 씨와 함께 수의를
입고 법정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사형까지 선고받았던 전 씨는 이듬해 4월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최종 확정.
하지만 전 씨는 본인 명의 재산 29만원뿐
이라고 주장하며 추징금을 거부한바 있다.
전 씨는 현재 1,050억원 추징금.,미납 상태.
노 씨는 전 씨와 함께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등 9개 죄목으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 최종 확정 받았다.
이후 전 씨와 노 씨는 지난 1997년 12월22일
특별사면 및 복권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면서
2년여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석방된 적이 있다.
석방 후에도 전 씨는 지난 2008년 4월 9일
국회의원 선거 투표를 하고 취재진 앞에서
차를 마시며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게
(찍는다).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라고 발언해 논란이 됐다.
그런 전 씨가 '사자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지난 11일 다시
광주 법정에 서게 된 바 있다.
전씨는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
했다고 증언한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폄훼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공소사실을 통해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 등
각종 조사 결과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 그러면서
또 전 씨가 회고록에 허위
내용을 적시해 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
했다고 덧붙였다.
전 씨의 법률 대리인 정주교 변호사는
"(80년 5·18 당시) 기총소사는 없었다"며
"(조비오 신부에 대한) 명예훼손 아니라
단순한 의견 진술이다"라고 진술했다.
즉, 허위사실로
사자(死者)의 명예 훼손
검찰 주장은 잘못됐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노 씨는 2006년 최규하 전 대통령 영결식,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과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 등 모둔 공식석상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그때마다 용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노 씨는 현재 반복되는 투병생활로
연희동 자택에서 칩거 요양하는 중.
이명박 전 대통령은 1992~2007년
'다스 실소유'로 회자 되면서부터
비자금 339억원 조성(횡령) 혐의와
삼성에 BBK 투자금 회수 관련 다스
소송비 67억7000여만원을 대납하는 등
16개 혐의로 지난해 3월22일 검찰 구속 기소.
이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1심으로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다스 실소유자이고
비자금 조성 지시 사실이 인정된다." 라며
7개 혐의에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15년에
벌금 130억원, 추징금 82억원 선고 받았다.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는
지난 6일 이 전 대통령에게 전직 대통령
최초로 '조건부 보석 허가' 판결를 내렸다.
이 전 대통령은 고령에 수면무호흡증
등으로 돌연사 가능성을 들며 올해 1월
29일 항소심 재판부에 보석을 청구했다.
아울러 이 전 대통령은 법원 인사로
항소심 재판부가 새로 구성돼 구속 기한인
4월 8일까지 심리가 이뤄지기 어려운 점도 들었다.
재판부에서 이 요구를 받아들임에 따라
이 전 대통령은 불구속 재판을 받게 됐다.
◆박근혜 선고 공판서 일부 유죄 판결
헌정사 사상 최초의 탄핵 대통령으로
현재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지난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파면 선고를 받은 지 만 2년이 지났다.
박 전 대통령은 파면된 지 11일만에
검찰로부터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돼,
3월21일 서울중앙지검 포토라인섰다.
이후 같은달 31일 구속돼, 다음달
17일 18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4월6일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혐의 18개 중 16개가 유죄 및
일부유죄로 판단돼, 징역 24년 벌금 180억원 선고
이후 24일 항소심에서
징역 25년 벌금 200억원
박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 사건
이외에도 20대 총선 공천개입 사건과
국가정보원 특활비 수수 사건으로 각
징역 2년과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특활비 수수 사건은
서울 고법., 항소심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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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젊은 시절인 '1899 ~1904'
대한제국 고종 재위 시절에
한성감옥 옥살이를 겪었지만,
그후에 대통령 임기 중은 물론
임기 후에도 투옥된 적이 없었다.
..이승만(1875~1965)...
대한민국 1·2·3대 대통령.
해방 전 임시정부에서 활동
광복 후 우익 민주진영 지도자로
1948년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개헌을 거듭하며 4선을 한 후
4.19혁명이 일어나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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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 사의 표명
윤보선 자택
...윤보선(1987~1990)...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치루어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임기 1년 5개월 만에 하야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재야인사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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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시정부가 분란에 휩싸였던
1921년 윤보선은 영국으로 유학했다.
우드블록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옥스퍼드를 거쳐 에든버러 대학교에 정착.
에든버러 대학교에서는 고고학을 전공하고,
입학한 지 6년만인 1930년 졸업, 1932년 귀국.
귀국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아내 민씨와 이혼
1945년 8.15 해방까지 거의 안국동 집에서 칩거.
현재 북촌의 한옥 문화재 중 하나
'윤보선 가옥'이라 불리는 이 집은
대지 1400평에 99칸의 대저택이다.
윤보선은 귀국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최규하(1929~2006)...
대한민국의 10대 대통령.
1975년부터 국무총리 재직 중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자
같은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가 전두환 등
신군부 압력으로 8개월 만에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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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서
아버지 최양오와 어머니 이응선 8남매 중 장남
할아버지 최재민은 성균관 박사를 지낸 인물로,
어릴때 최규하는 할아버지께 한학을 배우며 성장.
6살때 1928년 원주보통학교 2학년 편입 1932년 졸업.
서울 육촌 형 도움으로 1932년 3월에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경성고보)에 입학.
경성고보 4학년 때인 1935년 부모의 뜻에 따라
17세 나이로 홍병순의 셋째딸 홍기와 중매 결혼.
1937년 경성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갔다.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1942년 졸업한 뒤 만주로 가 만주국 관리양성소
대동학원 정치행정을 전공 2년 뒤인 1943년 졸업
졸업후 잠시 만주국 관리생활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서울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교 조교수로
영문학을 3개월간 가르쳤다.
1946년 미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며 공무원이 되었고, 이후 줄곧 공무원 생활
1937년 중앙식량행정처 행정실장이 되었다가 1948년
정부 수립 후 농림부로 자리를 옮겨 양정과장이 되었거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농지관리국장 서리로 진급했다.
이 해에 최규하는 농림부차관 정흥구와 함께
싱가포르에서 열린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아시아 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는데,
이때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을 인정받았다.
외무부장관 변영태는 최규하를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했다.
이후 외교관으로 자리 잡는다.
1952년 7월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7년 5월 주일대표부 참사관.
1958년 4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제4차
한일회담 한국 측 대표 중 하나로 나가는 등
이승만 정부의 한일회담 실무에도 참여했으나,
배상액수 양국간 입장 차이로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했고
그해 귀국해 외무부차관에 발탁됐다.
1960년부터 외무부 장관 직무대행을 겸
1960년 4.19 가 일어나자 5월 공직을 사임.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1962년 외무부 장관의 고문이 됐다.
1963년 외무부 대사를 거쳐
국가재건최고회에서 박정희
외교관련 업무를 조언하는
의장 외교 담당 고문이 됐다.
1963년 11월부터 2년 8개월 간
말레이시아 대사로 근무하다가
1967년 6월에 외무부장관에 발탁.
최규하는 박정희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해
한미회담 실무를 맡았다.
또 당시 발생한 북한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 청와대 무장공비사건 계기로
미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아내기도 했다.
대체로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며
실무에 있어서는 외교, 행정, 조직을
강화하고 통상외교에 주력했다는 평가.
1971년 청와대 외교 담당 특별보좌관 임명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서 평양에 다녀왔고,
대통령 특사로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24개국 방문.
.
당시 박정희는 3선 대통령이 된 후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임명했으나
수차례 갈등을 빚은 뒤 사임했고,
박정희는 국무총리 후임으로 정치
야심이 적은 최규하를 기용했다.
최규하는 국무총리 재직 중 근검절약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공식 회의석상에서 '부인 조심, 비서 조심,
자녀 조심'을 강조해 공직자들 청렴성 강조
1979년 3월 국무총리에 재임명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 살해되자, 헌법에 따라
10월 27일 새벽에 대통령 권한 대행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박정희 피살사건을 조속히 수사할 것을 지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계엄사령부 사령관.
박정희 피살사건 조사 책임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육군소장 전두환.
10월 28일 비상회의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직위를 소급하여 해임했다.
최규하는 11월 3일 박정희 빈소에
건국공로훈장 중장 추서, 국장을 결정,
국장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국장을 주관.
11월 6일 최규하는 '시국에 관한 담화'
유신 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대통령은 잔여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하여 제 11대
대통령 및 국회의원 총선을 실시한다고 발표
이에 반발한 재야는
유신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출은
있을 수 없으며, 민주헌법을 3개월 이내에
제정하고 빠른 시일 내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
1979년 11월 서울지역 대학생들 시위
전국 각지에서 유신헌법 철폐 시위 확산.
그러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 6일에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10대 대통령 선거 실시
단독 출마한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96.7%(2,465표) 득표율, 84표 무효표
최규하는 한국 헌정사상 처음 정당에
관여하지 않는 직업 공무원으로서
대통령이 된 첫번째 인물이었다
최규하는 대통령에 선출된 다음 날
국무회의에서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의결
긴급조치 위반 구속학생과 일반인 68명 석방.
12월 7일 부총리 신현확을 총리로 지명하고
12월 21일 취임식을 치렀다. 취임사에서 그는
"현정부는 국난타개를 위한 위기관리 정부"라며
개헌 일정을 제시하고 조속한 선거 실시 등을 약속
당시 여야 의원 28명으로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개헌 작업을 진행
중이던 국회는 "유신잔당 정부에
개헌을 맡길 수 없다. 개헌 주도권을
국회에 넘겨라"고 반발했다.
최규하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는
이미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였다.
전두환은 최규하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불과
6일만인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이끌던 신군부 세력은
당시 최규하의 재가 없이 부대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강제연행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은 이희승을 육군참모총장에 앉혀 군권을 장악.
최규하는 12월 21일에는
긴급조치 관련자 561명을
특별사면, 1,330명이 석방.
1980년 2월 29일에는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윤보선과 김대중,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인사 687명
특별사면 및 복권조치도 시행.
1980년 4월 최규하는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강요에 따라 그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했고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던 자리로 이 자리에 전두환을 임명
이것은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에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은
신군부의 퇴진과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며 거국적인 시위에 나섰다.
이에 전두환은 5월 시국 수습책으로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최규하에게 강요했다.
최규하는 무력을 앞세운
전두환의 강요로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전두환은 국회를 해산하고 김대중을 구속,
김영삼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을 가택연금
하거나 체포하여 중앙정보부로 끌고 갔다.
김대중이 구속되자 5월 18일에
광주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고
전두환은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민들을 학살했다. 총기를 탈취하여
저항하던 시민들은 8일만에 진압됐고,
김대중은 내란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비상계엄이 확대된 확대된 5월 17일부터
21일까지 닷새 간 최규하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공식 기록은 없다.
신군부에 의해 사
실상 연금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유추.
최규하는 전화 도청 등
신군부 세력으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은 것
으로 알려졌다
광주항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 신현확을 비롯해 국무위원
전원이 사직서를 제출하자 최규하는 당시
무역협회장이었던 박충훈을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했다. 개각 다음날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비상대책기구 설치를 요구했다.
5월 31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국보위는 대통령 자문 보좌기관으로
정식 발족됐다. 실질적 권한은 전두환.
최규하는 당선된 지 8개월 만인
1980년 8월 16일에 대통령직 사임
하야 성명에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 국가적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확실한
정치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퇴임 후 최규하는
공식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최규하 전임 대통령은
신군부의 반란사건과 관련해
여러차례 증언을 요청받았으나
끝까지 증언대에 서지 않았다.
1987년 5.18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때도 증언을 요청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김영삼 정부 때 진행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과
재판 과정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특히 1995년 12.12 및 5.18 사건 수사 당시
최규하는 법정에 강제구인됐지만 증인선서
및 관련 증언을 모두 거부.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 수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일일이
증명하거나 증언을 해야 한다면
국가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는 이유에서였다.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쯤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고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옮겨진 후
7시 37분경 향년 88세로 생을 마감.
서거 이후 최규하의 청렴한 면모가 알려졌다.
그는 국무총리 시절 강원도 장성광업소 광부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73년 서교동 사저로
이사한 이후 서거할 때까지 연탄을 사용했다.
태화고무신에 고무타이어를 붙여 신고
달력 이면지를 메모지로 사용하는 등
엄격할 정도의 청렴한 삶을 살았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뤄졌으며,
국민장 당일에는 2,000여 명이 참여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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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1931. 1. 18 ~ ).....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
경남 합천 출신, 12.12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를 거머쥐고 계엄 확대.
1980년 최규하가 하야하자,
장충체육관에서 간접 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취임했다.
취임 이후 헌법 개헌을 실시하고
체육관 선거 통해 12대 대통령 당선
재임 동안 사회 유화책을 적극 펼치고
언론통폐합, 삼청교육대, 민주화 운동 탄압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6.29 민주화 선언 발표후 퇴임
1995년 구속되어 1심에서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았지만, 1
997년 사면·복권되었고 추징금은
2018년 기준 완납되지 않았다.
........................................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받은 마이클잭슨
생전에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한.,팝 황제.
대한민국 IMF 당시 위기 탈출에.,크게 공헌.
두 사람은 같은 해에 운명.
.
2009.01.15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이명뱍 대통령 취임식
2008.09.21 청와대 식탁
이명박 대통령 밥상
2019.3.19.
...박근혜(1952년 2월 2일 ~ )..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다.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
차녀이자 육영수의 장녀로
대구에서 태어나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 이래
청와대에서 성장했다.
1970년 서강대학교 입학 1974년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 유학길에 올랐다가
1974년 모친 사후 귀국해 1979년 10.26 사건
이전까지 사실상 영부인 직무를 대행하였다.
아버지가 서거한 후에는 청와대에서 나와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지냈다.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는
제19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역임
2007년 한나라당의 제17대 대선
후보 경선 출마하여 이명박에게 석패
이후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한나라당 내 비주류계를 이끌었다.
2011년 12월부터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당 혁신 작업을 지휘, 2012년 제19대 총선 승리.
이후 새누리당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선에서
득표율 51.6%로 48.0% 득표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당선,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1987년 대한민국 헌법 개정 이후 최초
과반 득표 대통령, 최초 이공계 출신 대통령,
최초 독신 대통령, 최초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
재임 직후부터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라는 위기를 맞으며 국정을 본
박근혜는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
국가적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창조경제를 위시한 추진한 정책
다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미숙한 국정운영과
불통 논란 등으로 숱한 비판을 받았다.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민간인 국정 개입 사실이 폭로되면서
2016년 12월 3일 대한민국 국회에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어 12월 9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두 번째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 가결,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탄핵 소추안을 인용하면서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탄핵 후 곧바로 3월 21일 검찰 소환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중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에 이어 4번째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3월 31일에는
구속영장 발부되어 서울구치소 수감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세 번째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구속된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진행 중에
2017년 10월 16일 6개월인
1심 구속기간이 만료되었으나 검
사가 앞선 구속영장에 적시하지 않은
뇌물 공소사실에 대하여 다시 구속영장 발부
구속기간이 최대 6개월 연장되었다.
이에 대하여 박 전 대통령 측은 반발
모든 변호인단이 사임하였다. 한편
2017년 11월 3일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명했으며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강제출당된 대통령이 되었다.
박근혜는 대기업 관련 범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 혐의
18개 와 국정원 특활비 · 공천개입 등
혐의 3개에 대해 각각 재판을 받고 있다.
전자는 2심, 후자는 1심 판결이 나온 상태
2018년 4월 6일 18개 혐의에 대한 1심에서는
혐의 16개에서 일부유죄 및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24년 및 벌금 180억 원을 선고받았으며,
2018년 8월 24일 2심에서 징역 25년 및
벌금 200억 원으로 형량이 늘어났다.
2018년 7월 20일 혐의 3개에 대한
1심에서는 2개가 인정되어 징역 8년
및 추징금 33억 원을 선고받은 상태.
2개 재판 합치면
혐의가 총 21개,
형벌은 총 33년형과
벌금 200억 원과
추징금 33억 원.
......................
2017.02.04
2018.03.01
2018.3.1
2018.3.1
2017.03.25
..................문재인 대통령........................
19대 대통령 선거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노무현 정부의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18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낙선.
2017년 19대 대선에 도전하여
제 1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1953년 경남 거제 피난민 가정에서
2남 3녀 중에서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문용형과 어머니 강한옥은
원래 함경남도 흥남에서 살았으나
1950년 한국전쟁 '흥남 철수' 당시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 피난 나와
거제 피난민 수용소로 내려왔다.
문재인은 거제 피난살이 시절 태어났으며
문재인이 초교 입학 직전 부산 영도로 이사.
아버지 문용형은 흥남시청에서
농업과장으로 일할 당시 공산당
입당을 강요받으며 괴롭힘을 당해
거제에서는 장사로 생계를 꾸리려
했으나 빚만 잔뜩 졌다고 한다.
일곱살 때 태풍 '사라'로
판잣집 지붕이 날아갔다.
가난한 가정형편에도 부산의 명문인
경남 중·고교를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
술 담배를 하다 유기정학을 맞기도 했다.
"중·고교때 내 별명은 '문제아'였다"
"빈부격차가 확연한 경남중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 세상의 불공평함과
위화감을 피부로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1년 재수 후 경희대 법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75년 전국적 유신 반대투쟁,
문재인은 총학생회장 대행으로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이끌고,
유신독재 화형식 주도 구속·수감
재판에서 징역 2년을 구형받았으나
징역 10월 집행유예 선고 풀려났다.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영 영장
군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되어
폭파병으로 훈련을 받고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과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화생방 최우수 표창 받는 등 특A급 사병.
1978년 제대했으나 학교에서는 제적된 상태.
제대 직후 아버지가 59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문재인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책임감에
49재후,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사법고시 공부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으나,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격 당한 후
'서울의 봄'이 오자 1980년 3월 학교에 복학.
문재인은 복학생 대표로서
학원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투쟁 중 2차 시험을 봤고,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발표한
5월 17일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유치장에서 합격 통보
이후 수사가 유야무야 석방됐다.
사법연수원에서는
고 조영래 변호사와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전 대법관,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
박병대 대법관 등을 만났다.
사법연수원을 차석 졸업
등 뛰어난 성적을 보였지만
지망했던 판사가 될 수 없었다.
운동권, 시위 경력 때문이었다.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대학 시절부터 만났던
김정숙 씨와 결혼했다.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
로펌의 제안도 있었으나
어머니가 계신 부산으로 갔다.
..........
...........
1982년 부산에서 연수원 동기 박정규 소개로
당시 부산에서 변호사 하던 노무현을 만났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부산 서구 부민동 법원 후문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설립.
둘은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노무현은 이미 부림사건과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변론을
맡은 바 있었고, 문재인 합류 이후
이들은 부산 울산·창원·거제 지역의
대표적인 노동·인권변호사가 됐다.
문재인과 노무현은 시국사건 변론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설립에 발기인
등 재야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노무현은 상임집행위원장을,
문재인은 상임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문재인은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6월 항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민주화
운동이었지만 그 운동의 중심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자긍심을 드러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노무현이 국회의원에 당선.
문재인은 부산에 남아 혼자 변호사 사무실 운영
1995년 여러 변호사들과 함께 '법무법인 부산' 설립
문재인은 직접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를 맡고
부산노동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노동문제 상담
노조설립 활동을 지원하는데 집중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당시
문재인은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았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기용.
<운명>에 따르면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제안했을 때 문재인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노무현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
문재인은 민정수석으로 끝내고
정치하라고 하지 말라는 두가지
조건을 걸고 허락했다고 한다.
문재인은 열린우리당에서
총선 출마 압력이 거세지자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 상의
문제를 이유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나 네팔로 여행을 떠났다.
연락을 끊고 지내던 중
네팔 카트만두의 한 호텔에서
영자신문을 통해 노무현의 대통령
탄핵 소식을 알게 되어 즉시 귀국했다.
탄핵심판 과정에서는
대통령 대리인단 간사를 맡아
실무적 역할과 언론 대응을 진행했다.
노 대통령이 대통령에 복귀한 직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임명
이후 다시 민정수석을 거쳐 청와대 비서실장
으로 노무현 정부 말까지 청와대에서 일했다.
'왕수석'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엄격한 자기 절제로 특별한 문제 없이
청와대 보좌 업무를 마치고, 2008년
경남 양산으로 내려가 칩거했다.
그러나 문재인은
노무현의 서거 이후
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노무현의 서거 소식을 국민에게
직접 발표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국장을 이끄는 '상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
위원장을 맡아 장례실무를 도맡았다.
특히 장례식장을 찾은 당시
대통령 이명박에게 한 의원이
'사죄하라'고 항의하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0년 재단법인 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의 이사장을 맡으며
정치권과 거리를 뒀으나 정치권에서는
줄곧 '역할론'이 제기됐다.
문재인은 노무현 서거 후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그당시에 표현했다.
..........
.........
문재인은 2011년 말
민주통합당 창당에 참여
2012년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55%의 득표율을 얻어
새누리당의 손수조 후보
(43.76%)를 제치고 당선다.
보수 정당이
항상 강세를 보여왔던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된
첫 번째 민주당 후보다.
2012년 6월 17일 문재인은
18대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그는 민주통합당 국민경선에서
손학규·정세균·김두관 등을 꺾고
13번 모두 1등을 차지하며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나섰다.
이후 통합진보당 이정희,
진보정의당 심상정이 후보직을
사퇴하고 무소속으로 나섰던 안철수
와도 어렵사리 후보 단일화를 이뤄
야권 단일후보로 18대 대선 출마.
그러나 선거결과 문재인은
득표율 48.02%(득표수 1469만표)로
역대 야권 대선후보 최고의 득표율이자
득표수를 얻었지만 51.6%(1577만3128표)를
확보한 박근혜에게 밀려 패배했다.
문재인은 2013년 <1219 끝이 시작이다>
라는 책을 펴내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2015년 2월 8일 민주당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 나서
문재인은 초선의 당대표가 됐다.
그러나 두달 만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 직후
당내에서 리더십 논란이 불거졌다.
문재인이 통과시킨
'공천혁신안'에 반대한
안철수 등이 12월 이듬해
4.13 총선을 앞두고 대거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측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낸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세우고 표창원, 박주민, 양향자 등
외부인사를 영입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결과 수도권은 물론
부산·경남에서 11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며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박근혜 탄핵 사태가 벌어지고
2017년 5월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문재인은 충남지사 안희정,
성남시장 이재명, 고양시장 최성 등
함께 더불어민주당 경선에 출마했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전체 투표수 164만2640표 중 누적 득표율
57%(93만6419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누적 득표율 50%를 넘어
결선 투표로 가지 않고
본선으로 직행했다.
2위는 누적 21.5%(35만3631표)를 얻은 안희정,
3위는 누적 21.2%(34만7647표)를 얻은 이재명,
4위는 0.3%(4943표)를 얻은 최성이 차지했다.
문재인은 후보 수락 연설에서
"저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
지역 통합, 세대 통합,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국민 통합 대통령이 되겠다"
"경제와 안보 무너진
두 기둥을 바로 세우겠다.
불공정, 부정 부패, 불평등을
확실히 청산하겠다. 연대와 협력으로
통합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고 공약.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41.1%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
<<'한국 1인당 국민소득' 3만$ 돌파.>>
2019년 3월 5일 한국은행 발표 2018년 4분기 및
연간 국민소득을 보면 지난 해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만 1349달러로 전년 2만 9745달러에 비해 5.4% 늘었다.
2006년 2만 달러를 넘어선 이후
12년 만에 3만 달러벽을 넘어섰다.
인구 5000만 명 이상 규모를 가진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넘는 나라는.,7국.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한국.
하지만, 한국 경제 성장률은
침체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7%로 2%대에 그쳤다.
물가 상승률 반영한
명목 GDP 성장률도
1년 전보다 3% 증가
20년 만에 가장 낮았다.
- 2019.3.5 일요신문 -
............
............
국민총생산(GNP)은
1962년 23억 달러에서
1999년에 4,021억 달러로
연평균 경제성장률 8% up.
같은 기간에 1인당 GNP도
87달러에서 8,581달러로 증가.
이러한 고속 성장은
대한민국에 다음과 같이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같은 기간 중에 농림어업 부문이
GNP에 차지하는 비중은 36.6%에서
5.4%로 축소된 반면, 광공업 비중은
16.3%에서 31.9%로 2배 가까이 확대,
사회간접자본 및 서비스 부문 비중도
47.1%에서 57.9%로 증대되었다.
1962~1999 한국경제는 지난 30여년
고도성장기를 통해 급속한 양적 성장을
이룩해 GNP 세계 15위 경제대국이 되었다.
선진국들이 수백년 걸린 경제성장을
대한민국은 수십년에 걸쳐 고속 성장.
한반도 역사 상, 유래 없던.,한강의 기적.
제2차대전 패전국
독일의 고속 경제성장
'라인강의 기적' 같은 일.
...............
...............
1948년~2019년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역사를 주도한
1대~19대 역대 대통령.,12분.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 설화에는
싯탈타 태자가 탄생한 직후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은 다음, 오른손과 왼손으로
각각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했다는 유명한 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 위와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한다.)
이 이야기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을까?
부처 경전 가운데 이상과 같은 귀절 다음에
'삼계개고오당안지(三界皆苦吾當安之)' 귀절
즉, 온 세상이 모두 괴로움 속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는 의미이다.
이 귀절의 의미를 말 그대로 풀이해 보면
'부처와 비견할 위대한 분은 어디에도 없으며
부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직 세상 사람들을
온갖 괴로움으로 부터 건지기 위해서라.'는., 의미.
그런데 이 이야기는 해석하기에 따라
약간 다른 의미로 받아 들여 질 수 있다.
즉,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 최고의 진리를
깨닫고 석가모니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선언은
이 세상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은 오직 자신 뿐이라는
그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일대 선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출생 -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
사망 -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
아버지 이경선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두 형이 천연두에 걸려 이승만의 출생 전에 죽어
사실상 6대 독자로 태종 장남인 양녕대군 16대손.
본관은 전주이고 호는 우남(雩南).
3살이 되던 1877년 한성으로 이사하고
숭례문 밖 염동, 낙동, 남산 서쪽 도동 정착.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으나
몰락한 가문이라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부모님들은 아들이 왕족의 후손이라는
선민의식(選民意識)을 자주 심어 주었는데
여섯 살 이승만이 천자문을 떼자 없는 살림에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미국 유학 시절에 이승만은
자신을 이씨 왕가 왕자로 소개하기도 하고
대통령 시절에는 자신을 ‘과인(寡人)’이라
부르는 등 '군주'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온 후 한학을 공부하면서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연이은 과거 낙방으로 구체제를 혐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 폐지.
배재학당이 세워졌고 젊은이들에게는
외국어와 신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다.
스스로 단발(斷髮)하고 배재학당에 입학
개화와 서구 민주적 정치 제도를 접했다.
이승만은 학당을 다니며 한학을 배웠다.
1884년 20살 나이에 배재학당에 입학해
아펜젤러 등 선교사로부터 신학문을 배웠다.
특히, 영어 공부에 집중해 1895년 8월부터는
배재학당의 초급영어반 교사를 맡기도 했다.
1896년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서재필이 1886년 11월에
학생 토론모임 협성회 조직.
이승만은 적극 참여하는 한편,
1898년 <협성회주보>가 창간되자
주필을 맡아 정부 비판하는 논설 등 발표
같은해 3월 열린 만민공동회에 연사로 나섰다.
1899년 1월 이승만은 박영효 세력의
고종 폐위 음모가담 혐의로 체포 투옥.
수감후 기독교도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종신형을 받아
1899년 1월부터
5년 7개월 옥살이
1904년 8월에
민영환 도움으로
특사로 석방됐다.
같은해 겨울 고종의 밀사가 되어 미국 방문.
이승만의 임무는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일본의 조선 침략 저지에
협조 요청을 위해 루스벨트와 면담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미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상태
이승만은 외교 성과를 올릴 수 없었다.
이승만은 선교사들 적극 지원 속에
미국에 머무르며 공부를 시작했다.
1905년 2월
조지 워싱턴 대학 2학년 입학
2년 4개월 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1910년 3월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
같은 해 7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
유학 중 1908년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승만은 이 사건 변호 통역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여 동포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1910년 10월 10일 서울로 돌아와 1912년 3월까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YMCA는
일제 탄압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기독교 전도사업과 구국문화운동 골몰.
이 때 이승만은 조혼한 아내 박승선과 이혼
1911년 조선총독부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신민회 회원
105명을 검거하는 '105인 사건'이 발생.
이때 체포 대상에 오른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1912년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 기독교 감리회
총회에 한국 대표로 출국해 위기를 모면.
1913년 3월 옥중 동지이자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의 요청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로 갔다.
이승만은 이 곳에서 한인 중앙학원,
한인여자대학, 한인 기독학원 등을
세우는 등 교육사업을 펼치며 세 확장.
당시 하와이는 전체 미주 한인 1만 중
절반 가량이 살고 있는 곳으로, 막강한
권한과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국민회)의
주도권과 재정문제를 두고 박용만 측과
법정 소송 등 다툼을 벌여., 국민회 분열.
1913년 3월 옥중 동지이자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 요청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로 갔다.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 임시정부와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됐다.
당시 국내외 기독교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다,
미국 박사학위가 명성을 높여주었고
하와이에서 실권장악 인지도가 높아졌다.
임시정부의 추대를 받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
스스로 위원장이 되어 활동했다.
임시정부 명칭
'Republic of Korea'
자신의 대외호칭을 대통령
President로 정하고 각국에 통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임정 초기 '위임통치 청원서' 사건이 문제.
3.1운동 소식이 전해지기 전인
1919년 3월 3일 이승만은 미 국무부에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둘 것을 제안' 위임통치 청원서를 낸 바 있었다.
임시정부는 사과하라는 요구
이승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신채호는 1919년 4월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나라를 팔아먹었다“라고 거세게 비판.
이를 두고 안창호가 이승만에게
대통령 호칭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강력하게 주장
이승만의 주장대로 1919년 9월 개헌이 단행됐고,
또 이승만은 대통령이 됐음에도
1년 째 상해에 들어오지 않았고
미국에서만 활동해 반발을 샀다.
1920년 처음 상해에 왔으나
각료들과의 갈등은 지속되자,
1921년 5월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자금 문제도 불거졌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에게
자금을 걷었으나 본인의
활동비로 다수를 쓰고 임정에
돌아가는 돈은 매우 적었다. 결국
1923년부터 이승만 탄핵론이 제기됐고,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이승만을 탄핵.
탄핵된 후 7년간
정치적인 암흑기.
1932년 11월 당시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이승만을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했다.
이승만은 1933년 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을 중립국으로 인정해달라 탄원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인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승만은
이곳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고,
이들은 1934년 10월 결혼했다.
이승만은
1941년 일본이 태평양의 여러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
경고하는 내용의 <일본 내막기>를 출간했다.
이 책은 출간 당시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일본의 진주만 기습후 베스트셀러
이 책으로 이승만 이름은
미국과 유럽에 알려졌다.
남한에서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매주 방송을 통해 신탁통치 반대 연설
전국을 순회하며 반탁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김구와 함께 반탁 운동을 주도 이 과정에서
독립촉성회의 조직이 크게 확대됐다.
남한의 좌·우익은
신탁통치의 찬성-반대로
갈려 극심한 대립을 빚었다.
그러던 중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한 연설에서
통일정부는 여의치 않게 되었다며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와 같은 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에 한민당이 지지하고 나섰고,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조직으로
민족통일총본부를 설립하여 자신이 총재가 됐다.
이로써 이승만은 우익진영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
1947년 9월 17일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관할권을
UN총회에 넘겼다. 같은해
11월 14일 UN총회는 UN감시
하에 남북한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선거의 실시를 가결했다.
소련이 이를 전면 거부했고,
1948년 2월 미국은 남한만의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 발표.
전국 각지에서 반대 여론
반대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제주도에서는 군인과 경찰이
3만 도민 학살 4·3사건이 발생.
5월 10일 총선
헌법을 만들기 위한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의장,
신익희를 부의장으로 선출.
제헌헌법 초안은
의원 내각제를 골자로
정부수립안을 채택했으나,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주장했다.
제헌국회는 이승만의 뜻을 받아들여
1948년 7월 12일 헌법제정, 7월 17일 공포
7월 20일에 간접선거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
이승만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
................................................................
대한민국 1·2·3대 대통령.
해방 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
광복 후 우익 민주진영 지도자
1948년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개헌을 거듭하며 4선을 한 후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사임.
2차 세계대전 직후
전 세계인이 바라본
'조선에 대한 시각'은
일본의 식민국이 아닌
'일본의 지원국'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전 세계인들의 시각으로는
일본과 묶어 처벌 대상이었다.
1895년 4월 2일 '아펜젤러' 배재학당에 입학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다가, 배재학당에서 공부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원수를 갚는다는 '춘생문 사건'을 계획했다.
탄로나 황해도 평산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
그 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 으뜸 청년으로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
이때 그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는데, 그 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유학 적극 권고.
1897년 7월 배재학당 우수한 성적 졸업.
1897년 7월 8일 정동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에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 문학 시강.,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이 영어 연설이 시작,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1904년 8월 민영환, 한규설 등의 건의로,
예정이 없던 특사조치로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길 원해 밀지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왜 고종이 그를 만나길
원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상종도 않겠다.'며 거절
1904년 11월 4일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 해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D.C.에 도착하였다.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 지와 기자회견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
2월 조지워싱턴 대학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제8조)에 따라
한국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 죽음으로 허사
4월 23일 워싱턴
커베넌트 장로교회
류이스 햄린 목사 세례.
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를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경유.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고 있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루스벨트를 만났다.
1905년 8월 4일 뉴욕 동부
'루즈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과 만난 루즈벨트 대통령.
밀서(密書)에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위싱턴
한국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이승만은 당시 공사인 김윤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 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 민영환은
을사조약 울분을 못 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한다.
1905년 루스벨트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을 예방
고종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였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 만 받고., 되돌아갔다.
루즈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 총리
'가쓰라'와 식민지 분할에 합의한 뒤.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안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았다.'고
확신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의구심.
밀사활동 실패후 미국에서 공부를 결심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哲學)을 공부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
하버드 대학교 석사,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 논문 박사 학위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
그의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
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이때 이승만은 같은 캠퍼스에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 강의도 들었다.
1908년 덴버의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동지회에 참석하였다.
그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오클랜드기차역에서 저격, 암살
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를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미주의 한인들에게
전명운의 변호비용으로 3000달러 요구
(장인환 미국 변호사 선임비 4000달러)
전명운과 장인환 두 의사의 재판을 위한
의연금이 미주 본토, 하와이, 멕시코, 국내,
연해주, 만주, 중국 등지를 포함한 세계 각지
한국인들이 답지하여 7,390달러가 모아졌다.
미주 한인들은 3000달러를 모아 이승만에게 가져갔다.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형편을 살피고 통역 거절
"시간 관계로 오래 있을 수 없으며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 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 하고 같은 날 8월 25일
동방으로 갔는데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의
여론 반응을 살피고 있었기에 법정 통역을 거부했던 것.
그는 법정 변호를 거부 후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가 그냥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장인환과 전명의 의거는
국내외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파문과 각성의 계기를 주어
민족운동 참여를 이끌었다.
물론 일부에서는 이승만이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 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처럼
이 사건을 외면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그 대신 통역을 맡은 신흥우를 비롯하여
대다수 한인 기독교인들은 장인환, 전명운의
의거에 적극 관심 의연금을 보내며 힘을 모았다.
또한 후에 그는 임시정부의
주요 수반이 되었던 까닭에,
그가 전명운에 대한 변호를
거부한 것은 비판받기도 한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던.,이승만
한때 강원룡은
이승만의 고문이
거짓이라고 주장.
' 이승만은 일경에게 잡힌 적이 없으면서도
자기 손을 보여주며 '(고종이 아니라) 왜놈에게
붙잡혀 고문당한 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주장.
허정은 이승만이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 때
투옥당한 뒤 고문당한 것을 진술했다.
허정은 자신이 황성기독교회관 청년부 시절에
이승만이 안면 경련을 일으켰던 것을 진술했다.
허정은 '이 무렵의 이 박사의 인상은 지금도 생생
그 때에도 이승만 박사는 얼굴을 항상 실룩거렸다.
이승만 대통령을 상징하는 안면 경련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고문 당한., 후유증
이승만은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집필했고,
1900년 8월, 한성감옥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 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 번역.
이는 뒤에 다시 1917년에 미국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1904년 7월 8일 이승만은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
민영환, 한규설 등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결과,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8월 9일 특사로
감옥을 나왔다
한성감옥
이승만은 5년7개월 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그 재주가 아깝다며
주변에서 변호해준 덕분에 기적적으로 감형.
24세부터 29세까지(1899 1월~1904년 8월)
청년 이승만이 옥중에서 집필했던 옥중잡기.
청년 이승만이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석방을 요구했지만 거부 당했고
1899년 1월 말, 탈옥 시도 실패해 종신형 언도.
이후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 편역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
본부인 박승성
이승만은 1891년 박승선과 결혼했으나
미국으로 건너간 후 사실상 헤어졌다.
박승선은 이승만이 투옥되었을 때
갓난아기를 업은 채 덕수궁 앞에서
거적을 펴고 3일간이나 임금에게 읍소
남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그러나 부부는 아들을
미국에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심하게 다툰데다 그 아들이
미국에서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나자
갈등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혼 후 이승만은 쉰여덟 살 무렵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난 서른세 살의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도너와 재혼.
1948년 7월 20일, 초대 대통령 선출(만 73세)
대마도 반환 요구
이승만 초대 대통령(만 73세)
1948년 8월 15일
건국 기념행사에서
국방경비대 분열 행사를
지켜보는 초대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채스카 여사의 모습 - 건국절 행사 -
하야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러닝메이트 출마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
그리하여, 제4대 대통령에 무투표 당선됐다.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발발하자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에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 영결식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
.................
.................
1933년 2월 당시 발간된 서적을 통해
한국을 처음 알았으며, 어머니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던 중 이승만을 만났다.
이후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4년 10월 8일 미국 뉴욕의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윤병구 & 존스 헤인스' 목사 공동 주례로 이승만과 결혼.
이 결혼으로 그녀는 한국 독립운동가 및
정치가 아내로 굴곡 많은 길을 걷게 된다.
이승만 내조자로 미국 본토와 하와이 일대에
청소년들의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에 힘썼으며,
한인기독학원의 교사로서도 큰 공헌을 했다.
1945년 8·15해방 뒤에 한국에 왔으며,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후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검약정신을 몸소 실천
1960년 이승만 하야 후
그가 죽을 때까지(1965. 7. 19)
헌신적으로 남편을 돌보아 미국에서
'베스트 와이프'(Best Wife) 별칭을 받았다.
남편과 사별한 뒤 고향인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내다가
1970년 5월 16일 환국하여 이화장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양아들
이인수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이화장에서는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한국의 할머니
한 양산을 30년간 사용할 정도로
늘 검소해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프란체스카........
1900년 오스트리아 빈 교외
인처스도르프(Inzersdorf) 출생.
빈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가서 영어통역사와
타자-속기사 자격을 취득. 스포츠 선수
헬무트 뵈링거와 결혼했다가 곧 이혼했다.
오스트리아 출생 무국적 독립운동가와 결혼
항상 한복을 입었으며, 한국 음식만 먹었다.
“내 관 속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썼던
태극기를 넣어다오” 며느리 조혜자씨에게 유언
한국 첫 퍼스트레이디 프란체스카(1900~92)
남편인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이 붙여준
한국 이름은 이금순· 이부란(李富蘭)이었다.
화진포 .,'이승만 별장' 전시관
현재, 장성급 군 휴양소.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한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유물 유품 전시관으로 사용 중.
화진포 초대 대통령 별장(이승만 기념관)
...........화진포해수욕장...............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에 위치.
'38선' 이북에서는., 최남단 해수욕장.
백사장 길이 1.7km이며 수심 1~1.5m.
monas 성분 모래라 곤충 해충이 없다.
...................................................
김일성은 1948~1950년까지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 가족과 함께
하계휴양지로 화진포 해수욕장를 찾았다.
1948년 8월 당시 6살이던 김정일이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제프 소장의
아들과 화진포 김일성 별장 입구에서
어깨동무 하고 찍은 사진이 이를 입증.
화진포의 성은 당초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에 의해 1938년 독일망명 건축가
베버가 건축했다. 지하 1층, 지상 2층
석조 건물로 지어져 당시 건축물로는
성(城) 같은 디자인이 제법 화려하다.
화진포 성(城)에는 옛 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를 비롯해
김일성 가족이 사용했던 응접 세트 등
유품이 모형물로 만들어져 전시 되었다.
.....................................................
해안가 곁에 '화진포 성'은 광복 직후 건립,
한국전쟁 이전까지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와 함께 수시로 이용했던 곳으로
본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물이었으나
전쟁 중 훼손되어 64년 육군이 본래 건물을
철거하고 지금의 1층 건물로 재건축 했었다.
새롭게 단장된 화진포 성 내부에
김일성의 정체, 독재체제 구축과정,
한국전쟁 도발, 그리고 정전협정 이후
북한의 도발만행 등 북한관련 자료를
판넬식으로 게시하고 있으며 김정일과
김경희가 어린시절 이 곳에서 찍은 사진
등 관련자료사진도 전시하고 있다.
'화진포 성' 절경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마주 보이는 '금구도'
금구도는 바위섬으로
해변에서 3백m 떨어져
거북 모양을 닮은데다
가을철이면 이 섬에서
자라는 대나무 숲이
노랗게 변해 섬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여름에는 피서객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 해초,
전복 등을 따며 해수욕
겨울철에는 천연기념물
201호인 고니를 비롯한
철새가 군무를 펼친다.
동해가 내려다 보이는
해안가 바위섬 언덕에
위치한 '화진포 성(城)'
이승만 별장은
김일성 별장과 달리
바다는 보이지 않으며
화진포 호수 만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두 별장은
서로 3km 정도 떨어져 있다.
.............
.............
화진포 해수욕장은
'38선' 이북에 위치.
1950년 6.25 전까지
북한의 영역이었다.
화진포 해수욕장은
남한에서는., 최북단.
북한에서는., 최남단.
남북 분단의 상징인 곳.
...........
...........
1946년 4월 김일성은 기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창당해
조선공산당 중앙(서울 박헌영)과 관계 분리.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은
북측 신민당(조선신민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같은 해 말에 역사상 처음 선거 실시
1947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프롤레타리아독재정권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이 때부터는 사회주의
과도기 과업을 수행하는
길에 들어섰으며, 1948년 3월에
제2차 당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
4월에는 56개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가 참가한
남북연석회의를 주도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창건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은 내각수상으로 선출
뒤늦게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대한민국 역대 영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