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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황제 숙종
- 천추태후가 죽은 지 어언 60여 년이 지났다. 현종의 자손들이 대대로 때로는 형제가 순서대로 황위를 계승하여 일명 고려의 '황금시대'를 지나 선종의 치세에 이르고 있었다. 고려는 문화적으로는 눈부신 면이 있었지만 중국의 송나라를 의식한 나머지 다시 공손한 자세로 돌아와 있어 황제국이라는 것이 무색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는 천추태후에 의해 짓밟혔던 신라계의 기세가 다시 회복되어 문종 대를 거쳐 유학이 확고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 이전 천추태후의 선례도 있고 해서 신라계는 그들의 부귀영화를 보호해줄 확실한 장치가 필요했다. 그들이 선택한 세력은 외척 세력과 사원 세력이었다. 특히 문종 이래로 대대로 황실의 외척이 된 경원 李씨의 세도는 당시에 황실 세력을 제압하고도 남았다.
- 황실세력 자체도 사실 경원 李씨를 대부분 외가로 두고 있었으나, 권력의 냉정함 앞에서는 그것은 한낱 사적인 감정에 불과했다. 선종의 동생이던 계림공 왕희도 그들 중 하나였다. 문종 이후 나이 어린 황태자 대신 아우들이 황제가 된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선종의 바로 아랫 동생인 왕희가 다음 황제로 유력했다.
- 그러나 이때 선종의 황후였던 사숙 황후가 새로운 태풍의 눈으로 부상했다. 그녀 역시 인주 李씨의 집안 출신으로 사촌인 이자의를 앞세워 선종과 자신 사이의 아들 왕욱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려고 했다. 일찌기 고려 초기에 막강한 외척이었던 황보씨의 위상을 이제 고려 중기에 들어서 인주 李씨가 차지할 정도였다. 인주 李씨의 인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했다.
- 서기 1094년 왕욱의 나이는 당시 11살이었다. 반면 가장 유력한 황위계승자 왕희는 41살이었다. 누가 봐도 어린 왕욱보다는 황제의 기상이 넘쳐나던 왕희가 당연히 차기 황제감이었다.
- 사숙황후는 이미 선종때부터 천추태후를 흉내 내어 막강한 영향력을 황실에 발휘하려고 하였는데, 당시 인주 李씨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실이 많은 자존심을 상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황실 인물들의 상당수는 사숙 황후와 나아가 자신의 상당수의 외척 세력이던 경원 李씨 세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이제 사숙 황후는 왕희가 장차 황제가 되면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마침 선종의 병세가 약화되어 다음 후계자 문제가 조정에서 부상하고 있었다. 사숙 황후는 사촌인 이자의와 상의하여 황도 개경의 군대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아들 왕욱의 안전한 황제 계승을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계림공 왕희는 이미 고려의 군부 쪽에 이미 손을 써두고 있었다. 그는 이미 황제가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사숙 황후와 인주 李씨의 거대세력이 최대 장애물로 가로막고 있었다. 사숙 황후는 가문의 일원인 이자겸의 신라계 인맥을 동원해 군부를 왕희에게서 이반시키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한다.
- 한편 선종은 자신의 최후가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비교적 현명한 군주였던 그는 어린 아들이 황위를 잇게 되면 비극이 닥쳐온다는 역사의 교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랜 심사숙고 끝에 동생 왕희를 불러 후사를 부탁했다.
- 왕희는 친형 선종의 우애 앞에 눈물을 씻으며 고마워했다. 그러나 사숙 황후의 눈과 귀가 이들 형제의 대화에도 여지없이 개입하고 있었다. 남편 선종의 결심에 사숙 황후는 비상수단을 써야만 했다. 왕희가 물러난 이후 선종은 계림공 왕희에게 다음 보위를 전한다는 칙서를 쓰게 하였는데 이 칙서를 맡은 환관이 그것을 그대로 사숙 황후에게 가져왔다. 사숙 황후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바꿔치기했다.
- 결국 선종은 드디어 승하하고 그가 남긴 칙서는 자신의 아들 왕욱에게 황제의 위를 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왕희는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를 느꼈다. 형님이 나에게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독대 당시 선종의 진실된 눈길을 되새겼다. 누구나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는 진실한 법이다. 그렇다면 사숙 태후가?
- 그러나 갑자기 닥친 상황이라서 왕희는 미처 대비를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칙서가 조작되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칙서는 황제 자신이 직접 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분이 없었다. 왕욱의 황제 계승을 뒤엎기에는 너무나 명분이 없었다.
- 게다가 이자의가 개인적으로 거느리던 1만의 사병이 이미 황궁을 호위하며 왕욱의 즉위식을 지켜내고 있었다. 제 2의 천추태후를 꿈꾸던 사숙황후는 왕희로 하여금 즉위식에 참여하도록 명한다. 왕희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일단 황제 이름으로 나오는 조칙을 받들어야 했다. 왕희는 사숙황후를 정면으로 노려봤다. 네년이더냐? 조만간 계림공 그대의 목도 떨어질 것이요...호호호...
- 그러나 어린 황제는 이미 당뇨병에 시달리는 환자에 불과했다. 그러니 사실상 고려의 여황제는 내가 아닌가? 이전에 목종을 대신해 천추태후가 여황제로 행세한 것 처럼 이제 태후가 된 사숙태후도 즉위식 동안 마치 자신이 70년전의 천추태후로 되돌아 간 것과 같은 착각에 빠졌다. 더구나 그녀는 이자의의 막강한 세력의 보좌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인가? 쉽게 물러설 계림공 왕희가 아니었다. 이미 그의 눈은 황제에 대한 야망으로 훨훨 불타고 있었다.
- 이리하여 병약한 사숙 황후와 선종의 외아들이 간신히 즉위식을 마치니 이가 고려 헌종이다. 그러나 어린 황제는 줄곧 병상에 누워있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정작 조정에 나타난 사람은 사숙 태후였다. 그녀의 섭정이 시작되고 그녀는 자신이 거처하던 연화궁을 중화전으로 개칭하고 그곳에 영녕부를 설치하여 행정 및 군사를 포함한 일체의 정사를 보았다. 천추태후의 재판인 듯 했으나 사숙태후는 천추태후와 같은 원대한 포부도 없었고 그저 흉내 내기에 그친 집권욕의 화신일 뿐이었다.
- 또한 헌종의 증세가 심해지자 황제의 혼인도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사숙 태후는 자신의 아들이 얼마 살지 못하리라는 점을 깨닫고 이자의와 의논하여 차기 황제로 선종의 세번째 황후였던 원신 궁주의 큰아들 한산후 왕윤을 지목했는데 원신 궁주는 다름 아닌 이자의의 친동생이었다.
- 이렇게 사숙 태후-이자의 세력이 결합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자 계림공 왕희는 이들 세력이 더욱 굳건해지기 전에 하루속히 명분을 잡아야만 했다. 이미 그의 주변에는 대부분의 황실과 신료들이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사실 특히 사숙 태후의 오만한 정권 농단에 많은 지지파들도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 틈을 노려 왕희는 측근들을 동원해 사숙 태후와 이자의가 불륜의 관계고 또 이자의가 장차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등의 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 이자의가 없는 사숙태후와 헌종은 그야말로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왕희는 이자의의 세력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이자의의 핵심 측근들을 포섭하려는 공작을 시도했다. 여기에는 미인계가 총동원되었고 약점을 잡힌 상장군 왕국모 등은 그만 왕희의 편으로 넘어오기에 이른다.
- 이자의가 황제자리를 노린다는 것은 물론 헛소문이었다. 이미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던 그가 황제 자리를 새삼스럽게 노릴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일가인 이자겸 등은 이를 기화로 오히려 왕희를 제거해야 한다고 이자의에게 권고했으나 이자의는 이를 무시했다. 그러나 이자겸 등은 나름대로 왕희가 정변을 노리고 있다는 역소문을 퍼뜨려 오히려 왕희의 세력의 배반을 유도하려고 하였다.
- 겉으로는 이자의의 천하처럼 보였으나 기실 양측은 팽팽한 세력균형을 이룬 채 긴장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헌종이 사경을 헤메고 있다는 급보가 들려왔다. 달려온 사숙 태후와 잠시 의논한 이자의는 시급히 옥새와 왕윤을 불러들였다. 선종 때처럼 새로운 황제를 즉위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자의는 왕윤을 황제로 즉위시킨 다음 헌종이 죽으면 그 죽음을 계림공 왕희에게다 뒤집어 씌어 그 일당을 쓸어버리려는 계산이 었던 것이다.
-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왕윤을 데리러 갔던 군사들이 왕희의 사병에게 사로잡혀 사건의 전 말이 드러났고 이는 지체없이 왕희에게 보고되었다. 왕희는 이미 내통하기로 되어 있던 왕국모와 연락을 취하여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외부에서 호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도 그만 배신자로 인해 이자의에게 알려지고 만다. 황궁에 있던 이자의는 급히 자신의 충복이었던 고의화에게 사병을 총동원하여 왕희의 사저를 급습하여 그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다.
- 사숙 태후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이자의...이윽고 왕희의 목을 가져왔다는 고의화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계림공 왕희의 목이 선정문 밖에 걸려있다는 것이었다. 득의양양해진 이자의는 선정문으로 달려왔으나 거기에는 왕희가 수하의 군사들을 모두 몰고 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미 고의화 마저 오래전에 왕국모의 꼬임에 넘어가 이자의를 배신했던 것이다.
- 이자의는 얼마 안되는 수하들과 피투성이의 사투를 벌였으나 결국 목이 잘려 오히려 그의 목이 선정문에 걸리게 된다. 반대파의 거두가 쓰러졌으니 나머지를 청소하는 일만이 남았다, 왕희는 반대파들을 모조리 참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사숙 태후가 있는 중화전으로 말에 박차를 가했다. 황궁안에는 원래는 말을 타고 들어올수가 없었으나 이미 거칠것이 없는 왕희는 오히려 중무장을 한채 사숙 태후 앞에 도달했다.
- 사숙 태후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자의 대신 계림공 왕희가 저승사자처럼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황을 짐작한 사숙 태후는 그만 실성한 사람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왕희는 분노를 억누른 채 일단 태후와 헌종을 후궁에 감금했다.
- 황제 자리를 눈앞에 둔 왕희는 그러나 주변의 말을 귀담아들어 성급하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일정한 수순을 밟아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모든 반대 파들을 일말의 자비심 없이 9족까지 죽였고, 중서령으로 임명되어 이제 모든 신료들이 그의 집으로 와서 정사를 보았다. 사숙 태후는 아들인 헌종과 더불어 자살을 했고 이자의를 도와 활약했던 이자겸도 가문이 결딴나는 것을 뒤로하고 종적을 감추게 된다.
-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왕희는 드디어 서기 1095년 10월 고려 제 15대 황제에 오르니 이가 바로 첫 번째 북벌 영웅인 숙종이다. 따라서 사숙 태후와 이자의의 천하는 불과 1년 5개월만에 막을 내리고, 이제 고려의 오랜 숙원 이었던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을 천재일우의 기회가 새로운 황제 앞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 조카를 밀어내고 황제에 오른 숙종은 그 즉위식 날에도 바로 헌종에 이어 이자의 일당에게 황제로 지목된 한산 후 왕윤과 원신 궁주와 나머지 아들들까지 모두 유배를 보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유배지에 닿기도 전에 모두 숙종의 지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친형이었던 선종의 후사는 모두 끊기게 된 것이다
- 또한 인주 李씨 가문도 거의 멸문지화를 당할 지경이었다. 숙종도 그 외가가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한치도 용서가 없었다. 이자의의 가문은 모두 10족까지 색출되어 참형을 당했고 이자겸과 몇몇 종친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 지방의 한적한 사찰에 몸을 피하게 된다.
- 이자의와 사숙 태후가 물러난 힘의 공백을 숙종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측근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등용된 신료들도 모두 숙종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에 광종 이래 숙종은 가장 강력한 황제권을 행사하게 된다. 신라계는 천추태후 때처럼 노골적으로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숙종은 이를 참작, 융통성을 발휘하여 이들 중 쓸만한 이들을 조정에 기용했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으로 화근거리가 되고 만다.
- 뒤이어 논공행상이 중대한 사안으로 떠올랐다. 소태보와 왕국모 등 많은 이들이 공신으로 책봉되어 포상되었으나 유독 숙종과 뜻을 같이했던 황실 세력들에게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는 숙종의 황실 견제책의 일환이었으나 특히 숙종과 배다른 아우였던 부여 후 왕 수같은 이는 숙종의 면 전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 당시 살아있던 문종의 아들들은 숙종을 포함해 모두 7명이었는데, 이들 중 천태종으로 유명한 대각국사 의천 등 2명은 승려였고 나머지 5명 중 숙종과 동복형제는 1명뿐이었고 나머지 3명은 모두 이복아우였다. 이들 3명은 잔인한 숙종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수 순이라고 오해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숙종의 정적들이 한몫 거들기도 하였다.
- 이들 3명의 황자들 중 가장 출중한 이는 부여 공 왕수였다. 왕수는 자신의 동복아우들과 의기투합하여 일찌기 숙종이 내세운 명분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였다. 즉, 숙종이 거사한 명분도 형제상속이었는데 이제 숙종 또한 자신의 아우들로 황제를 전해야 한다고 여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숙종에게는 이미 장성한 17세의 장남 왕우가 있었기 때문에 숙종의 입장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수작이었다. 조만간 형제간에 또 한 번의 피바람이 풀 태세였다.
- 이때 숙종의 바로 아랫 친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이 개입한다. 그는 숙종을 만나 더 이상의 피붙이 싸움은 안된다고 강력하게 말린다. 숙종은 마지막으로 부여 후 등을 독대하여 형제간에 우애를 강조했으나 오히려 왕수는 다음 후계자 문제를 노골적으로 언급하여 숙종의 인내를 자극하였다.
- 이 와중에 숙종이 장남인 왕우보다 더 총애해 황제감으로 염두에 두고 있던 왕 필이 갑자기 급사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부검 결과 타살로 들어났으나 부여 후 왕수의 짓인지는 드러나지가 않았다, 그러나 숙종의 슬픔은 뒤이어 이성을 잃은 광기로 표출되어 의천의 만류도 더 이상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 때마침 부여 후 왕수는 세력을 규합하여 숙종을 암살하고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막 진행시키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인지 숙종의 선제공격을 받고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귀양길에 올랐고 그의 이복아우들은 모두 능지처참에 처해진다. 죄목은 물론 왕 필의 살해 혐의였다. 왕수는 한 발짝 늦었음을 뼈저리게 후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물론 왕수도 귀양지에 닿기도 전에 숙종이 즐겨 쓰던 방법대로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 이제 더 이상 황제의 후사 문제는 거론될 필요가 없었다. 서기 1100년 정월 숙종은 장남인 왕우를 태자에 책봉하여 만천하에 이를 알렸다.
- 숙종은 그러나 자신들의 이복아우들과 조카들을 도륙한 행위에 대해 두고두고 고통을 받게 된다. 이들과 문종, 선종의 모습이 밤마다 그의 앞에 환영처럼 나타났다. 숙종은 결국 황도 개경의 운이 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황도를 구상하여 지금의 서울 일대인 남경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 그러나 남경 천도가 결실을 맺기도 전에 이번에는 북쪽의 여진족의 발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104년에는 여진족이 대거 남하하여 정주 일대를 위협하고 거란과의 통로를 막는 지경에 이르렀다. 숙종은 정예군을 파견하여 이를 막았으나 여진족의 강대한 기마병 앞에 추풍낙엽으로 패퇴했다. 윤관은 이때 출정했으나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 숙종에게 군사력의 강화를 요청한다. 이때 숙종의 앞에는 괴문서가 도착했다. 그것은 환 단 이래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숨겨진 찬란한 역사를 적은 비기였다.
- 숙종은 자신의 오른팔이던 윤관 장군을 불러 이에 대해 물어봤다. 윤관은 바야흐로 이제 숙종 자신이 고려군을 양성해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할 때가 왔다는 징조라고 말했다. 숙종은 윤관이 추천한 인물들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와 역사를 알게 되었고 금새 북벌은 숙종의 새로운 열정이 되었다. 또한 북벌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숙종은 자신이 그동안 저지른 지나친 살육에 대해 조상들에게 사죄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 곧이어 여진족을 정벌할 대대적인 군사력 강화가 일어났다. 별무반이 창설되고 윤관의 지휘 아래 나날이 강성하고 정예로운 군사로 고려군은 거듭나고 있었다. 고려 정종이 서경 천도의 일환으로 광군 30만을 정비한 이래 이때처럼 고려의 북벌 기운이 왕성한 적이 없었다. 절대군주 숙종의 지도력 아래 전 고려가 일사불란하게 북벌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이제 여진족과의 일전이 시간문제로 다가왔다.
- 그러나 숙종은 자신의 건강이 급속히 쇠약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권력다툼으로 피로와 긴장이 누적되어 이제 그의 오장육부를 병들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이미 윤관과 함께 직접 말을 몰아 저 광활한 만주벌판을 달릴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다.
- 서기 1105년, 모든 준비는 끝났다. 숙종은 친히 서경으로 가서 고구려 동명성 제의 묘역에 제사를 지내고 곧바로 고려군의 대대적인 만주 출병을 선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사 와중에 쓰러지고 만다. 이어 그는 황제 수레에 실려 급히 개경으로 환도의 길에 오르게 된다. 숙종의 뇌리에는 오직 고구려, 고구려 뿐이었다. 조만간 병을 치유하고 짐이 다시 친정에 오르리라... 가서 만주벌판에서 여진족의 항복을 받고 중국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세우리라... 그러면서 숙종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결국 그는 황도로 돌아오는 수레 안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 52세였다. 희대의 영웅이었던 그다운 비장한 최후였다.
- 숙종의 죽음으로 북벌계획은 잠시 연기되었으나 그의 과업은 윤관이라는 걸출한 명장과 그의 유지를 이어받는 다음 황제 예종에 의해 드디어 본궤도에 오르게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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