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생을 읽고>
죽음이라는 단어보다는 사망선고에 익숙해버린 올해로 5년차 외과병동의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어떤 응급상황에서도 조금은 당황하지 않는 능숙함이 조금이 배어나오지만, 유독 죽음, 사망이라는 단어에서는 여러차례 경험을 해보아도 마음속에 알 수없는 복잡한 것들과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사후생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라는 제목에서 죽음이후를 삶이라 말하는 것에 대해 알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 버리는것 같다. 죽음과 삶은 공존한다. 즉 삶은 축복이고 행복인 것과 같이 죽음 또한 불행하고 슬픔기만 한 것들은 아니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이 살고 있는 순간 속에서도 누군가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어떤이는 하루하루를 죽어가고 있다. 나는 수많은 삶과 죽음을 보았다. 4년이란 시간속에서 간단한 충수돌기염부터 암에 이르기까지 많은 질병을 보게 되었고, 현재 근무중인 병원의 경우 암병동이 따로 있지 않아서 외과파트에서 수술과 항암요법까지 병행을 한다. 암진단을 받는 환자들의 경우 큰 수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어도 재발과 전이를 막기 위해 항암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받는다. 50세의 나이로 대장암을 진단받고 수술의 경과도 좋았다. 그러나 조직검사상 이미 전이가 되고 있어 3기 진단을 다시 받았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항암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1년뒤 다시 입원한 그녀는 다시 알아볼수 없을만큼 야위였고, 간 전이로 인해 얼굴에 황달까지 온 상태였다. 이제 그녀에게 희망이란 두글자를 찾아볼수 없었다. 처음 수술후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던 그녀인데, 아직 50이란 나이에 받아들이기엔 큰 죽음의 절망을 보면서 내가 할수 있는것은 과연 무엇이가란 생각을 했다. 그저 통증을 줄여주는 행위말고는 내가 더 이상 그녀를 위해 할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어느날 나이트 근무를 하던중 그녀에게 갔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야위어갔고, 황달이 전신에 퍼진 상태였지만, 너무도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있었다. 난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머뭇거릴수 밖에 없었다. “저.. 저... 많이 아프지 않으세요?...” 그녀는 “네 괜찮아요.” 너무 고맙다고 힘들게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했다. “ 이젠 다 된거 같은데요. 그렇죠?... 이제 그만 정리하고 편안한 곳으로 고통없고, 두려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고통과 두려움 없는 그 곳은 아마도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애써 태연하기 위해 그녀를 바라보면 눈물을 꾹 참고... 그녀의 따뜻한 손을 힘껏 잡고 간호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누구에게나 죽음이란것은 두렵고 무섭기만 한 것인데 그녀를 죽음에 대해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우리들은 가족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생각 하는것 조차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10년 20년의 계획을 세우지만, 죽음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그렇게 힘들고 고되기 보다는 하나의 생명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죽음에 있어서는 직업, 돈, 지식, 나이, 성, 인종을 불문하게 된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죽음을 보고 이렇게 어린나이에 죽음을 받아야 들여야하나 싶지만, 그 아이는 이미 한간지 사랑이는 배움을 다 하고 떠나게 된다.
죽음뒤 사람들은 혼자가 되지 않을까 어둠속에서 혼자만 남지 않을까만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음뒤엔 나를 기다려줄 수호천사가 있다. 그 수호천사는 우리가 그토록 그립고 보고싶은 사람이다. 부모를 일찍 여위고 생을 마감했을때 죽음후에 눈을 떳을때는 나의 부모님이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위암 진단을 받은 그는 운전기사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날 심한 복통으로 119를 통해 병원에 실려와서 위천공이라는 진단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조직검사에서 위암으로 인한 천공으로 재 진단을 받게 되었다. 185cm의 건장한 모습의 그는 열심히 항암요법를 받았고, 식이요법과 모든 것을 힘들이지만 살기위해 즐겁게 이겨내고 있었다. 그러나 2년뒤에 다시 병원에 온 그는 다시 알아볼수 없을만큼 야위었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물 한모금 삼키는것 조차 힘겨운 모습 이였다. 그는 물한모금 삼킬수가 없었다. 물을 먹자 마자 구역과 구토가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는 곧 영양수액으로 식이를 대신 하였고, 수액에 섞인 마약성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그를 힘들게 했던것은 앞으로 2달일지 3달인 모르는 불투명한 삶보다도 무서운 것은 통증이었다. 1분 1초도 편안하게 있을수 없게 만드는 암성통증으로 힘들어했다. 어느날 그 환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간호사님... 저 얼마나 살수 있을까요?"... "저 삶에 대한 미련 없습니다. 저 그냥 죽고 싶습니다. 통증이 내 팔보다 큰 쇠망치로 내 온몸을 두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편하게 하루라고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였다. 단지 생명의 연장으로 하루하루를 더 살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한 것인지, 통증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그만 생을 마감하는 것이 그를 위한 것일까란 질문을 했을때 난 선듯 대답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죽게 된다면, 사후생에서와 같이 사람은 고통이 없는 곳에서 살수 있게 된다. 다리를 잃은 사람도 다리를 다시 갖게 되고 통증으로 고통스러워 할 일도 없을 것이다. 죽음이란 영어에서 end 가 아닌 and 라고 생각한다. 끝이 아닌 그리고의 의미인 삶의 연장이라 생각한다. 인간을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의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고 때론 죽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태어남과 다르게 준비할수 있는 여유를 가질수 있다.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죽음후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은 조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책에서 죽음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죽음은 나비가 고치를 벗어 던지는 것처럼 단지 육체를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다. 죽음은 당신이 계속해서 지각하고 이해하고 웃고 성숙할 수 있는 더 높은 의식 상태로의 변화일 뿐이다. 유일하게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육체이다. 육체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봄이 와서 겨울 코트를 벗어버리는 것과 같다. 당신은 그 코트가 낡아 더이상 입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이다." 라는 글귀가 있다. 죽음은 옷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올바르게 알려주기 위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여러책을 저술했고 사후생은 그 중에 한권에 해당 한다. 짧지만, 강렬하게 다가오는 책인것 같다.
달콤한 인생이라 영화에서 어느 맑은 봄날에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 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입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것입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니 마음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고 있나? 아님 죽어가고 있나? .... 어떤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나 마음이 죽음이나 삶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한다. 살기위해 죽음을 밀어내고 있지만 인간을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어가고 있다. 죽음이라는 패러다임에 삶이 있고, 삶에 끝에 죽음이 있다. 책을 통해 죽음이후의 삶에 대해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고, 앞으로 죽음에 대한 무지함으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로스박사처럼 죽음을 그리 외롭고 힘든 여정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다. 누구보다 삶과 죽음의 현장에 있는 나의 직업에 감사한다.
조금만 열심히 하길 바라고 조금만 시간이 있기를 바란다고 외치고 있지만, 지금 이순간이 바로 그토록 바라는 시간일수 있다. 앞으로 1분 1초의 시간도 소흘하게 보내지 않아야 한다. 죽움은 언제 다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훗날 죽음이 다가와도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사후생을 통해 변화된 나를 기대한다.
첫댓글 선생님은 이미 간호사로서 많은 숙제를 했네요.... 정말 죽음을 맞는 환자분들께 선생님이 큰 힘이 될것 같아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