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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 - 김대성 목사
오늘 경계인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경계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흔히 쓰는 의미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잘 조심해서 단속한다는 의미의 경계가 있고, 또 한 가지는 무엇과 무엇 그 사이를 경계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드린 경계인이라고 할 때 경계는 그 둘 사이의 경계를 말합니다.
그 둘 사이에 그어진 선을 경계선이라고 한다면 어떤 것 둘 사이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을 경계인이라고 합니다.
사전에는 경계인에 대해서 다른 말로 주변인 그렇게 돼 있습니다.
중심에 들어가지 않고 변두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주변인을 또 경계인 그렇게 같이 쓰는 말입니다.
이 경계인을 조금 더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행동 양식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을 경계인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 설교 제목으로 경계인이라고 하는 제목을 가져온 상당히 큰 동기 중에 하나는 신문의 경제인이라는 말이 몇 번 나왔습니다.
생각나십니까?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 철학자 송두율 씨가 2003년 4월 6일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남북 사이의 경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 사람 남한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 북한 사람도 아니고 여기에 그 한 기사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남한의 국가보안법에 걸려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또한 그는 북한과의 대화를 지지할지언정 북한의 국민 혹은 추종 세력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없음과 동시에 그가 살아가고 있는 독일의 완전한 성원이 될 수도 없다.
그야말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이념적으로는 북한과 남한 사이에요
위치로 볼 때는 독일과 한국 사이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에는 영적 경계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과 15절을 펴시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어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갈아사되 내가 내 행위를 아노니
내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지도 아니하도다.
내가 차든지 더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또 하나의 경계인이 있습니다.
참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영적인 경계인의 모습이 여기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이 하늘로부터 온 계시를 받아서 라오디게아 교회로 보낸 편지 가운데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모습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과 권면의 말씀을 가지고는 별도의 설교를 따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성경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영적인 경계인들에 대하여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 경계인은 하나님 편인가요 세상 편인가요? 국가에서도 국가에서도 경제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국 남한 사람이 되려면 전향을 하라는 것입니다.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경계에 있다고 해서 북한에서 송두율 씨를 북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한에서도 그가 전향하지 않으면 남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중간지대는 엄격히 말해서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0절에 경계인이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를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영적 경계인의 확실한 위치가 어딘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여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
경계인에 대하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해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간지대가 아닙니다. 중간지대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요, 예수님을 해치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교회 안에 많은 경제인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체를 다 분석하지 못했습니다만 이런저런 모양으로 분석해 보니까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경계인들 중에 한 다섯 부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 첫째는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 서 있는 경계인들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곧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다시 말하면 그 경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의 노예가 되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재물이 반대 개념인가요? 신앙과 재물은 원수지간인가요? 천만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과 인간의 삶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재물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재물을 목적으로 삼느냐 아니면 근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삶의 결과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이 말하는 마치 재물이 신앙과 반대인 것처럼 말씀하는 것은 재물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사는 사람들의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돈 버는 일에 지나치게 열중하면서 깊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재물을 얻을 기회가 있고 신앙을 성장시키는 기회가 있을 때에 무엇을 선택하고 있느냐 이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느냐 재물을 섬기고 있느냐를 결단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돈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 재물과 돈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재물에 대한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며 일만하게 뿌리라 돈 자체가 악의 뿌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의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자도 얼마든지 하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예외가 있습니다. 욥도 대단히 큰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겼습니다.
예수님께 자기의 새로 판 무덤을 내어준
아리마데 요셉도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진정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가난해도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 재물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의 편에 설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2. 두 번째,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살아가는 경제인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재미도 다 보고 교회가 주는 영적인 축복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이상적이지만 실현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춤도 좀 추러 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도박도 해가면서 진실하고 진지한 신앙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까?
못합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그렇게 지혜가 뛰어나고 아주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도 세상 재미에 빠지다가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오랜 세월 솔로몬은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하게 살았습니다.
그가 시작할 때 얼마나 겸손했고
얼마나 진실한 믿음을 가졌습니까? 그러나 세상 재미를 맛보다 보니까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져 버렸습니다.
쾌락에 빠져서 다행히 그가 인생 만년에 모든 인간의 그러한 쾌락을 추구하고 재미를 추구하는 삶이 헛된 것을 깊이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왔습니다만
그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세상 재미와 영적인 축복을 겸하여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그 두 사이에 경계에서 신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진리와 오류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신앙을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잘못된 교리 혹은 부분적인 오류에 빠져서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건 정말 큰 인류의 불행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잘못 믿을 수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그렇게 잘못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자기가 어떤 계기로 신앙을 시작했는데, 열심히 믿었는데, 한참 깊이 속으로 들어가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잘못되었더라 이것입니다.
참 놀라운 사실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우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어떤 신앙에 깊이 들어가 있으면
여러 가지 복잡하게 맺어진 인간의 관계 사슬 때문에 정리를 못하는 모습을 저는 정말 너무나 여러 번 많이 보아왔습니다.
진리와 부분적인 오류입니다. 사람이 완전한 오류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끌고 갈 때는 그럴 만한 그 도덕적 교지나
어떤 사람을 끌 만한 다듬어진 교리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끌려가는 것이지 그냥 오리터어리 속으로 사람이 빠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이 신앙적 경계인들은 진리와 부분적인 오류 사이에서 방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오류 사이의 경계인들이 있습니다.
4. 네 번째 믿음과 불신 사이의 경계인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완전히 불신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과 불신 사이의 경계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온전히 기울어지지도 않고 또 하나님 반대편으로 완전히 기울어지지도 않고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설명은 제가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5. 다섯 번째로 지식과 순종 사이의 경계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100% 믿습니다.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좋은 거 다 인정하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선뜻 순종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경제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는 못하고 그 사이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더 다른 표현으로 하면 지식과 습관 사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는데 자기의 생활 습관은 저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옳은 것을 압니다. 그 지식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있습니다. 며칠 전에 이 식당에서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당뇨가 진행되고 있는 환자였습니다. 근데 뭐 이렇게 손을 펴면서 얘기를 하는데 이 속주머니 속에 담배곽이 들었어요.
이제 모르는 척하고 이게 지금 당뇨하고 씨름을 하시고 이렇게 식사를 좀 골라서 드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술 담배는 하십니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술은 끊었는데 담배는 하루에 한 갑 반을 피운대요.
글쎄 그 당뇨에 안 좋을 텐데요. 아무래도 담배가 예 안답니다.
당뇨에 담배 안 좋은 건 알지만 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습관 사이에 지식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계인이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경계인으로 머물러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경계인이라는 말을 이제
한번 찾아봤더니 여기 이렇게 정의가 돼 있습니다.
오랫동안 소속되었던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옮겼을 때에 원래의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을 금방 버릴 수 없고 또한 새로운 집단에도 충분히 적응되지 않는 사람이다.
신체적 성질, 언어, 의복, 습관 등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가 하나님을 믿는 집단으로 옮겼을 때에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의 그 습관이나 사고 방식이 좀처럼 새로운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저쪽으로 가고 싶은데 노력을 많이 해도 좀처럼 안 되거나 그 속도가 더딘 경우가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 신앙인들이 또 잘못된 신앙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집단 안으로 들어오면 분명히 상당한 그 생활 습관의 갭을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에 어떠한 결단을 내리느냐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외국인들이 지금 한국에 와서 노동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있죠 그 사람들이 종종 보면은 한국말을 굉장히 유창하게 합니다.
1년밖에 안 됐는데도 유창하게 한국말 하는 사람이 있고
3년이나 됐는데도 한국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지금 여기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앞에서 그 외국 사람이라고 함부로 욕하시면 안 됩니다.
그 사람들이 어떨 때는 다 알아들어요.
미국에서 한국인 몇 사람이 차를 타고 가다가 아침에 그 교통에 걸렸어요.
흑인 순경이 경찰이 와가지고 이제
운전석에 와서 이제 그 운전석하고 대화를 하는데 그 옆에 앉았던 사람이 이 사람은 흑인이니까 한국말로 아침부터 재수 없게 흑인한테 걸렸어 그랬어요.
그랬더니 흑인이 갑자기 한국말을 하는 거예요.
나하고 결혼한 여자가 한국 사람이라 내가 당신을 오늘 봐주려고 했는데 못 봐주겠다고 어쨌든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지만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냥 자연적으로 우연이 됐을까요? 아닙니다.
남보다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뭘 배우려고? 한국말을 배우려고 그래서 빨리 한국에 동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찾아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하루속히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하늘의 습관에 길들여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의복이나 우리의 언어나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우리의 모든 것들이 신속하게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지고 목표를 세우고 부지런히 연습하라고 성경 말씀은 권면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7절, 8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말씀하시기를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십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체의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정기적으로 하고 뭐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서 애쓰면 분명히 좋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몸에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하시기를 경건은 다시 말해서 경건하게 살기를 연습하는 것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의 약속이 있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따라서 경건하게 깨끗하게 바르게 살기를 연습하는 일은 장래에만 보장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세에도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손해가 아닙니다. 마음을 마음을 좀 단단히 가지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결단을 내리시고 순종하고 연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금생에 내세에 놀라운 약속과 축복이 있게 될 것입니다.
경기도 개성 북한에도 경기도가 약간 들어있습니다.
아시죠? 경기도 개성
그래서 북쪽으로 한 16km를 올라가면 천마산이라는 산이 있답니다.
못 가봤기 때문에 그냥 기록된 것 가지고 전합니다.
근데 그 천마상 아래 노래에도 나오는 박연 폭포가 있다고 합니다.
박연폭포. 근데 그 박연폭포로 가는 길에 희한한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개의 낭떠러지 두 개의 절벽이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박연폭포를 가려면 이쪽 절벽 끝에서 저쪽 절벽 끝으로 건너 뛰어 가는 것입니다.
근데 그 사이가 1m라고 합니다. 1m.
사람이 1m 건너뛸 수 있어요 없어요? 충분히 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박연폭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그 1m의 사이를 건너뛰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래요? 그 1m를 건너뛰다가 밑으로 떨어지면 큰일 나거든요.
결단만 내리면 건너뛸 수 있는 거리인데 겁이 나 가지고 거길을 못 건넌다는 것입니다.
떨어질까 봐 많은 믿음의 신앙의 경제인들의 상태가 그런 것입니다.
분명히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시작하면 할 수 있는데 요거 하다 보면은 집안이 어려워질까 봐 이거 하다 보면 친구들에게 욕먹을까 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는 도중에 앞에 있는 그 건너뛰는 그 발판된 바위의 이름이 뭔가 하면은 결단의 바위라고 합니다.
결단의 바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단의 바위에 서서 그 바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결단을 내리시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안전하게 지도해 주실 테니까 염려하지 마시고 결단을 내리셔서 경건의 삶을 연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대체로 세상살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머리와 뼈와 근육의 힘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그런데 신앙에 대해서는 별로 힘을 쓰지 않습니다.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세상 사는 쪽의 근육은 발달돼 있는데 신앙을 하는 쪽의 근육은 허약한 것입니다.
운동 선수들의
그 근육은 보통 사람들의 근육보다 조금 발달돼 있습니다.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많이 발달돼 있습니다.
종목에 따라서 발달하는 근육의 부위가 다 다르겠죠.
축구 선수나 육상 선수들은 주로 어디가 발달하겠습니까? 다리 근육이 발달합니다.
수영 선수는 뭐 다리도 물론 쓰지만
주로 이 어깨나 이 상체의 근육이 발달합니다.
거기를 많이 쓰기 때문에 발달한 것입니다.
탁구 선수들은 아마 그 순발력, 판단력, 이 손목에 어떤 그 근육들이 발달할 것입니다.
경계인, 신앙의 경제인들이 세상살이에 익숙한 이유는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세상살이에 바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관심과 기능이 세상적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딴에는 중간쯤 있다고 생각되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기 엘렌와이씨 아들 생일에 보내는 편지에 이런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증언보감 1번 242페이지에 그 편지 내용 중에 이런 것이 나옵니다.
절반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절반은 세상 사람이 되는 것은 너를 100분의 1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 그 나머지는 세상 사람이 되게 할 것이다.
자기는 중간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상은 99%는 세상이고 1% 정도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과 세상의 중간쯤에 걸쳐 있는 것은 거의 세상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적 난장이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을
그들의 삶의 목적으로 삼으려는 확고한 뜻과 결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경건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외국어처럼 들립니다.
남의 나라 말 같은 것입니다. 경건이고 그건 뭐 나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 단어라 경험적 지식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증언보감 1번 242페이지에 있는 말씀을 몇 구절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영적 삶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는 영적 힘이 없고 나는 성령을 기뻐하지 않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부르짖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적으로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시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영적인 힘이 없고
어떤 성령의 역사에 별로 그렇게 마음이 반응을 하지 않는데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한탄입니까 저의 한탄입니까 우리의 한탄입니까? 우리가 대부분 그렇게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근데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 사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활발해지고
말이 많아지며 유창하게까지 된다. 그러한 자들이 모임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아라.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많이 한다.
무슨 뜻입니까? 기도하라고 하면은 아이고 다 죽어갑니다.
아이고 나 기도 못해요. 또 앞에 나와서 기도하면 그냥 개미 같은 소리로 다 죽어가요.
무슨 겸손한 것도 아니에요. 그게 그냥 주눅이 들어버려요.
기도하라고 그러면
그런데 뭐 세상 얘기하라고 그러면 힘이 펄펄 나고 아주 박력 있고 아주 유식하고 할 말이 많습니다.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 사물에 있어서 강건하고 현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하다.
그들은 경건의 비밀을 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의 언어를 모르며 그들의 마음을 하늘의 노래를 부르도록 준비시키거나 하늘에서 모든 자들의 주목을 끌 영적 예배에 대하여 기뻐하도록 준비시키지 아니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좀 더 영적인 사물에 경건을 연습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움직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아주 다급하게 우리에게 이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끝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성령의 음성에 대하여 귀를 막고 우리의 영적인 삶이 경건의 연습으로 돌아서지 아니하면 마침내 그동안 계속해서 우리에게 자극하시고 말씀하시던 성령의 역사는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계속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비추어 주시는 빛을 따르는 일을 거절하거나 태만하게 되면 마침내 그것이 흑암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상태가 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이 없고, 어떤 마음의 자극을 봐도 도무지 말이나 행동에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른 생각만 머리에 꽉
들어와 있고 그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성령이 거두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빛이 흑암으로 바뀌기 전에 속히 방향을 바꾸셔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가면
그 세계에서 가장 높은 cn 타워가 있습니다.
553m입니다. 탑 높이가 굉장히 높습니다.
근데 이렇게 옆으로 돌출해 나온 그 전망대 바닥 한쪽에 유리가 깔려져 있어요.
사방 한 3~4m 정도의 유리가 깔려 있습니다.
그 유리에서 보면 밑에 553m 밑에 바닥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유리를 굉장히 튼튼한 유리로 만들어 놨습니다.
그거 왜 만들어 놨는지 아십니까? 용기 있는 사람은 거기 한번 올라가 보라는 거예요.
여러분 거기 올라가실 수 있어요 못 올라가십니까? 가봐야 알죠.
그런데 거기 올라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전부 다
콘크리트 바닥에다 이렇게 발을 딛고 내려다보지 그 유리바닥에 올라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거기 올라가려면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유리가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시험과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깨끗하고 순수한 정말 유리처럼 맑은 정결한 하나님의 말씀 절대로 깨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에 올라서도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깨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쉽게 약속을 파괴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절대로 안 깨집니다.
마음 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올라서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선뜻 올라서지 못하고 주저하는 사람들, 신앙의 경계인들을 향하여 엘리야가 호소한 말씀이 바로
열왕기상 18장 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바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이 끝의 말씀이 참 신비롭습니다. 이것을 택하든지 저것을 택하든지 하라 하니까 백성들이 대답을 안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대답을 안 하시겠습니까 꺼리시겠습니까? 여러분, 어느 때까지 이렇게 진리의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 경계인으로 사시겠습니까?
어느 때까지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사시겠습니까? 어느 때까지 영적 난장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살이에는 능숙하고 신앙생활에 서투른 삶을 사시겠습니까? 좀 더 진리의 편에, 하나님의 편에 확고하게 서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백성이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여러분,
이 우리의 지혜로운 하루하루의 순간의 결단과 선택이 마지막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영원한 갈림길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하게 서서 결단을 내리면 정말 어마어마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삶이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여전히 경계인으로 남아 있다면, 주님이 오시는 그날, 그렇게 구제하기 위해서, 좀 더 보존하기 위해서 애쓰고 아끼던 생명은 영원히 끝나버리는 겁니다.
지혜롭게 생각하시고 판단하시고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들께서
지혜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경계인으로 머물러 살 것이 아니라, 한 발 들여놓고 더 중심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하게 서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