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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시조, 호흡하듯이 삶을 담는 그윽한 운치
서연정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회장
3년 임기 회장직을 시작하는 해입니다. 협회 초창기(3대 노창수 회장)에 사무국장을 맡기는 했으나 이후로 여러 해 동안 저는 협회 바깥에서 회비나 내며 지냈습니다. 갑자기 중책을 맡아 시청, 세무서에 대표를 변경하는 데서부터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김계룡 선생님, 이한성 선생님, 노창수 선생님, 김강호 선생님, 조연탁 선생님, 백학근 선생님, 박정호 선생님, 유헌 선생님, 전임 회장님들께 먼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김계룡 선생님과 조연탁 선생님께서는 하늘의 별이 되셨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시조단의 담론을 경청하고자 올해 전국에서 열린 세 곳 세미나에 참가하였습니다. 영랑문학제 학술심포지엄(4월 14일, 강진시문학파기념관)의 주제는 ‘시문학파 시인들의 시세계와 한국의 전통시’로, 제2주제가 ‘시문학파에 나타난 한국의 정형시, 시조’입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학술세미나(8월 11일, 동국대학교 만해마을 설악관)는 ‘출발·세계로 도약하는 K시조의 전망’이라는 상당히 거창한 주제이고, 오늘의시조시인회의의 학술세미나(9월 16일, 수원 해든호텔하이엔드)는 ‘현대시조의 여민정신과 시대적 통찰’이 그 주제입니다. 논자가 다름에도 향하는 지평은 엇비슷하였습니다. 시조는 우리 전통 시문학의 출발지이며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앞선 자리에 세움이 타당하다는 인식, 자유시 속에 면면히 흐르는 시조 율격을 접하면서는 그것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조의 가장 큰 미덕은 역시 익숙한 안정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습니다.
요즘은 낯설고 새로운 것이 매일 출현합니다. 세계는 더 빠르게 더 넓게 스마트폰을 매개로 우리와 접속합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눈에 안 보이는 건 공기 정도였는데, 지금은 돈도 공간도 사물도 동식물도 가상세계에 있습니다. 그것들을 영위하는 인간 형체를 인물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문화는 서로 충돌하며 급진적인 경주를 시작합니다.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이들은 난기류를 만난 듯 당황합니다. 사회에 팽배한 이 불편감은 고립감으로 점차 부풀어 어느 순간 뻥, 터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정서적 안정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시조는 흥얼거림에 최적입니다. 천년을 이어온 숨결은 부드러운 걸음걸이와 호흡 속에 절로 스며들기에 시조는 호흡하듯이 자연스레 우리 삶을 담아냅니다. 큰 그릇 작은 그릇에 각각 생각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무엇이든 그릇에 담기게 마련입니다. 쉬운 걸음걸이를 따라 써 놓고 보면 그것은 둘레에 운치가 그윽한 그릇이 됩니다. 그런데 자꾸 그것을 형식이라고 말하니 오히려 시조가 어려워집니다. 창작에 열성을 다하는 것 못지않게 시조를 알리는 데에도 힘써야 할 이유입니다. 모르면 어려운 게 당연하지요. 우리 모두 시조를 읽게 하고 짓게 하는 프로그램을 늘리는 데에 힘써야겠습니다. 평생교육원, 방과후교실, 복지센터, 취미교실, 어디에서든 문화교양으로서 시조강좌가 개설되면 좋겠습니다.
올해 미진함은 새해 소망으로 넘기며 협회와 함께 움직여주신 많은 분들게 다시 한번 존경의 인사를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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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 2023 전국빛고을학생시조문학제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성장기에 겪는 고민과 의지를
시조의 율격에 담아내
전국빛고을학생시조문학제가 전국 규모의 학생 공모전인 만큼, 2023년에도 수준 높은 작품들이 응모되었다. 심사위원들은 먼저, 초등학생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고무되었다. 이에 비해 중, 고등부의 작품들은 성장기에 겪는 고민과 의지가 잘 나타나 자아성숙의 일면을 찾아보게 하였다. 응모작에 따라 심사위원을 배분하여 각급 학교의 특색에 맞추어 심사가 진행되었다.
먼저 초등부에선, 아동기 특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더하여 율격을 잘 지킨 글들이 주목을 받았다. 시조는 형식을 가진 시인데, 이 형식은 자연스러운 우리말의 리듬감을 잘 살리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완성할 수 있다. 교육감상은 받은 「엄마는 봄」, 「마음 크림빵」은 시를 쓰는 방법 면에서는 매우 다르지만, 자기만의 특기를 살려 완성도 높은 시조를 썼다. 「엄마는 봄」에서는 “엄마”를 껴안을 때의 따뜻한 느낌을 “봄”에 비유한 글로, 시조의 형식이나 표현 면에서 간결하면서도 나무랄 데가 없는 수작이다. 이에 비해 「마음 크림빵」은 천진난만한 감수성과 발랄한 상상력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마음빵”은 졸아들기도 하고 부풀어 커지기도 하는 “내 마음”에 대한 비유이다. “마음 빵집”이라는 판타지적 가게를 오픈한 이 어린이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최우수상을 받은 「눈」은 눈 온 날, 눈싸움을 하는 어린이들과 그 놀이의 즐거움을 꿈속에까지 가져가는 유희충동을 시조의 율격으로 잘 풀어냈다. 우수상을 받은 「송아지와 호랑이 이야기」는 3학년 학생의 글인데, 전래동화의 이야기 구조를 호랑이와 송아지에 대입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송아지와 어미소를 보여준다. 시조의 형식 내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동시조를 쓰는 시조시인들이 오히려 참고삼아 배워야 할 대목이다. 장려상을 받은 작품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 많았다.
중등부에 응모된 작품은 비교적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청소년기에 진입한 만큼, 자아와 관계를 맺는 대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그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이 중학생의 시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교육감상을 받은, 「복숭아」, 「야생화」는 대상에 대한 주시(注視)의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먼저 「복숭아」는 “태양을 등에 지고 집으로 달려가”는 고단함 속에서도 “복숭아”로 비유되는 회복의 시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중학생 가진 수고의 일면을 드러낸다. 「야생화」는 자아를 벗어나 “당신”이라는 외적인 존재에 눈을 뜨고 있다. 이때 “야생화”는, “꽃 하나 꺾어 주고 날 떠난 당신”을 향한 ‘나’의 상태를 나타낸다. 물론 이때의 “떠남”은 환상으로서 가정된 미래이다. 이와 같은 환상에서 “당신”에 대한 추억이 소중한 만큼 ‘나’인 야생화는 작고도 조심스럽다. 최우수상을 받은 「나만의 색」과 우수상을 받은 「물의 나라」는 자아성찰의 시간들을 거쳐,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향한 간곡한 소망을 펼쳐 보인다.
고등부에서는 응모된 작품의 편수는 많으나 몇몇 학교에 집중되어 있다. 그만큼 대학 입시 준비로 숨 돌릴 틈이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응모 작품의 대다수는, 자아의 껍질을 벗고 사회적 삶의 맥락을 추구하는 내용이 두드러진다. 초중등부와 매우 구별되는 장면이다. 이를 해석하면, 고등학생에 이르러 자립적 개체로 성장한 자아를 관찰하고 객관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교육감상을 받은 「연필」, 「꽃」은 공통적으로 외적 대상인 “그대”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자아성찰과 함께 존재론적 각성을 보여준다. 먼저 「연필」에서 내 몸은 “연필”로 은유된다. “얇게 깎인 줄기와/ 가득 새겨진 가시들”은 자기점검의 노력을 보여주며, 그어진 “선(線)”은 ‘삶의 과정’으로서의 “길”을 함축한다. “그래도/ 길을 갑니다.”와 같은 의지 표명은, 성장기에 직면하게 되는 사회적 추구를 나타낸다. 이에 비해 「꽃」에서는 대상 세계를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각자의 존재는 쓸쓸하지만, 이와 동시에 각각의 개체는 “꽃”과 같이 아름답고 소중하다. 이와 같은 시선으로 쓸쓸한 꽃들을 아름답게 피워 보이는 것이 이 작품이 가진 장점이다. “어두운 달빛 아래에도 함께 피는 꽃이네”와 같은 발상을 통해 “그대” 있음으로 “나” 또한 밝아지는 것이다.
이상으로 각급 학교별 투고의 경향과 성과들을 정리하였다. 응모작이 아주 풍성한 편은 아니었지만 입상작들을 일람해 보았을 때, 두각을 나타낸 이들 작품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지도해 주신 선생님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입상을 하지 못한 학생들의 경우에는 아쉽지만 내년에 더 큰 선물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겠다는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가나다순) : 곽호연, 김강호, 박정호, 염창권(대표집필), 유헌, 정혜숙, 최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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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켜지는 상자
- 염창권론
이 송 희
1.
염창권 시인은 존재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면서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 과거와 현재, 무형無形과 유형有形의 간극을 좁히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다. 그렇게 서로의 경계를 허물면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생명을 하나로 끌어안으며 일상의 안녕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갈등과 반목을 줄이고 평화와 안정을 찾아주고자 끊임없이 내·외적으로 소통을 시도한다. 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어디서도 답(길)을 발견하지 못한 까닭으로 여전히 계속 번뇌하며 헤매는 중이다. 인간은 자기 생존을 위해 경계를 짓고 살아가지만 진짜 생존을 위한다면 경계를 허무는 것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경계를 짓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간 실존을 고민하면서 지속적으로 생존을 위한 출구를 찾아가는 것이 염창권 시인이 선택한 길이다.
염창권 시인의 시에 주로 깔려 있는 죽음의 이미지와 어두운 색채는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죽음을 잊지 마라’는 의미의 ‘Memento mori’라는 말에서 의미를 구할 수 있겠다. 늘 자신의 죽음을 잊지 않는다면, 지금 여기에서 내가 어떤 언행을 취해야 하는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당신도 나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상기하고 있다면 삶에 위태로움은 줄어든다. 염창권 시인은 이러한 실존의 깨우침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듯하다. 죽음을 떠올리는 일은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니 희망과 꿈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명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역설적 깨우침이다.
염창권의 시는 죽음을 상기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반대의 극성極性을 끌어안아야 스스로 성장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가능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차가움과 뜨거움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응축과 발산도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반대되는 속성을 품지 못해 어느 한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생명은 지속될 수 없고, 얼마지 않아 소멸하고 만다. 그러나 이 둘이 조화를 갖춘다면 생명은 오래갈 수 있다. 이 포용과 소통의 미덕을 추구하는 지점에 시인의 시가 놓인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포용을 추구’할 때 우리의 삶은 좀 더 강건해지고 평화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염창권 시인의 시가 다소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미지 속에서도 매력이 있는 이유는 인간 실존의 고민과 성찰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의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을 이미지화하는 탁월한 감각과 변화하는 삶과 실존에 대한 고민의 과정은 오후의 시차(책만드는집, 2022)의 ‘시인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삶의 형상들이 달라져 간다, // 사유 혹은 세계는/ 모습을 바꾸고, 감추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술래처럼/ 이곳저곳 찾아다녔는지 모르겠다, // 무엇을 형성할 수 있을지는/ 언제나, / 미결인 채로 남아 있다." - 시인의 말
2.
가을은 喪中이었다
검은 구덩이 새로 패였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애썼다, 말 건네듯
저녁은 눈두덩이 부어 한참을 서 있었다.
- 「하루」 전문
“가을은 喪中”이라는 말속에는 누군가를 떠나보낸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겨울, 봄, 여름을 다 보내고 가을을 맞는 주체는 새로 패인 검은 구덩이 앞에 서 있다. 주체가 들어갈 수 있는 구덩이일 수도 있고, 떠난 그 누군가가 들어갈 수 있는 구덩이일 수도 있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애썼다”고 말 건네듯 “저녁은 눈두덩이 부어 한참을 서 있”다. 모든 계절은 하루하루가 연결되어 흘러간다. 즉 이 하루에는 사계절이 모두 들어 있다. 하루살이의 평생을 보고 있는 것처럼 주체는 하루를 통해 가을을 읽고 가을을 통해 겨울과 봄, 여름을 읽는다. 달리 생각하면, 자연은 ‘가을 저녁’이라는 소멸의 시간을 통해, 뭇 숨탄것들이 지난 봄·여름 동안 열심히 잘 살아와서 이제 동면冬眠을 준비하거나 땅에 묻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대견함과 연민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이제 가을이 되고, 저녁이 되면 다음 해 봄을 기다리며 동면을 하거나 땅에 묻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봄의 재생과 부활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봄의 부활과 재생을 위해 기꺼이 가을의 숙살지기肅殺之氣를 감내해야 하는 뭇 생명에 대한 애수와 연민을 드러낸다.
복도에 서 있었다, 언뜻 말을 걸어왔으나
형형한 눈빛은 등 뒤에서 꺼졌다
늙어서 밝아진 것일까, 그림자가 없었다
발굴을 기다리는 소문들이 모여들어
눌어붙은 그의 등을 떠메고 나올 때
지상의 탄착점에는 구덩이가 파였다
펴지지 않는 손과 입을 다문 말들이
만개한 허공에서
복도를 빠져나온, 질문이 흘러내린다
뒤를 읽는 눈이 있다
어수선한 전깃줄 밑 친친 감긴 시선들
잠시만 틈을 주면 존재가 꺼질까 봐,
결말을 유보시킨 채 서류함에 넣어둔다.
- 「그의 시선들」 전문
주체는 복도에서 낯선 시선들을 느낀다. “언뜻 말을 걸어”오는 듯했으나 그 “형형한 눈빛은 등 뒤에서 꺼”지고 만다. 스치듯 지나간 시선들에는 무언가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나를 거쳐 가는 느낌이 남아 있다. 정보가 제시되어 있진 않지만 아마도 그들은 억울하게 죽은 존재일 수 있다.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못하고 외압과 기만으로 죽은 존재라면 누군가 은폐된 진실을 밝혀주길 바랄 것이다. “발굴을 기다리는 소문들이 모여들어” “눌어붙은 그의 등을 떠메고 나”오자 “지상의 탄착점에” 구덩이가 파였다. 구덩이는 무덤을 표상하는 것으로 누군가가 사건을 은폐 혹은 묻어버리려고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시위 도중 건물로 숨어 들다가 총을 맞은 것일까? 주체는 죽은 자의 원혼이 있는 장소를 찾아간 듯하다. 죽은 자의 원혼이 등 돌리는 주체를 향해 원한을 풀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뒤를 읽는 눈이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다. 복도는 미제의 사건을 품고 있다.
주체는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건의 정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쉽게 결말을 내릴 수도 없는 이유는 증거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입을 다문 말들이 만개하고, 질문은 흘러내려 버리고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통할 수 없는 각기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눈빛도 꺼졌고 그림자도 없는 데다 “눌어붙은 그의 등”이라 했으니 이미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죽은 자는 무언가에 대한 원한이 맺혔다. “펴지지 않는 손과 입을 다문 말들”이 만개한 허공에는 말하지 못한 날들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시선’이 아닌 ‘그의 시선들’이라는 표현도 중요하다. 그의 시선은 어느 한 군데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양하게 열려 있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다양한 방면으로 바라보면서 어떤 문제를 제기했으나 그 시선들은 “어수선한 전깃줄 밑”에 친친 감겨 있다. “잠시만 틈을 주면 존재가 꺼질까 봐,” 걱정이 된 주체는 “결말을 유보 시킨 채 서류함에 넣어” 두기로 한다. 우리의 역사에는 미제의 사건들이 즐비하지만 무작정 덮거나 서둘러 결말을 맺기에는 안타까운 사건들이 너무 많다. 미제의 사건과 억울한 영혼들을 대하는 우리의 관심과 기억이 필요할 때다.
한밤의 거리에는, 유령이 지나간 듯
미열의 별빛들이 우수수 떨고 있다
감정이 사라진 뒤에야
몸이 따라 죽는다
기억을 꺼내버린 유기체의 원소들이
연료통 속으로 천천히 흘러들 때,
조금씩 부스러지며 꺼져가는 감정선!
은하계 너머에서 몸을 잃은 여행자는
시간을 앓다가 잠시 먼 곳을 바라본다,
나, 라는 통속이 지워진, 영원이
또
다녀갔다.
- 「주유소 불빛 아래서」 전문
감정이 사라지면 더 이상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닌 것과 같다. “몸이 따라 죽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기억을 꺼내버린 유기체의 원소”는 기억과 의식이 사라진 상태의 주검이 만들어낸 연료이다. 영원(연료)을 태워서 육체라는 자동차가 움직인다. “나, 라는 통속이 지워진, 영원”은 길고 멀리, 또 오래 지속된 것으로 제한이 없는 영속성을 띤다. 주유소에는 늘 연료를 채우기 위해 수많은 차들이 오고 간다. “영원(연료)”은 계속 몸을 바꾸어 가며, 삶과 죽음을 무한히 반복한다. 주유소에서 연료(영원)를 주유한 자동차는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자동차는 연료가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쇠붙이일 뿐이다. 다시 살아나려면 ‘영원’이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한다. 또한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감정(나, 통속)이 있어야 한다. 그 차를 움직이려면 연료(원소)가 필요하다. 감정, 기억, 의식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몸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고, 자동차에 기름을 계속해서 넣어야 하는 것이다. 영원은 이렇게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며 존재한다. 우리도 기억과 감정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삶의 모든 경험, 체험을 지속시키는 것이 내 존재를(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앞세우는 날들이 잦아졌다
캄캄한 지층으로 몰려가는 가랑잎들
골목엔 눈자위 검은 등불 하나 켜진다
잎 다 지운 느티나무 그 밑둥에 기대면
쓸쓸히 저물어간 이번 생의 전언이듯
어둔 밤 몸 뒤척이는 강물소리 들린다
몸 아픈 것들이 짚더미에 불 지피며
뚜렷이 드러난 제 갈비뼈 만져볼 때
맨발로 걷는 하늘엔 그믐달이 돋는다
젖 물릴 듯 다가오는 이 무형의 느낌은
흰 손으로 덥석 안아 날 데려갈 그것은
아마도, 오기로 하면 이맘쯤일 것이다.
- 「11월」 전문
그림자는 ‘나’라는 실체로 인해 빛이 가려진 영역에 머물며 어둠 속에 감춰진 존재이다. 사회적인 역할이나 지위에서 나의 ‘억눌리고 가려진 욕망’의 측면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주체는 이 “그림자를 앞세우는 날들이 잦아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림자는 해가 질 무렵 가장 길어지는데, 이는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잎이 무성할 때는 나뭇가지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잎이 다 지면 나목의 속살, 즉 나무의 본체가 다 드러난다. 어쩌면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캄캄한 지층으로 몰려가는 가랑잎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세계로 넘어가는 존재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다. 사라져 가는 것, 죽어가는 것,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가는 것을 보며 주체는 무엇을 느낀 것일까? 이 시의 배경인 11월은 절기상 입동立冬이 있는 달로서, 겨울로 들어서는 문턱으로 ‘화려한 세속’과 멀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화려한 5월과 대척점에 있는 11월은 그래서 처량하고 애잔한 느낌이 있다.
또한 11월은 모든 것이 최대한 움츠리고 감춰지는, 이별의 계절이다. 잎이 다 떨어지고 나무는 나목이 되며, 차가운 기운이 대기를 감싸면서 활동성이 떨어지고 에너지가 점점 땅속으로 응축되어가는 시기다. 이별을 준비하고 갈무리하는 시기이지만 꿈을 꾸는 계절이기도 하다. 미래를 꿈꾸는, 다시 봄을 그리는 11월은, 그리하여 충전과 재생의 시간이다. 겨울은 봄을 준비한다. “젖 물릴 듯 다가오는 이 무형의 느낌”이 드는 것은 생명의 기운을 거둬들이고 저장한 후 다시 재생과 부활의 길목에 들어서는 준비과정이기 때문이다. 겨울은 종자種子를 잘 품고 길러서 봄의 탄생을 예비한다. “흰 손으로 덥석 안아 날 데려갈 그것은” “아마도, 오기로 하면 이맘쯤일 것이”라고 주체는 말한다. 날 데려가지 않으면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없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세계로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3.
널 볼까 봐,
얼른 계단 밑으로 내려왔지
상처받은 내 얼굴을 조심하지 않도록
감정이 물렁거려서 숨을 곳이 필요해
수년째 공사 중인, 걸었던 길 아래
어둠의 긴 부도체를 통과하는 쇠바퀴처럼
마음이 달려가다 말고 주저앉은 이곳에서
허공을 내지르는 고압의 노을빛이
슬픔을 끌어당겨 어둠의 구멍을 뚫네
외눈의 화인 자국이 몸 곳곳에 새겨지네,
몸이 몸을 떠날 때의, 절연된 느낌처럼
쇠판을 깔아 덮은 그 내면의 허공을 딛고
누군가 떨어져 걷겠지,
수치심을 꺼낼까 봐
- 「복공판」 전문
주체는 “널 볼까 봐,/ 얼른 계단 밑으로 내려왔”다. “상처받은 내 얼굴을 조심하지 않도록”
“감정이 물렁거려서 숨을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복공판 아래는 무언가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한참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어 복공판으로 감춘다. 주체가 지하로 내려간 이유는 “감정이 물렁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다. ‘너’는 복공판 위를 자주 다녀가는 누군가로, 주체가 상처를 들키고 싶지 않은 존재일 것으로 짐작된다. 주체는 복공판으로 가린 길 위를 마음껏 지나가라고 한다. 복공판 아래에는 “허공을 내지르는 고압의 노을빛이” “슬픔을 끌어당겨 어둠의 구멍을 뚫”는 과정이 있고, 그로 인해 “외눈의 화인 자국이 몸 곳곳에 새겨”지는 상황이 펼쳐진다.
외눈의 화인 자국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상징한다. 복공판 위로 차들이 지나가면 그만큼 압력을 받게 되는데, 아무리 감춰도 내면의 상처는 통증을 유발하여 아픔이 된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복공판 아래의 빈 작업 공간에는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몸이 몸을 떠날 때의, 절연된 느낌처럼/ 쇠판을 깔아 덮은 그 내면의 허공을 딛고” 떨어져 걷는 이유는 수치심 때문이다. 복공판처럼 내면의 상처를 감추고 가면을 쓴 채 사람들은 살아간다. “외눈에 화인 자국” 등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처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감추고 사니 그동안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고 서로의 감정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품은 작품이 아닐까.
창가에 선
그는 한때 니체학회 멤버였다
파이프라인이 멀리서 기억을 끌어올 때
뜨거운 내연성 피가 점화되어 타올랐다
스패너로 조여드는 생애의 관절 따라
물색없는 소리들만 지하층을 떠도는 날
배기통 그슬린 온기에 젖은 몸을 말린다
회귀의 못을 박듯 구들 위에 몸 눕히면
풋잠 위를 떠다니는 제어 못한 거품들
철 지난 위로의 말이
외벽에서 펄럭인다.
- 「보일러공」 전문
보일러공은 집 안에 훈풍을 불어넣는 존재인데, 시인은 보일러공이 한때 니체 학회 멤버였다고 말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초인적인 역량을 품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신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극복해 나가는 삶을 지향했던 니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도그마Dogma나 이념에도 얽매지 않고 자유롭게 인간의 이상을 실현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니체는 원했다. 보일러 온수관 호스는 방마다 깔려 있는데 이 배관을 통해서 뜨거운 물이 흐르면 바닥도 따뜻해진다. 그리고 보일러가 돌아가면 배기통을 통해 연무가 나간다. “파이프라인이 멀리서” 끌어오는 기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뜨거운 내연성 피가 점화되어 타”오른다. “물색없는 소리들만 지하층을 떠도는 날/ 배기통 그슬린 온기에 젖은 몸을 말”리는 주체는 “철 지난 위로의 말이”라도 “따뜻하게 해주니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4.
염창권 시인은 평론집 몽유의 시학(아꿈, 2022)을 내면서 제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사회적 유토피아 혹은 아름다움의 유토피아, 심지어는 빛나는 모습의 갈망조차도 낮꿈이라는 안식처에 머물고 있을 따름”이라고. 진정한 유토피아는 우리가 꾸는 꿈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우리 시대의 시적 논리와 시인들’에 대한 상징적 기표로 ‘몽유(夢遊)’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우리가 지향하는 유토피아가 현실에 실재하지 않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는 ‘몽유의 시간’에 오롯이 머물러 있어야 덜 고통스러운 것일까?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는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고, 현실은 늘 “낡고 병든 몸”(「세면대」)과 지친 일상을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단테가 신곡에서 지옥을 가장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천국의 모습을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그린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이승에서는 천국을 쉽게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은 음과 양으로 나뉘어 공존하면서도 대립하는 세계로, 절대적인 만족과 안정, 평화를 추구하기가 어렵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현실에서 경험한 지옥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의 소설에 고스란히 담았다. 현실의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주체들이 힘들게 극복해가는, 고단하고 외로운 길에 시인은 늘 함께 한다.
염창권 시인이 보듬는 주체들은 결핍과 부재로 얼룩진 존재들이다. 이들을 대하는 시인의 자세는 “대상을 존중하고 충분히 이해하여야 하며, 표면적인 이해를 넘어 심층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의 시론에도 담겨 있다. 그의 말처럼, 이러한 추구를 통해 “대상과 합치하였을 때 대상에 대하여 새로운 언어로 명명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그는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탐구 정신으로 눈앞을 가로질러 가는 존재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려 애쓴다. 그러면서 시인은 여전히 “슬픔을 켜 놓은 상자 안에서” 누군가에게 “안 보이는 말을 공중에 쏟는”(「공중전화」) 또 하나의 그리운 존재가 된다.
--이송희 약력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열린시학 등에 글을 쓰며 평론 활동, 고산문학대상 등 수상. 시집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외 4권, 평론집 유목의 서사 외 4권,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그 외 저서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이 있음,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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