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세계 문화유산 조선왕릉, 파주 삼릉 이야기입니다.
위치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에 있습니다.
파주삼릉에는 3 기의 능이 있습니다.
① 공릉: 8대 예종의 장순왕후
② 순릉: 9대 성종의 공혜왕후
③ 영릉: 21대 영조의 효창세자, 추존 진종과 효순왕후
해설사는 파주 시청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해설시간은 10:30/13:30/15:00입니다.
1. 공릉(恭陵)
능의 특징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한 번 꺾여 있다.
능보다 원 형식입니다.
능의 역사
공릉은 조선 8대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 한씨의 능입니다. 1461년(세조 7) 장순왕후가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1462년(세조 8)에 파주 보시동(普施洞)인 현재의 자리에 왕세자빈의 묘로 조성하여 세조는 며느리에게 ‘장순'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순빈묘(章順嬪墓)라 불렀습니다.
1470년(성종 1) 장순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공릉이라 하였습니다.
능의 구성
능의 구성은 진입 및 제향공간에 홍살문, 판위, 향로 및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있습니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 각 1쌍만 배치하였습니다.
망주석을 생략하고 봉분을 크게 하였습니다.
문석인입니다.
장순왕후(章順王后)1445~1461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 한씨는 본관이 청주인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셋째 딸로 태어나 5살 연하인 예종과 결혼해 1460년(세조 6)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다음 해 원손(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1461년(세조 7) 안기(安耆)의 사저에서 17세로 세상을 떠났다.
순릉(順陵)
다음은 순릉 이야기입니다.
능의 특징은
3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 형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의 귀면 무늬가 넓게 조각된 것이 특징입니다.
능의 역사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의 능입니다.
1475년(성종 5)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이 있는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습니다. 순릉은 파주 삼릉에 있는 3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이는 공혜왕후가 중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능의 구성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라간, 수복방 등이 있고, 비각 안에는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새겨져 있는 표석이 있습니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왕릉의 형식에 맞게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2쌍을 배치하였습니다.
공혜왕후(恭惠王后)1456~1474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는 본관이 청주인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넷째 딸로 1456년(세조 2) 연화방 사저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와는 자매지간이 됩니다.
1467년(세조 13) 잘산군(者乙山君, (성종))과 혼인하여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이 되었고, 1469년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막강 한명회의 딸 이였지만, 층층시하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 3명의 과부 모시고 바람둥이 남편 시앗 꼴 보며
자식 못 낳는다고 숨죽이며 살다가 19살 어린 나이에 죽었는데, 언니인 예종 원비인 장순왕후와 서로 위로하면서 파주 삼릉에 같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성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권력욕에 사로 잡혀 딸 둘을 왕비로 만들었지만 결국 둘 다 10대에
요절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에 평범한 집안에 시집갔으면 혹 아들 딸 낳고 오손 도순 오래오래
살지 않았을까요?
3.영릉(永陵)
능의 특징
영릉은 왕세자의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간소한 모습입니다.
영릉의 역사
영릉은 황제로 추존된 진종과 효순황후 조씨의 능입니다.
영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 형식입니다.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진종, 오른쪽이 효순황후의 능입니다. 1728년(영조 4) 진종이 왕세자(효장세자)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1729년(영조 5)에 파주 순릉 왼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습니다.
이후 1751년(영조 27) 효순황후가 왕세자빈(현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1752년(영조 28) 효장세자묘 동쪽에 묘를 조성하였습니다.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조의 계승상 아버지가 되는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영릉이라 하였습니다.
능의 구성
능침 아래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고 2개의 비각 안에 3개의 표석이 있다.
1비는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의 표석,
2비는 진종대왕과 효순왕후의 표석,
3비는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의 표석입니다.
이는 진종이 추존될 때마다 표석을 새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하였습니다.
문석인과 석마입니다.
진종(眞宗)1719~1728
진종은 영조와 정빈 이씨의 아들로 1719년(숙종 45) 창의궁에서 태어났습니다.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경의군(敬義君)이 되었고, 다음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 창경궁 진수당에서 10세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일찍 죽은 왕세자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습니다.
1776년(영조 52) 영조의 명으로 이복동생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양자로 입양되자 효장승통세자(孝章承統世子)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진종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2)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로 추존되었습니다.
효순왕후(孝純皇后)1715 ~1751)
효순황후 조씨는 본관이 풍양인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딸로 1715년
(숙종 41)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습니다. 1727년(영조 3) 왕세자빈이 되었으나, 1729년(영조 5)에 진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비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진종보다 4살 연상이니 13살에 과부가 된 셈입니다.
조혼의 큰 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1735년(영조 11) 현빈(賢嬪)에 봉해졌으며, 1751년(영조 27)에 창경궁 건극당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조는 왕세자빈에게 효순(孝純)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습니다.
영조의 명으로 장조(사도세자)가 진종의 양자로 입양되자 효순승통세자빈(孝純承統世子嬪)이라 하였고,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추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