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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실용 공부법
공부에는 왕도가 따로 없다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은 상태에서는 덕도 올바르게 발현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도덕을 바로잡으려면 삶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연암 박지원의 이러한 사상은 소설을 통해 잘 표출되어 있다. 그는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의 취약한 유통구조를 질타하였다.
[하루라도 공부하지 않으면 얼굴빛이 달라진다]
『열하일기』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년)은 어떤 선비였을까? 그는 평생 무엇을 공부하고, 공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어떤 방식으로 공부했을까?
조선의 베스트셀러 작가 연암 박지원
연암은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내고 양양부사로 승진했지만 다음 해 벼슬에서 물러난 학자이다. 하지만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과 평생 깊이 교유했고 무엇보다 그 시대의 잘못된 고정관념들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던 개혁가이자 탁월한 작가였다. 또한 그는 세속의 구속을 벗어나 재야에 은거하는 삶을 통해 세상에 초탈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부귀영화보다는 공부하는 것 그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긴 선비의 풍모를 강하게 보여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공부는 무엇이며 그 자세와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의 작품 『연암집燕巖集』의 「원사原士」에는 그가 생각한 선비의 모습이 실려 있다.
연암의 저서 중 하나로 한전제(限田制)를 비판하고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과농초소』
그는 "선비가 되어 하루라도 공부를 거른다면 얼굴빛이 곱지 못하고 언어가 바르지 못한 데다 두려운 마음이 생겨 생각이 갈팡질팡하게 되니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지고 마음 둘 곳이 없어진다"고 말하였다. 또한 "장기나 음주가 어찌 공부보다 즐거울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선비라면 의복을 단정히 하고 정숙하게 앉아 책상을 공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책을 대할 때는 그 내용을 묵묵하지만 깊이 되새기라"고 강조하였고, "짧은 구절은 한꺼번에 묶어서 살피고 자구를 깊이 연구하고 풀이하되 천착하거나 비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잘 모르는 대목은 반드시 반복해서 보아야 하며 모르는 채로 그냥 넘어가지 말라"고도 하였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평범한 조선 시대의 선비가 아니었다. 오늘날에나 있을법한 베스트셀러 작가와 같은 삶을 살았던 선비가 연암이다. 다산이 실학을 학문으로 집대성하였다면 연암은 실학으로 조선의 문학을 새롭게 창조한 혁신가였다. 그리고 그러한 혁신적인 글쓰기가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한 현실주의자라는 점에 있었다.
연암은 과거시험에 연연하지 않았고 출세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한 나이가 스물아홉 살이었는데, 그 이전에 그는 이미 마장전(馬駔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우상전(虞裳傳)과 원문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등 다양한 작품을 펴내며 작가로서 문명을 드높이고 있었다. 또 그가 남긴 『열하일기』와 다른 소설들은 양반을 풍자하고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그의 사상과 철학이 담겨 있는 당시의 인기 저작물이었다.
그의 글쓰기를 보면 그가 생각했던 공부의 핵심을 알 수 있다. 그가 생각했던 참된 공부는 바로 '실용'이다.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연암의 글쓰기]
연암의 공부와 글쓰기의 핵심은 동일하다. 바로 "옛것을 배워 새것을 창조하는 것(법고창신, 法故創新)"이다. 21세기는 창조의 시대이다.
그런데 수세기 전 조선 시대에 연암은 이미 창조의 대가였다. 그것도 공부를 통해 실학을 강조한 것에 머물지 않고 창조적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고 혁신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연암의 공부법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연암은 옛것을 본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그것의 틀 속에 갇히게 되고, 새것만 창조하려는 사람은 그 어떤 원칙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옛것을 본받되 그것을 변형하여 새것을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오늘날의 글이 옛날의 글과 다른 이유가 "새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옛것을 배우고 본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법도와 원칙이 없어서"라는 지적을 잊지 않았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병폐 중 하나가 중국에서 건너온 학문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의 틀 속에 자신을 가두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선비가 자신이 배운 것을 실생활에 이용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만족할 지식을 쌓고 그 정도 깨우침에 만족하며 사는 게 고작이었다. 이것을 개선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실학이다.
연암은 글쓰기와 공부를 통해 이러한 폐단을 깨뜨리려던 개혁가였다. 그의 글쓰기가 과거와 크게 다른 것도 그의 개혁 의지의 표현이다. 공부의 중요성은 그것의 실용에 있다고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글쓰기'에 대한 연암의 생각이 담겨 있는 공작관문고 자서 (출처: 한국고전종합DB)
연암에게 있어 글쓰기는 공부의 한 과정이자 공부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그의 글쓰기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의 글쓰기는 과연 무엇과 닮았으며 무엇을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연암집에 실려 있는 공작관문고 자서, 孔雀館文稿 自序에 담겨 있다. 이 글을 보면 연암이 생각한 글쓰기는 문장을 세련되게 꾸미고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며 글을 쓸 때는 무엇보다 진실함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글은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인데, 생각을 꾸미고 글자마다 고치려고 애쓴다면 화공을 불러 초상화를 그릴 때 용모를 고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연암이 생각하는 글쓰기는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한지 아닌지가 관건이었다. 글쓰기란 진실하여야 하는데 글을 거짓 또는 인위적으로 지나치게 꾸며서 쓰려고 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드러내기 어렵고, 지나치게 추상적이게 된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의 글을 통해 필자가 내린 결론은 그의 글쓰기는 진심이 담기고 꾸밈이 없는 글쓰기라는 것이다.
청나라 여행길에 나선 연암 박지원은 다른 선비들이 오랑캐의 나라라고 업신여기고 있던 청나라가 조선 선비들이 생각하듯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는 청나라의 문물이 오랑캐의 문물이 아니라 문명의 산물임을 발견하고 그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청나라의 조그마한 마을인 책문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받은 느낌을 기록한 글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책문을 돌아보며 물건이 모두 단정하고 바르게 정돈되어 있고 한 가지도 난잡하게 버려둔 것이 없다는 사실에 감탄하였다. 더 나아가 "뒷간에도 법도가 있으며 쌓아 놓은 거름도 정갈한 것이 마치 그림과 같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열하일기』는 일종의 기행문으로, 연암이 청나라를 다녀온 뒤 그곳의 앞선 문물을 기록한 책이다.
연암이 느끼기에 청나라는 '악취가 나는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라 '향내가 나는 문명의 숲'이었다. 그러니 조선 사대부들의 고루한 생각처럼 오랑캐의 문물이라고 업신여기지 말고 그 문물을 빨리 배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을 잘살게 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은 상태에서는 덕도 올바르게 발현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도덕을 바로잡으려면 삶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연암 박지원의 이러한 사상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잘 표출되어 있다. 그는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의 취약한 유통구조를 질타하였다. "배가 외국과 통하지 않고 수레가 나라 안을 다니지 못해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지는" 그런 유통구조의 취약성을 이용해 돈을 번 사람이 바로 허생 자신이라는 것을 밝히며, 조선의 취약한 유통구조와 더딘 경제 성장을 통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허생은 자신의 상술을 밝힌 후에 "이것은 백성의 삶을 해치는 길이 될 것이고, 후세에 당국자들이 만약 나와 같은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즉 그는 허생이 아닌 누구라도 쉽게 돈 몇 푼으로 나라 경제를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로 허약한 유통구조를 가진 조선의 경제 구조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실용 공부법]
공부의 중요성은 그것의 실용에 있다
연암은 공부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로 이용되거나 세상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학문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학문이 귀한 것은 그것의 실용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연암이 도를 추구하며 이상 정치의 실현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성리학에서 벗어나 실용을 강조한 학자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정약용처럼 실학자라고 할 수 있지만 북학의 영향을 받은 북학파라고도 불린다는 점에서 정약용과 차이를 두고 있다. 연암은 '북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일으킨 사람들 중 하나인데 북학은 북쪽, 즉 다시 말해서 '청나라를 배우자'는 운동이다.
조선 후기 실학 4대가 중의 한 사람인 이서구
당시 북쪽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의미한다. 오랑캐라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운 후 조선에 적용하여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연암의 지론이었다. 그는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의 서문에서 "장차 학문을 하려면 중국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연암은 "사대부들이 말하길 지금 중국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오랑캐이니 그들에게 배우기가 부끄럽다면서 중국의 옛 제도까지 함께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아무리 오랑캐라 할지라도 떳떳하게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더구나 청나라에는 한나라뿐만 아니라 당, 송, 명의 옛 문물이 남아 있는데 어찌 배울 게 없겠느냐고 개탄하면서 조선 선비들의 짧은 생각을 아쉬워했다.
이런 사상에서 등장한 것이 '이용후생이다. 그가 생각하는 공부는 이용후생이었다. 백성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그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즉 선비라면 이용후생의 학문을 수행하여 백성에게 이바지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은택이 천하에 미치는 공부를 하라
연암은 선비의 공부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선비가 공부하면 그 은택이 천하에 미치고 그 공덕이 만세에까지 전해진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말을 다른 각도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선비는 결국 그 은택이 천하에 미칠 수 있도록 공부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는 『연암집』의 「원사(原士」에서 "하루를 마칠 때까지 책을 읽어도 학문에 진보가 없는 것은 私意가 학문을 해치기 때문이다"라며 공부가 사사롭게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선비는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는 온 천하에 은택과 공덕을 미치게 하는 공부를 하라고 말하였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박제가
오늘날 사람들은 성공과 출세, 재테크, 혹은 자기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연암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공부보다는 은택이 천하에 미치고 그 공덕이 만세에까지 전해지는 공부를 하라고 말하였다.
천하에 은택이 미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그는 "자기 자신을 잊어야만 무엇을 하더라도 그 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연암의 말처럼 자기 자신을 잊고 공부에 매진할 때, 결국 일가를 이루고 그 은택이 천하에 미치게 되는 것이리라. 『연암집에는 자기 자신을 잊고 무엇인가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라에서 알아주는 명필인 최홍효가 과거시험을 보러 갔을 때 일이다. 공을 들여 답안을 작성하던 최홍효는 우연히 자신이 쓴 글자 하나가 중국의 명필 왕희지의 필체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과거시험이 끝날 때까지 그 글자를 들여다보다가 결국 답안지를 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는 최홍효가 이미 이해득실 따위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崔興孝通國之善書者也 ̊嘗赴舉書卷 ̊ ̊̊得一字 ̊ 類王羲之坐視 ̊ ̊終日。
(출처-『연암집』 7권 별집 종북소설선 형언도 중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생사를 마음에 두지 않고 영욕을 잊을 수 있으며 이익과 손해를 마음에 두지 않으면 일가를 이루고 대가가 될 수 있다. 더욱이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익과 손해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마음에도 두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천하에 은택이 미치는 공부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연암은 또한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였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아는 것이 있다면 그에게 물어야 한다고 고백했다. 심지어 모르는 게 있으면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라도 물어야 한다는 것이 연암의 생각이었다.
그의 말처럼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 하지만 연암조차도 경계하는 공부는 있었다. 바로 수박 겉핥기식 공부이다.
연암은 비록 세상에 책이 많긴 하지만 그 내용은 저마다 다르다고 말하였다. 그 때문에 책을 다양하게 읽어서 식견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보고 들은 것이 적으면 결국 자신의 식견 안에만 갇히게 되고, 자신의 식견을 벗어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하게 되는 병폐가 생길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하늘과 땅도 날마다 새로워질 뿐만 아니라 해와 달의 빛도 날마다 새롭지 않은가. 세상에 책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연암의 지론에 필자의 고개도 저절로 끄덕인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다니라
연암은 청나라에 가서 선진문명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웠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 이외의 바깥세상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대부분 조선을 떠나 한 발자국도 나가보지 못한 선비들이 살던 시대였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보고 배운 것이 적은 까닭에 아는 것이 없고, 혹은 자신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서 의심부터 하고 끝내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청을 건국한 태조 누르하치 (왼쪽)와 청의 부흥기를 연 제4대 황제 강희제(오른쪽)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연암은 “백로만 본 사람은 자신이 처음 보는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만 본 사람은 자기가 처음 보는 학의 자태를 위태롭게 여긴다"고 말하였다. 사물은 변함이 없는데 자기가 본 것과 다른 사물이 있으면 혼자 화를 내며 만물을 다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치를 깨달은 선비는 괴이하게 여기는 게 없지만 속인, 즉 본 것이 적은 이는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우리가 많은 책을 읽고 폭넓게 공부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여행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혹은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더라도 우리는 책을 통해 자신의 좁은 식견을 넓힐 수 있다.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좁은 경험과 식견에 갇혀서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부정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예전에 필자가 모 일간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기사 내용에 경악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1년 동안 책을 18종 출간하고 40종을 계약했으며 일주일 만에 책 한 권을 쓸 수 있는 남자'라는 식으로 기사가 나갔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기사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현실 세계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경이로운 성과에 감탄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은 연암이 청나라에 가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 온 후 북학을 전파할 때 의심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경험이 적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본에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출간하는 작가가 있다. 그는 지금 통산 900권 정도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런 사람과 비교하면 필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필자가 1년에 18종의 책을 출간하였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다니면서 여행을 해야 세상의 일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식견을 넓혀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지 않은가.
1780년(정조 4) 연암은 친척 형 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함께 길을 나섰다. 그는 약 5개월 동안 遼東과 遼河, 北京 등지를 여행하면서 청나라의 문물과 생활, 기술을 자세히 살핀 뒤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적은 기행문 열하일기』를 발표하였다. 당시 열하는 건륭제의 별궁이 있던 곳으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청의 학자와 몽골, 티베트 사람을 만난 뒤, 오랑캐라고 폄하했던 그들이 뛰어난 과학 기술력을 갖고 있고 자유롭게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와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며 그들에게 배울 점을 논하였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시 조선의 학계를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