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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질(眼疾)은 이미 나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던 것도 조금 가벼워졌으며, 오른쪽 다리의 병도 차도가 있음은 경 등이 아는 바이지만, 근자에는 왼쪽 다리마저 아파져서, 기거(起居)할 때면 반드시 사람이 곁부축하여야 하고,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반드시 놀라고 두려워서 마음이 몹시 두근거리노라. 예전에 공정왕(恭靖王)께서 광주(廣州) 기생의 이름을 생각하여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사람을 시켜 치문(馳問)하게 한 뒤에야 심중이 시원하신 듯하였고, 또 연회 때에 신색이 이상하시더니, 얼마간 있다가야 안정하시고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침 생각하는 것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얼굴빛이 변함이 이르렀노라.’ 하셨다. 그때에 내 매우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제 왼쪽 다리가 아픔에 때로 이를 생각하니, 기운이 핍진(乏盡)함을 깨닫지 못하다가, 오래 되어서야 평상으로 회복되고는 하니, 예전에 괴이하던 일이 내 몸에 이르렀노라. 박연(朴堧)·하위지(河緯地)가 온천에서 목욕하고 바로 차도가 있었지만, 경들도 목욕하고서 병을 떠나게 함이 있었는가. 나도 또한 온천에 목욕하고자 하노라."
"신 등도 일찍이 배천 온천(白川溫泉)에 가서 목욕하여 병을 고쳤습니다."
하였다. 이에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강맹경(姜孟卿)을 배천 온천에 보내고, 인하여 명하기를,
"그전에 이천(伊川)으로 거둥했을 때 폐단이 많았음은 말할 수 없다. 온양(溫陽)의 초수 행궁(椒水行宮)에서도 너무 지나쳤으나, 모두 이엉[茨]을 덮었을 따름이니, 너는 배천으로 가되 폐단이 나지 말게 하라. 그렇다고 내가 거처할 곳이 너무 좁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또 병조 판서 민신(閔伸)으로 지응사(支應使)를 삼고,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동궁(東宮)은 내 노환[老疾]때문에 멀리 떠날수 없으므로, 강무(講武)를 행할 수 없겠다. 이번 배천(白川)의 행차에는 개성(開城) 등지의 길을 경과하게 되니, 새짐승을 번육(繁育)시켜 연도(沿途)에서 사냥을 함이 어떻겠느냐. 그러나, 또한 이 때문에 군졸을 더함은 불가하니, 다만 호위하는 군사로써 이를 할 것이다."
하니, 좌승지 조서안(趙瑞安) 등이 대답하기를,
"이 기회에 강무(講武)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였다.
1444년에 지어진 세종대왕의 초수리(초정약수) 행궁이 와가(기와집)가 아닌, 초가였다는 사실이 본보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지역 학계도 몰랐던 이같은 사실은 세종실록 31년 12월3일자의 "온양(溫陽)과 초수 행궁(椒水行宮)에서도 너무 지나쳤으나, 모두 이엉[茨]을 덮었을 따름이니"(溫陽 椒水行宮 亦爲大過 然皆蓋茨耳)라는 문장을 통해 확인됐다. 이 문장은 세종대왕이 초정약수를 방문한지 6년이 지난 1449년(세종 31)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거둥하기 직전에 대신들에게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원문 '溫陽 椒水行宮' 문장은 일견 '온양의 초수행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뒤에 '모두 이엉을 덮었을 따름이니'(然皆蓋茨耳)라는 복수 표현이 온 것을 감안하면 별개의 2개 행궁, 즉 온양행궁과 초정약수 행궁을 모두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또 지명 온양은 따스한 온천수가 나오기 때문에 지어진 것으로, 차고 톡 쏘는 용출수에 붙이는 초수(椒水)와는 분명히 구분되고 있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세종실록을 보면 당시 조정은 세종대왕의 초정약수 행궁은 한 달만에 지은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그것도 겨울이 한참이던 엄동설한에 초가가 아닌 와가를 건립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충북일보]
세종이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이 곳 초정온천을 찾은것을 기념하기위해 조형물에도 잘 표현하여 놓았다.
초정리를 대표하는 초정리조형물 건너편으로 한글공원이라 하여 많은 탐방객들과 지역주민들의 쉼터공원이 있다.
이 한글공원에도 초정약수인 약수를 음용할수 있도록 음수대를 비치하여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