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華城行宮) 기행
최무순(崔武淳)
한국공무원문인협회(회장 金愚) 주관의 「가을문학기행(2023.10.21)」 일환으로,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에 소재한 '화성행궁'을 다녀 왔다. 행궁변의 성곽 둘레길을 걸으면서, 나는 젊은시절 수원시청 공무원 재직에 얽힌 옛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반세기전 1970년 5월 수원시청(시장 南永祐)의 공무원으로 봉직했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수원과 인연은 1968년 내무부 기획관리실 근무 당시, 나를 적극 배려해 줬던 고위 공직자(金振衡 장군)가 지병으로 세상을 뜨자, 나는 곧바로 내무부를 물러났으니, 졸지에 실직 상태의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배려했던 분과 막역한 수원 출신의 무임소장관(장관 李秉禧)께서 나를 한국전력 수원지점에 근무토록 주선해 주었으니 뜻밖의 행운으로 느껴졌다. 이후 수원시청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시청(시장 南永祐)에 근무하던 중, 조달청장(청장 高在一)의 전입 요청에 따라 조달청 인사담당 공무원으로 전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당시 나의 주변에는 막강한 고위 공직자가 여럿 있었던 까닭에, 관운(官運)이 무척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1970년대의 수원은 전원 풍광을 지닌 도심속의 농촌처럼 보였다. 서울농대와 농촌진흥청이 그곳에 있었으니 전형적인 도농 복합지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여느 지역보다 발전 여지가 많았고, 또한 앞서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농촌진흥청 인근의 서호(西湖) 저수지 남측편의 넓은 들녘은 농작물 시험재배 단지로 활용되고 있었는데, 정조대왕의 능행길인 지지대 고개의 농지 역시 서울농대 유달영 교수의 과수원과 전원농장이 자리잡고 있어, 후학들의 학습 터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수원의 인계동[인도래]은 한적한 농촌이었으나, 삼성전자 공장이 건설되면서 세계적인 전자공업단지로 조성되었고, 지지대 고개 인근 벌판은 선경그룹의 뿌리인 선경직물이 자리잡아 현재의 SK그룹로 발전된 글로벌 재벌기업이 되었다. 또한 원천유원지는 신대호수와 연결되어 오늘날 광교(光敎) 호수공원으로 확장되었으니, 아름답고 걷기좋은 둘레길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수원은 근세의 행궁을 비롯한 청동시대의 사적(史跡)들이 즐비한 역사성 짙은 팔달산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고, 정조대왕의 행궁 건설로 사적(史蹟)이 넘치는 도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화성행궁은 조선조 제22대 임금 정조가 세운 행궁으로서, 건물 21동에 576칸 규모로 지어졌다.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임시거처로 머물렀던 일종의 별장 역할을 담당한 곳이다. 정조는 선고(先考) 사도세자가 애통하게 죽음을 당하자 지극한 효심에서 원침을 수원으로 옮겨 궁궐과 성곽을 조성하였는데,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을 비롯한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과 궁궐이 건설되면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과학적인 응용력이 뒷받침 되었다.
화룡문, 북암문, 동암문, 동장대, 동북공심, 창룡문, 방화수류정과 성곽의 축성 역시 다산의 거중기 역할이 컸다고 하겠다.
정조가 화성을 완공하고 수원을 행차했을때 방화수류정에서 활을 쏘고 시를 지었는데, 그 어제(御製) 시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역편춘성일미사(歷遍春城日未斜) 소정운물전청가(小亭雲物轉晴佳) 난기관보삼연묘(鸞旂慣報參連妙) 만류음중족사화(萬柳陰中簇似花)
즉, 춘성을 보고도 해가 아직 기울지 않고 / 소정의 풍경은 한결 더 맑고 아름답구나 / 난기가 계속 연이어 세번 맞춤을 알리니 / 수많은 버들 그늘 속에 살촉이 꽃 같구려.
이러한 정조의 어제(御製) 시는 좌의정 채제공의 글씨로 현판에 쓰여졌으며 방화수류정 벽에 걸려 있다. 다산(茶山)도 버들을 따라 꽃을 찾아 간다는 방화수류정을 작명(作名)하면서 지은 그의 시 '류수간수구정(柳樹看隨鷗亭)'은 자연을 벗 삼은 풍류의 인품이 멋을 한껏 느낄 수 있게 한다.
모정회작춘주(茅亭會酌春酒) 류안전임소교(柳岸前臨小橋) 우엽여황사록(雨葉如黃似綠) 연조사정환요(煙條乍靜還搖)
즉, 모정에 모두 모여 봄 술잔 기울일제 / 버들 언덕은 작은 다리 곁에 있구려 / 비에 젖은 이파리 노란듯 푸른듯 / 안개속 나뭇가지 고요타 다시 흔들리네.
이렇듯 다산(茶山) 역시 명시를 남겼다. 한시(漢詩)는 원래 오언 또는 칠언율로 시를 짓지만, 다산은 4자(字)나 6자 시로 자유분방하게 지어 형식에 구애 받지 않았다.
화성(華城)경내에는 연무대(鍊武臺)도 건립되어 요즘 찾는 이가 많아 즐거운 놀이터가 되고 있다. 연무대의 넓은 잔디 뜰은 양궁과 연날리기의 묘기 광장으로 추억 명소가 되었고, 둘레길의 걷기 운동은 건강증진에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는 듯 싶다.
한편 행궁옆 골목마다 역사 깊은 화춘옥의 한우갈비와 통닭거리의 먹거리는 팔진미오후청(八珍味五侯鯖)과 어찌 비교될 일일는가.
나는 이번 문학기행을 통해 정조의 지극한 효심과 행궁의 역사를 깊이 터득하게 되었고, 청년시절 수원시청에 봉직했던 추억들이 새삼 되새겨진 값진 기행이 되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