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와의 인연은 강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사다난했던 고등학교 생활을 마침과 동시에,
웃을 때면 드러나던 반쪽짜리 보조개보다도
더 움푹 컬을 말고 다니던 단발머리를 과감히 쳐냈다.
잘린 머리카락, 초기화된 연락처, 한번도 보지 못한 새파란 바다로 떠나면
멸종된 스베누 신발을 신고도 구름을 걸을 수 있었다.
몇십 분을 기다려 사먹은 유명 수제버거는 맛이 없었고
겨울 바닷바람에 뺨이 베이는 느낌이 들었지만
전부 괜찮았다.
유난히 거대했던 동해의 파도 앞에서는
구태여 악을 쓰며 무너지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밀물은 마음을 가려줄 이불이 되고
썰물은 목 아래 침잠한 모든 말을 가져가고
남중한 햇살 아래 반짝이는 윤슬을 보고 있자면
이 지겨운 삶의 불가해성을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유도 전조도 없이 삶을 침범해온 모든 일들을
덜 미워하게 될 것 같다고 말이다
잊기 위해서는 더 먼 곳으로 가야 해
대구로, 광주로, 부산으로, 제주도로 떠나오다가
결국 열 다섯시간을 날아온 유럽.
언어의 장벽도 낯선 거리도 두렵지 않았지만
나의 결핍을 세상에서 가장 먼 곳에서까지 찾지 못한다면
고장난 나침반이 될 것만 같아서
이곳에서 답을 내지 못하면 더는 떠날 곳이 없다는 게 두려웠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가고 있지
유럽 여행은 꽤나 효과 있는 방법이었다
이국의 거리를 떠돌아다니다 보면 한국에 두고 온
거대해 보이던 고민 덩어리들이
한 줌에 들어올 만큼 작아 보였으니까
가까이서 볼 땐 그저 녹슨 철골 덩어리었던 에펠탑이
저 멀리 개선문에서는 로망 덩어리로 탈바꿈하는 것처럼
아주 멀리서 바라본 내 고민 또한 우스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통증의 밤을 보냈는데
겨우 이것뿐이었구나
날 괴롭히던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뭐든지 일단 믿어보고 싶었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일지라도 확신해보고 싶었다
너무나도 억울한 삶이라는 미제 사건이
보름 사이 허무한 막을 내렸다
노란 촛불이 가득한 바실리크 성당에서
하염없이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신을 믿는 이들은 이곳에서 더없는 확신을 가지겠구나
삶이 어떤 방식으로 날 배신할지라도
그저 신의 뜻이구나 할 수 있는 마음이 있겠구나
처음으로 종교인들이 부러워졌어
나는 믿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무엇도 쉽게 믿질 못하거든
모든 게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어
앞으로 걸어갈 날들에
웃는 날이 더 많을 거라고 믿고 싶어
내가 어제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거라고 믿고 싶어
내가 친절해지는 만큼 타인도 그럴 거라고 믿고 싶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고 없는 이별을 말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어
살기 위해 애착을 쌓고 싶지가 않아
한국에 많은 걸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담아보니 짐이 많질 않다
애착과 미련이 사라지면 너무 공허할까봐
인생이 끝나 버릴까 두려웠다
와인을 잔뜩 먹고 취했어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난 이곳에 없을 테니까
망가지는 것도 똑바로 서는 것도 다 순간의 선택이더라
한국에서는 내가 알던 나로 살아야만 했는데
여기서는 하룻밤 사이 어떤 나도 될 수 있어
기내 수하물만 담고 사는 인생이었다면 조금 일찍 편해졌을까
피렌체 골목 계단에 앉아 살짝 울었다
내 고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다행이면서도
여태까지의 삶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아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어쩌면 알면서도 고통 속에 살았는지 몰라
왜 이리 어려울까
영영 잊지 못할 기억도 사람도 사랑도 없는 거고
변하지 않을 믿음도 없는 거고
해류에 쓸려가는 해파리처럼 사는 법을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