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그 날의 생활을 인생의 사업이라고 한다면 여행은 인생의 즐거운 예술이다. 생활이 인생의 산문이라면 여행은 분명히 인생의 시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여행의 진미는 인생의 무거운 의미에서 잠시 해방되는 자유의 기쁨에 있다. 여행은 도착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 더 큰 즐거움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나는 혼자서 또는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고, 잊을 수 없는 일을 겪기도 했다. 지나고 나서 보니 그때의 어려움은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일 중의 하나가 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기행문을 좋아해서 옛날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정비석의 금강산기행문인 ‘산정무한(山情無限)’은 글이 좋아 거의 외우고 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도 읽어 보았다. 어릴 적부터 신작로를 보면 저 길을 넘어가면 무엇이 나올까 하며 궁금해하며 언제가 신작로 저 너머로 가고 싶은 욕망을 품고 살았다.
나는 가족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며 지금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괴로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서, 지금도 가족과 그 사건을 가끔 반추해 본다.
내가 1986년 벨기에 브뤼셀 소재 국제기구에 근무할 때였다. 1986년 1월부터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열심히 일하다 보니 어느덧 여름휴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국제기구의 여름휴가는 토∙일을 포함하면 한달 반 정도 되었다. 긴 여름휴가를 어떻게 보낼건가 하고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짰다.
여름휴가 한달 반 중 우선 한 달만 미리 다녀오기로 했다. 나머지는 적절한 기회에 쓰기로 했다.
1986년 8월 초부터 한 달간 휴가를 잡았다. 프랑스 르와르강을 따라 있는 고성순례(古城巡禮), 몽셍미셀 수도원, 칸, 니스, 모나코, 그리고 이탈리아 밀라노, 가요제로 유명한 산레모, 나폴리, 로마, 프란체스코의 고향 아시시, 피렌체를 가기로 계획을 잡았다.
여행계획을 짜는 기간은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운전을 하고 아내는 지도를 보며 안내했다. 호텔 예약도 하지 않고 무조건 도시에 가서 "I"(Information)에 들려서 그 도시의 유명 관광지, 음식점을 파악하고 묵을 호텔을 정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세살난 딸이 하나 있었다.
우선 프랑스의 고성(古城)과 영화 라스트 콘서트에 나오는 몽셀미셀수도원부터 보기로 했다. 프랑스의 고성(古城)(앙브와즈성, 쉬농소성, 샹보르성 등)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프랑스의 영광을 보는 듯 했다. .더구나 외로이 떠있는 외딴 섬 몽셍미셀수도원을 보니 가슴이 벅찼다. 여행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느꼈다.
다음으로 프랑스 남부 도시인 영화제로 유명한 칸, 니스 그리고 모나코로 갔다. 니스 근처의 바닷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있는데 내 옆의 한 젊은 여성이 윗도리를 전혀 거리낌 없이 훌렁 벗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아내가 옆에 있어 눈을 어디 둬야할 지 몰랐다. 아! 이것이 topless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 여인을 뒤로 하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아름다운 지중해를 끼며 가요제로 유명한 산레모, 밀라노, 피렌체, 아시시, 로마, 나폴리 등을 들릴 예정이었다.
산레모, 밀라노를 잘 여행하고 피렌체로 향했다. 피렌체에 도착한 날은 8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수중에 현금이 다 떨어진 것이었다. 당시에는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호텔이나 식당이 많았다.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돈이 다 떨어졌다. 가족을 굶기게 생겼다. 가장이 이런 문제 하나 해결 못 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내가 가진 신용카드는 벨기에의 은행신용카드였는데 당시에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엔 현금을 인출할 수 없었다.(당시엔 American Express만 토∙일요일에 현금 인출이 가능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어느 카메오를 파는 보석 가게에 들어갔다. 피렌체는 카메오라는 보석이 유명하다. 카메오 가게 점원한테,
“나는 벨기에 국제기구에 근무한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가 돈이 떨어졌다. 미안하지만 1,000불짜리 카메오를 샀다고 카드로 결제하고 물건 대신 1000달러를 달라. 그 대신 수수료는 5% 고율로 주겠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점원이 처음에는 꺼리는 것 같다니 내가 믿음이 가는지,
“좋습니다. 1,000달러를 드리죠.”하는 것이었다.
소위 카드깡을 한 것인데, 그때는 카드깡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이 돈으로 우리는 식사 문제를 해결했다. 한국에서도 해보지 않는 불법행위인 카드깡을 남의 나라에서 했으나 당시엔 그 가게 점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사건은 1995년 8월 내가 독일에 유학하고 있을 때였다. 그 해 9월1일까지 귀국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8월에는 그동안 가지 못 했던 독일의 옛 동독지역, 체코, 그리고 헝가리를 여행하기로 했다. 구 동독지역은 바이아르, 라이프찌히, 드레스덴, 헝가리는 부다페스트, 체코는 프라하를 관광지로 잡았다.
문제가 생긴 건 드레스덴에서였다. 이 때는 딸은 12살, 아들은 7살이었다. 드레스덴에 갈 때 호텔 예약을 하지 않고 갔는데, 드레스덴에 도착하니 밤 10시였다. “I"에 가서 지도를 얻고 호텔을 예약하려 하는데 시내에는 방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여러 ”I"에 들렸지만 방은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드레스덴에 관광객이 많이 몰렸다는 것이다. 가장이 되어서 방을 마련하지 못 한다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애들을 차에 두고 나 혼자 방을 찾으러 나섰다. 무조건 호텔에 들려서 방을 구하려 했으나 방은 하나도 없었다. 변두리 어느 ”I"에 들르니 교외에 방이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호텔 주소를 가지고 차로 돌아오니 어느덧 3시간이 흘러 새벽 한시가 다 되었다. 아내와 애들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빠!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겁이 나서 죽을 뻔 했어요.”
“야! 이것 참!
방 구하는 게 이렇게 힘이 드네. 가자! 변두리에 방을 구했으니.....”
겨우 지도로 호텔 위치를 확인해서 찾아가니 거의 새벽 2시가 되었다. 지금도 그 호텔비가 220마르크였다는 것을 기억한다. 당시의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120,000원 정도였다. 아마 별 3개 정도 되는 호텔이었다고 생각된다.
옛 동독지역 여행을 마치고 체코를 거쳐 헝가리로 향했다. 헝가리 국경을 넘어 점심을 먹으러 국경 근방의 한 식당에 들렀다. 배가 고파서 스테이크를 시켰다. 스테이크가 나온 걸 보고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다. 스테이크라기에는 너무나 작아서 삼겹살 한 조각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을 10조각 정도 가지고 와서 스테이크라는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세상에! 이게 스테이크라니? 스테이크 맞아요?”
“예! 그렇습니다.”
이건 사기였다. 값도 상당히 비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뜨내기라고 생각해서 바가지를 씌운 것 같았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부다페스트 시내에서 한번 잘 먹어보려고 중국식당에 들어갔다. 음식도 훌륭했고 값도 독일에 비하면 60% 정도였다, 아주 만족해서 국경에서의 사기는 잊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헝가리의 시골 마을 지나는데 곳곳에 화장을 짙게 한 여자들이 많이 서 있었다.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애들이 왜 여자들이 저렇게 서있냐고 물었지만, 대충 둘러대었다. 동구권이 무너진 다음 일자리가 없는 젊은 여자들이 매춘대열에 섰던 것이다.
나는 유럽 여행을 좋아한다. 고풍스런 옛 모습을 지닌 도시가 무척이나 많고 역사의 향취가 물씬 묻어나기 때문이다. 파리, 로마, 아시시, 프라하, 부다페스트, 드레스덴 등 많은 역사적 도시를 여행하면서 수 없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를 보며 여행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마지막으로 유럽을 여행한 것은 2006년 아내와 함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15 – 16 세기 지리상의 발견으로 한 때 세계 최강의 나라로 여지던 나라라서 오래 전부터 가고 싶어하던 나라였다. 만족도가 큰 여행이었다.
많은 나라를 가봤지만 역시 여행은 유럽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금은 독일에선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데,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성한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첫댓글 ㅎㅎ 마치 내가 유럽여행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댕큐 써 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