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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1일 민노총은 시청역 앞을 점령하고 ‘효순·미선 20주기 반미자주 노동자대회’라는 것을 열었다. 2002년 6월 미군이 모는 장갑차에 치여 숨진 ‘효순·미선’양의 20주기를 기린다면서 ‘반미 정치 집회’를 개최한 것이다. “종속적 한미 관계 끊어내자” “주한미군 몰아내자” “주한미군은 사드 갖고 떠나라”는 등 반미(反美) 구호가 난무했다.
이들은 문재인(文在寅) 정권 시절에는 ‘효순·미선’양 추도집회를 연 적이 없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이 출범하자 공세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민노총은 이미 지난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서울 도심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를 연 바 있었다. 당시 민노총은 아직 출범도 하지 않은 윤석열(尹錫悅) 정부를 공격하며 시위를 했다.
좌익(左翼) 세력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보았던 기시감(旣視感)의 행태들이다. 저들의 변함없는 이념적 본성이 보여주는 데자뷔(Déjà Vu)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행태가 결국 어디를 향한 것인지를 보게 된다.
“理念의 시대는 갔다고? 천만의 말씀!”
▲ 2008년 5월부터 두 달여 동안 이어진 광우병 시위는 갓 출범한 이명박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 조선DB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일이다. 2007년 제17대 대선(大選) 선거전 당시 한 방송사 토론회에서 이명박(李明博) 한나라당 후보는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에게 “이념(理念)의 시대는 갔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진통이 있었지만 그렇게 말한 이명박 후보가 48.67% 득표율로 당선됐다. 2위인 정동영 후보의 득표율은 26.14%였다. 비율로는 22.53%, 표로는 530만 표가 넘는 차이였다. 이명박 후보의 득표율은 50%를 넘기지는 못했지만 역대 대선 사상 유례가 없는 압도적 격차였다. 민노당 권영길 후보의 득표는 3.01%였다.
그렇게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후 2008년 3·1절 기념사에서 다시 한 번 이념에 대해 언급했다. “이제 이념의 시대는 갔고 투쟁과 비타협이 미덕이던 시대도 끝났다”고 하고 “정치, 경제, 외교안보, 노사관계 등 모든 분야에서 실용(實用)의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들은 무엇보다도 좌파 세력들을 향한 충고였을 것이다. 그리고 낡은 좌익 이념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함께 가자는 권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좌파 세력에겐 소용없는 얘기였다. 2007년 12월 19일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지 며칠 뒤 한 좌파 논객은 좌파 매체에 “이념의 시대는 갔다고? 천만의 말씀!”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러면서 “5년 후를 준비하자”고 했다. 그 준비가 어떤 식인지는 얼마 뒤 바로 드러났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 첫해인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반대 시위가 폭발했다. 광우병(狂牛病) 논란으로 빚어진 시위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투쟁과 비타협이 미덕이던 시대도 끝났다”고 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격렬한 비이성적(非理性的) 투쟁을 마주하게 됐다. 두 달간 시위가 전국을 휩쓸었다. 출범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이명박 정권에 대해 ‘정권 퇴진’의 목소리까지 터져 나왔다. 불과 5개월 전 대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던 이명박 정권은 위기에 봉착했다.
광우병 시위는 명백히 허위 정보로 인한 소동이었다. 하지만 대선에서 참패(慘敗)했던 야권과 좌파 진영은 기회를 포착했다. 격렬한 진통 끝에 잦아들게는 되었지만 이로써 이명박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힘이 꺾이게 되었다. 좌파 진영이 2007년 대선 직후 “5년 후를 준비하자”고 한 것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민노총은 6월 11일 서울 시청 앞에서 ‘효순·미선 20주기 반미자주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사진=뉴시스
박근혜, “이념보다 정책이 중요하다”
물론 2007년 대선의 5년 뒤인 2012년에도 좌파 진영은 정권을 잡지는 못했다.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선에서 당선자는 새누리당의 박근혜(朴槿惠) 후보였다. 박근혜 후보는 과반(過半)인 51.6%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사이에 달라진 게 있었다. 야당인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득표도 과반에 육박하는 48%였다.
5년 전인 2007년의 제17대 대선에서 우파 진영의 득표는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를 합하면 65%에 달했다. 좌파 진영의 득표는 정동영 후보와 권영길 후보를 합해 29%에 지나지 않았다. 36%의 차이였다. 우파 진영에 대한 지지는 좌파 진영의 두 배가 넘었었다. 그런데 이명박 시대 5년이 경과한 뒤 좌파 진영은 48%의 지지를 얻었다. 5년 전 좌파 진영 후보를 모두 합해 20%대에 머물렀던 데 비춰보면 놀라운 약진(躍進)이었다.
박근혜 후보는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와 함께 국민대통합 공약을 내걸었다. 박 당선인은 당선 확정 후 일성(一聲)으로 대통합과 대탕평을 천명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념보다 정책이 중요하다”고 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유민주 이념의 중요성을 몰랐을 리 없다. 박 당선인은 야권과의 대화 원칙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달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은 좌파 이념에 젖어 있는 야권에 대해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통합’에 동참해달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좌파 세력은 그런 얘기를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5년 전의 탄핵 난동, 5년간의 재앙의 시대
▲ 2017년 탄핵사태 때에는 ‘중고생 혁명’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 조선DB
좌파 세력은 박근혜 대통령 당시 온갖 책동으로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에 훼방을 놓았다. 그러다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건을 계기로 좌파 진영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전개했다. 세월호 사건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로 본질적으로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사고(事故)였다. 하지만 야권과 좌파 진영은 온갖 음모론(陰謀論)까지 동원하여 집요한 공세를 펼쳤다. 그 같은 음모론적 공격은 2년 뒤 최순실 문제를 빙자한 공세와 탄핵 난동의 예고였다.
광우병 난동이 그랬고 세월호 사고 공세가 그랬듯 최순실 문제도 과장과 날조의 공세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 대통합의 꿈을 안고 임기를 시작했지만 야권과 좌파 진영은 그에 호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으며 내내 그랬다. 그들은 단 한순간도 박근혜 정권에 대한 악랄한 공세를 멈춘 적이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여야(與野) 간의 정치공방적 대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근원적인 이념적 대립이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자세의 문제였다. 하지만 당시 여권의 일부 세력들은 그 같은 문제를 전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저들 세력의 탄핵 난동에 부역(附逆)하고 말았다. 그게 얼마나 심각한 과오(過誤)였는지는 정권을 탈취한 문재인 정권의 지난 5년의 엽기적(獵奇的)인 통치가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권은 헌법 전문(前文)에서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하는 개헌(改憲)을 하려고 했다. 북한의 갖은 도발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해 타협적인 정도를 넘어 종북적(從北的) 자세로 일관했다. 대한민국에 대해 모독과 위협을 일삼는 중공(中共)에 대해서도 굴종으로 일관했다. 우리 안보의 생명선인 한미 동맹이 위기로 치달았다. 한일 관계도 최악이 됐다. 뿐만 아니라 고의가 느껴질 만큼의 갖은 재앙적 정책으로 국정 전 분야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그릇된 이념이 빚어낸 ‘이념적 재앙’이었다.
15년 전 이명박 대통령은 “이념의 시대는 갔다”고 하며 ‘실용’을 천명했다. 10년 전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 대통합과 대탕평”을 내걸었다. 그러나 저들 좌익 이념의 무리에겐 아무 소용이 없는 얘기였다.
정치적 價値判斷의 운동장이 기울었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동안 그들 무리에 대한 대응을 안이하게 했던 탓이라 하기도 한다. 대통령이었던 만큼 그런 지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다. 한국의 일반적인 정치적 인식과 가치판단의 양상이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돼 있었다는 문제였다.
종북좌파의 문제점에 대한 경고는 ‘낡고 상투적(常套的)인 반공(反共) 이데올로기’라는 식으로 경원시되기 일쑤였다. 이른바 민주화운동 세력은 반공을 민주화를 억압하기 위한 독재정권의 수법으로 치부하곤 했다. 87년 체제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같은 발상은 시대적 상식으로 굳어져 갔다. 과거의 공안 사건이 이미 재심되고 있었다. 그래서 종북좌파의 문제점에 대한 경고가 제기되어도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또 낡은 반공 이데올로기 수법을 동원하느냐”는 식의 반격이 위세를 부리곤 했다. 민주화 시대인 만큼 좌파 정치 세력에게도 정치적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분위기가 정치적 상식의 행세를 했다.
국민 일반도 그렇지만 우파 진영의 많은 정치인, 지식인들도 당시 이 같은 문제에 대해 결연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설마 하는 심리도 있었으며 몸을 사리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기울어진 시류(時流)에 전반적으로 젖어갔다. 공산주의도 허용해야 민주주의, 반공은 낡은 것, 좌익을 배제하는 건 극우(極右) 독재라는 식의 논법이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현혹했다. 딱히 좌파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그래야 선진적인 정치라 여기게 됐다. 그런 가운데 전통적인 이념적 경각심은 힘을 잃어갔다.
86운동권의 정치권 진입
박근혜 대통령 시절인 2013년, 통진당 사건이 있었다. 이석기의 통진당이 내란음모 혐의로 단죄(斷罪)되어 해산되었다. 당연한 처분이었다. 그러나 통진당 사건에도 불구하고 좌익 진영은 전체적으로는 결정적으로 제압되지 않았다. 오히려 명백한 좌익 인사들이 민주 인사라는 외피(外皮)를 쓰고 통진당을 ‘또라이’라고 비난하며 자신들은 그런 부류가 아닌 양 방어막을 쳤다.
언젠가부터 되레 좌익 성향이 아닌 인사들에게서 통진당 해산이 실책(失策)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통진당을 해산하니까 통진당이 사라진 대신 민주당이 통진당화(化)돼버렸다는 인식이었다. 통진당 같은 것을 내버려 두는 게 정치판 전체의 이념적 건강성을 위해선 오히려 현명했을 거라고 했다.
틀린 생각이었다. 민주통합당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세력의 좌익 성향은 통진당이 없어지고 그들 무리가 모여들면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들 정당의 좌경화(左傾化)에는 오랜 연원(淵源)이 있다.
그것은 당시 민주통합당과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의 골간을 장악하고 있는 86운동권 세력 출신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실이다. 87년 민주화투쟁 당시 PD 계열 운동권 세력은 민주화투쟁을 하면서도 보다 선명하게 진보적 주장도 제기하고자 했다. 하지만 NL 주사파 세력은 제도권 야당과 보조를 맞추어 대통령 직선제(直選制) 투쟁에 힘을 모을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87년 대통령 선거전 당시에는 PD 계열 세력은 진보 진영의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목표로 했지만 NL 주사파 세력은 양김(兩金)으로 분열돼 있는 제도권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PD 계열은 급진적이며 NL 주사파 세력이 오히려 온건하거나 심지어는 기회주의적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 양상에 불과했다. 따지자면 NL 주사파 세력이 더 전략적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나중에 제도권 야당으로 속속 진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이른바 ‘젊은 피 수혈(輸血)’이라고 하면서 운동권 출신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그러한 진입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86운동권들은 좌익 이념을 버리고 전향(轉向)을 한 뒤 들어간 게 아니었다. 그 정치 이념을 그대로 간직한 채 들어갔다. 출세주의 욕망도 있었겠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개인적 욕망이 어떠했든 ‘좌익운동 세력’의 제도권 정당 진입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과 관련해 반드시 짚어보아야 할 게 있다.
김일성이 본 통혁당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인 1968년 통혁당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1974년에는 2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2차 인혁당 사건 발생 1년 뒤인 1975년 6월 초 불가리아를 방문했다. 당시 김일성은 토도르 지프코프(Todor Hristov Zhivkov) 불가리아 총리와 나눈 비공개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조선의 마르크스당(黨)인 통혁당의 인원수는 많지 않다. 약 3000명가량 된다. 통혁당은 각지에 중앙조직이 구성되어 있다. 통혁당원들은 몇 개 공장에 대표를 두고 있지만, 불법화됐으며, 활동이 약화됐다. (…) 공개적인 반(反)박정희 활동을 하게 한 결과 지도부가 와해됐다. 이 때문에 우리는 통혁당원들로 하여금 남조선의 합법(合法) 정당에 참여할 것과 노동자·농민들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킬 것을 지시했다. 남조선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주요 세력은 학생들이다. 이들이 대규모 반박정희 데모를 조직화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미국의 우드로 윌슨 센터 홈페이지(https://www.wilsoncenter.org/)에 게재되어 있는 〈김일성과 토도르 지프코프 간의 대화에 관한 정보(Information on the Talks between Kim Il Sung and Todor Zhivkov)〉라는 제목의 자료에 나오는 것이다. 이 자료는 불가리아 주재 동독(東獨)대사관이 입수한 기밀 정보다. 우드로 윌슨 센터는 단순한 민간 싱크탱크가 아니다. 1968년 미국 연방의회가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공공(公共) 연구기관이다. 무게가 있다.
그런데 그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김일성은 남한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북한이 신민당(New Democratic Party)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통진당은 從北 本陣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이 당시의 신민당이 북한과 엮여 있었다는 증거일 수는 없다. 김일성의 언급은 단지 그의 말일 뿐이다. 하지만 합법 정당 침투를 중요한 방책으로 제시한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이것은 북한의 대남(對南) 공작은 물론 좌익운동의 일반적 차원에서도 당연한 전략이었다. 좌익운동의 입장에서 유력한 합법 정당에 침투하여 근거를 확보하고 세력을 성장시키는 것은 언제나 기본적 중요성을 갖는 일이었다.
이것은 투쟁노선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직접적이고 급진적인 좌익적 슬로건이 아니라 ‘민주화’를 가장 중요한 투쟁방침으로 앞세운다는 것이다. 그랬다. 박정희 시대는 물론 1987년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과의 연계를 거절하는 PD 계열 세력은 진보 진영의 독자적 세력화를 추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북한과의 연계를 당연시하는 NL 주사파 세력은 표면적으로는 대통령 직선제와 후보 단일화 등 말하자면 전혀 급진적이지 않은 주장을 앞세웠다. 그러더니 나중에 그들은 그 제도권 야당 속으로 대거 진입해 들어갔다.
主思派의 뿌리
▲ 재판정에 선 통혁당 관련자들. 가장 왼쪽이 신영복 교수이다. / 조선DB
내막을 잘 모르는 이들은 이석기의 통진당을 종북 세력의 집결체(集結體)였던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오다. 종북 세력은 통진당에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사실 통진당은 종북 세력의 본진(本陣)이 전혀 아니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민주통합당에는 일반에 알려진 정도 이상으로 종북좌익 세력이 강력히 포진하고 있었다. 민주통합당은 86세대의 주사파 전대협 세력이 기간(基幹) 라인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사파 세력이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6년부터로 인식되고 있다. 김영환의 《강철서신》이 주사파의 직접적 출발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반이 잘 모르는 착오가 있다. 주사파가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때부터지만 사실은 운동권의 주류(主流) 세력 자체가 본래부터 친북·종북이었다.
유신 시대 반(反)유신 투쟁에서부터 1980년대 86운동권 세력까지 끈질기게 이어져오던 운동권 핵심 지하 서클들의 뿌리는 모두 1960년대의 인혁당·통혁당, 그리고 더러는 더 이전 초창기의 좌익 서클들에 맥이 닿아 있었다. 당시 86운동권 핵심들은 조직의 그 같은 역사를 학습했다. 물론 개개인별로 수용 태도에 차이는 있었다. 그 같은 인식에 반발한 사람도 있었으며 혹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모두가 그 같은 인식을 공유할 필요는 없는 것이기도 했다. 좌익운동 자체가 본래 그랬다. 좌익운동은 강력한 소수(少數) 핵심이 동반자(同伴者) 세력을 두껍게 형성하는 게 기본이었다. ‘민주’를 앞세운 것은 그 일환이기도 했다.
그것은 더 거슬러 올라가 해방 공간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남로당의 박헌영은 물론 북한의 김일성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내세우기보다는 ‘민주주의’를 전면에 앞세우도록 했다. 한때는 우파 진영의 테마였던 ‘민족’을 좌익의 무기로 접수한 것도 마찬가지의 수법이었다. ‘민주·민족’은 이후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남북 좌익 세력 모두의 중요한 정치적 무기가 돼 있다.
‘脫이념’은 좌익의 수법
국민의힘 당도 그렇지만 좌익이 아닌 인사들도 ‘이념’이라는 용어를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이념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이념에서 탈피해야” 운운의 얘기를 더 세련된 것으로 여기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 탈(脫)이념은 사실은 좌익들이 먼저 동원한 수법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좌익적 주장과 의도를 민주와 민족이라는 구호의 이면에 숨기는 방법을 구사했다. 한국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었다. 동유럽 공산화 과정에서도 그랬으며 중공의 국공합작(國共合作)도 마찬가지였다. 그 같은 수법을 체계화한 게 통일전선전술이었다. 나라마다 그리고 주요 이슈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구사했다. 인민전선, 민주전선, 민족전선 등 이름을 어떻게 하든 보편적 개념의 이면에 좌익적 목표를 집어넣는 수법은 다 마찬가지였다.
민주와 민족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는 좌익 이념의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좌익 세력이 그 같은 개념을 앞세우는 건 자신들의 이념을 포기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것을 앞세워 그 이면에서 세력을 키워 궁극적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일 뿐이다.
온건한 우파 정치인들 혹은 지식인들은 종종 좌익 세력의 그 같은 프레임에 걸려든다. 그러나 그것은 속는 것일 뿐이다. ‘이념에서 벗어난 합리적 대화’ 운운의 생각은 나이브한 우파 성향 인사들이나 내막을 잘 모르는 국민 대중이 갖는 착각이다.
우파는 보편적 진실을 보자는 의미에서 “이념에서 벗어나자”고 말하지만 좌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좌익에게 진리의 기준은 계급성·당파성이다. 좌익은 반대편의 건강한 상식적 반론(反論)에 대해 계급적 이익에 따른 허위(虛僞)의 이데올로기라고 공격한다. 좌익이 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할 때는 상대편의 이념이 허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념에서 벗어나자는 얘기는 결국 우파 진영의 이념적 무장을 흐트러지게 하고 국민 일반의 이념적 경각심을 약화시키는 결과만을 낳는다.
국민의힘은 이념적으로 허술한 게 문제
정권 교체가 됨으로써 재앙의 시대는 문재인 정권 5년에서 일단 멈추었다. 그리고 얼마 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압승(壓勝)을 거두었다. 이로써 지옥의 문턱을 느끼게 하던 재앙은 끝나고 극적인 회복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또다시 아슬아슬함을 느끼게 하는 일이 있었다.
이번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지난 6월 7일 국회에 등원하면서 국민의힘의 ‘혁신위원회’와 관련해 언급했다. “정당은 시대정신을 반영할 수 있도록 변화를 거듭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며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병폐인 낡은 이념 지향적 정당에서 탈피해야 하는 것 또한 굉장히 중요한 혁신 과제”라고 했다.
나름의 좋은 성과를 바라는 마음에서의 발언일 것이다. 그러나 핀트가 빗나간 얘기다. 그 지적은 더불어민주당 등에 해당되지 국민의힘에 해당될 사항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의 고질적 병폐는 낡은 이념 지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념적 지향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데 있는 것이다.
정치인 개인이든 정당이든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정치적 확장성을 갖기 위해 유연함과 개방성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당은 그저 그런 테크노크라트의 모임이 아니라 이념의 결사체다. 근간의 이념을 굳건히 하지 않은 채 정치공학적 접근을 거듭하다 보면 안팎으로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당 내적(內的)으로는 단지 정치적 출세만을 노리는 꾼들의 집합소가 되고 외적(外的)으로는 무원칙한 포퓰리즘 남발로 국민을 오도(誤導)하게 된다.
‘자유’에 답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35번에 걸쳐 ‘자유’를 언급했다. 거기에 답이 있다. 국민의힘이 지향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혁신의 방향은 우선 자유민주 이념을 굳건히 하는 것이어야 한다. 공천 방식의 혁신도 그 같은 이념적 원칙에 바탕해야 건강하게 이뤄질 수 있다.
문재인 정권 5년은 재앙의 시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좌익 세력의 문제점을 수많은 국민이 뼈가 저리게 목격하고 체험하게 됐다는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각성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건강한 흐름도 여전히 완강하다. 이 같은 병폐는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강력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불순한 행동들뿐만 아니라 사특(邪慝)한 이념과 담론을 제압해야 한다. 이를 소홀히 하면 악몽은 다시 되풀이될 수 있다. 지난날의 경과가 이미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강호 /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월간조선 2022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