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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9
“크리스마스의 기적(奇跡)은 계속돼야 한다”
영국에서는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유독 ‘이웃’ ‘자선’ ‘화해’를 내건 일들이 많아진다. 이맘때쯤 영국 언론에 반드시 단골로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이 하나 있다. 제1차세계대전 중인 1914년 12월 있었던 ‘성탄절 휴전’이다. 올해가 1차대전 발발 100주년이라 1차대전 관련 행사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성탄휴전 100주년 문화행사’ 또는 ‘성탄휴전 축구시합 100주년 기념비 제막’ 같은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성탄절 휴전’은 1914년 1차대전 중 성탄절을 맞아 영국,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과 독일군이 대치하던 벨기에와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비공식 휴전을 말한다.
당시 양측 병사들은 본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무기를 내려 놓고 휴전을 했다. 총을 쏘지 않고 전투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간 지대에서 만나 담배를 같이 피면서 대화와 농담을 하고 선물도 나누고 심지어는 축구시합까지 했다. 역사학자들은 ‘2000년 유럽 역사상 처음인 기적’을 유사 이래 가장 참혹했던 전쟁 중에 이름 없는 병사들이 해냈다고 평한다.
▲ 지난 12월 16일 이스트런던에 들어선 1차대전 성탄절 휴전 기념 벽화. / ⓒ AP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1차대전은 개전 초반에는 독일군의 파죽지세였다. 그해 8월 초 독일군은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통과해 프랑스로 진격했다. 개전 초반 독일군의 작전에 지리멸렬하던 연합군도 항전을 하면서 전선이 고착되고 지구전에 돌입하게 된다. 동쪽으로는 로렌느부터 서쪽으로는 프랑스 서부해안과 영국 해협까지 500㎞의 서부전선에서 참호전이 벌어졌다. 이 참호전은 참혹했다. 어떤 곳에는 심지어 수미터 사이를 두고 양측 참호가 파졌지만 누구도 쉽게 상대를 점령하지 못하고 장기 살상전이 벌어졌다. 참호가 더욱 튼튼하게 건설되면서 아무리 공격을 해도 한 치도 더 나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거듭되는 공격과 수비에서 살상되는 병사들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어느 쪽 군인이 모두 죽느냐, 혹은 어느 쪽 탄환이 다 떨어지느냐 하는 소모전이 된 것이다. 누가 먼저 빨리 많이 죽이느냐 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순수한 살상전이 되었다고 전사가들은 적고 있다. 특히 이 지방의 토양은 진흙이라 우기인 겨울에는 걸을 수도 없을 만큼 진창이 된다. 1차대전 영화를 보면 돌격 명령이 내려진 후 참호에서 일명 ‘무인지대(No Man’s
Land·적군과 아군 진지 사이의 완충지대)’로 뛰쳐나간 병사가 진흙에 빠져 허덕이다가 총탄을 맞아 물구덩이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이었다. 이런 대치전을 끝낼 목적으로 1915년 4월 독일군이 먼저 독가스를 사용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더욱 살벌해졌지만 그전에도 전쟁은 충분히 참혹했다. 하지만 1914년 첫 번째 성탄 때는 참혹함이 아직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 적이지만 오래 대치하다 보니 서로 고통받는 처지라는 점을 이해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는 서로 이름도 알게 되었고 아침식사로 무엇을 준비하는지도 냄새로 알 정도가 되었다. 고위 장성들은 이런 점을 걱정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성탄절이 돌아왔다. 후방에서 전국적으로 위문품 보내기 운동이 벌어져 엄청난 양의 위문품이 계속 도착하자 전선의 군인들도 성탄절 분위기에 푹 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2월 19일 전선 일부에서 아침에 갑자기 아주 짧은 휴전이 이루어졌다. 양측이 모두 중간 무인지대에 방치되어 있는 전사자들을 묻자는 데 합의를 했다. 이런 경험이 바로 1주일 뒤에 있을 성탄절 휴전을 만들어 내는 단초가 되었다. 또 다음 날은 다른 곳에서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독일군이 돌격해 들어오다가 자신들 참호 근처에 쓰러진 영국군 부상병을 위험을 무릅쓰고 데려다가 치료를 해주기 시작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성탄이 가까워지니 병사들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인류애가 생겼는지 모른다. 전우의 시체를 거두어 같이 기도하면서 성탄절 휴전이 싹텄다고 볼 수 있다. 아래 인용이 그때 기도에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 시편 23편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새롭게 살리시고
주님 바른 지름길로 인도하시네/ 내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이 몸 주님 계시니 두렵지 않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해 주시니
내 원수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향기름을 머리에 발라주시고
내 잔이 넘치게 하시네/ 한평생 은총이 이 몸 따르오리니
오래오래 주님 궁에서 살으오리다.’
좀 드라마틱하게 상상해 보자! 유난히 추워진 잿빛 하늘 아래서 포탄으로 파인 물구덩이에 거꾸로 박혔던 전우 시체를 거두어 앞에 두고 머리 숙여 기도하는 장면을. 그것도 조금 전까지 총을 겨누던 양측 병사들이 말이다. 나무 한 그루 살아 남지 않은 진흙 들판에 울려 퍼지는 기도. 1차대전 영화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다. 정말 감동적이지 않은가?
사실 성탄을 앞두고 공식적인 휴전의 기회는 있었다. 당시 교황이던 베네딕트 15세가 12월 초 “성탄절 며칠간이라도 휴전을 하자”고 양측에 권유를 했다. 독일은 연합군이 동의한다면 할 용의가 있다고 했지만 연합군 측은 거부했다. 독일은 원래 유럽 다른 나라들보다 성탄을 더 기념한다. 그래서 독일군이 더 성탄을 평화롭게 지내고 싶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 독일은 성탄절 이브를 기념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성탄절 당일을 기념한다. 당시 영국군 사병들이 고향으로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성탄 전날 저녁에 독일군은 식사도 크게 하고 참호 위로 크리스마스 트리도 올리고 등불도 켜고 캐럴도 부르면서 분위기를 잡았다. 당시 AP뉴스는 ‘결국 연합군도 성탄절 무드에 젖었다’고 전했고 이 뉴스가 영국 신문에 크게 났다.
지금은 ‘고요한 밤(Silent Night)’이 성탄절 성가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는 영국에서는 잘 모르는 노래였다. 한 영국군 병사는 독일군이 부르는 독일어의 ‘고요한 밤(Stille Nacht)’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성탄휴전을 하고 나서부터는 이 노래가 영국에도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양쪽 군인들이 같이 불렀던 성가 중 하나는 ‘참 반가운 신도여(O Come, all ye Faithful)’였다. 그 노래를 같이 부를 때는 정말 성탄이구나 하는 느낌과 함께 독일군이 적군이 아니라 전우 같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고 했다. 노래가 주는 놀라운 마력이었다.
당시 같이 부른 노래 중에는 영국 노래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 스코틀랜드 노래 ‘이별의 노래(Auld Lang Syne)’, 독일 노래 ‘소나무야 소나무야(O Tannenbaum)’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노래들이 성탄 전날 밤늦게까지 양 진영에서 함께 불려졌다. 자신들이 아는 노래를 적군이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적군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내가 부르는 성가를 적군이 자기네 말로 따라 부르는 것을 듣고 영국의 한 사병은 ‘천둥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편지에 썼다. 악마 같던 저들도 인간이고 더 나아가 같은 성가를 부르는 기독교인이구나 하는 자각을 처음 하는 순간, 서로 죽이려고 싸워야 하는 사실이 너무 슬펐고, 같은 신을 믿는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웠고, 그들을 단순히 미워한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독일군이 먼저 참호 언덕에 크리스마스 트리(tannenbaum)를 올렸다. 영국군은 이를 보고 흡사 ‘극장 어둠에서 비상구를 가리키는 바닥 등(the footlights of a theatre)’을 보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비상 탈출구 불빛을 본 셈이다. 이렇게 독일군이 먼저 성탄 분위기를 잡았다는 데는 모두들 이의가 없다. 또 휴전 제의도 독일군 쪽에서 먼저 시작했고 더 적극적이었다는 게 양측 병사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당시 독일군이 전세가 자신들에게 더 유리하다고 느낀 게 휴전을 먼저 제의한 배경일지 모른다. 당시 임시로 지어진 연합군 참호에 비해 독일군 참호는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 스스로 자신들이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다고 자부했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분석했다. 승자의 여유였다는 말이다.
▲ 영국 스타퍼드셔주에 위치한 국립기념물식물원에 세워진 성탄절 휴전 축구 기념 조형물. / ⓒ 연합
병사들에 의한 ‘자발적이고 비공식적인 휴전’이 어떻게 처음 시작되었는지는 전투 지구마다 다르다. 서부전선 전체에서 일괄적으로 휴전이 이루어진 적은 없고 지구마다 각자가 알아서 휴전을 이룬 듯하다. 공식적으로 휴전을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내자고 결정한 곳도 있고 그냥 대충 합의한 곳도 있었다. 영국군 전사연구가들에 의하면 영국군 전선 3분의 2에서 성탄 평화가 있었다고 한다. 휴전이 합의된 곳에서는 ‘서로 공격을 멈추자’가 가장 우선적인 합의 사항이었다. 각자 참호에서 나와 어떻게 하자는 합의는 없었다. 전사자 시체 수습도 휴전 기간 가장 화급한 일이었다. 나와서 시체를 수습하다가 대화가 이루어졌고 그러다 보니 농담도 주고받게 되었다. 급기야는 담배니 소시지니 하는 선물과 군모·배지 같은 기념품도 교환했고 서로가 아는 전쟁 상황 정보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결국 그 유명한 성탄 휴전 축구시합으로 이어졌다.
휴전 시작의 한 예를 들어 보자. 한 지구에서 독일군 참호 위로 판때기 하나가 올라왔다. 서투른 영어(broken English)로 ‘너 안 쏘고 우리 안 쏘고(You no shoot, we no shoot)’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는 성탄 캐럴이 들리더니 노래가 끝나고 나서 능숙한 영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독일 황제군 중위이다. 영국 신사들! 이제부터 내가 참호 위로 올라설 터인데 그렇게 되면 내 목숨은 당신들 손에 달려 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당신들 쪽으로 걸어갈 터이니 당신들 장교 중 한 명이 중간으로 와서 나를 만날 것인가?” 처음에 영국군은 공격 전초의 위장술이라고 의심해서 모두 독일 참호 쪽으로 총을 겨눴다. 영국군 쪽에서 침묵이 계속되고 반응이 없자 두 번 세 번 요구를 하다가 독일군 장교는 드디어 참호에서 걸어 나와 “나는 기다린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용감하게 참호 밖에 우뚝 섰다. 그러자 영국군 장교 중 한 명이 독일군 장교의 용기에 기가 죽고 창피하고 정말 무서웠지만 더 이상 비겁하기 싫어서 죽을 용기를 내서 걸어 나가 중간에서 만나 휴전을 이뤘다.
다른 병사의 증언이다. “성탄절 전날 저녁 독일군이 먼저 ‘담배’ ‘푸딩’이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성탄절 축하! 좋은 영국군!’이라고 영어로 말을 건넸다. 그래서 우리 사병 둘이 참호 위로 올라가 독일군 쪽으로 걸어가 중간에서 4명의 독일군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가 성탄절날 사격을 하지 않으면 자기네들도 안 하겠다고 했다. 독일군은 시가와 와인을 주었고 우리는 케이크와 담배를 줬다. 그들이 돌아오고 나서 우리는 다시 나가 30명의 독일군을 만났다. 그들은 유쾌한 녀석(fellow·아주 친근한 표현)들이었다. 나는 기념으로 그들의 이름과 주소를 엽서에 적었다. 나중에는 장교들도 같이 따랐다. 독일군은 자신들의 배는 두 척밖에 침몰하지 않았는데 영국군 배는 30척이나 가라앉았다고 했다. 아마 독일군의 사기 침체를 막기 위해 그릇된 정보를 준 것 같았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알 때쯤 되면 상당히 충격을 받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양쪽 참호가 하도 가까워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은 중간 지역 무인지대를 ‘죽음의 덫(the death trap)’이라고 불렀다. 우리 참호 뒤에 폭격으로 부서진 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안에 자전거, 중산모, 밀짚모자, 우산 등이 있었다. 우리 병사들이 성탄절날 그런 것들을 쓰고, 들고, 타고 무인지대를 지나 독일군 진지로 넘어갔다. 그러자 독일군이 폭소를 터뜨렸다. 심지어는 여자 복장을 하고 건너간 사병도 있었다. 그날 저녁 독일군은 영국 국가 ‘주님은 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King)’를 하모니카로 연주해 주었다. 놀랍지 않은가?”
1915년 1월 9일 허트포드셔 머큐리지에 소개된 안 웨스트민스터 연대 소속의 브레지어 사수병의 편지이다. 이 정도가 전형적인 휴전의 모습이었고 심한 경우는 중간을 넘어가 상대방 진지로 가서 참호 안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 같이 술을 먹고 지낸 곳도 있다고 했다.
병사들의 편지에 나타난 상대방에 대한 감정은 거의가 다 동일했다. 특히 영국 군인들이 놀란 것은 수많은 독일군들이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다는 점이다. 특히 영국 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병도 많아서 아주 놀랐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 같은 게임을 했고 같은 맥주를 좋아했고 같은 벌판에서 공 하나를 두고 뛰었다. 우리는 군복 안에서는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비록 군복 모양은 달랐지만….’ ‘처음에 악수를 하고 대화를 시작하자 몇 년을 안 것 같은 친근감이 들었다. 우리는 흡사 길거리에서 우연히 친구들을 만나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수다를 떠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축구시합은 버려진 양배추밭에서 벌어졌고 독일군이 이겨서 상품을 가지고 갔다.’ 영국 병사들은 고향으로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물론 휴전이 실패한 지역도 있었다. 프러시안들이 독일군들과 같이 있는 경우는 많은 곳에서 휴전에 실패했다. 프러시아 군인들이 영국군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프랑스군들은 이런 무드에 잘 휩쓸리지 않았다. 프랑스 내에서 전투가 벌어지니 고향에 대한 향수도 적게 느꼈고 자신들의 땅을 점령한 독일군에 대한 원한이 더 크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10만여명의 양국 군인들이 휴전에 참여했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하지만 휴전이 태동되던 성탄절 이브에 80여명이 사망했고 성탄절날도 86명의 영국군이 전사했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결국 휴전이 전체 전선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양쪽 군대 고위층은 사전에 휴전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래서 일부 부대장들이 경고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축제 기간 중 군인들 사이의 기강해이가 전투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양쪽 사령관에게는 12월 26일 상황이 보고되었다. 상대방을 증오하도록 교육된 병사들이 자신들의 허락도 없이 휴전을 했으니 노발대발했고 일부 전선의 장교는 처벌을 받기도 했다. 이런 모든 사실은 당시 병사들이 매일 집으로 쓰는 편지를 통해 후방으로 퍼져 나가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아직 검열이 일반화되기 전이었다. 양국 국민들 사이에는 죽음의 들판에서 일어난 상상을 초월한 일에 대해 찬성과 반대도 있었지만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이었다고 신문은 기록하고 있다.
축구시합에 대한 설은 상당히 분분하다. 11명이 참가한 제대로 된 시합이 벌어져 독일군이 3 대 2로 이겼다는 설부터 ‘시합이 여러 개 있었다’ 혹은 ‘그냥 우르르 몰려 다니면서 떼축구(kickabout)를 했다’는 설도 있다. ‘어디선가 공이 나타났고 수백 명이 뛰었다. 규칙도 없었고 심판도 없었다. 그냥 대충 차는 식이었다.’ 떼축구를 증언한 병사의 편지는 ‘신발과 공은 흙덩어리가 되고 우리들의 옷도 진흙창이 되었다. 얼굴에 흙이 튀어 엉망이었는데도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있었다’라고 했다. 다른 증언들은 ‘축구공이 통조림 깡통이었고 어떨 때는 모래주머니의 모래를 빼고 뭉쳐서 차기도 하고 아주 드문 경우 진짜 공이 나왔다’고 했다. 당시 군화는 아주 크고 무거웠음에 불구하고 ‘그들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미 그때는 독일군 30만명이 전사했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시 각 부대에는 사진병이 있었다. 이들이 많은 사진기록을 남겼지만 유독 성탄절 축구 사진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병사들은 성탄절 휴전 후에는 위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적군들과 더 이상의 직접적 접촉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몇 시간 전에 함께 선물을 나누던 병사들에게 총을 겨누고 쏘려고 하지도 않았다. 양측은 먼저 발사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독일군은 영국군에게 ‘진지에서 머리를 낮추고 다니라’고 경고 겸 충고를 했다. ‘본부 장교가 사격을 명하고 있기 때문에 쏘지 않을 수 없지만 쏘고 싶지 않으니 진지 밖으로 제발 나오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성탄절 다음 날도 총성 한 발 없이 지나갔다. ‘양쪽 진지를 지키던 군인들을 전부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고 맨체스터 가디언지 파리 특파원이 1915년 1월 6일 보도했을 정도다. 휴전은 성탄절부터 새해까지 잠정적으로 이어졌고 전투가 ‘정상 영업(business as usual)’을 시작한 것은 1월 초순을 지나서였다.
그 다음 해에는 이런 휴전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전투는 점점 격렬해졌고 독가스까지 등장했다. 전쟁의 양상이 참혹해지면서 전술은 더욱 교묘해졌다. 순진한 인간애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지면서 더 이상 이런 휴전은 없었다. 전쟁은 그러고도 4년을 더 끌었고 1000만명 이상이 전사했다.
권석하 /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