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넝쿨이 남겨준 교훈
새벽녘 어렴풋이 눈을 떠자 이웃집 빌라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걸걸한 목청을 들어보니 택시 아주머니가 틀림없었다. 아침이라 나긋나긋 대화를 해도 시끄러울 판인데 스모선수처럼 몸집이 큰 여자가 걸걸한 목청을 뽑아내니 주위가 귀를 막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열어 놓은 창문을 닫을까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대화의 주된 내용은 우리 집 험담이었다.
‘ 여기가 자기들 쓰레기장인줄 알어, 호박넝쿨을 걷어놨으면 가지고 갈 일이지 여기다 내방쳐 놓으면 어떡하겠다는 거여“
그 순간 마음이 뜨금했다. 남을 헐뜯는 대화인줄 알다가 그 대화가 우리를 공격하는 험담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더구나 아침부터 여자 둘이서 남이 듣든 말든 우리를 험담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기분이 착잡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내가 실수한 일이 떠올랐다. 담장을 타고 올라간 호박넝쿨을 걷어내면서 빌라 쪽으로 넘어간 넝쿨들을 빌라 마당 한쪽에 내방쳐놓은 일이 있었다. 그렇다고 끝까지 놔두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 마당이 비좁아 잠시 놓아두다가 호박넝쿨이 바싹 마르면 우리 집 마당으로 끌고 와 땔감용으로 쓸 작정이었다. 더구나 빌라 아주머니의 성격을 너무 믿었던 것도 큰 실수였다. 스모선수처럼 육중한 체구에다 뒤뚱거리며 걷는 폼이 사나이처럼 호방해서 웬만한 일쯤은 눈감아 줄 수 있는 통 큰 사람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성격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덩치가 큰 사람도 사소한 일에 삐지고 속 좁은 사람도 때에 따라서는 느긋한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호박넝쿨 그 까짓것 가지고 운운해도 그것은 나의 생각일 뿐 빌라 아주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심각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남의 입장을 안중에 두지 않고 내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는 나를 두고 아내의 충고도 따랐다.
남에게 욕먹을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는 내 인생에서 쓰디쓴 약이 되고도 남았다. 그 때 내가 호박넝쿨 걷는 것을 알았으면 바로 우리 집 마당으로 끌고 왔어야 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아내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빌라 아주머니의 험담이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빌라로 갔다. 그 때까지도 빌라 아주머니는 다른 여자와 한 통속이 되어 험담을 늘어놓기 바빴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능글맞게 인사를 하고는
“미안해요, 호박 넝쿨이 마르면 나중에 우리 집 마당에 갖다놓고 땔감용으로 쓰려고 했는데, 미처 그 생각을 못했네요,”
갑작스런 내 말에 대화가 뚝 끊겼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빌라 아주머니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었다. 몹시 미안했던지 곧장 택시의 시동을 걸고는 횅하니 마당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막상 가서보니 호박 넝쿨이 한 줌 밖에 되지 않았다. 걷어낼 때는 줄기와 잎이 너풀거려 한 아름이었지만 땡볕에 말라 쪼그라들어 한 움큼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것을 놓고 두 여자가 아침부터 큰소리로 떠들어댔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런 사소한 것 가지고 떠들어댄다면 나에게도 할 말은 있다.
작년 초겨울 이었던가. 빌라 마당에는 하늘로 솟구쳐 오른 우람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한 아름 되는 밑동만 봐도 그 은행나무가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을 껴않고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은행나무 때문에 빌라 아주머니와 사사건건 충돌하는 일이 빚어졌다. 은행나무를 숨 막히게 뒤덮은 무성한 잎 때문이었다. 은행나무 그늘 때문에 우리 집 아래채와 마당은 늘 어두침침했고 가을에는 우리 집 마당으로 흩날려 들어온 은행잎들 때문에 늘 지저분했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베어내라고 틈만 나면 다그쳤지만 빌라 아주머니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빌라에 살기만 했지 땅은 자기 소유가 아니라서 은행나무를 맘대로 베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은근히 일을 떠넘기는 눈치였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식구들과 함을 합쳐 은행나무를 베어냈는데 그 때까지도 이렇다 저렇다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없었다. 그래도 빌라 아주머니가 육중한 몸집만큼 통이 크고 말소리도 시원시원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여태까지 지내왔는데 오늘 아침 그런 일이 터지고 말았으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빌라 아주머니의 입방아에 오르면서 내년부터는 담장 아래에다 호박 모종을 하지 않기로 했다. 호박 넝쿨이 담장을 넌출넌출 휘젓는 것을 보면 갓난아기의 머리통만한 호박 열매 몇 개쯤은 딸 것 같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허황된 생각이었다. 그런 호박은 고사하고 함지박만한 꽃만 팡팡 터뜨리다가 허망하게 꽃을 접는 일이 반복되었다.
호박은 넝쿨을 걷어내는 일이 귀찮기도 하지만 담장너머 빌라까지 침입해 넝쿨을 넌출대는 일은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보다는 해를 입히는 일이 다반사였다. 호박 반찬을 해먹고 싶으면 담장에다 호박 넝쿨을 올리기보다 차라리 시장에 가서 사 먹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