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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실패(失敗)는 없다 -1
새벽이 되었다. 백리웅은 선향지를 울릴 수밖에 없었다.
백리웅은 말하지 않고 조용히 떠나려 했는데, 선향지가 여인 특유
의 예민한 육감으로 이별을 느끼고 문 밖까지 따라 나온 것이었
다.
"조…조심하세요, 흐흑……!"
"울지 마시오, 부인!"
백리웅은 선향지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일찍 다녀오십시요!"
"핫핫, 친구를 찾아가는 것이니 그리 심려 마오!"
백리웅이 환히 웃었다.
"듣자니 최근 무림인들이 서로 싸운다고 합니다. 자객방이란 흉신
악살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마구 죽인다 하니 제발 몸조심하세요!"
"걱정 마오. 그리고 올 때 꽃신 하나를 사올 테니, 몸조리나 잘하
고 나를 기다리시오!"
"예!"
"자, 그럼 나는 가겠소!"
백리웅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느릿느릿 걸어 길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부터 그는 이청운이 아닌 대살수가 되어 있었다.
슷…, 그는 순간적으로 칠십 장을 날아올랐다.
성문 밖, 열 필의 한혈마(汗血馬)와 아홉 사람이 백리웅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표사( 士) 차림이었다.
화산(華山)으로 가는 길이다. 이틀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화산 쪽으로 갔다. 대부분이 강호인이고 강호인 중에서도 배
분(拜分)과 무명(武名)이 지극히 높은 사람들뿐이었다.
합비(哈肥)의 남궁세가(南宮勢家) 고수들,
남창(南昌) 해룡방(海龍幇)의 고수 오십사 명,
청매보(靑梅堡)의 쌍교(雙嬌),
감리신군(坎離神君) 이웅(李雄)…….
길을 따라간 사람의 이름을 적는다면 무림영웅보(武林英雄譜) 한
편이 만들어질 것이다.
휘휙-휙! 하오경. 길모퉁이를 돌아나오는 열 개의 인영이 있었
다. 모두 푸른 옷을 걸치고 있는데 나이가 서른에서 마흔 사이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종류가 다른 기문병기(奇門兵器)를 지
니고 있는데, 무림에서 손꼽히는 수준의 신법으로 관도를 따라 치
달려 갔다.
"창궁령(蒼穹令)이 발동되다니… 신비전에서 벌어진 일이 창궁령
이 발동될 정도로 화급한 일이란 말인가?"
"변황의 무리들이 숨어 있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지!"
"어쩐지 불길합니다, 사형들!"
열 사람은 대강 이북을 질타하는 고수들이었다.
선풍십걸(旋風十傑). 이들은 십인방(十人幇)이라 할 수 있을 정도
로 꽤나 큰 세력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직접 관장한다고 할
수 있는 표행( 行)의 수가 스물다섯이나 되고 그들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문파만 해도 일곱 개였다.
휘휙-휙! 선풍십걸은 두 줄로 몸을 날렸다.
비조(飛鳥)보다도 빨리 길 위를 달리는 사람들.
저 멀리 화산이 그들을 굽어보고 있고, 하늘 위에는 노을에 젖는
붉은 구름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비라도 뿌릴 듯 음산한 날씨였다.
스슷-슷-, 선풍십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또 하나의 모
퉁이를 돌았다. 바로 그때 스슷-슷-, 어디에선가 송침(松針) 한
무더기가 날아들었다.
"엇?"
"암습이다!"
선풍십걸이 동요하며 일제히 몸을 위로 끌어올리려 하는데, 피잉
-핑! 송침은 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들
어 그들의 혈도 깊이 파고들었다.
아아, 전설로만 알려지고 있는 다라비엽도(茶羅飛葉刀)가 아니라
면 그 어떤 암기술도 이렇게 절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암기를 던진 사람은 동시에 열 곳을 점(點)한 것이다.
선풍십걸은 혼혈을 점혈당해 길게 드러누웠고, 그 순간 열 사람이
나타나 그들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는 쓰러진
사람들과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소지품을 취하라!"
누군가 단호하면서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엣! 대살수!"
"훗훗, 이자들은 행운아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쓰러졌기에 대혈
겁(大血劫)을 모면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차게 내뱉는 목소리들. 바람은 더욱 강하게 불고 있었다.
서악(西嶽)이라는 화산(華山). 그곳에서 가장 빼어난 봉우리라면
누구나 선인장을 친다.
선인장은 독특한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손(手)이
었다. 아아, 하늘을 훔치려 하는 다섯 손가락이여! 그 누구의 한
으로 인해 만들어진 봉우리일까?
선인장 중턱, 관문(關門) 하나가 있고, 그 근처 많은 사람들이 서
서 관문 쪽으로 다가서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길가에는 방문(榜文)이 내걸렸고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도 보였다.
- 창궁혈의맹(蒼穹血義盟)이 있는 한, 중원대의(中原大義)는 천
추(千秋) 내내 이어지리라!
- 의풍(義風)은 멈추지 않으리라!
처음부터 끝까지 비밀인 창궁혈의맹. 그곳의 비밀집회가 화산 선
인장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선풍십걸은 백오십 번째 방문자로 관문을 찾았다.
선풍일걸(旋風一傑) 이하수(李何秀)!
그는 중년의 무사로 체격이 듬직하고 눈매가 부리부리했다. 그의
손에는 홍색 소기(小旗)가 들려 있었다.
<홍기령(紅旗令)>
그런 글이 한쪽에 있었다.
<창궁혈의로 대중원을 지키리라! 목숨을 던져 의를 이룩하리라!>
피를 뜨겁게 끓게 하는 글귀가 다른 편에 적혀 있었다.
창궁혈의맹에는 오색(五色) 서열이 있다. 금색(金色)은 최고의 서
열이다. 그 아래에는 은색(銀色)의 서열이 있고, 그 아래가 홍색
이었다. 그 아래는 청색(靑色), 최하의 서열은 자색(紫色)이었다.
비록 자색 서열이라 해도 무림계에서는 일류(一流)의 지위에 해당
한다.
관문주는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는 홍기령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이다!"
그는 선풍십걸을 보고 부드러운 눈빛을 던지다가 손을 가볍게 쳐
들었다.
"예-엣, 여기 대령했습니다!"
순간 이 장 밖에 있던 두 명의 청의 동자가 쟁반을 들고 관문주
쪽으로 다가섰다.
쟁반 위에는 세 종류의 면사가 있었다. 홍색 면사, 청색 면사, 남
색 면사.
관문주는 그 중에서 홍색 면사 한 장을 쳐들어 선풍일걸에게 전하
고, 이어 아홉 개의 청색 면사를 쳐들었다.
"이걸(二傑)에서 십걸(十傑)까지는 이것을 쓰시오. 자아, 어서 이
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회의장으로 가시오. 회의는 내일 아침 거행
될 예정이나, 입장은 곧 완료될 것이니 속히 들어가시오."
"문상(文相)은 오시었소?"
일걸이 물었다.
"글쎄."
"……."
"듣기에는 소문상(少文相) 남삼(藍衫) 서생이 회의를 주도한다고
는 하나, 자세히는 모르겠소. 하여간 곧 기문진이 펼쳐질 것이니
어서 들어가시오!"
관문주는 성격이 음침한 자였다. 그는 거지를 내몰듯이 선풍십걸
을 관문 뒤쪽으로 내몰았다.
관문 뒤에는 매림(梅林)이 수십 리에 걸쳐 만들어져 있었다. 놀라
운 것은 그 중 반이 인공이라는 것이다.
'건(乾)과 곤(坤)이 뒤바뀌어져 있다.'
선풍십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흠, 용담호혈(龍潭虎穴)이다. 하나, 우리 열 사람을 막기에는…
너무 허약하다.'
그는 누구인가? 어이해 뼈가 얼음으로 된 사람인 양 이처럼 차가
운 기운을 흘려내는 것일까?
매림 가운데에는 정사(精舍)가 여러 개 있었다. 그곳은 평상시 기
문진으로 외부와 차단되는 곳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금지(禁地)라
고 부르기에 서슴지 않았다.
무림 십대세력(十大勢力) 중 한 곳, 문향원(文香院).
창궁혈의맹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신비전보다 훨씬 더한 곳이고,
구파일방(九派一幇) 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겉보기에는 방비가 별로 없는 듯했다.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매화
나무와 날아갈 듯한 처마뿐이다. 그러나, 고수라면 잠복한 매복들
의 나직한 숨소리를 백여 군데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문향원은 두 곳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본래 문향원 사람은 내전
(內殿)에 머물고, 창궁혈의맹의 일원으로 온 사람들은 객사당을
중심으로 한 외전(外殿)에 머문다.
매복들은 내전과 외전 사이, 그리고 외전 둘레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다.
이경(二更). 흑운(黑雲)이 문향원 주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릉! 꽈르르르-릉! 별안간 굉음과 함께 진무(陣霧)가
일어나 문향원 근처를 휘감았다. 거대한 기문진 일곱 개가 동시에
나타나 문향원을 철저하게 격리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문향원에 왔으나, 전혀 시끄럽지 않았다. 평소 안면
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면사(面絲)를 쓰
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창궁혈의맹은 변황 세력으로부터 철저히 보안을 유지한다는 구실
로 맹내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비밀로 만들었다. 맹에서 중요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맹의 총인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조
차도 알려지지 않았다.
암흑 속, 두 개의 눈이 번쩍이고 있었다.
'일단 잠입해서 찾아보자. 큰 싸움이 벌어져야 한다면… 밤이어
야 수하들이 안전하게 빠져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너무나도 차가운 눈빛. 그런 눈빛을 던질 사람은 천하에 단 한 사
람이다.
바로 대살수(大煞手).
이름을 창궁혈의맹 뇌옥에 묻고, 검을 쥐며 불사신이 된 대살수
백리웅.
그가 이 안에 나타난 것이다.
대중원 제1권 끝- 제10장 실패(失敗)는 없다 -2
대지는 완전한 어둠에 묻혔다.
문향원(文香院). 언제부터인가 문향원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봉
파중인 소림사(少林寺) 이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세인들은 문향원
안에 가장 소장 권수가 많은 서고가 있다고 떠들었다.
삼경(三更)이 될 때, 선풍일걸(旋風一傑)로 화신(化身)해 문향원
의 객사로 잠입한 백리웅은 정좌 상태로 있다가 몸을 일으키고 있
었다.
그는 이제껏 천이육합통령술(天耳六合通靈術)을 시전해 반경 오
리 안의 동태를 살폈었다.
'지금이 때다.'
그는 일어나 침상 위 이부자리를 두둑하게 만들어 둔 다음, 창문
을 통해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무음신행술(無音神行術)이라는 야유절기(夜遊絶技)를 이용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밖으로 날아올랐다.
숙소를 나온 그는 좌우를 살피지 않고 곧바로 숲 안으로 날아들었
다. 잠시라도 주저하다가는 매복(埋伏)에게 발각당하고 만다.
쏴아아, 바람이 불어 숲을 흔들고 있었다. 도처에 매복이 있고,
매복이 없는 곳에는 은사(銀絲)가 처져 있어 건드리기만 해도 소
리가 난다.
하나, 중요한 것은 매복들의 마음가짐이었다.
누가 감히 문향원 안으로 잠입하겠는가? 수천 쌍의 눈이 지키고
있는 문향원이 아닌가?
쏴아아-, 바람 소리가 강하게 날 때 백리웅은 흑건(黑巾)으로 얼
굴을 가린 채 높은 나무 꼭대기에 머물러 있었다.
나뭇잎이 유난히 많은지라 그의 모습은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그는 서른여섯 가지의 잠입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중인의 눈을 속
이고 잠입해 간다는 것은 백리웅이 지니고 있는 장기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혈의맹의 문상(文相)이라는 자를 죽이고 태상(太相)이라는 자의
거처를 알아내야 한다.'
백리웅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휘휙-휙! 절정 고수들이 약간의 시차(時差)를 두고 문향원의 내
전과 외전 사이를 주유하고 있었다.
문향원의 진세는 완벽했다. 허점(虛點)이라고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백리웅은 그것을 허점으로 만들어 진세와 완벽함 가운데
있는 한순간의 허를 노린 것이었다.
쏴아아, 바람이 나무숲을 흔들 때 백리웅은 몸 주위에 흑무(黑霧)
를 일으키며 내전을 향해 신형을 폭사시켰다. 그는 찰나지간에 오
십 장을 가로질렀다. 누군가 그것을 본 듯 나직막이 중얼거렸다.
"안개가 이상하게 흐르는군."
슷…, 백리웅은 문향원 안의 건물 구조를 모두 다 알고 있는지라
주저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문향원의 내전은 구궁방위(九宮方位)에 따라 건축이 되었다. 구구
(九九) 팔십일(八十一). 도합 여든한 개의 누각(樓閣)이 질서정연
하게 건립되었고, 요소요소마다 매복이 있었다.
백리웅은 매복들이 자리를 바꾸는 찰나의 틈을 절묘하게 이용해
가며 문향원 심장부로 들어섰다.
그는 그곳에서 한 채의 대루(大樓)를 볼 수 있었다.
<문창천기루(文昌天機樓)>
누각은 구 층 높이이고, 위층으로 갈수록 면적이 줄어들어 멀리서
보면 하나의 첨각(尖角)을 이룬다.
문창천기루는 중원천하를 칠 성이나 장악했다는 창궁혈의맹의 위
세를 역력히 드러냈다.
'이것을 세운 자는 천하의 모든 기관학(機關學)에 정통한 자이리
라!'
건물의 위대함에 압도당한 순간 백리웅은 혈뇌옥에서의 지옥 같은
나날을 떠올렸다.
그를 완전히 변모케 했던 저주의 나날들. 그 나날을 강제로 만든
자들이 바로 저곳에 있는 것이다.
쉬쉭-쉭! 문창천기루 근처에는 칠십이지살대(七十二地煞隊)라 불
리는 일흔두 명의 검수(劍手)가 있는데, 그들은 언제나 멈춰서는
법없이 일정한 속도로 문창천기루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만에 하나 기변(奇變)이 있을지 모르니, 새벽이 될 때까지 한순
간도 방심하지 말고 지켜라!"
"장로회의(長老會議)가 열릴 때까지 이변이 있어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간간이 호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휘휙-휙! 칠십이지살대는 칠십이 쌍의 눈으로 일흔두 곳의 방위
(方位)를 노려보며 빙글빙글 대루를 보호했다.
백리웅은 들어갈 길을 찾지 못했다.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는 절대
로 들어가지 못할 천라지망(天羅地網)! 창궁혈의맹의 명성은 과연
허명이 아니었다.
'문상이라는 자가 안에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면 수하들로
하여금 난동을 부리게 한 다음, 단신 잠입할 수 있을 텐데…….'
백리웅은 숨을 멈춘 채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
사경(四更). 감춰졌던 달이 나타나며 근처가 전에 비할 수 없이
환해졌다. 오래지 않아 새벽이 될 것이다.
백리웅은 꼼짝도 하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그는 돌덩이로 변한
것 같았다.
영주가 내린 명령은 애초에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실패한다는 것
은 당연한 일이다. 단 하나의 가능성이라면 일을 해 나가고 있는
사람이 고금에서 가장 지독한 절기를 익힌 백리웅이라는 것뿐이었
다.
오경(五更). 드디어 주위가 환해지기 시작했다.
밤을 새우며 천둥 같은 수비망을 쳤던 사람들의 입가에는 한 줄기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새벽이 시작된 것이다. 밤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깨어나는 시각.
삐이이-익! 갑자기 단조로운 호각 소리가 나며 밤새 진열을 흐트
리지 않고 매복을 섰던 칠십이지살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그리고 밤새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문창천기루의 문
이 열리며 서른여섯 명의 갈포 대한들이 걸어 나왔다.
"핫핫, 밤새 수고들 했네!"
"이제는 우리 문향삼십육천강수(文香三十六天 手)가 수비를 맡을
것이니, 걱정 말고 푹 쉬게!"
"헛헛, 자네들도 맹에 충성을 오래 하면 밤에 매복을 서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네!"
삼십육천강수들. 이들의 무공은 칠십이지살수들에 비해 한 단계씩
높다. 나이는 대부분이 사십 전후였다. 태양혈(太陽穴)이 세 치
정도 두둑한 자들이 태반이고, 몇몇은 신광(神光)이 안으로 갈무
리될 정도로 고강했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을 때 휙! 얼굴을 은사(銀絲)로 가린 자 하
나가 바람처럼 날아올랐다.
그의 손에는 영패(令牌) 하나가 들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
자 마자 얼른 허리를 숙였다.
"소문상(少文相), 예정대로 오시는군요!"
"혈의무한(血義無限)! 천세정의(千歲正義)!"
천강검수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였고, 은색 면사로 얼굴을 가린 남
의인(藍衣人)은 고갯짓으로 응대하며 문창천기루 안으로 들어갔
다.
문창천기루는 장로회의가 열리기로 예정된 장소였다.
장로회의가 열리는 이유는 하나. 신비전이 파괴되고, 정체 모를
오대죄수(五大罪囚)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창궁혈의맹의 장로들은 서로간의 얼굴과 신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한 철저한 비밀 유지가 중원천하의 제패를 노리는 변
황의 위협으로부터 창궁혈의맹을 보호하는 힘이었다.
삼십육천강수들이 소문상이라는 자를 마중할 때, 두 시진간 미동
도 하지 않고 있던 백리웅의 입가에 한 줄기 차가운 미소가 떠올
랐다.
'소문상이라면, 문상이 있는 곳을 알 것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백리웅은 손을 품에 넣었다. 그는 붉은 구슬 하나를 꺼낸 다음,
숨을 멈춘 상태에서 그것을 힘껏 집어던졌다.
그것은 던져지는 힘에 비해 비교적 느리게 허공을 갈랐다.
이 장(二丈)… 사 장(四丈)… 적주(赤珠)는 오 장 정도 천천히 날
다가 갑자기 꽈꽝!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삼 장 안을 잿더미로 만
들었다.
우르르르-릉- 꽈르르르-릉-, 불기둥이 일어나며 근처가 대낮
처럼 환해졌다.
"어엇, 갑자기 무슨 일이냐?"
"조심해라!"
"신비전에 나타난 자들도 화탄(火彈)을 잘 썼다고 들었다!"
휘휙-휙! 사방에서 고수들이 몰려들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때였다. 꽝-꽝-꽝! 꽤 먼 곳에서 또다시
폭발음이 일었다.
우르르르-릉- 꽝-!
"아아-악!"
"살…살수들이다!"
"크으윽, 선풍십걸이 미쳤다!"
밤새 고요하던 문향원이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객실 안에 머물러
있던 자들 중 몇몇이 갑자기 암기를 던지며 밖으로 날아올랐기 때
문이었다.
삐이이-익!
"천라지망을 쳐라!"
"모두 잡아야 한다!"
수백 군데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 가운데 매복해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나타냈다.
대혼돈(大混沌). 문향원 전역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휘말렸을
때, 백리웅은 문창천기루의 오 층 창문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구천살수대장(九天煞手隊長)에게 힘으로 뚫고 나가라는 명령
을 내렸던 것이다.
'혼란은 곧 가라앉는다. 그러니 반 시진 정도의 여유밖에 없다.'
백리웅은 텅 빈 방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밖은 소란스러울 대로 소란스러워졌다. 백리웅은 지체하지 않고
텅 빈 방문을 열고 통로로 걸어 나갔다.
슷…, 그가 미끄러지듯 육 장 정도를 갔을 때, 갑자기 그의 앞을
가로막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엇, 그대는 누구지? 홍면사(紅面絲)는 여기 들어올 수 없는데?"
한 사람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오색 면사가 아닌, 다른 색깔의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녹색 면사! 그것은 그가 문향원 내부 사람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
다.
"훗훗, 그럼 자네 것을 쓰면 되지 않겠는가?"
백리웅은 웃으며 탄지미심인(彈指眉心印)을 쳐냈다. 팟! 경미한
파공성과 함께, 나타난 사람의 입이 가볍게 벌어졌다. 백리웅의
일지가 그의 뇌수(腦髓)를 순식간에 태워 버린 것이다.
백리웅은 재빨리 금나수를 써서 그의 얼굴에서 녹색 면사를 벗겨
내 자신의 얼굴을 가린 다음 몸을 더 빠르게 날렸다.
문향천기루 지하, 벽이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거대한 석실 하나가
있다.
그 안에는 하명(下命)을 기다리며 장로회의에 모인 창궁혈의맹의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수는 일흔다섯. 모두 면사로 얼굴을 가리
고 있는데, 대부분이 면사 아래로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
다.
석실은 외부와 소음이 철저히 차단되도록 건축되어, 설사 밖에서
지진이 난다 하더라도 무덤 속같이 조용할 것이다.
<창궁혈의(蒼穹血義) 천년무적(千年無敵)>
붉은 털방석에 그런 글이 적힌 채 동쪽 벽에 걸려 있었다.
그 아래, 남색 옷을 걸친 사람 하나가 서서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
다.
소문상(少文相). 그는 창궁혈의맹에서 총순찰(總巡察)과 같은 지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체격이 조금 연약해 보이는 자로, 언제나 팔짱을 끼는 습관이 있
었다.
그는 지금 남이 볼 수 없는 얼굴을 심각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그
의 눈에서는 면사를 태울 듯한 청광(靑光)이 폭사되었다.
"장로들은 동요할 것 없소이다. 적도들이 맹도(盟徒)로 화신해 난
입한 모양이나… 소란은 곧 진정될 것이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
창궁혈의맹의 장로들은 고개를 약간 끄덕거렸고, 그 중의 몇 사람
은 바로 옆 사람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한숨 을 쉬었다.
외부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분위기는 침잠되어 있었다.
심각한 회의이기 때문일까? 사람들의 눈빛은 불신의 빛으로 점철
되어 있을 뿐이었다.
소문상은 팔짱을 낀 자세로 이야기했다.
"자객방(刺客幇)이라 불리는 살수 집단은 맹도들의 도움이 있어야
단시일 내에 토벌할 수 있다는 문상의 말씀이 있었소이다!"
"……."
"으으…음!"
반 정도의 장로들이 야릇한 한숨 소리를 냈다.
소문상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좌중을 쓸어본 다음 말을 잇는
다.
"별도로 비밀첩(秘密帖)이 전해질 것이니, 이후의 모든 일은 거기
적힌 대로 따라 행하십시오!"
"……!"
"그리고 오늘 여러분께 신임 부순찰(副巡察) 한 분을 소개하겠
소!"
그 말이 채 여운을 맺기 전 스슷-슷-, 허공에서 한 사람이 불쑥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자신의 신법을 뽐내려는 듯 세 가지 다른 신법을 멋들어지게
시전하며 소문상 곁에 내려섰다.
몸매가 날렵한 여인인데, 얼굴을 은사로 가리고 있었다.
장로들은 전혀 의외라는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부순찰이라는 중임을 맡기에는 체격이 너무 왜소하다 여기는 것일
까? 그들의 눈빛에는 의혹의 빛이 가득했다.
여인은 그것을 아는 듯 갑자기 내공의 힘을 발휘했다.
우지끈! 그녀의 몸이 돌바닥을 뚫고 일 장 깊이 파고들지 않는가!
"호호, 이 정도면 됩니까?"
여인은 돌을 일 장이나 부숴 버린 다음 몸을 끌어올렸다.
"대…대단하군."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둔석비기(遁石秘技)이다! 부순찰의 역할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다!"
장로들은 그제서야 회의의 눈빛을 거두었다.
내공의 힘은 체격의 크기와는 별개의 것이다.
무림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한 여인이 창궁혈의맹의 부순찰로
당당히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모두 놀라는데 단 한 사람,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
다.
'운향(雲香), 들어가서는 안 될 길로 들어섰구나.'
한 사람이 뒷줄에 있었다. 그는 장로 자격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만일의 일에 대비한 호위무사의 신분으로 석실로 드는 문가를 지
키고 있었다.
'아아, 네가 문향원 사람이 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구나.'
처음 모습을 드러낸 부순찰에 대해 그만은 익히 알고 있는 듯했
다.
하여간 장로회의는 외부에서의 기변으로 인해 예정보다 일찍 개최
되었고, 일찍 마무리지어졌다.
소문상과 부순찰은 나란히 석문 쪽으로 갔다. 둘은 아주 다정해
보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할일을 다한 듯했다. 그들이 단상을 비운 후,
노년으로 보이는 복면인 다섯이 나타나 장로들에게 이러저러한 것
을 말하기 시작했다.
문향(文香) 오장로(五長老).
이들은 천하대세를 지도하고 있는 위치에 있었다. 개개문파는 이
들이 정한 바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창궁혈의맹에 속한 문파는 언제부터인가 창궁혈의맹이 정하는 대
로 자신들의 세력을 움직여야 했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쳐 이룩
된 맹의 세력 확대 작업의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석문 앞, 소문상과 부순찰이 다가서자 녹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
던 무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끼이이-익, 그리고 문 바로 곁에 있던 무사 두 명이 힘을 합해
이 장 두께의 문을 활짝 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문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슷…, 그들 뒤쪽으
로 경미한 파공성이 났다.
호위무사 하나가 갑자기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십칠검(十七劍), 무슨 짓이냐?"
"아…아니? 저…저자는 십칠검이 아닌 것 같은데?"
호위무사들이 깜짝 놀랄 때였다. 휘이이-잉! 십칠검의 양소매가
흔들리며 두 줄기 경력(經力)이 사나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와 호
위무사들을 휩쓸었다.
꽈르르르-릉!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무사들이 추풍낙엽(秋風落
葉)처럼 흩어졌다.
"어이쿠우!"
"가…가짜였다!"
"어…어느새 이 안으로 들어왔단 말인가?"
무사들이 휘청일 때, 소문상과 부순찰은 뒤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경악하며 신형을 틀고 있었다.
"누구냐?"
"가짜라니?"
두 사람이 눈길을 돌릴 때였다.
휘이이-잉! 흐릿한 연기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서더니, 둔탁한
소리가 잇따라 터져 나왔다.
파팟-팟! 수십 줄기의 지력이 펼쳐지며, 두 사람의 허리가 동시
에 꺾여졌다.
"으윽!"
"크으으……."
두 사람이 신음 소리를 내는 바로 그 순간 괴영이 다가섰다. 괴인
은 그들의 몸뚱이를 양손으로 낚아채며 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모든 일은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가히 탄지지간(彈指之間)에 두
사람이 납치되고, 이십여 명이 피를 토하며 나뒹군 것이다.
휘이이-잉! 괴인은 벌써 통로 열 개를 돌아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삐이이-익-삑!
"통로를 차단하라!"
"저…저렇게 빠른 자가 있다니?"
호각 소리는 괴인이 문창천기루를 빠져 나간 후에야 사방으로 퍼
져 나갔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단 한 사람을 막지 못하고 마
는 것이다.
번개보다 빨리 날아 도망쳐 간 자. 그는 단 오초(五招)만을 사용
해 창궁혈의맹의 근 일백 년 전통을 철저하게 유린해 버린 것이
다.
< 대중원 제1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