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4. 12
2019년 10월의 어느 날, 광고회사에 다니는 김진실씨는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1년 전 프랑스 배낭여행에서 만났던 영국인 친구 윌리엄이 한국에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도, 성(性)도 달랐지만 둘은 죽이 너무 잘 맞았다. 게스트하우스 주방에서 우연히 만나 컵라면을 먹으며 시작된 둘의 대화는 밤새도록 이어졌고 다음 날부터는 마치 십년지기처럼 파리 시내를 쏘다니며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다. 귀국 후에도 가끔 이메일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던 터라 재회의 기쁨은 남달랐다. 황혼이 깔린 인사동에서 만난 두 사람은 파전에 막걸리를 곁들이며 밀린 수다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다음은 요약한 둘의 대화.
윌리엄 : 한국의 가을은 정말 아름답네. 도시가 마치 잘 그린 풍경화를 보는 것 같아.
김진실 : 하하, 원래 남의 것이 좋아보는 법이랍니다.
윌리엄 : 좀 전에 광화문을 구경하다 왔는데 거긴 어떤 곳이야?
김진실 : 경복궁이라는 궁궐의 정문이야. 옛날 왕이 살던 궁궐이지.
윌리엄 : 아, 그렇구나. 광화문 앞에서 동상을 두 개 봤는데 그 사람들은 누구?
김진실 : 의자에 앉아 책 들고 있는 사람은 세종대왕이고 칼을 차고 있는 서 있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 영국으로 치면 넬슨 제독 같은 인물이지.
윌리엄 : 어째 포스가 남다르다 했네. 그럼 세종대왕이 대한민국을 만든 사람인가?
김진실 : 아니, 세종대왕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그 전 봉건 왕조인 조선의 왕이야.
윌리엄 : 그럼 진실이가 예전에 말했던 헬조선의 왕?
김진실 :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아 그게...헬조선은 그 조선이 아니라...대한민국을 말하는 건데...
윌리엄 : (놀라며) 여기가 헬조선이라고?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김진실 : (더듬더듬) 아, 그게 다 잘 사는 게 아니라...힘들고 못사는 사람들도 많거든.
윌리엄 : 모든 사람이 다 잘 사는 그런 나라가 세상에 있나? 그건 그냥 이상향일 뿐이잖아.
김진실 : 뭐 그렇기는 하지만...
윌리엄 : 그럼 대한민국을 건국한 사람 동상은 어디 있어?
김진실 : (또 말문이) 없어. 그게..저...독재를 하다가 쫓겨났거든. 우리 민족이 원래 민주주의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까. 하하하.
윌리엄 : (갸우뚱) 독재를 했든 뭘 했든 나라를 세운 건국의 아버지인데 내가 보기엔 좀 이상하네. 그럼 이순신 장군도 조선이라는 나라의 장군이야?
김진실 : (환해지며) 응, 우리나라를 일본의 침략에서 구한 인물이지.
윌리엄 : 둘 다 조선시대 사람들? 그럼 광화문 광장에 대한민국과 관련된 인물은 없어?
김진실 : ...뭐 그런 셈이지.
윌리엄 : 이렇게 잘 사는 나라를 만든 사람들의 동상이 없다고?
김진실 : (갑자기 술이 마구 당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런 얘기 하지 말고 우리 건배~.
윌리엄 : 하하, 그러지 뭐 (잔 들다 말고 갑자기 생각난 듯) 그런데 광화문 광장에서 내가 목조건물을 하나 봤거든. 뭐래더라? 무슨 기억 공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김진실 : 아, 그건 기억, 안전 전시 공간이라고, 사람들을 추모하는 장소야.
윌리엄 : 오우, 멋지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기리는 나라가 진짜 선진국이지.
김진실 : (아, 대화가 자꾸 왜 이렇게 가냐) 그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아니고...
윌리엄 : ...?
김진실 : 세월호라고,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윌리엄 : 선박 사고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라고?
김진실 : 그렇지....뭐...
윌리엄 : (또 갸우뚱)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의 얼굴 같은 곳이잖아.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하면 제일 먼저 찾는 상징적인 장소인데 그런 조형물이 있다는 건 좀 납득이...
김진실 : (드디어 할 말이 생겼다) 희생자들이 억울하게 죽었거든. 대통령이 안 구하는 바람에.
윌리엄 : 쯧쯧, 그랬구나. 그럼 대통령이 잠수부 출신이야?
김진실 : (살짝 미칠 것 같다) 아, 그건 아니고...
윌리엄 :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중이지만 쉽지 않다) 그 대통령은 어떻게 됐어?
김진실 : 감옥에 있어. 기업인들에게 뇌물을 받았거든.
윌리엄 :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정치인들이 뇌물을 받는 건 절대 용서 못하지. 그런데 뇌물은 얼마나 받았어?
김진실 :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다) 음, 그게..얼마더라....몰라, 하여간 받았대.
윌리엄 : (진땀을 흘리는 진실을 보니 슬슬 미안해진다) 내가 괜한 걸 물었나보네. 우리 딴 얘기하자.
김진실 : (아이고 살았다) 그래, 자, 건배~.
그날 저녁 김진실씨는 수없이 건배를 외친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의식불명 전 김진실씨가 윌리엄에게 들은 마지막 말은 ‘대한민국은 참 이상하지만 매력 있는 나라’였다. 며칠이 지나자 ‘매력 있는 나라’라는 말은 희미해지고 ‘이상한’이라는 형용사만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 이 글은 가까운 미래 어떤 날을 가상으로 써 본 것이다.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천막이 철거되고 추모시설이 조성된다. 이 시설은 목조건물 형태로 내부에는 세월호를 추모하는 전시물이 놓인다고 한다. 서울시는 내년 초부터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추모시설을 임시로 둘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지만 유족들은 상설화를 주장하고 있다. 글쎄다. 아무리 임시라지만 설치했던 시설을 들어내는 것이 과연 쉬울까. 어쩌면 우리는 참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지만 우리만 모르는, 앨리스도 없는 그런 이상한 나라에서.
남정욱 /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