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03. 06
음지에서 자라나 더 옹골찬 '베어스 미라클'
1990년대의 베어스는 해마다 신인 선발에서 실패를 겪어온 팀이었다. '안목' 때문이었든 '운' 때문이었든, 연고지로 서울을 공유하는 트윈스에게 해마다 신인 최대어를 빼앗겨왔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90년대 초중반만 놓고 보자면, 그렇게 놓친 대표적인 선수가 이상훈과 유지현이었고, 그들은 각각 20승과 신인왕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따내며 트윈스 전성시대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매번 스타플레이어의 영입에 실패하며 곳곳 포지션마다 선수난을 겪었던 베어스가 한 치 물러섬 없이 트윈스와 '서울 라이벌전'을 벌이며 선두를 다투는 '기적'이 있었고, 그 기적이 90년대 중반 프로야구 500만 관중시대의 밑바탕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적의 핵심은 이상훈에게 밀리지 않았던 투수 김상진, 유지현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유격수 김민호라는 두 연습생 출신이었다. 그 중에서도 김민호, 그는 특별히 내놓을 기록이나 타이틀 하나 없이도 90년대 중후반 내내 베어스의 '키 플레이어'로 불린 사나이였다.
90년대 베어스의 열쇠, 연습생 김민호
▲ 김민호 / ⓒ OB 베어스 팬북
1993년, 계약금과 연봉 각 천만원이라는 헐값으로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김민호는 철저한 무명이었다.
경주고는 그가 재학했던 3년 동안 전국무대의 주요 4개 대회(봉황기·청룡기·황금사자기·대통령기)에서 1회전 탈락 두 번을 제외하면 본선무대 기록을 전혀 남기지 못했을 정도로 허약했던 팀이었고, 곧바로 진학했던 계명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약체였다. 김민호는 애초에 주목을 받을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선수였던 셈이다.
그러나 양지의 나무처럼 빨리 자라지 못하는 대신, 음지의 나무는 옹골차게 자란다. 그리고 음지에서 자란 선수들도 특유의 옹골찬 구석이 있다.
김민호는 비로소 프로무대에 서기까지 단 한 번도 따뜻한 볕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확' 폭발하는 기질은 약했지만, 기본기가 좋았고 언제든지 기회만 주어진다면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몸을 날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는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고, 결정적으로는 항상 중심을 낮은 곳에 두는 수비의 기본기와 공을 향해 과감하게 몸을 날리는 헌신성마저 겸비하고 있었다. 팬을 즐겁게 하는 몸놀림이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자신을 드러내느라 팀의 흐름을 끊는 플레이를 욕심낼 줄 모르는 음지 식물의 묵묵함도 몸에 배어있었다.
이 젊은이는 생각보다 빨리 1군 무대에 서기 시작했고, 곧 팀의 주전 유격수로 자리를 잡았다. 원년 멤버 유지훤이 사라진 이후 마땅한 임자를 찾지 못했던 유격수 자리에 수비 하나만큼은 단단했던 그가 꼭 들어맞았던 것이다. 애초에 전력으로 치지도 않았던 연습생 출신이 똘똘한 수비형 유격수로 빈 틈을 막아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팀의 기대를 채우고도 남았다.
대개의 감독들이 유격수에게 원하는 것은 분명 공격력보다 수비력이고, 그 중에서도 안타를 잡아내는 화려한 수비보다도 범타를 놓치지 않는 안정적인 수비력이다. 그러나 과거 롯데의 권두조나 태평양의 염경엽이 그랬듯, '안정적인 수비'라는 기본에만 충실한 유격수는 자리를 오래 지키기 어렵다.
대한민국에 단 여덟개 밖에 없는 '주전 유격수'라는 보직을 노리는 날고 기는 젊은이들이 세상에는 널려 있기 때문이고, 입으로는 '기본만'을 말하는 감독들 또한 '플러스 알파'를 항상 꿈꾸기 때문이다. 김민호가 베어스의 '자물쇠'가 아닌 '열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수비력에 더한 그의 예리한 공격력 때문이었다.
'반쪽 유격수'에서 '공수겸비형 유격수'로
팬들 사이에서도 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베어스 유격수 자리를 지킨 김민호에 대한 기억은 두 가지로 갈린다. '수비형 유격수'와 '공수겸비형 유격수'. 물론 그 중 후자가 조금 더 먼저 야구를 보기 시작한 이들일 것이다.
2년차인 94년부터 그가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 면에서도 수준급으로 올라서기 시작한 것은 주변의 기대를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는 94년에 타율 .275에 17개의 도루를 성공시켰고, 타순도 9번에서 2번으로, 다시 1번으로 상향조정되었다.
특히 1995년은 그의 전성기였고, 자연히 그가 이끌던 베어스에게도 전성기였다. 그 해 그는 3할 타자가 단 한 명도 없었던 베어스 타선 선두에서 .288의 타율에 무려 47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팀의 공격을 이끌었고, 결국 팀은 그 해에 팀 역사상 두 번째 우승을 달성하고 만다. 그리고 김민호는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도 7경기에서 12개의 안타와 6개의 도루, 5득점, 2타점을 기록하며 홈런타자와 승리투수를 제치고 MVP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는 단순한 수비형 유격수가 아닌 공수겸비형 유격수의 대표주자로 떠올랐고, 이종범, 유지현과 함께 '유격수 삼국지' 시대를 열었다. 나란히 팀의 주전 유격수이자 톱타자로 활약하던 그 세 선수의 방망이와 발에서 각 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그들의 몸짓과 송구에서 각 팀의 수비가 시작되었다.
특히 공격 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주루플레이였다. 그의 발과 도루기술은 최고가 아니었지만, 그는 경기의 흐름을 읽으며 도루를 해야 할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을 가렸고, 개인적인 욕심을 팀의 승부 앞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도루는 성공률도 높았고, 가장 치명적인 순간을 노려 상대팀을 괴롭혔다. 통산 200개 이상의 도루를 성공시킨 선수들 중에서 그보다 높은 도루성공률을 가진 이는 이종범 외엔 없다. (이종범 .824, 김민호 .789)
세 번의 중상, 감동보다 긴 안타까움
▲ 김민호가 슬라이딩 하는 2루주자를 피하기 위해 점프한 채 1루로 송구하고 있다./ ⓒ OB 베어스 팬북
그러나 헌신적인 선수들이 대개 그렇듯, 그 역시 경기장에서 직접 그를 지켜본 팬들에게 감동 못지않은 안타까움을 길게 남기고 사라져가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성기였던 1996년, 그리고 재기의 몸부림 끝에 두 번째 전성기를 시작하려던 무렵에 찾아왔던 2000년, 2001년의 부상이 그를 주저앉히고 말았던 것이다.
1996년, 우승과 한국시리즈 MVP의 기세를 몰아 한 단계 높은 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어야 했던 그 해, 그는 개막 직후 정민태의 몸 쪽 공을 노리다가 손목 인대를 크게 다치며 한 해를 허송세월해야 했고, 그 후유증으로 2년간 부진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273의 타율에 37개의 도루를 성공시킨 99년을 지나며 제자리를 찾아가는가 싶던 2000년 여름에는 최향남의 공에 맞아 손가락이 부러졌고, 그 이듬해 가을에는 주루플레이를 하다 접질리며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당했다. 독일에서 수술까지 받으며 재활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돌아온 그라운드에서 그는 2할 1푼, 혹은 1할대의 빈타에 허덕이며 '멘도사 라인(규정타석에 든 선수 중 최하위 선수를 뜻하는 용어) 유격수'로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승리·투지·뚝심·근성... 한 마디로 '미라클'
언제부턴가 베어스는 '미라클'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것은 '최강'이나 '최고' 같이 흔히 쓰이는 상투적인 별명과 달리 최악의 조건에서도 묵묵히 전진해 때로는 승리로, 또 때로는 패배를 통해서도 감동을 만들어냈던 베어스의 역사를 담은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 별명에는 박철순의 22연승과 오버랩되는 원년 우승의 짜릿함, 그리고 1998년 시즌 최종전까지 기적의 8연승을 거두며 반 게임차로 포스트시즌으로 가는 마지막 티켓을 잡아낸 희열만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마지막 8연승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데다가 경기 직전 선수단 버스가 빗길에 뒤집히며 주전 투수들이 부상을 당한 악조건 속에서도 연장전까지 물고 늘어졌던 1998년의 준플레이오프 패배, 그리고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서 포스트시즌에서만 13경기를 치르는 강행군 속에 주전 대부분이 서로 포옹하는 것도 힘겨울 만큼 완전연소했던, 그래서 먼저 세 판을 내주고도 다시 세 판을 잡아내며 동률을 이루었다가 결국 7차전에서 무너져 내렸던 2000년 한국시리즈의 눈물이야말로 '베어스 미라클'의 핵심요소인 것이다.
세 번의 부상은 김민호의 날개를 꺾었고, 그는 또다시 반쪽짜리 유격수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안타를 때리지 못하고 다리가 무뎌진 뒤에라도 두 눈 번득이며 상대의 빈틈을 헤집는 공격성과 헌신성만큼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그는 '빈타에 허덕이면서도 묘하게 공격적인 느낌의' 수비형 유격수로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2000년 한국시리즈 6차전과 7차전, 마땅히 대신할 후배가 없었기에 채 회복되지도 못한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나와 비록 홈런이나 도루는 아니더라도 병살타를 막아내기 위해 기를 쓰고 1루 베이스에 몸을 던지던 그의 모습 또한 '미라클'이라는 별명의 원경으로 새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베어스 '발야구'의 원조
▲ 마스코트 곰돌이와 함께 ⓒ OB 베어스 팬북
11년간의 프로생활. 그 중에서도 팀의 중심에 서있었던 세월만 치면 7년, 혹은 8년. 그리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모았던 것은 불과 한 두 해 정도.
그리고 2할 5푼에도 미치지 못하는 통산 타율과 29개에 불과한 홈런. 다만 232개의 통산 도루가 '제법 빨랐던 허약한 야수'라는 그림을 그려놓고 있는 선수.
그러나 지난 한 해 언제나 살기등등한 투지를 뿜어내며 팬들에게는 즐거움을, 상대에겐 불쾌감을 선사했던 이종욱을 필두로 한 베어스의 '발야구 선수들'을 보면서, 지금은 간혹 그들과 하이파이브나 하며 사진 배경에 잡히는 김민호의 십수년 전 모습을 떠올린 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열쇠구멍이 결코 대문의 무게중심이 아니듯, 김민호 역시 기록으로 가늠할 수 없는 팀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한 선수의 삶을 놓고 아쉬워한다. 조금만 더 조심했다면, 조금만 덜 불운했다면. 그러나 언제나 행운만이 깃들고 언제나 기쁨만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라운드는 또 하나의 인생이며,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 수 없는 감동이 된다. 다만, 불운을 두려워하지 말고 헌신해야 하는 것이 선수의 몫이라면, 불운에 가려 채 결실 맺지 못한 헌신을 기억해주는 것이 팬의 몫일뿐이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