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교구 순교자 현양대회 날이다. 그동안 여러가지 사정때문에 미루어졌던 공적인 일을 오전 오후 바쁘게 해결하느라 참석하지 못한다. 그래도 늘 참석하던 행사인데 조금은 서운하다. 전에 읽고 정리해 두었던 책의 내용을 다시 읽어본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 사람들 / 이용권
20쪽
성경이 과연 창조론을 뒷받침하고자 쓰였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작성될 당시의 문화 속에서 그들의 언어로 세상과 사람의 기원에 대해 말합니다. 성경을 쓴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하고자 한 말은 세상과 사람의 기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없이는 세상이든 사람이든 존재할 수도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라는 사실입니다.
30쪽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느님은,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라며 아담을 찾던 그 말씀으로,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끝까지 우리 편이십니다.
46쪽
아브라함은 불확실함과 불안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의지했습니다. 하느님께 묻고 청했습니다. 그분 앞에 나아가 엎드려 매달렸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어려움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을 마감했고, 그의 자손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인간적인 노력들과 대책들 모두가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때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그대로 완성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후일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 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 말씀을 삶에서 따르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찾기보다 인간적인 힘과 능력을 우선 찾지는 않는가 물어봅니다. 신앙의 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훈련의 길입니다. 오늘은 나의 불안과 불확실함 모두를 아브라함처럼 주님께 맡겨 드리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57쪽
사라와 하가르, 그들을 대변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하가르가 임신의 기쁨을 누릴 때 사라는 울부짖었습니다. 반대로 사라가 웃을 때 하가르는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이 눈물의 때에 그들은 모두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집이든 광야든 어디서든, 기쁨과 슬픔, 행복과 좌절 등 어느 순간이든 하느님은 당신을 찾는 이들을 찾아오십니다. 하느님은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소리를 듣고 함께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여인들의 갈등은 후대에도 이어집니다.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이 그 당사자들입니다. 자매이지만, 한 남자의 아내가 된 이들은 자녀 출산을 빌미로 경쟁합니다. 빌하와 질파라는 두 여종까지 끌어들입니다. 르우벤부터 벤야민까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들이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68쪽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창세 40,8; 41,16). 주님께 대한 굳센 믿음이 역사 안에서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는 혜안을 열어 주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 나를 이집트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7.8). 자신 앞에 엎드려 있는 형제들을 바라보던 요셉이 눈물을 쏟아 내며 한 말입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의 안배와 섭리로 해석하는 깊이 있는 통찰은 믿음에서 온 것입니다. 그것이 나아가 모든 원한과 원망을 지우고 화해의 입맞춤(창세 45,15)으로 형제들과 마주하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83쪽
주님은 광야와 같은 우리 삶의 여정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때로 흔들리기도 하고, 때로 불평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돌아보면, 인생의 그 부침, 신앙의 그 굴곡들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돌아보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청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은총이며 인도하심입니다. 아, 그래서 저는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제 인생의 저 오르막들과 내리막들이 다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며 여기로 데려오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아멘.’
99쪽 ~ 100쪽
“주님과 기드온을 위한 칼이다.”(판관7,20). 그들이 쳐든 것은 칼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저들을 우리 손에 넘겨주셨다’(주님은 이미 우리의 승리를 결정하셨다)는 믿음과 ‘주님의 영이 기드온과 함께하신다.’(판관 6,34)는 확신이 그들의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그들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칼을 든 적군 십이만(판관 8,10)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들의 임금 제바와 찰문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비웃고 협조하지 않던 수콧과 프누엘 사람들을 징벌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말하지만, 그들의 전투력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중략)
기드온 이야기는 우리 신앙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도 보여 주고,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서 이루시는 일들 즉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온전한 은총으로 우리 힘의 한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역사도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끊임없이 주님을 찾지 않으면, 다가올 유혹들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깨우쳐 줍니다.
184쪽 ~ 185쪽
한 사람의 열심하고 간절한 기도, 소위 ‘강력한 힘들’(우상이나 권력, 재물)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만 매달리는 기도, 그 기도가 자신과 백성, 나라를 구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 역사 안에 개입하셔서, 청하는 이들의 믿음을 확인해 주시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새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249쪽
고통의 이유, 의인과 악인의 삶의 반전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습니다. 우리의 지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고통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의 이유, 원인을 찾아 설명하려 들기보다, 또는 ‘신비’나 ‘섭리’라는 고상한 말로 포장하기보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곁에 있어 주려는 실천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주님께 부르짖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몫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는 분, 자비의 하느님이시니, 우리를 찾아 주실 것입니다.
266쪽 ~ 267쪽
이사야의 목소리는 때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자주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멈추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 누구의 목소리보다 우선해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며, 세상의 힘에 흔들리기 보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중략)
‘주님을 믿는다.’ 고 하면서도,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좇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따라오라고 요구하는 오만일 뿐입니다. 믿는다고 하며 세상의 흐름을 그냥 따르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나도 종교를 가졌다.’고 말하는 자기 위안이며 겉치레일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 그 말씀을 우선하는 자, 주님께 의지하는 자만이 굳건하게 서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