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별 대표 중국화 작품 특징
전국시대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이른 중국고대의 변혁시대이다.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에
걸치는 청동기의 장식에 그림자그림 형식 및 선각으로 된 회화적 표현이 남아 있어 일부 회화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주제는 궁전에서 열리는 연회나 오락, 사냥, 전쟁, 귀신 등으로 주로 측시형(側視形)의 표현을 하며 측면상의 여자
및 봉황, 용을 먹으로 그린 전국시대의 비단그림이 유명한데, 필을 중요 조형기법으로 사용하였다.
이 시대의 작품은 그 근원이 정확히 중국것 이라기 보다 동이족의 것의 변용으로 보는데, 연구가 필요하다.
진,한 시대(BC221~AD220)
화상석
이 시대는 봉건사회로서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외래 문화의 수입과 전파 시대이다. 어지럽던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
는 분서갱유를 감행하고,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누리려 했으나 그 치세는 짧았다.
한나라는 서양의 로마 제국과 같이 정치와 군사에서는 강하였으나 문화와 예술에는 앞 시대의 모방에 치우쳐 독창력
이 적었다. 이 시대에는 다양성의 통일이 조화된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양식을 낳았는데, 재현적 기법과 상징 및 추상
화 과정이 혼합된 것 이다.
한(漢)대에 전하는 그림들은 모두 지하 무덤에서 출토된 분묘미술이다. 따라서 무덤 안을 장식했던 벽화나 화상석,
화상전이 주요 미술품인데 회화적 표현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지상의 것과 큰 차이는 없다.
표현된 내용들은 신화와 역사적 사실, 고사, 일상생활, 유교적 주제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산동 지방의 화상석에
표현된 인물이나 자연 묘사는 그야말로 고식의 미를 한껏 보여준다
회화라고 하여도 오늘날 볼 수 있는 한대의 유품은 전(塼)이나 능묘의 벽면에 새겨진 화상석(畵像石)이 주된 것인데,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필치는 중국 회화를 발전시키는 풍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선묘(線描)를
중히 여긴 이 시대의 필법은 선(線)의 예술이라고 불린 중국화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인물·풍경·동물·화훼(花卉)·신선
등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어, 중국미술의 한없는 깊이와 풍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
이 시대 까지의 미술품의 원류나 유품은 완전 중국것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앞으로 연구 과제이다.
위(魏)·진(晋)·남북조(南北朝) 시대
남북조 시대의 회화는 타율적인 제약에서 해방된 문인화라는 양식을 낳았다.
이 시대에는 현실을 초월한 노장의 사상이 유행하여 사실(寫實)을 초월한 추상적인 동양화의 선을 강조하였고,
산수화를 발전시켰다.
이 때의 회화는 기존의 원시적인 상하법을 대신하여 대상을 내려다보는 부감법이 성립하고, 깊이 있는 공간 구성이
가능해졌다. 공간 처리가 분명해지고 인물도 자연스럽게 표현되기 시작한다. 아직 전경, 중경, 후경 사시에 자연스러
운 진행이 없고 크기나 비례가 잘 맞지 않으며 인물들에도 개성 표현이 없는 등 고풍스러운 표현을 간직하고 있다.
주제상으로는 기존의 유교와 도교에 새로 들어온 불교가 주 배경이 되며 신화적인 색채는 퇴조한다. 한말의 서화를
겸한 사대부 화가가 출현해서 필선만으로 그리는 백묘화(白描 )가 창시되었고 문학적인 제재를 즐겨 채택하였다.
처음으로 산수화를 그리고 인물화를 특히 잘 그렸던 고개지(顧愷之)는 「여사잠도권」을 남겼고 산수화에 있어서의
시각적 현상에 주목하였다.
그는 신기론(神氣論)이란 화론(畵論)을 펴 사혁(謝赫)과 함께 동양 회화의 원류가 되었다.
남제(南齊)의 사혁(謝赫)은 「고화품록(古畵品錄)」이란 화평(畵評)에서 회화의 근원이 되는 육법(六法)을 논하였다.
송병(宋炳)의 산수화는 고개지에 비해 솔직하고 간명하며, 그가 발견한 '지척천리(咫尺千里)'라는 투시 원근법은
서양보다 천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후기 화북에서는 공작 기술을 겸비한 기술화가가 임용되기도 했다.
수(隋)·당(唐) 시대
수나라는 회화에 있어서도 남북을 통합했다. 북조계의 화가가 남조의 양식을 흡수한다는 화북중심의 통합이었다.
수에 이어 대제국이 된 당은 외국 미술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제적 색채가 풍부한 화풍을 낳았다.
전기에 전래된 헬레니즘의 흐름을 섭취한 굽타조 양식의 인도미술과 사산조 양식의 이란 미술이 중국인에게 형사
(形寫)라 불리는 새로운 자연주의와 표현 기법을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는 중국 회화의 독자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이며 중국 미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다.
인물, 도석, 산수, 화조가 많이 그려졌으며 각기 개성적인 표현을 하게되어 각각의 유파로 발달하게 된다. 즉 남화,
북화의 개념이 확립된다. 당나라의 회화는 외래양식을 소화하는 한편 고유의 전통 양식과 융합한 이른바 종합성을
가진 회화 예술을 완성하였다. 당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수묵화풍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남종 문인화의 출발을
뜻한다. 번영을 구가하던 당 왕조에서는 불사도관(佛事道觀)이 조성됨에 따라 벽화가 많이 그려지고, 대승적인
변상도가 그려졌다.
초당(初唐)의 대표적 화가인 염입본(閻立本)은 「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 「직공도(職貢圖)」로 유명하다.
후기 회화의 특색은 외래 영향의 중국화와 전통의 존중인데, 그러한 경향은 전기의 후반에 보인다. 사녀화, 화조화나
묵화는 측천무후 시대에 시작되고, 성당기에는 천재화가 오도현(吳道玄)이 백묘화를 부흥시켰고, 그에 입각하여 회화
의 지도이념인 사의를 제창했다. 또 오도현(吳道玄)은 당대의 대표적 화가로서 불교, 도교에 관한 것을 많이 그렸고,
이러한 필법이 오가풍(吾家風)이라 불리며 당대를 풍미했다. 이른바 '산수의 변혁'을 창시하여 산수·수석화를 자연
주의의 계열에 편입시켰다.
이사훈(李思訓)은 북화의 시조이며, 귀족적 묘법으로 금벽청록(金碧靑綠)의 산수로 유명하다.
후기의 산수화가는 수묵산수화 발전의 기초를 세운다. 특히 왕유(王維)는 남화의 시조이며, 남방의 풍경을 주로 초속
적인 태도로 그렸다. 선담(渲淡)의 묵법이라 하여 수묵의 멋을 십분 살렸으며, 대상의 묘사보다 정감 어린 운치를
주관적으로 표현하였다. 사녀화, 화조화, 산수 수석화는 공적인 목적보다 사적인 감상에 봉사하는 경향이 강한 분야
이고, 후세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당대의 산수화 : 당대는 종교화, 궁정화(인물화, 여인화), 동물화 등이 발달한 외에도, 자연을 묘사한 산수화가 발달
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의 산수화는 담채가 아니라 색깔을 원형대로 집어넣고자 했으므로 [靑綠山水] 도는 [金碧
山水]라 한다. 이러한 산수화는 아주 짙은 청록색을 칠하고 때로는 금분을 덧입히기도 해서 화려한 효과를 꾀하였다.
당대 이후 산수화는 산수의 규모와 장엄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물을 작게 묘사하였다. 당시에는 산수화들이 대개
병풍의 소재로 쓰였다 한다.
당에 이르러 오도자(도현)가 다시 필묵기법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 오도자의 필법은 격정적이고 변화가 풍부한
것으로 리듬감 같은 것이 있었다. 이 같은 필법은 과거의 필선들이 딱딱하고 경직됐던 것에 반하여 동세가 더욱 강
하고 변화가 풍부한 필선이라 말할 수 있다. )수와 당 이후 산수화의 발전에 따라 수묵의 용필기법은 큰 발전을 보게
되었다. 형호(오대(五代)의 화가) - 『필법기』의 육요(기, 운, 사, 경, 필, 묵)에서 필과 묵을 표현기법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두 가지로 삼았다.
송(宋) 시대
중국에서는 '육조(六朝)의 서(書), 당(唐)의 시(詩), 송(宋)의 화(畵)'라는 말이 있다. 화원이 융성한 것은 송조가 최고
였으며, 한림 도화원을 설치하고 화인을 우대하였다. 북송말의 휘종과 남송초의 고종은 궁정 예술가를 양성하여,
송나라의 예원을 크게 번성시켰다. 문인화 예술 풍조가 유행하여 소동파(蘇東坡)와 미불과 같은 이름높은 사람이
나타났다.
북송 시대에는 오대에 이어 형호와 관동의 뜻을 따르는 화가들이 많이 나타나 화북 산수의 황금시대가 도래한다.
전통적 사실주의와 신흥이상주의의 2대 화풍이 성행하였다. 전통적 사실주의는 앞 시대의 전통을 지키면서 대상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표현하는 원체화풍의 화조화와 북송 화풍의 산수화를 연결시켜 나갔다.
이는 자연을 합리적으로 포착하여 그 속의 생명감과 인간을 이어주는 자연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흥 이상주의는
기성 형식에 거리낌 없이 마음의 이상을 자유로이 표현하는 문인·사대부·승려 등 재야의 비전문적 화가들로 구성
되었다.
그들은 수묵 담채화풍의 화자와 사군자, 남종 문인화풍의 산수화를 아울러 성립해 나갔다. 그들의 화풍은 자연을
단순하게 추상화하여 수묵화의 형식으로 이상적 세계를 개척하려 했다. 이러한 양대 양식은 원말사대가를 거쳐
이사훈(李思訓)과 왕유(王維)를 시조 로 하는 이른바 남북 2대 화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성의 「청만소사도(晴巒蕭寺圖)」와 같이 치밀한 붓질과 빈틈 없는 구도에 의한 산수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성의 뒤를 이어 범관, 곽희, 허도녕과
같은 화가들에 의해 더욱 다양한 화북 산수화가 나타났다.
곽희(郭熙 )는 11세기 산수에 능하였으며 고원, 심원, 평원의 삼원 화법을 주장하였다. 이는 중국 회화에 있어서
원근법의 시초이다. 또 허도녕의 「추강어정도(秋江漁艇圖)」는 걸작으로 꼽힌다. 그의 그림에서 치솟은 산의 기상과
필력은 화북 산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강남에 자리잡았던 남송에서는 화원을 중심으로 강남 지방의 경치를 주로
그리는 직업 화가 화풍이 성행하였다. 주변 경치에 어울리는 화법을 쓰다보니 자연히 강남 산수풍의 소경(小景) 산수
로 회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휘종은 제왕 화가로서 유명하다. 섬세하면서도 강한 필선으로 그린 휘종의 산수화풍
은 후기의 대표적 산수화가인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예술을 낳은 원류가 되었다.
마원은 이당(李唐)의 화법을 흡수하여 자기류의 화풍을 성립시킨 화가이다. 그의 산수화풍은 일본 산수화에 영향을
주었고, 조선 초기 이상좌, 강희안에도 미쳤다. 하규, 이적은 용필과 용묵이 뛰어나고 각기 개성적이다. 목계는 문인화
의 명수로서 당대의 대표적 화가이다. 선종 승인답게 번잡한 것에서 벗어나 마음 속의 것을 일필로 표현하였다. 그의 「소상팔경도」는 기존의 준법이나 필법을 따르지 않고 간결함과 상징성으로 표현하여 한 차원 높은 수묵의 미를
살리고 있다.
* 송대를 기점으로 수묵산수화가 본격적으로 그려진다. 당대의 [청록산수]는 오대 이후 수묵에 의해 담담하고 고아한
풍격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러한 수묵산수의 발전을 촉진한 것은 신유가(주자학)의 영향에 크게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북송 때는 특히 자연은 크게, 인물은 개미처럼 아주 조그맣게 묘사한 大關山水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자연의
전모를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파악하고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 그리고 理와 氣의 관계로
이해되는 자연과 사물들이 모두 氣의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원(元) 시대
회화는 시대 양식으로서 간단하게 추출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함을 보여준다. 이런 양식, 형식의 혼란은 명시대의
절파, 오파, 원파등을 생겨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 초기의 산수화는 고극공(高克恭), 조맹부(趙孟賦)등에 의한
복고 운동에서 시작되어 주로 북송 산수화가의 양식과 묘법이 연구되었다. 그러나 북송 산수화풍의 양식이나 묘사
형식을 적당히 취해 화면을 구성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는 잃어버리고 형태나 기법에 대해 지나친 편집 경향만
띄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오진(吳鎭), 왕몽(王蒙)등을 원 때의 4대가가 배출되기 전까지 계속된다.
원사가(元四家)는 오대의 동원, 복송의 거연에 기초를 두고 발전하여 필묵을 중시하고, 서법과 시문을 결합하였다.
이는 원래 산수화의 주류로 명·청 양대에 걸쳐 영향이 지대했다. 도교와 불교 관계 인물화인 도석인물화에 있어서는
원 초기의 안취등이 유명한데, 필선의 변화가 심한 인물묘사와 환상적인 화면 느낌은 원대 회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조자앙, 안휘 등이 유명하다.
명(明) 시대.
중세까지 길러진 회화적 정신은 명대에 이르러 실제로 발로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중심 사상은 동기창(董基昌),
막시룡(莫是龍)에서 시작된 남화, 북화의 2대별이다.남화와 북화는 지역의 풍토나 사람의 기질에서 연유되며 화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북종 화가들의 대부분은 원체화풍을 따라고 남종 화가들은 원체화 외에 몰골이나 수묵 담채
를 즐겨 그렸다.
동기창(董基昌)은 남종과 북종을 논하고 남화 쪽을 숭상하는 논지를 펴서 남화 일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또 동기창은
전통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변형의 중요성도 아울러 강조하였으나 후계자들이 전통에 집착하여 그들의 화풍은 진부한
것이 되고 말았다.
문인화는 장감의 소주 출신의 심주(沈周)와 문징명(文徵明)의 출현으로 활기를 띠게 된다. 심주는 관직으로 나가지
않고 평생을 예술에 경주(傾注)하여 새로운 명대식 산수화를 창출시켰다. 심주는 문인화에 철학적 사고를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 하에 깊이 있는 산수 표현에 자신의 철학적 사고와 인생관을 부여하였다. 「야좌도(夜坐圖)」가 대표적인
예인데, 그림의 반을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고 나머지 반은 산 속에서 자지 않고 좌선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여기에 많은 친구들의 찬문이나 본인의 글이 곁들여져 학구적인 회화가 만들어졌는데 이들을 오파라 했다. 그가 화가
로서 이룩한 탁월한 업적은 제작 문징명에게 계승되었는데 그도 역시 정갈하면서 회화적 깊이가 있는 문인화를 많이
그려 오파식 그림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진계유, 심주, 문징명등은 동기창과 함께 명말(明末) 4대가이다.
청(靑) 시대
초기의 화단은 남화 일색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으나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기법은 섬세하나 약
하고 주제는 산수는 화조와 사군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독창적인 화법과 사고로 그림을 그린 왕시민, 왕감,
왕휘 그리고 명승으로 그림으로 잘 그린 팔대산인, 석계, 석도등이 유명하다. 석도는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실경산수
를 많이 그렸다. 황산을 그린 여러 장면에는 실제의 경치에 충실하기보다는 회화적으로 아름다운 구도와 먹과 멋진
조화를 이룬 담채등 무한한 변형이 이루어진다. 석도의 친구였던 팔대산인도 분출하는 창의력을 작품에 담았는데
「성난 물고기」나 「두 마리의 까투리」등을 보면 산수보다는 화조, 영모등 분야에서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는 필력이 날카롭고 핵심을 잘 포착하여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기 화단은 산수화보다 화훼,
영모 등의 화조화에 치중되었고, '양주팔괴(楊洲八怪)' 라는 괴이한 작가들은 독창적인 화풍을 보였다.
청말의 임백년, 오창석, 오역등도 좋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근현대
중국 근대 회화는 청의 말기부터 시작되는데 그 때 궁정화가가 화단의 중심이었던 풍토에서 벗어나 각지에서 유력한
화가의 배출을 기다리는 상황이 출현하였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 제일의 개항 도시가 된 상해에서는 화가들이 모여
들었는데 여기에서 조지겸(趙之謙)과 임이, 오창석(吳昌碩)이 있다.
임이의 영향은 청말부터 민국 초기에 걸쳐서 상해 화단 전반에 나타났으며 오창석의 영향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0세기 전반에 전통 화풍을 새로운 시대에 접목시긴 화가로는 제백석(齊白石)과 황빈홍(黃賓虹)이 있다. 북경의
화단에서 명성을 얻은 제백석은 팔대산인과 석수, 오창석등의 감화를 받으며 독특한 화풍을 수립하였다. 미술학자
이기도 했던 황빈홍은 당송 시대 회화의 깊은 맛을 살린 산수를 그렸다. 이 시대 이후로는 프랑스에서 서양화를
배우는 한편 독자적인 중국 전통 회화를 시도한 서비홍(徐悲鴻)이 있으며, 장대천(張大千)도 있다. 영남화파라고
일컬어졌던 광동의 고검부(高劍父), 고기봉(高奇峯) 형제는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풍과 전통 회화 양식의 통합을 기도
했다. 이밖에 20세기 전반의 동향으로는 노신(魯迅)의 제창으로 이루어지는 목각화 운동, 대중과의 의사 소통을
주안점으로 한 새로운 중국 회화로의 방향도 주목되었다.
동양화 중국화
중국의 미술을 서양화와 구별하기 위해 지금도 동양화라는 말로 불리우고 있는데, 현재는 나라별로 중국화,한국화,
일본화, 등으로 불러지고 있다. 그러나 이 동양화의 원류에 대해서는 대체로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되여 있어,일견
정설로 굳어진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동아시아의 고대 역사의 시원이 불분명하고 기록에서 조차 애매한 부분이 너무나 많은 관계로 지금으로서는 그
어떠한 문화,문명의 파생 분야인 인문,사회,예술 등의 분야를 확정적으로 정설이라 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유보된 문화 문명의 파생 분야별로 지금의 현상은 각국의 학자들이나 관련 학제간 통합 연구의
기회를 주어 제대로 된 동양 사관이 정립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특히 작금에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영토
확장의 억지 주장 등은 이러한 인류의 문화,문명의 보고를 국가의 조그만한 부분 이익에 따라 왜곡 시키고자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바, 각국은 성의있는 태도로 진실과 정의의 인류사를 복원시켜야 할
것으로 주장한다. 특히나 아시아 일대는 인류의 시원지로서 그 문명의 태동이 전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므로
재삼 각국의 양식있는 지도자들이나 학계,학자들은 인류의 시원의 발자취를 함께 찾고, 이러한 고대로 부터의 인류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통하여 장래 인간들에게 닦칠 위기에 보다 쉽게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대체로 고대 아시아의 기원 전,후 석기,청동,철기시대에는 여러 종족들이 함께 살아왔고, 부족의 형태나 초기 국가
형태의 기간 동안에도 뚜렸한 국경의 개념이 없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동의 신관이나 가치관을 삶의
형태에 따라 갖고 있어 왔음은 자명한 일이며, 공히 제정일치의 형태에서 출발하여 땅에 붙밖혀 사는 농경종족과
수렵체취로 주로 산 종족간의 크게 대별한 역사의 연생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출발은 고대사를 말할 때 서로의
공통의 출발지가 중첩되어 져 각기 지기의 것으로 주장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하는 셈이다.
더구나 인류의 역사는 삶의 환경 변화가 수반하여 종족의 이동이 빈번한 변수 또한 간과할 수 없다.그러므로 하나의
그림 일지라도 시대에 따라 분명히 그 그림이 존재 하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이를 현대에서 보는 기준으로
그러한 그림을 해석하는 오류는 버려야할 것이며, 보다 심층있는 연구가 병행 되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