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3. 17
문제상황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의 짧은 역사 속에서 압축 성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눈부신 변화⋅발전이 있었다. 그 이면에 사건⋅사고도 잦았고, 발전의 방향과 방법에 대한 논란도 많았다. 그러나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의 다양한 의사가 존중되고, 국민의사를 조율⋅조정하는 가운데 국가의 올바른 방향을 정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립과 반목이 바람직한 것은 결코 아니다. 국가공동체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그것이 역사적⋅문화적 공동체라는, 한반도에 한민족의 자손으로 태어나 같은 역사,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다문화 사회에서 그런 주장은 이제 시대착오적이다.
한때 영호남 지역갈등이 극심하여서 영남공화국, 호남공화국 이야기가 나온 적도 있었다. 과거 인도에서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가 분리⋅독립한 것처럼 대한민국이 쪼개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 바 있었다. 물론 어느 나라에도 지역색과 지역 간의 갈등 및 경쟁은 존재한다. 그런데 지역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를 조장하면서 영호남 갈등은 망국적 지역갈등으로 심각해졌던 것이다.
다행히 민주화 이후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의 화해와 통합을 위한 노력, 그리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영호남 지역갈등은 크게 완화되었다. 그런데 최근 보수와 진보 진영의 보혁갈등은 이른바 진영논리를 앞세우면서 과거의 영호남 갈등에 못지않은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은 찾기 어렵고, 진영 간의 적대감이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의 시대에 국민통합에 대해 관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어떻게 통합해야 하는지, 아니 국민통합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오해가 적지 않다. 이는 민주적 다양성의 의미에 대한 오해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 윤석열 제20대 대통령 취임식. / 사진=연합뉴스TV
민주국가에서의 분열과 통합에 대한 오해와 정확한 이해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국민들이 모두가 주권자로서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는데, 어느 누구의 생각이나 주장이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민들의 다양한 생각과 주장이 모두 존중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핵심 이념인 자유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다양성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의 전제는 상호 존중이며,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귀 기울이고, 때로는 상대방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의 자세이다. 민주주의가 20세기 초 전체주의와의 체제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스스로의 결함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개선할 수 있는 체제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이 상호 존중을 잃고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다양한 생각과 주장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영호남 지역갈등이나 최근의 진영 갈등이 특별히 문제되는 점은 바로 이와 같은 상호 존중의 결여에 있는 것이다.
우리 진영이 옳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벌써 전체주의에 경도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정의, 흠결 없는 체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게 태어나서 평생 완성을 향해 노력하는 존재인데, 어떻게 인간이 만든 것들이 완벽할 수 있는가? 심지어 신을 섬기는 종교조차 다양하지 않은가?
민주체제에서 다양성은 공통의 기초를 전제한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전체주의자들에게 다양성의 틀 안에서 논의하자는 것은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을 되풀이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 본질적 요소들은 다양성의 틀 안에서 논의되어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우리는 헌법상의 근본가치 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고 부른다.
▲ 3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 일대가 조국 장관 퇴진 촉구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로 가득 차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민통합의 기초로서 헌법적 가치들
이렇게 볼 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보이는 진영 갈등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정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초한다면, 불필요한 갈등이나 있어서는 안 되는 갈등이 적지 않은 것이다.
민주적 다양성은 국민의 선거에 의해 정권의 교체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것은 헌법적 가치가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바뀌고, 국회의 다수당이 변해서 국정운영의 기조가 달라지고 법률들이 바뀌어도 헌법의 틀은 계속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권 교체의 파급력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국가질서의 근간을 형성하는 헌법규범의 핵심은 주권자인 국민의 인권이며,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없이는, 그 핵심요소인 국민주권, 대의제, 다수결, 권력분립, 사법부의 독립 등의 확보되지 않고서는 인권의 보장 또한 유명무실해진다는 것이 인류 역사의 소중한 경험이다.
우리가 헌법상의 근본가치, 즉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일컫는 것은 이처럼 인권을 비롯하여 민주주의, 법치주의의 핵심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하는 결정, 예컨대 의회제도 폐지, 다수결 폐지, 사법부 독립 폐지 등은 아무리 국민 다수에 의한 결정이라 하더라도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현대 민주국가에서 보편화되고 있는 방어적 민주주의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가치에 해당하는 작은 부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대립할 수 있으며, 이를 합리적으로 조율⋅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강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진영 갈등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들도 대부분 이와 관련된 것들이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합리적 절차를 통한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때로는 절차 자체의 합리성이 훼손되기도 했다. 국회법상 안건조정위원회에 제1당이 위원의 반수만 채우도록 한 것을 위장탈당을 통해 탈법적으로 과반수 위원을 임명하도록 한 것은 누가 보아도 절차의 합리성을 깨뜨린 것이며, 그로 인해 헌법재판소에 제소된 상태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부적절한 이유로 임성근 판사의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았던 것도 절차의 정당성이 훼손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때로는 사법절차에 따른 결정이 무시되기도 했다. 국회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도 불구하고 기간 내에 개선 입법을 하지 않은 예들이 적지 않으며, 국민들 중의 일부는 조국 전 장관에 대한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헌법적 가치의 존중에 선행되어야 한다. 근본가치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합리적 국가 시스템은 입법과 집행, 사법이 모두 합리적 절차에 따라 운영될 때 가능해지면, 그 때 비로소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신뢰, 정치와 사법에 대한 신뢰도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 전남 목포 김대중노벨평화상 기념관을 방문한 윤석열 국민의 힘 대통령 후보가 방명록에 ‘국민 통합으로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의 초석을 놓으신 지혜를 배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 아시아뉴스통신=고정언 기자
국민통합의 장애요소들과 극복방안
국민통합을 위해 막연히 국민들이 통합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우쳐야 한다고, 혹은 국정 지도자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답이 아니다. 틀린 답은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구체적인 대안이기 때문이다. 즉, 통합의 당위성이 아니라 방법론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통합의 장애요소들을 확인하고,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 번째 장애요소는 국민통합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다. 국민통합을 마치 전체주의와 유사한, 혹은 권위주의 정부에서 강조했던 국민들의 일치단결 및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국민통합은 다양성 속에서 공통분모를 확인하는 것이다. 미국이 평소 다양한 갈등 상황을 보이다가도 국가의 위기가 문제될 경우에는 일치단결하여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 번째 장애요소는 승자독식의 정치체제이다. 승자독식의 구조 하에서는 갈등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같이 연방제 등에 의한 완충장치가 없는 우리의 경우 그 심각성은 더욱 뚜렷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쥐려 할 경우에는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는 것도 피하기 어렵다. 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세 번째 장애요소는 지역과 진영, 선거구조와 결합된 정치구조이다. 진영 갈등이 제2의 영호남 지역갈등의 형태로 전락하는 양상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어렵게 극복한 지역갈등이 재연될 경우에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두워진다. 영남당, 호남당을 가능케 하는 선거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야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개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치권의 기득권 때문이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 왜곡되고, 실패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장애요소들의 극복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선진화되기 위한 전제이기도 하다.
장영수 / 객원 칼럼니스트(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헌법학 교수)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