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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이렇게 멀쩡한데 아프다니요. 강소협.. 내 한 가지 청이 있는데.. "
"아이 참.. 말투가 왜 그래? 그냥 아까처럼 편하게 말하라니까! 우씨..
좋아. 나야 손해보는 거 없으니까 아저씨 좋은 대로 부르던가 하고 부탁
이 뭔데? "
"그것이 좀 어려운 부탁일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강 소협이 우리 팽가의
가족이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강 소협이 원한다면 가주를 빼놓고 그 어
떤 것도 해드릴 테니 한번 생각해 보겠소? "
지금 팽연후가 하는 말은 정말 파격적이다 못해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가주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해준다는 팽연후의 말을 들은 강운 일행은
강운만 빼놓고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생각해볼 게. 하지만 지금은 귀찮으니까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그건
그렇고 추남형! 이거 한번 쏴봐. 되게 잘 쏴진다니까. "
정작 강운 자신은 그런 엄청난 제안을 받고도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지만
화린이나 추남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운아.. 지금 팽대협께서 아주 엄청난 제안을 하셨는데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니? 활 쏘는 거야 나중에라도 하면 되잖아. "
"지금은 별로 생각없다니까! 나중에 심심하면 한번 생각해볼 게. 아저씨!
내가 나중에 생각해본다는 거에 대해서 불만 있어? "
"아, 아닙니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꼭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저희 팽가에서는 강소협같은 훌륭한 인재가 절실히 필요하거
든요.."
팽연후가 이렇까까지 저자세로 나가는 이유는 팽가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도 있어서 였겠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이 품은 야망이 누구보다 컸던
까닭이다. 팽연후는 단순히 오련회에서 팽가를 대표하는 가주로서의 위
치가 아닌 오련회주가 되기를 원했고 더 나아가서 무림을 통일해 그 위에
군림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음.. 그래. 나중에라도 내가 꼭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테니까 이제 그
런 재미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활 쏘기 놀이나 하면서 놀자. 형! 이거 한번
쏴보라니까. "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좀 보채라. "
끈질기게 매달리는 강운때문에 마지못해 묵철강궁을 손에 쥐게 된 추남
은 일단 그 무게에 놀랐고 그리고 그 보다도 시위를 잡아당기려다가 느껴
지는 엄청난 탄력에 놀랐다.
'이런 걸 운이는 그렇게 쉽게 잡아당겼다는 건가? 후~ 내공을 쓰지 않으
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겠구나.. '
추남은 호흡을 조절하며 조금씩 내공을 끌어올려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팽연후는 추남이 묵철강궁을 들고 놀라하는 모습에 득의의 웃음을 지었
고 시위를 잡아당기려다 머뭇거리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
려 올라갔다.
'후훗! 강운이라는 꼬맹이는 그렇다 치고 너 같은 촌놈까지 감히 우리 팽
가의 묵철강궁을 우습게 봤단 말이냐? 어림없는 소리지! 네놈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다 후련해 지는 것 같구나. 하하! 아무리 용을 써
봐도 소용없을 테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그렇게 추남에게 비웃음을 보내던 팽연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똥 씹은 표
정이 되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추남이 호흡을 가다듬더니 이번에는 아무런 어려움 없
이 시위를 잡아당겨 활을 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강운만큼의 힘과 빠르
기는 아니더라도 팽연후에 비해 전혀 뒤처짐이 없었던 것이다.
"와! 형 언제 활쏘는 거 배웠어?"
추남의 전직이 사냥꾼이었다는 걸 새까맣게 잊어먹은 강운은 전에 추남이
했던말을 고대로 돌려주었다.
"자식.. 배웠지.. 옛날에.... 그때는 참 즐거웠었는데.. 아! 물론 지금도 즐
겁기는 하지만.. "
어렸을적 활 쏘는걸 배우던 시절이 떠오른 추남의 말 속에 깊은 슬픔이
배여 나왔고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려 했지만 그 웃음이 너무 쓸쓸해
보였다.
"형.. "
추남의 말을 듣고 비로서 옛날 생각이 떠오른 강운은 미안한 마음에 추남
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 거렸다.
화린도 강운에게 추남의 과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얘기를 전해 들었었기
때문에 추남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팽대협 저희가 여행을 오랫동안 하느라 많이 피곤한 상태입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이만 물러가 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
"아! 이런 제가 큰 실례를 범했군요. 제가 이미 특실로 방을 예약해 놨으
니까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이나 모레쯤에 팽가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에.. 그리고.. "
처음으로 화린이 팽연후에게 말을 걸었기에 팽연후는 조금이라도 화린과
얘기를 더 하고 싶어서 쓸데없는 얘기까지 떠들어댔고 화린은 한귀로 듣
고 한귀로 흘리면서 얘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 그런 일이 있었지요.하하하! 정말 우습지 않습니까? "
드디어 끊임없이 주절거리던 팽연후의 입이 닫히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화린이 재빨리 말을 꺼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올라가겠습니다. "
"아! 예... 그럼 편히들 쉬세요. "
사라져 가는 강운일행을 보면서 팽연후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고 자신
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소이가 방을 안내해 특실 안으로 들어선 강운이 힐끔힐끔 추남을 쳐다
보며 눈치를 살폈다.
"형.. 괜찮은 거야? 아까는 정말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미안해. "
"운아.. 미안하긴. 형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일이면 또 떠나야
할 테니 푹 쉬렴. "
강운의 등을 토닥거려준 추남이 곧장 침대로가 잠을 청했고 강운도 머뭇
거리면서 침대로 갔다.
강운일행이 묵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소향산 중
턱에 언뜻 보아도 족히 수천 년은 넘게 자라온 듯한 고목에 등을 기대고
눈을 부치고 있던 광진현은 느닷없이 날아온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자신
을 스쳐지나가 그 너비만 해도 장정 서너 명이 둘러서서 안아도 다 안지
못할 정도로 굵은 고목을 뚫고 바위에 박히는 모습을 보고 안색이 시퍼
렇게 질려있었다.
사실 광진현의 무공은 그렇게 내세울만한 것이 못 되었다. 물론 산채 내에
서야 천상천하 유아독존 천하제일 고수였었지만 산채에서 자신만 살겠다
고 도망쳐 나온 지금은 강호에서 이름 없는 삼류 고수 측에도 끼지 못할 정
도로 그 신세가 처량해 진것이다.
산채에서 빠져나온 광진현은 언제나 처럼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시비거
는걸 즐겨했고 또, 괜히 지나가는 아녀자들에게 추파를 던져서 가는 곳마
다 말썽을 일으켜왔다.
사실 광진현의 실력으로 여기까지 살아온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
었다. 자신의 실력이 형편없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무서운 줄 모
르고 밥먹듯이 시비를 걸고 싸움을 하면서 이곳까지 흘러오면서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광진현의 정신상태는 완전히 미쳐도 한 참 미친 상태였지만 살고 싶다는
의지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했기 때문에 시비를 걸어도 어느 정도 수준을
고려한 다음에 덤벼왔던 것이다. 물론 그중에 예상을 뒤엎고 숨겨진
실력을 가진 고수들도 많이 있었지만 광진현은 그런 고수들이 나타나면
언제 시비를 걸었냐는 듯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 한번만 살려달라고
하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사람
을 만난다면 적당히 훈계 받는 선에서 해결이 되었지만 무림인치고 성질
좋은 사람 없다는 말이 있듯이 거의 반죽음이 되도록 얻어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나서도 광진현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무림인 무서운 줄은 어느 정도 알았기 때문에 함
부로 싸움을 걸진 않았지만 한쪽 욕구를 줄이면 다른 쪽 욕구가 더 심해
지는 경향이 아주 심했던 광진현은 싸움을 못하는 대신에 이제는 낮과
밤 그리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나가다 예쁜 여자만 보이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시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쫓아다녔다.
처음에는 주로 서민층이나 힘이 없는 집의 사람들만 쫓아다녔었지만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기고 입맛도 까다로워 지다보니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에게 함부로 접근하다가 혼쭐이 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광진현은 바위에 박혀 있는 화살을 살펴보며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광진현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고 여자들을 관찰하
기 좋은 곳을 찾아내 아침부터 죽치고 앉아있었다.
산채에 있을 때는 기다림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고 지내던 광진현도
험란한 강호 생활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배워야만 했다.
"우~ 씨! 여기는 물이 왜 이러냐? 반나절을 기다려도 호박들만 굴러다니
니... 쯧! 그렇게 인물이 없단 말인가. 엇? 오호~ "
투덜거리던 광진현의 눈에 도저히 인간의 아름다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여인을 쫓아가려던 광진현은 여인이 일행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조금 더 두고 보기로 했다.
여인은 건장해 보이는 청년 한명과 이제 막 꼬마쟁이 티를 벗어던진 소년
과 동행하고 있었는데 소년이야 별로 신경 쓸 것도 못 되었지만 청년을
보는 순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저 자식은 누구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음.. 기억이 안 나네. 까짓
거 별로 쎄 보이지는 않은데 가서 두들겨 패버릴까? 음.. 근데 왠지 뭔가
걸린단 말이야. 도대체 뭘까.. '
머뭇거리며 어떻게 해야할까를 생각하던 광진현의 눈에 여인의 일행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질주하는 것이 보였다.
아니, 눈 앞에서 없어졌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로 그들은 순식
간에 신형을 날려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황당한 표정으로 여인일행이 사라져간 방향을 쳐다보던 광진현은 문득
산채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마, 맞아! 저 자식은 산채에서 바로 그 미친 세끼였잖아? 이, 이런..
저 개세끼는 왜 이럴 때 나타난 거야? 정말 보기 드문 계집이었는데..
으~... 어쩔 수 없다. 저 미친 자식의 눈에 띠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
같으니 서둘러 피하는 게 낫을 것 같다... 하지만 아까운데.. 쩝. "
입맛을 다시던 광진현은 서둘러 그들이 앞으로 나아간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죽을 힘을 다해 뛰어갔다.
그렇게 하루 종일을 뛰어 소향산의 중턱에 도착한 광진현은 엄청 크고 오
래된 고목을 발견하고는 그 밑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너무 무리하게 뛰어온 탓일까.. 광진현은 고목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더
니 어느새 깊은 잠이 들어버렸다.
광진현은 눈을 붙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를
내며 뭔가 서늘한 것이 옆을 스쳐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돌아
보다 머리통 만하게 뚫려있는 고목과 그 뒤에 커다란 바위에 거의 반치 정
도 박혀 버린 화살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했다.
'이, 이게 뭐지? 어떻게 화살이 고목을 뚫고 바위를 박혀버릴 수 있는 걸
까? 아까는 분명히 없었는... 엇?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를 노리고 화살을
쐈다는? '
상황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광진현은 급히 주변을 경계하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죽어라고 뛰어갔다.
강운이 객점에서 날린 화살이 여기까지 날아왔다는 것을 알리 없는 광진
현은 정말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뛰고 또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