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어릴 적에 그는 나랑 동갑이었지만 나보다 어른스러웠고 아주 마르고 키가 컸다. 얼굴은 아주 잘 생긴 편이었는데 어딘가 모르게 왕의 자손같은 귀티가 났다.
그와 동네 사격장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갖은 기억이 있는데 이상하게 그 후에는 그 사격장이 그 근처에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것을 보면 내가 꿈을 꾸고 현실로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나에게 어릴 적 진돗개 강아지를 준 적이 있다. 귀에는 세자리 숫자로 도장이 찍혀있었는데 한 번도 짖지를 않고 이상하리만치 얌전했다. 온통 하얀 색이고 눈동자가 아주 검은 예쁜 강아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탈장이 되어서 죽고말았다.
집에서 살림을 도와주던 사촌누나와 동생들이 근처의 산 입구에 묻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금강제화에서 판매원으로 시작을 해서 나중에는 한 도시의 지역본부장이 된다. 남들은 단시간에 가능하면 여러 명의 손님들에게 구두를 파는 판매방법을 선호했지만 그는 시간이 좀 걸려도 한 손님에게 집중을 해서 그 사람을 단골로 만드는 데 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 IMF가 오고 점차 구두의 수요가 줄면서 자기 밑의 직원을 해고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자신도 한 소도시의 지점장으로 좌천을 하고 결국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선택하게 된다.
미국에 와서는 온갖 험한 일들을 다 경험했다고 한다. 풀장 청소도 했고 자바시장에서 온갖 허드렛 일을 포함해서…
그러던 그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 번은 이십 일 한 번은 사십 일을 단식하면서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단식을 하다가 죽을 경험을 했다. 나중에는 식도가 쪼그라들어 물을 마시기도 힘들고 점차 의식이 흐려지기도 했단다.
지금은 LA의 한 교회에서 시니어담당 목회를 한다.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교인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노인분의 라이드, 상담, 심부름 등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교회를 나가면 저녁 늦게야 일이 끝이 난단다.
그의 인상과 목소리는 어릴 적의 모습과 아직 닮아 있었다. 단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같이 머리는 벗겨졌지만…
이번 기회에 잘 몰랐던 외할아버지의 인생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그는 평아북도의 삭주 출신이었고 청소년시절 선교사를 따라 미국에 유학을 가는 도중에 그의 아버지가 보낸 사람에게 붙들렸다고 한다. 그 후에도 그는 탈출을 계속 시도를 해서 결국 만주로 이주를 한다. 그곳에서 양귀비농장을 해서 떼돈을 벌어서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대고 일본 괴뢰정부에 비행기를 헌납한다. 결국 나중에는 일본군에게 체포를 당하고 구금중에 젓가락으로 목젖을 쑤셔서 피를 토하면서 병원으로 이송이 되고 거기서 탈출을 하는 중에 해방을 맞는다.
갖고있던 돈으로 금덩이 몇개를 사서 황해도 백천에 산과 집을 샀다가 다시 육이오 때에 피난을 내려온다. 거제에 있는 산을 하나를 구입을 해서 숯장사를 하려다가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연탄이 나오면서 그 사업을 포기하게 된다. 그 산을 판 현금을 친척이 군용트럭에 싣고 올라오다가 그 트럭이 전복이 되면서 그 돈의 대부분을 찾지 못했고 그 후로는 그는 젊은 시절 손만 대면 돈이 되는 그 망상과 현실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면서 어려운 노후를 보내신다.
내가 결혼했을 때 그가 근무하던 명동 구두가게를 밤문했을 때가 마지막으로 기억이 되니 이번에 근 35년만에 만난 셈이다.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던 가까운 친척이었는데 무엇때문에 한 번도 못 만났는지 이상하기만 하다.
그가 이곳에 머물던 이번 주는 LA 에서 한 부부가 집을 보러 왔고 카페의 한 회원부부가 집을 클로징하러 내려와서 삼촌부부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그는 내게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존댓말을 썼다. 그의 눈빛은 반짝였다.
마치 세상이 퍼붓는 고난을 자신의 의지와 신앙으로 넉넉히 갈 길을 가는 자신과 긍지를 보는 듯 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좋았고 앞으로 자주 만나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랑과 대접을 받고 갑니다. LA 에 꼭 오세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그가 떠나며 나에게 남긴 문자메세지이다.
10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