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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행 고 춘 식(‘씨알 편집위원 · 다솔 지역아동센터 공동대표) 질 문 김 성 민(광운전자고등학교 컴퓨터공학과 3년) 김 성 우(인덕공업고등학교 자동차공학과 2??학년) 김 수 경(석관고등학교? 1학년?) 주 동 혁(다솔 토론 동아리 D.D. 지도교사) 장 유 리(다솔 토론 동아리 D.D. 지도교사) 이 가 람(다솔 토론 동아리 D.D. 지도교사) 정 선 욱(다솔 토론 동아리 D.D. 지도교사) 답 변 박 재 순(씨알재단 상임이사 · 씨알사상연구소장) 기 록 조 은 진(다솔 지역아동센터 실무교사)
일 시 2014. 7. 12(토) 14:00 장 소 다솔 지역아동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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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춘식 반갑습니다. 그리고 귀한 시간을 내준 참석자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씨재단’에서는 계간으로 ‘씨알이라는 책을 내고 있는데, 매번 좌담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청소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기로 하여, ‘질문이 있는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석 달이 다 되어갑니다.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참사였지요. 300여 명이 넘는 희생자들이 있었고, 특히 200명이 넘는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교육계도 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나라의 교육도 ‘세월호 이후에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 있습니다. 저는 그 답을 씨사상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는 박재순 목사님을 모시고 청소년들이 함께 우리 교육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박재순 목사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여러분들이 자유롭게 질문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박재순 목사님은 다솔과도 이미 인연이 있습니다. 저도 씨지 편집을 맡고 있어 씨사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요. 박재순 목사님은 씨재단의 상임이사와 씨사상연구소 소장님으로 계시면서 씨사상을 삶에서 실천하시고, 평생을 바쳐서 연구하고 계십니다. 알수록 매력이 있는 씨사상을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재순 목사님은 씨사상 연구의 제1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씨사상에 대한 박재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나’를 낳는 교육
박재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갑습니다. 오늘 말씀을 나눌 제목은 ‘나를 낳는 씨교육’입니다. 생명은 ‘낳자’는 것인데, 인생은 ‘나를 낳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교육도 낳는 것입니다. 우선 다른 동물들은 학교와 교육이 없는데, 사람에게는 학교와 교육이 있습니다. 나를 낳는 일이 사람에게는 그냥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교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생명을 생명답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낳고 자라는 것은 그냥 태어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교육이 필요합니다. 다른 동물은 그냥 자연스레 낳으면 그냥 살면 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학교와 교육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교육이라는 것은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것은 생명을 낳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가장 큰 구실과 사명은 생명이 가장 생명다운 활동을 하고 그 생명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개체들은 이전의 생명을 이어서 살다가 그것을 물려주고 이어주고 죽는 것입니다. 생명을 이어받아서 이어주는 것이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활동이고 사명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이어받아서 이어받은 생명을 물려주는 것이 배움이고 가르침입니다. 생명을 어떻게 잘 이어받는지가 중요합니다. 이어받은 생명을 잘 이어주는 것이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인생이라는 것은 릴레이 경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바통을 이어받아 달려가다가 그 생명의 바통을 자손들에게 넘겨주는 것을 볼 때에 릴레이 경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경주를 하면서 그 생명이 더 자라나고 늘어나고 깊어집니다. 생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진화가 이루어집니다. 생명의 개체들은 그것이 진화인지 모릅니다. 사람들도 그것을 깨닫고 사는 이들이 드물지요. 모든 생명체는 씨의 방식으로, 씨의 형태로 생명체를 물려주고 물려받습니다. 수컷의 씨와 암컷의 알을 통해서 생명을 물려주고 물려받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생명을 직접 주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박테리아 같은 세균 상태를 제외하고는 씨을 통해서 진화되며 생명이 이어지고 생명의 진화가 됩니다. 즉, 씨이 생명 진화의 비밀입니다.
놀랍게도 거의 모든 씨들이 수컷의 씨와 암컷의 알을 통해서 생명을 물려받고 물려줍니다. 식물도 수술과 암술이 만나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다시 씨를 맺습니다. 이것이 씨와 알이 서로 물려주고 물려받는 방식과 동일합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답고 멋있는 광경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가득 찬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도 다 남에게 주고 꽃도 아름답습니다. 이것은 매우 이타적인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생명은 굉장히 이타적인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씨와 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만약에 남자만 있었다면 인류는 다 죽고 없을 겁니다. 남녀 간의 사랑으로 계속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낳는 진통과 희생
이렇게 남녀가 만나 부모가 되면 희생이 따릅니다. 씨에서 생명을 낳는 과정을 보면 자기를 깨뜨리고 죽어서 생명이 이어지는 겁니다. 생명을 낳는 모든 과정이 그러합니다. 모든 부모는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생명을 낳고 기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만일 아버지가 자식을 경쟁상대로 생각한다면 남아나는 가정이 없을 겁니다. 서양의 경우에는 간혹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건 옳지 않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제 몸으로 낳은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딸과 아들을 위해서 희생을 합니까? 많은 희생을 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경쟁하면 가정이 이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낳는 과정은 진통을 느끼고, 내가 깨어지고 희생하는 과정입니다. 모든 생명이 생명을 낳는 과정에는 진통과 자기희생이 있습니다. 파충류를 보면, 알을 낳고 끝나기 때문에 부모 자식의 관계가 성립이 잘 안 됩니다. 스승 · 제자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나 포유류를 보면 새끼를 자기 몸에서 기릅니다. 자신의 살과 피와 뼈를 나누어줍니다. 이보다 숭고한 과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가 살과 피를 나눈다고 하는데, 사실 그 전부터 여성은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보면 여성과 같이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은 없습니다. 남자들이 범접할 수 없는 희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자신의 살과 피와 뼈를 나누어 주는 진실 된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새끼를 낳는다고 끝이 아니라 자신의 젖을 먹여서 기릅니다. 이 지극 정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생명과 맘은 복사·복제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학교와 가정에서 정신적인 지혜와 삶의 원칙, 마음가짐과 마음 원칙을 전달하고 가르치려고 교육을 합니다. 생명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생명이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내가 나를 낳는 것입니다. 자기와 가장 닮고 가장 비슷한 존재를 낳습니다. 자기 생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넣어서 새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생명을 낳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나보다 나은 나를 낳는 것입니다. 학생 중에 기계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이 많아서 이야기하는데, 생명과 기계가 다른 것은 기계나 기술은 복사와 복제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생명과 마음은 복제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하여 인공지능이 발전한다고 해도 그것에는 생명과 마음은 없습니다. 생명과 마음은 복사하거나 복제를 할 수 없습니다. 생명과 마음은 낳는 것이기에 복사와 복제가 불가능합니다. 생명은 낳는 것인데, ‘겉의 나’는 부모가 낳아주지만 ‘속의 나, 얼의 나, 정신의 나’는 내가 낳는 것입니다. ‘몸의 나’는 그냥 부모가 낳아주지만, ‘마음속에 있는 나, 얼과 혼의 나’는 부모나 선생님이 도와줄 수 있지만 결국에는 내가 낳아야 합니다. 대신 낳아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명과 본성과 목적은 ‘내가 나를 낳는 것입니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사람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그대로 사람 구실은 못합니다. 평생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낳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냥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주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 되고, 내가 ‘나’가 되고, 내가 ‘나’를 낳아야 하는 겁입니다. 여기까지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고춘식 박재순 목사님이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참으로 많으실 겁니다. 씨사상의 전문가들을 키우기 위해 몇 학기 강의를 하시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씨사상에 대해 말씀하시자니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나를 낳는다.’는 말이 청소년들, 특히 고등학생들에게는 더욱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동물과 다르게 사람은 사람다움이 필요하다, 사람다워지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고 공부가 필요하다는 게 참 와 닿습니다. 컴퓨터공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질문을 하고 싶은지 궁금합니다.
김성민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마음은 스스로 키워야 한다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낳는다는 것과 씨알형태로 이어받고 물려받는다는 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면서도 ‘씨알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 그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네요.
거짓(거죽), 참(알 참)
박재순 모든 생명은 생명을 물려받고 생명을 남기는데, 씨을 통해서 생명을 물려주고 물려받습니다. 씨은 생명진화의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생명의 씨알입니다. 사람 의 생명 속에는 세 차원이 있습니다. 자연생명, 인류역사, 신적 생명의 세 차원을 씨이라는 말로 함께 표현합니다. 씨에는 껍데기가 있고 알맹이가 있습니다. 우리말에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거짓’이란 말이 중세에는 ‘거즛’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거죽’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껍데기와 껍질에 매여 있는 것이 거짓입니다. 또한 참이라는 말의 유래를 보면 ‘알맹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알맹이가 차오르는 것이 참입니다. 참과 거짓이란 말 속에도 씨사상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거죽이나 껍질이 중요하지만 거죽이나 껍데기는 알맹이를 키우고 살리기 위해서 중요한 것입니다. 자연 생명은 마음의 껍데기이고, 마음은 얼의 껍데기입니다. 몸이 소중한 것은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고, 마음이 소중한 것은 그 속에 얼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과 물질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소중한 이유는 정신과 뜻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에 나와서 부자로 살 수도 가난하게 살 수도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만 돈을 사용한다는 것은 허무한 것입니다. 돈과 물질을 정신과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해야 인생이 보람이 있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정신과 뜻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 생명과 정신을 낳는 것, 내가 나를 낳는 것, 보다 나은, 보다 깊은 큰 나를 낳아가는 것이 본질입니다. 이것을 위해 돈이나 정신을 쓰는 것이 보람되고 좋은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춘식 수경이가 궁금한 것은 뭔지요?
김수경 저는 씨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나를 낳는 과정에 교육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교육이 과연 어떤 것을 말하는지 궁금합니다.
참된 교육은 거짓된 자아를 깨뜨리고 참된 자아를 찾는 것
박재순 생명이 생명을 낳는 데에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또한 내가 나를 낳는 것에도 희생과 고통이 따릅니다. 아픔이 따르는 이유는 껍데기 나, 거짓 나를 깨트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욕심에 붙잡힌, 편견에 사로잡힌, 미움이나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힌 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나’와 ‘너의 나’하고 ‘그의 나’가 서로 상처를 주고 싸우는 것은 거짓된 나, 진정한 나가 아닌 것과 싸우는 것입니다. 몸의 욕심과 집착과 편견에 붙잡힌 껍데기 나를 깨뜨려서 벗어나야 자유로운 나에 이릅니다. 이럴 때에 편해지고 사랑을 할 수 있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유영모 선생님은 철학이란 깨서 배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집에 사로잡히고 욕심에 사로잡힌 나를 깨뜨리고 배우는 것이 철학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낳는 교육이라는 것은 거짓 나를 깨뜨려서 참된 ‘나’를 찾는 일입니다. 참 교육은 거짓된 자아를 깨뜨리고 참된 자아를 찾는 일입니다. 물론 방법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교육이지만 그 교육의 중심의 중심에는 그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고 쓰는 그 사람의 ‘나’, 나를 깨고 깨우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고춘식 성우는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깨어지는 교육을 받은 기억이 있었는지요? 본인이 가지고 있던 어떤 고정관념이나 습관이 깨진 것을 느낀 경우가 있었나요?
김성우 아뇨, 기억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궁금한 것은, 씨사상을 알고 그 교육을 받았을 때 그대로 행동을 하면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인지를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박재순 생명도 사람도 완성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유영모 선생님도 인생에는 완성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생명과 사람은 완제품은 없지만, 완성을 향해서 늘 새롭게 되고, 깨어져야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미완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정되고 완성된 것이 없지만 그래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정해진 것도 없고 늘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자유로운 것입니다. 완성되는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고춘식 일반 고등학교가 많이 힘들다고 알고 있습니다. 학교 생활하면서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지요? 반대로 가장 즐거운 경우는요?
김수경 하루 종일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친구들끼리 해소하기 위해 노력은 하지만, 늘 공부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친구들끼리 서로의 생일을 챙겨주거나 편지를 쓰거나 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순둥이 악어
고춘식 아직도 학교에서는 학생들 간에 폭력이 있다고 합니다. 학교 폭력을 줄여가는 데 씨사상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박재순 폭력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것입니다.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것은 껍데기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나운 감정 분노와 미움 같은 마음의 껍데기서 폭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씨사상에서는 이런 껍데기 안에 알맹이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알맹이는 참 소중합니다. 우주의 별들이 탄생할 때 생겨난 무거운 원소들이 그대로 사람 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 몸의 뿌리는 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이 우리 몸의 고향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별들에서 온 그대’입니다. 생명진화의 역사가 우리의 DNA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한 사람을 만날 때 우주의 역사를 만나고, 37억 생명의 역사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 속에는 사랑이 있고, 얼이 있고, 영원한 신적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자존감이 생겨납니다. 별들의 역사와 200만년의 역사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 내 자신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자존감이 생겨나며 폭력을 저지를 수 없게 됩니다. 자존감이 없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우주보다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다른 사람도 자신만큼 소중하게 생각을 하면 폭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베트남 뉴스에서 ‘순둥이 악어’ 뉴스를 봤습니다. 베트남의 시골 마을에 있는 국수집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데 그 국수집은 ‘순둥이 악어’가 있는 걸로 유명합니다. 몸집은 큰 악어인데 가족들과 한 가족처럼 지냅니다. 악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주인이 악어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아주 소중하게 길렀더니 그런 순둥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흉칙한 이빨을 가진 동물도 생명의 본성 속에는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 서로를 해치지 않게 자라납니다. 생명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물질의 세계에서는 서로 더불어 있을 수 없는 요소들이 생명의 세계에서는 서로 상생 공존합니다. 그것 자체가 엄청난 사랑의 기적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사실은 초월적 사랑의 기적을 실현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본성입니다. 이렇게 보면 폭력을 휘두르는 청소년들의 난폭한 행위도 사실은 껍데기에서 나오는, 일시적인 모습입니다. 그 껍데기를 지나서 속을 들어가면 순둥이 같은 인간 영혼의 본성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씨사상은 이런 교육을 하려고 합니다.
고춘식 얼마 전에 어떤 글을 읽어보니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 자존은 건드리면 터지는 무서운 폭탄이 된다고 합니다. 자존감은 자기 성숙이라고 합니다. 목사님은 씨사상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깊이 있게 알면 자존감을 키울 수 있고, 이를 통해서 학교 폭력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성민이가 가장 자존감을 느꼈던 경우는 언제였나요?
김성민 저는 아직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모르기도 하고.... 음, 잘 생각이 안 나네요.
주동혁 인터넷 등에서 씨사상이란 단어를 많이 보았는데, 정말 씨와 알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가요? 그리고 씨사상과 생명사상이 분리가 될 수 있는 것인가요?
박재순 생명사상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말이고, 씨사상은 씨알중심으로 생명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흔히 생물학자들이나 생명공학자들이 과학적으로 공학적으로 생명을 이해하다 보니까 생명을 기계적이고 물리적 관점에서 접근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씨은 생명의 주체성과 정체성, 정신성, 신성을 강조하는 생명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사상이라고 하면 동양적 접근과 서양적 접근이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생물학자들은 공학적으로 접근을 해서 생명을 유전자의 자기 복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저는 생명이 복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주체는 ‘나’인데, ‘나’는 복제가 불가능합니다. 마음도 내가 있으니까 마음이 있고, 느낌이 있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학자들은 생명을 말하면서 복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나 과학자 사이에 큰 혼란이 있습니다.
왜 씨알사상이 낯설까?
이가람 예전에 책에서 봤을 때에는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박사님 말씀을 들으니 좀 이해가 됩니다. <씨사상 씨누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사실 제가 공대에서 공부를 해서인지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직접 말씀을 들으니 이해가 되는 거 같습니다.
박재순 어떤 부분이 어려웠나요?
이가람 평소에 잘 접하지 않는 단어가 많아서 생소하게 느끼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일상적인 거나 직접적인 예시를 들어주시면서 말씀을 해주셔서 이해가 되는 거 같습니다. ‘씨재단’에서 목사님은 어떤 활동을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박재순 저는 씨재단에서 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습니다. 우선 씨사상을 연구해서 책을 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씨사상을 가르치고 연구자들도 양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씨사상과 정신에 대해 보급하고 알리는 목적으로 ‘씨지’를 발간하고 있는데, 점점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회원들은 함께 답사를 하면서 지역을 걷기도 하고 산행을 하는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씨사상을 스스로 터득해서 지역에서 씨운동을 전개하도록 하는 것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씨이라는 말이 낯설고, 사상도 낯설 것입니다. 그러니 씨사상을 확립한다는 것은 더욱 낯설 것입니다. 지금은 돈과 기계가 주도하는 세상이라서 생각한다는 것과 사상을 내세운다는 것이 낯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더욱 이해가 어려운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기계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습니다. 핸드폰이나 스포츠나 돈에 대해서 관심도와 욕구가 아주 높지만 이것이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한 고비가 지나가면 물질문명도 기울 때가 올 것이고 그러면 새 문명이 동틀 수 있습니다. 오늘 정치의 과제는 돈이 한쪽으로 몰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돈이 고루 돌아가면 멀지 않아 기계와 돈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스위스에서는 얼마 전에 한 회사에서 최하 봉급자와 최고 봉급자의 연봉차이가 11배 이상 넘으면 안 된다는 법안을 놓고 국민투표를 하였지만 부결되었습니다. 일단은 부결되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국민투표를 하게 되면 통과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스위스뿐 아니라 유럽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기계와 돈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생명철학에 대해서, 나를 낳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밀알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번역 같습니다. 밀알은 성경의 원어를 직역한 것입니다. 중동지역에서는 밀과 빵이 주식이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쌀과 밥이 주식입니다. 밀알 대신 ‘씨알’로 번역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씨알사상은 생명의 보편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보편적 진리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면 낯설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씨사상이 보편화되어 서로 이런 생각들을 하며 대화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 동안 서양철학 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우리의 몸과 맘과 얼을 정화하고 고양시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합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연구하고 공부하여 많은 저서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 없는 것도 열심히 연구하는데, 하물며 씨사상은 우리의 삶과 직접적 연관이 많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맘과 얼을 정화하고 고양시키는 철학입니다.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씨알사상을 더욱 연구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가람 말씀 중에 ‘그 고비가 지나가면’이라고 하셨는데, 그 고비를 넘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요?
박재순 물론 민중들이 이를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다수가 소수를 위해 희생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바라는 방향으로 정책이 이끌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상하게 99% 국민이 1%의 사람이 주도하는 게임 규칙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면 이런 잘못된 게임규칙이 깨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숙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90% 국민이 바라는 방향으로 정치·경제·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얼마 전 기독교계의 큰 기관 대표를 지낸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은 여러 가족들과 함께 생활공동체를 추진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자유시장경제와 함께 자치와 협동의 공동체적 경제를 발전시켜 가야 합니다.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자치 공동체를 만들어 가면 공생하고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춘식 요즘 책을 읽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책 읽는 사람이 점점 소중해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자본의 논리와 경쟁의 논리, 욕망의 논리가 압도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씨사상이 점점 소중해지고 있습니다.
박재순 글 읽는 사람을 말씀하셔서 생각이 납니다. 파리가 사람보다 5배 이상 사물을 빠르게 볼 수 있다고 해서 많이 놀랐습니다. 수 억 년 전부터 시각이나 청각은 진화하고 발달되어 왔기 때문에 익숙한데, 문자가 생겨난 것은 5천 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글을 읽는 인간의 뇌신경 세포가 진화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의 뇌 구조가 보는 것에 익숙하게 되어 있고, 글 읽는 일을 위해서 인간의 뇌신경 구조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그러니 글을 읽기 위해서는 뇌신경 회로를 새롭게 만들고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뇌신경 구조에 없는 것을 만들려고 노력을 하다 보니 인간 뇌의 활동능력과 인지능력이 획기적으로 증진된 것입니다. 그래서 독서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지만 인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은 생명진화의 역사와 문명사에서 큰 퇴보를 뜻하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장유리 목사님께서 처음으로 어떻게 이런 사상을 추구하고 연구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박재순 제가 대학 4학년 때 함석헌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 시작해서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따라다니다 보니 씨사상과 친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저를 가까이 하며 많이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많은 애정도 주셨습니다. 직설적으로는 아니지만, 당부를 많이 주셨습니다. 한번은 독대를 하고 있는 데에, “나는 생각이 나서 곧장 말은 하지만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하는 말은 잘 못 한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저에게 하신 것은 씨사상을 연구해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정립하라는 뜻이 있었던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함석헌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 했습니다. 그 이후에 씨알사상을 계속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장유리 청소년들에게 한 시간 정도 씨알사상 특강을 하면 아이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박재순 홍성환 씨은 학원에서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씨알사상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에게 수업 중에 간단하게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라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학생들이 알아듣고 좋아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씨은 스스로 싹이 트고 잎과 가지를 내고, 스스로 꽃 피우고 스스로 열매를 맺고, 스스로 씨을 맺는 것입니다. 사람도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생들의 생활이 바뀌고 변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학생들이 대학 공부를 하고 함께 씨사상을 공부하길 바란 거 같지만 그 이상 발전적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거 같습니다. 씨알사상이 말하는 하나의 원리나 교훈을 가지고 대중적인 강의를 하면 이해가 잘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씨사상의 핵심 내용을 집어서 원리를 전달하는 것도 필요해 보입니다.
정선욱 기독교 교리나 불교의 교리라는 것을 초등학생에게도 그 수준에 맞게 하고 있습니다. 씨사상도 연령대 별로 교육을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박재순 그러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교재가 앞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씨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 있다면 받겠습니다.
주동혁 씨사상의 내용을 봤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체로 섬긴다는 것인 거 같습니다. 아까 성민이가 자존감이 높았던 경험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을 봤을 때, 현재의 우리나라 교육 상황에 어떻게 접목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봤을 때에는 지금의 교육 현실에서는 당장 접목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발전의 여지는 많겠지만, 당장 접목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신 게 있으신지요?
박재순 현재 입시 경쟁-대학입시와 출세교육-에서 씨사상과의 접촉점은 매우 제한적인 거 같습니다. 학교교육이 변화되려는 노력이 있을 때에 씨사상과 현장교육이 접목되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이때에 씨사상이 좋은 교육의 비전과 동기, 내용을 제시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입시경쟁 교육이라고 하더라도 학교 교사의 역량에 따라 씨사상이 접목되고 교육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전 안창호 선생은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에게 큰 절을 하면서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큰 절을 받으면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자존감이 크게 늘었을 겁니다.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 설립자고 3·1운동 지도자인데 어린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허드렛일을 하려고 하면 학생들은 공부를 해서 나라를 일으켜 세울 큰 인재라고 여겨 이승훈 선생이 변기 청소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아이들이 많은 자존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춘식 다솔은 ‘작은문화공동체 다솔’이라고 합니다. 다 푸르게 솔잎처럼 살자는 의미에서 다솔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런 다솔이 어느덧 사반세기를 맞고 있지요.
제가 씨사상을 접하면서 다솔에서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 자원교사 선생님들과 실무자분들이 바로 ‘씨알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서로 관계 맺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다솔이라는 이름으로 만나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가며 서로 소통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모습을 보면 씨의 삶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곤 합니다.
갈수록 살벌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나름의 공동체적인 성향을 지니고 관계를 맺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곳이야말로 씨의 정신이 구현되고 있는 현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요. 그러면서 이런 씨다운 생각을 가지고 너와 나의 관계 속의 서로 존중해 주는 마음을 더욱 키워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요즘 공교육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답이 없다는 것이지요. 공교육에서도 이런 씨정신이 스며들게 하는 노력들이 있어야겠고, 그것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애를 쓰는 분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리 발언들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주동혁 씨사상이라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느끼기는 하는데, ‘탁!’ 하고 쉽게 말하기는 어려움이 있는 거 같습니다. 노력을 하고 계시겠지만, 좀 더 씨사상을 쉽게 받아들이고 실생활에서도 쉽게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발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재순 씨사상을 쉽게 표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한데, 더 중요한 것은 씨사상을 모르고도 씨사상과 정신에 걸맞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씨사상은 그렇게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당신은 씨사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씨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당신이 씨입니다. 씨로 살아오셨습니다’라고 말해주고 발견해주는 것이 1차적인 책임인 거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씨이다’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한 거 같습니다. 내용이 쉽고 어려운 것은 그 다음인 거 같습니다. 내가 씨이라는 자각이 없이 이론적으로만 이야기하면 겉돌기만 할 뿐입니다. 말과 이론이 아닌 내 존재와 삶을 확인해 주고 이해해 주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지면 될 거 같습니다. 내가 씨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씨로 살려는 결단을 하고, 내가 씨이라고 선언을 할 때 씨사상이 와 닿는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내가 씨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격려해주는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밥을 먹거나 술을 먹으며 건배할 때, 함께 ‘씨알이라고 세 번 외칩니다. 씨이라는 말은 참 아름답고 품위 있는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씨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더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씨이라는 말이 백성이라는 말보다, 국민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하고 아름다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모두 박수)
고춘식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의 뜻을 착각해서, 석가가 너무 오만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석가뿐만 아니라, 태어난 모든 존재가 다 그러하다는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뜻이 매우 높고 깊다고 느꼈습니다.
인내천 사상도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큰 뜻 속에는 단지 나라는 존재는 나만의 존재가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람이, 모든 사람이 얼마나 큰 존재인가 알 수 있습니다.
다솔 공동체의 식구들도 나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사실을 온몸으로 알고, 내가 하늘과, 모든 생명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오늘의 ‘질문이 있는 수업’을 통해서 새롭게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