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넌 어디에서 왔니.
어린 나무가 물었다.
넌 어디에서 왔니.
맞은편 나무가 되물었다.
너도 모르는구나.
그걸 아는 존재가 있어?
- 많은 게 뭐지?
부족하지 않다는 뜻이야.
부족하다는 건 뭐지?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것.
넌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아?
어린 나무는 주변의 키 큰 나무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저기 높은 곳의 새들에게 들었어.
나도 새소리를 들었어. 주로 이런 말을 하던데. 조심해. 위험해. 가까이 오지 마.
그게 바로 부족하다는 뜻이야.
부족하면 가까이 있을 수 없어?
우리 사이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가까웠다면......
어린 나무는 말을 잊지 못하고 맞은편의 나무를 가만히 바라봤다.
좋았을까?
맞은편 나무가 나뭇잎을 마주쳐 바스락 소리를 내며 물었다.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야. 10p
- 어느 날 어린 나무의 푸른 이파리 틈에서 하얀 꽃이 피었다. 나무는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맞은편 나무를 바라봤다. 그곳에도 꽃이 있었다. 11p
- 태풍이 몰고 온 온갖 위협 속에서 두 나무는 서로 뿌리를 움켜잡고 가지를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봄이 오더라도 새잎을 만들지 않겠다고. 그리고 다짐했다. 봄이 오면 마지막인 것처럼 더 많은 꽃을 피우겠다고. 이어 다짐했다. 열매 따위 맺지 않고 뿌리에만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더 많은 열매만이 다른 세계에 닿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다짐을 번복하고 반복해도 비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15p
- 두 나무는 살아가는 방법만을 알았다. 그들은 삶을 거부하는 서로를 지켜볼 수 없었다. 하나의 나무가 토하듯 푸른 잎을 밀어내자 맞은편 나무도 그렇게 했다. 그들의 뿌리는 엉켜 있었다. 그들은 죽음에 몰두할 수 없었다. 16p
- 홀로 남은 나무 주변을 뒹구는 푸른 이파리와 나뭇가지.
수수께끼처럼 남은 그루터기.
그와 같은 죽음은 처음이었다.
그처럼 강제적인 죽음은. 19p
- 노력하는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노력은 비굴한 안간힘이니까. 30p
- 일화의 라이벌은 이 세상 전부였다. 일화는 그것에 포함되어 포위된 채 싸워야 했다. 38p
- 물건이 사람을 잃은 경우, 사람을 유실한 경우가. 52p
- 목화는 자기가 아직 살아있음을 의심했다. 버스나 자동차나 자전거를 수천 번 탔을 것이다. 매일 길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아직 한 번도 사고를 겪지 않았다고? 저렇게 많은 사람이 죽는데 어째서 나는 살아 있지? 수많은 죽음 앞에서는 살아 있음 자체가 비정상이었다. 65p
- 신은 부당했다. 악의 없이 잔인했다. 장미수에게 신은 전능에 도취한 존재에 불과했다. 복종은 당연하며 자기 말을 따르지 않으면 벌을 내리는 독재자. 91p
- 100년 가까이 살아온 임천자는 이제 두려운 것이 없다. 평생 두려움을 만지고 살아 그것은 처음의 모양을 잃고 동글동글 작아졌다. 94p
-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신에게 구걸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 목화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125p
- 사람의 탄생이란, 어쩌면, 뿌리째 뽑히는 것. 사랑의 시작 또한, 어쩌면, 뿌리째 뽑히는 것. 139p
- 목화는 종종 상상했다. 깊은 산속에서 홀로 태어나 홀로 살다가 홀로 죽은 사람을. 작은 행성의 드넓은 바다에서 홀로 탄생해 홀로 소멸한 생명을. 끝없는 사막에서 홀로 피어나 홀로 메말라 가는 식물을. 그들이 확실히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신은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우주에서 생명이란 너무나도 이상한 현상. 신은 생명에 관심이 없다. 살려달라는 기도를 신은 이해하지 못한다. 인류 생존의 각종 증거와 인사말을 저장한 탐사선이 우주를 비행하더라도 그것은 돌과 불덩이와 먼지와 암흑 물질 사이를 떠돌 뿐. 적막과 적요뿐. 어둠과 고독뿐. 인류는 해변의 모래알보다도 작은 행성에서 홀로 존재하다 홀로 사라질 것이다. 인류가 잠시나마 실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줄 이는 없다. 142p
- 보이지 않는 곳에 나이테를 만들면서, 땅속 깊이 더 멀리 뿌리를 내리면서, 하늘 높이 더 멀리 잎을 틔워 올리면서 오직 한자리에서 수천 년을 살아가는 나무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159p
- 신목화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내 운명에 내 몫이 있음을, 내 의지가 개입할 수 있음을, 내 삶의 주인은 나임을 증명하는 것. 164p
- 신이 자기를 보살핀다는 생각만큼 순진하고 이기적인 건 없어. 산 사람이나 삶을 축복이라고 여기는 거야. 신의 옹졸한 차별을 은총이라 부르면서. 184p
- 아주 고집스럽게 자기 불행만 들여다보는 사람들한테는 신점도 사주 풀이도 기도도 무용지물이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니까. 그들한테는 자기 불행이 노다지인 거야. 누구한테도 뺏기기 싫은 굉장한 보석인 거지. 왜냐면 내 불행만이 나를 위로하니까. 알아주니까. 가장 가까이서 나를 지켜주니까. 204p
- 삶은 죽음과 탄생을 모두 담는 그릇이다. 죽음 없는 삶은 불완전하다. 23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