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압제받고 착취당하는 南美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自由化運動에 투신하고 있는 남녀들의 체험을 그리스도교 복음에 비추어서 고찰해 보려는 하나의 試圖이다.
해방이란 개념은 인간이 자기의 實存과 자기의 생애를 통해서 자유를 쟁취하는 가운데 인간이 자기를 變革함을 강조한다. 성서는 전적으로 선물로서 주어지는 해방- 구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해방을 이야기한다. 그 선물은 곧 우리가 말하는 모든 국면을 포괄하며 해방운동 전체에 깊은 의의플 부여하고, 아울러 예견할 수 없는 완전한 해방이 어떤 것인가를 시사한다.
"신학은 교회의 역할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신학은 교회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좌우되기 마련이다." 이는 Christian Duquoc의 말이다.
교회 초기 몇세기 동안을 보면 우리가 지금 말하는 '신학'이라는 것이 靈性生活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었다. 본래 신학은 聖書에 대한 默想을 의미했으며 영성의 증진함양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初心者' 곧 여느 信者와 '精進者' 긑 完德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구별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신학이라면 전적으로 修道의 성격을 띠었고 따라서 俗事와는 거리가 먼 영성생활을 주안점으로 하고 있었다. 신학은 聖化의 좁은 길을 따라 精進하고 완전한 영성생활을 추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염원에 대해 하나의 龜鑑을 제시햐야 했다.
14세기를 전후해서 신학자들과 영성생활 지도자들간에 균열이 생겼다. 이 결별을 잘 볼 수 있는 책이 <遵主聖範, Imitatio Christi)으로, 지난 수세기 동안 깊은 영향을 끼친 책이다. 신학과 영성생활의 이 균열때문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곤경을 당하고 있다. 비록 성서를 중심으로 한 쇄신이 있었고 평신도의 영성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여 가히 새로운 영성신학'이라 할 움직임이 있긴 하지만 이 장애는 여전하다.
신학이 갖는 이 영적 기능은,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매우 중요시되었었지만 후대에 와서는 지엽적인 것으로 천대받다시피 되었었고, 계속 여전히 불변하는 신학의 一翼을 구성하고 있다.
성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인간이 드리는 全的應答이 곧 신앙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이해'란 일정한 진리들에 대한 認定 또는 기억이라고 볼 수 없다. 차라리 하나의 歸依요, 全人的인 태도이며 生에 대한 특별한 자세를 이해하는 것이다.
Karl Barth는 그리스도교의 인간본위 사상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으로 표현한 바 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상,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이러한 제반 여건이 세계 안에서 인간이 갖는 현존과 활동, 특히 타인들과 관련된 활동을 재평가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