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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은 더불어 가는 것. 이 말은 오래된 이데올로기다. ‘人’부터 서로 기대는 삶을 끈끈하게 강조한다. 그러니 혼자 가는 삶은 위험천만하다. 무엇보다 종족번식이라는 인류의 지상 의무에 반하는 짓이니 대역 죄인이 따로 없다. 그런 세상에서 단독의 길이란 거개가 고행이다. 무리 속에 들어야 편하다는 지엄한 훈계에서 보듯, 비정상의 비(非) 같은 것은 얼른 떼고 갈수록 신상에 좋다. 보통 사람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면 갖은 수모와 피해가 따른다. 그들 안으로 들어오라고 끊임없이 종용할 때, 밖에 서 있는 자는 불안을 먹고 살아야 한다. 로마(집시) 추방 역사처럼, 금을 긋는 모둠살이의 힘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런 차별은 ‘다름’에 대한 배타성과도 관련이 깊지만 안과 밖의 가름도 큰 몫을 하는 듯싶다.
‘더불어 삶’은 어쩌면 단독자의 운명 때문에 더 강조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혼자 와서 결국은 혼자 간다. 생명 가진 자의 운명이 다 그러한데, 서로 기대고 나누는 게 더 살 만한 세상을 만들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안락을 좇는 삶은 사람을 쉽게 틀에 맞추며 획일화하거나 상품화하게 된다. 아파트 같은 규격화의 편리함에 안주한 지 오래, 그래서 낯선 세계를 찾는 모험이며 여행을 일상화하는 신유목인 ‘호모 노마드’들이 점점 넘치나 보다. 일탈을 종종 감행하는 예술인만 아니라 고독 속으로 잠행하는 새로운 만행도 느나 보다.
단독자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만행. 바랑을 짊어진 고독한 뒷모습이 길게 겹치는 만행은 본래 운수행각(雲水行脚)으로 더 많이 쓰이던 말이다.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줄임말 운수는 구름이나 물이 어디에도 걸림 없고 막힘없이 흘러가듯, 일체의 경계나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운 심경으로 살아가는 수행의 한 방법이다.
그런 운수행각을 일찍이 노래한 시인으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의 검경을 피해 산중을 떠돌던 조지훈이 있다. 그 길에서 조지훈은 특유의 선취(仙趣) 높은 명편을 몇 남겼다. 동양 고전과 불교 등 한국 미학에 대한 남다른 사유와 소양으로 ‘신고전(新古典)’이라는 평을 이미 들었지만 말이다.
만행을 자주 꿈꾸는 시인들. 그들은 오늘도 고독한 운명의 손금을 쥐고 세상의 안팎으로 또 삼라만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나오고를 한다. 그들의 시적 만행을 따라가 본다.
2.
무릇 떠남은 고행의 시작이다. 만행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혼자 겪어야 한다. 그 길은 단독자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나서는 길이다. 아나키스트의 길도 비슷하다. 세상과 홀로 마주 서는 고독 속에서 절대 자유를 구한다는 점에서 특히 닮았다.
누가 또 먼 길 떠날 채비 하는가 보다
들녘에 옷깃 여밀 바람 솔기 풀어 놓고
연습이 필요했던 삶까지도 모두 놓아 버리고
내 壽衣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다
빈손이 허전하면 거기 깊이 찔러 넣고
조금은 거드름 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라
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하든가
천지에 꽃 피고 지는 것도 순간의 탄식
내 사랑 아나키스트여 부디 홀로 가시라박시교 시인
―박시교 〈나의 아나키스트〉 전문(《현대시학》 2010. 10)
‘아나키스트’는 단독자 중에서도 매력적인 캐릭터다. 무엇보다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추구하며 일체의 억압을 허용 않는 태도가 그러하다. 시 역시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꾼다. 끊임없는 부정과 저항 너머 날것의 자유가 시의 최고 양식이다. 그러니 시인이야말로 진정한 아나키스트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그런 질문을 하게 한다. 화자가 “떠날 채비”하는 들녘에서 보는 생의 마지막 길은 가장 홀가분한 상태로 비친다. 하지만 “내 수의(壽衣)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라는 개구쟁이 같은 약간의 투정 어린 말은 다 털고 가기 어려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어 “빈손이 허전하면 거기 깊이 찔러 넣고” 가겠다는 선언에서 우리는 홀로 가는 자의 고독 안쪽에 꿍쳐 놓은 자존을 만난다. 또 “조금은 거드름 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라”는 대목을 보면, 조선 선비 같은 여유만 아니라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즈음 삶에 대한 저항도 묻어난다. 이런 표현의 근간에는 모든 여정은 “일회용”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천지에 꽃 피고 지는 것도 순간의 탄식”일 뿐 아니던가. 우리의 삶도 그러하니 여유를 가지라는 전언. 그런 길이기에 더욱 “내 사랑 아나키스트여 부디 홀로 가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화자의 여유 이면에는 단독자의 음영이 짙게 서려 있다. 패를 짓고, 일을 꾸미고, 잇속 챙기기에 분주한 무리 속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선 아나키스트의 뒷목을 길게 남기는 것이다.
콩 타작을 끝으로 가을도 끝이 났다
외면 받은 이름들은 낱알로 뒹굴다가
하나 둘 무대 밖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슬픔마저 그리워진 신라의 들판 위로
서툴렀던 고백처럼 첫눈이 다시 오고
강물은 뜨겁던 노래 속살 깊이 묻었다
떠돌다 길을 잃은 바람들의 배회 앞에
이중섭의 은지화처럼 철촉으로 긁어대는
까마귀 늙은 울음이 핏빛보다 붉었다
―민병도 〈겨울 들판〉 전문(《한국시조》 2010 가을호)
민병도 시인
겨울을 맞는 들판에는 고단함과 소임을 다한 자의 휴식이 함께 있다. 빈 들판이라 일 년 농사에 쏟았던 땀을 거두며 다음 해를 예비하는 순환도 더 확연히 드러난다. 들판은 노동을 먹고 자라는 가장 정직하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다. 거기서 마주하는 뭇 생명의 순환은 그래서 더욱 경건하다. 시인은 “콩 타작을 끝으로 가을도 끝이 났다”며 농부처럼 담담한 진술로 겨울 들판을 제시한다. 이런 비움은 또 다른 채움의 암시이자 예비다. 휴식에 든 양 보이는 것은 들판의 겉모습뿐, 흙 속에서는 생명을 위한 이런저런 마련들로 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낱알로 뒹굴다가/ 하나 둘 무대 밖으로 자취를 감”추는 운명의 “외면 받은 이름들”도 불러내 흙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렇게 잠시 호명한 쭉정이의 삶을 덮어주는 들판의 겨울은 감각을 다시 세운다. “서툴렀던 고백처럼 첫눈이 다시” 온다니 겨울 들판은 그런 설렘의 기억들이 붐비며 거듭나는 곳이다. “뜨겁던 노래 속살 깊이 묻”는 강물은 물론 속으로 깊어지는 겨울의 모습이지만, 침잠 속 하강의 예비이기도 하다. 그런 들판에서 시인은 소리 하나를 집어 올려 상승을 편다.
황량한 들판의 까마귀 울음, 그 이미지를 강렬하게 만드는 것은 “이중섭의 은지화처럼 철촉으로 긁어대는” 소리의 감각적 재현이다. 그 소리는 다시 “까마귀 늙은 울음이 핏빛보다 붉었다”고 유화 같은 시각적 덧칠을 입는다. 수도자를 닮은 겨울 들판, 즐겨 그림 고행을 한 “이중섭”, 저승길을 연상시키는 “까마귀”, 읽기에 따라서는 이 모두가 만행의 다른 발현이다.
구청 앞 확성기에서 종일 우는 노동歌
말끔히 밀어버린 재개발 공사장에
시인이 기어들 만한 낮은 지붕은 이제 없다.
수당을 올려 달라 보상 대책 세워 달라
철거당한 세입자 미화원들 절규해도
십년 뒤 그 십년 뒤도 변치 않을 생존구호.
월급도 보너스도 퇴직금도 없는 일
고료를 못 주어서 處染한 잡지들
常淨인 시의 제단에 경전처럼 모셔놓고.
훗날을 장담하기엔 매한가지 아득하여
남미의 인민해방찬가가 마리화나처럼 퍼지는
청진동 좁은 골목을 이리 떼가 지나간다.
*處染常淨 :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함.
―백이운 〈狼狽〉전문(《현대시학》2010. 10)백이운 시인
이 작품에서 “이리 떼” 밖에 홀로 선 자의 고독을 엿보는 것은 과잉일까. 특히 작품 전체를 관장하는 단어 ‘낭패’에서 미묘한 파장이 와 닿는다. 일상적으로 쓰는 의미 위에 본래의 뜻을 겹치면서 만드는 효과 덕분이다(낭패는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은 ‘낭’과 그 반대인 ‘패’가 나란히 걷다 사이가 벌어지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한자를 그대로 쓴 것도 애초의 착안과 함께 기의의 확장을 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렇게 읽을 때 얼핏 거리가 먼 듯한 첫 수와 둘째 수의 “노동가”와 “생존구호”, 셋째 수의 “잡지들”과 넷째 수의 “이리 떼”가 모두 “낭패”에 얽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관계망이 환기하는 것은 우리네 삶의 이런저런 “낭패”들이다. 첫 수, 둘째 수의 사람들처럼 나머지 경우도 낭패의 다른 모습에 불과할 수 있는 것. 그런 점에서 시인이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셋째 수일 듯싶다. “고료를 못 주”는 잡지 주간이나 “시의 제단”이나 세속에 물들지 않은 깨끗함에의 지향은 높지만, 실은 마음대로 안 되는 낭패의 씁쓸함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시인이 세속의 이런저런 욕망들을 “낭패”로 엮어내며 현실의 이면을 곱씹게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 삶은 “낭패”를 거듭할 뿐인가, 그런 생각마저 드는 것은 다층적으로 구축한 의미망 때문이다. “狼狽”만 아니라 “處染常淨”을 따로 떼어 “處染한 잡지들”과 “常淨인 시의 제단”으로 쓴 것도 말 맛과 의미 확장의 묘미를 더한다. 그 모두 만행에 다름 아니라는 듯, 나름의 생각을 얹어 읽게 하는 것이다.
계절은 다 거기 가서 여름을 사나보다
수런대는 연잎서껀 꽃잎을 바치다가
혹서(酷暑)의 수척한 새떼에
곁두리로 연밥 낸다
바람은 다 거기 모여 오지랖을 얻나보다
빠질까 멈칫하는 부리 붉은 물닭에게
오너라, 내 받아 줄꾸마
연잎 마당을 펼친다
적막은 다 거기 스며 마음 하나 여나보다
연꽃 아래 스쳐가는 유혈목이 등살에도
소름을 잠재운 물살이
물거울을 불러낸다
―유종인 〈연호(蓮湖)를 지나다〉 전문(《화중련》 2010 하반기)
유종인 시인
만행처럼 꼭 어디를 길게 다니지 않아도 수행은 가능하다. 면벽수행이나 좌선수행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연호”는 제자리에 앉은 채 뭇 생명을 받아 기르는 삶 자체가 나름의 수행이라 할 만하다. 그런 과정의 예비이자 귀결로 시인은 세 수의 초장을 펴놓는다. “계절은 다 거기 가서 여름을 사나보다”에서 “바람은 다 거기 모여 오지랖을 얻나보다”로 나아가고, “적막은 다 거기 스며 마음 하나 여나보다”로 호수의 품을 열고 모으고 하는 것이다. 결국은 “물거울”을 보여주며 거기 비치는 마음을 읽으라고 하는 듯하다. 이렇게 펼쳐 가는 호수의 “오지랖”은 모성적인 품의 넓이와 깊이를 문인화처럼 보여준다. 진흙에서 피는 연꽃을 기르는 호수니만큼 불성에 따르는 만행 같은 느낌도 더 부각된다. 그렇지 않아도 물은 양수, 탄생, 세례, 정화 등 숱한 상징을 띠는 동서고금의 시적 의장이요, 다양한 깨달음을 주는 변함없는 자연이다. 여기서는 물이 모성과 불성의 자연스러운 조화와 개화를 아우르는 웅숭깊은 바탕이다. 그 호수에 들이는 ‘새떼’ ‘물닭’ ‘유혈목이’ 등은 평소에도 호수와 더불어 사는 생명들이다. 하지만 “수척한 새떼”에게 “연밥”을 “곁두리로” 내주고, “빠질까 멈칫하는 부리 붉은 물닭”에게는 “연잎 마당”을 펴주는 등 생명을 돌보는 모습이 똑 대지 모신의 대자비 품새다. 이런 삶이야말로 끊임없이 펴는 호수의 만행이라고 넌지시 이르는 것만 같다.
썰물에 다 드러난 너의 집은 비어있다
마음이야 쉽게 너를 채울 수 있겠지만
한걸음 걸을 때마다
줄어드는 해안선
못다 한 말 몇 마디 삼켰다 뱉어놓은 듯
웅덩이 팬 곳마다 들어와 앉은 낮달
나 또한 비스듬히 누운
고깃배, 한 척이다
기운 각도만큼 기우뚱한 저녁 포구
발등을 간질이며 바닷물이 밀려든다
채워라, 펄이든 물이든
서녘놀이 잠길 때까지
―김동인 〈전곡항〉 전문(《시조시학》 2010 겨울호)
김동인 시인
항구에는 어느 곳보다 뒷모습이 오래 남는 이별 이미지가 쌓여 있다. 요즘이야 단장을 끊는 항구의 헤어짐이 없지만, 예전에는 기차역보다 쓰라린 이별 장면이 항구에서 더 많이 연출되곤 했었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같은 대중가요는 그런 정서의 반영이자 활용일 것이다. 이 작품의 〈전곡항〉은 화성시 제부도·누에섬과 마주하는 서해안의 항구다. 그간 서쪽은 ‘서역 삼만 리’처럼 귀의의 거처거나 구도의 길을 환기하는 표현으로 많이 쓰이며 독특한 이미지를 덧입은 묘한 처소다. 여기서는 ‘서쪽’이 “기우뚱한 저녁 포구”의 이미지로 화자의 상태를 암시하는 표현이 된다. “웅덩이 팬 곳마다 들어와 앉은 낮달”을 보는 내면은 “기운 각도”를 풍경에 얹으며 더 고적해진다. 이는 화자가 “나 또한 비스듬히 누운/ 고깃배, 한 척이다”라는 인식 위에 있기 때문이다. 노을만 붉게 퍼지는 전곡항 그 “저녁 포구”처럼 그도 현실의 고적한 상황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는 또 그 자리에서 늘 보내고 맞기만 할 뿐, 묶여 있는 항구의 운명을 돌아보게 한다. 이즈음 힘든 세상을 만행처럼 떠돌고 있는 사람이 많기에 가능한 겹침이겠다. 이 세상의 주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직업과 거주지 등을 떠돌다가 ‘서쪽’이나 ‘저무는 포구’에서 홀로 발목 적시는 일이 잦아진 때문이다.
늦은 저녁 비 온다 땅콩만 한 빗방울이다
투두둑 운주사 와불
옷깃이 뜯어져
집 밖을
나설 때부터 좀약 냄새가 난다
맨살을 덮을수록
바람에 날릴 것 같은
휘어진 등에 걸쳐 걸어가며 입어야 할
내 생애
옷 한 벌이라 세탁하여 말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허물일까
아무 데나 발 닿아도 문 열고 달을 보며
옷깃이
접힌 모양대로 길을 가는 중이다
―이석구 〈만행(卍行)〉 전문(《유심》 2010. 11/12) 이석구 시인
쉽지 않은 제목 〈만행(卍行)〉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고전적 아취의 시조로 자기 세계를 확보해 가는 신인이니 지켜볼 일이다. ‘수졸당’ 시편을 몇 쓴 후로는 그쪽의 개성이 더 부각되는 것 같다. 사실 고전적 소재는 답습의 우려가 상존하는데, 시조에서는 그게 더 높은 편이라 조심스러운 제재다. 일반 독자만 아니라 문인들조차 시조를 ‘고루한 답습’으로 보는 편견이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발견이고 해석이라면 고전 소재가 시조 고유의 미학 구현에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문제는 늘 ‘무엇’보다 ‘어떻게’ 즉 기법의 갱신 아닌가. 이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만행”은 조금 가벼우면서도 감각적인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다르다. 첫 수부터 “늦은 저녁 비 온다 땅콩만 한 빗방울이다”라는 도입으로 피부에 와 닿는 구체적 실감과 감각적 비유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 나오는 “옷깃이 뜯어”진 모습, “좀약 냄새” 등은 누추한 길의 표정을 담아낸다. “생애/ 옷 한 벌이라 세탁하여 말”리며 가는 길, 그것이 곧 그의 만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만행을 묘사하는 몇 장면에서도 그 길에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는 명료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만행 자체가 무목적의 목적 같은 수행의 길이고, 화자가 여전히 “아무 데나 발 닿아도 문 열고 달을 보며” 가는 중이기 때문일까. 뭔가 아쉬우면서도 만행이라는 여정의 여운을 담백하게 전하는 맛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허물”이 옷인지, 마음인지, 길인지, 아니 그 모두라고 하는 듯…….
3.
우리 삶은 늘 무언가를 찾고 바란다. 그것이 진리든 사랑이든 예술이든, 더 나은 것에 항상 목마른 것이다. 그 미궁 속을 서로 겯고 가는 게 삶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 속을 홀로 날 세워 가는 길 또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런 길 중에도 시인은 홀로 서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사람이다. 사람 속의 즐거운 동행은 잠시일 뿐, 수시로 더 고적한 만행을 홀로 떠나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낯선 세계와 온몸으로 직면할 때 새로운 시와도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누구도 머리 맞대고 시를 같이 쓰지는 않으니, 시가 올 때야말로 온전히 홀로 있을 때가 아닌가. 그런 독백이나 삶의 묘사에 집중한 작품에서는 단독자의 운명 혹은 만행의 안과 밖이 더 오롯이 드러난다. 그것은 시인의 내면이거나 빈 들판, 연못, 항구 등의 이면으로 그 나름의 만행을 보여준다.
단독자의 운명은 본래 고독한 것. 고독은 일용할 양식이거니 하지만, 만행을 나선다면 그 정도가 당연히 다르다. 그래도 고독과 만행은 서로 잘 붙어 다니는 속 깊은 동반이다. 도를 구하는 여정의 제일 좋은 도반은 절대 고독이 아닐까. 깊이 고독해야 깊은 만행이 될 테고, 진정한 만행은 당연히 큰 고독을 넘어서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단독자의 길을 흔들림 없이 가는 만행이라면 언젠가는 원하는 세계를 얻을 것이다. 새해에는 순도 높은 시적 만행이며 그 끝에서 오늘을 넘어서는 새로운 작품이 더 많이 나오리라.
정수자 | 시인. 1984년 세종숭모제전백일장 장원으로 등단. 시집으로 《허공 우물》 《저녁의 뒷모습》 《저물 녘 길을 떠나다》 등이 있음. 중앙시조대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등 수상.
<유심> 2011년 1,2월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