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돈대의 뿌리
강화의 땅, 망향돈대의 뿌리에서
돌 하나가 바람에 말을 건다
시간의 비늘을 덧입은 그 침묵
서해 끝자락에서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옛 물결 따라 피어난 숨결 하나
조용한 증인처럼,
강화의 역사 위에 우뚝 선 돌
망향의 바람 속에서도
돈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바람과 풀, 그리고 이름 모를 이들의 기억으로
쌓아 올린 벽,
그 위에 얹힌 수많은 꿈들
흙먼지 밟은 발자국마다
사랑처럼, 사라지지 않는 울림이 있다
# 2 돈대의 노래
밤마다 깃발을 바라보며
적막을 견디던 병졸들의 숨결
그 고요한 절규는
이제 노래가 되어 흘러온다
저녁노을이 돌벽을 감쌀 때면
한 시대가 붉게 타오른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 눈 감는 것일 뿐
노을 아래, 상암돈대는 오늘도
말 없이 품는다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처럼
# 3 흔들리지 않는 돈대
사라짐조차 끌어안는
돈대의 고요한 의지
바람은 그것을 스치며 배운다
돌에 스민 세월,
돌틈에 핀 들풀 같은 삶,
조용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것들
누군가는 떠나가도
80일을 쌓아온 선수돈대는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침묵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리고 먼 미래가
시야를 넓혀 다가올 때
그 첫걸음엔
언제나, 고독에 흔들리지 않던
분오리돈대가 있다
# 4 까칠한 미선나무
점점 자취를 감추는 자그마한 나무
괴산 한국땅 봄에만 피는 희귀한 여인
고운 아기손 같은 하얀 꽃잎
맑디 맑은 치아처럼 빛나는
자주 빛 가지마다 줄지어 핀 꽃들
그욱한 향기로 집안을 가득채운다
이른 봄을 따라 피었다가
아쉬운 걔절처럼 덧없이 진다
열매는 선녀의 부채를 닮아
그 이름 미선이라 하였네
매혹적인 향기와
사랑을 품은 열매, 미선나무여
하트 모양 열매 긴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끗끗이 꽃눈을 지켜낸다
연한 녹색의 사랑스런 열매
가을바람을 타고
사랑을 찾아 멀리 떠난다
# 5 폐가 (廢家)
집안 살림이 어수선하다
누가 있을 듯 아무 인기척이 없다
간혹 고양이만 주인인양 들락거린다
색바래고 깨진 시멘트 기와지붕
비 새는 구멍을 찢어진 비닐로 덮었다
대문은 반쯤 열렸다
의자가 대문 밖에 나와 거꾸로 있다
수명을 다한 냉장고 집문을 막고 있다
냉동실을 열고 흉측한 내장을 보이고 있다
플라스틱 통만 엎어져
마지막 부엌살림의 수치를 감추고 있다
시멘트 벽면은 떨어져 황토벽이
때 묻은 속내의 처럼
삶의 오랜 쇠락의
고뇌가 여기저기 붙어있다
# 6 성스러운 비밀
보랏빛 수레국화의 기도 속에
붉은 꽃양귀비, 피로 맺은 성찬처럼 피어난다
가녀린 꽃잎, 성령의 손길처럼 떨리며
하늘거리는 저고리 사이로
감춰진 계시가 숨 쉰다
깊고 선명한, 검은 십자가의 흔적
그 위에서 생명의 말씀이 자라나고
씨방은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며
고요히 꽃잎을 내려놓는다
그제야 세상은 알게 되리
하나의 존재가 떠나는 것이
곧 또 다른 시작임을
세상을 바라보는 씨앗들
그 눈빛 속에는 하늘의 사명이 깃들어 있다
이제 그들은 떠난다
불러주신 뜻을 따라,
어떤 구원을 품은 채
# 7 섬진강 매화따라
지리산 봉우리에 아직도 춘설이 남았건만
섬진강가엔 매화향기 그윽하네
눈보라 몰아치던 동해의 겨울도
강따라 흘러와 봄이 되었구나
아버지 손잡고 피난길 내려오던 그 길
강물은 여전히 소나무 숲 사이로 빛난다
소박한 마을을 감싸안고
굽이굽이 광양만까지 안겨 흐르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던 강물
손을 씻어보니 세월도 씻겨가고
모래톱은 젊은 아낙의 등살처럼 희다
봄 햇살 아래 속살 드러낸 채
따스한 기억을 품고 누웠구나
푸른 초원이 신기해
아이처럼 한 웅큼 뜯어 코에 대니
진한 봄내음이 가슴을 적신다
상춘객 손에들린 매화나무 한그루
꽃잎은 바람에 힘없이 지고
그렇게 강물 따라 흘러간다
# 8 "소금의 성자, 함초“
태초의 물결 속,
짠물의 품에서 눈을 뜬 작은 존재
눈물로 젖은 갯벌 위에
그는 고요히 누웠다
소금기 어린 고통이
기도처럼 몸속 깊이 스며들고
그 아린 침묵 속에
생명의 싹이 자란다
불볕 아래 갈대숲,
철없는 생명들과 숨바꼭질하며
그는 고통을 놀이처럼 받아들이고
어미 바다의 숨결을 품었다
잎 하나 내지 못한 채
비늘 같은 육신으로
거센 태풍을 견디는 몸
그 자체가 기도였다
함초,
그 이름은 소금꽃이 피는 계절마다
묵묵히 고난을 감싸 안은 자의
거룩한 증언
뿌리로 견디고,
몸으로 받아내며,
마침내, 짠빛 속에 피어난다
신이 남긴 생명의 증표로
# 9 이런 땐 가슴이 뛴다
누구의 간섭도 닿지 않는 곳,
고요가 나를 감싸 안을 때
커다란 책상 위에
마음속 이야기들이
꽃처럼 환하게 피어난다.
은은히 흐르는 음악
오디오를 타고 번지는 선율은
지친 하루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감싼다.
내 안의 꿈들이 조용히 깨어난다.
무전기를 잡고 먼 세상을 부르면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닿을 것 같다.
옥상 위, 바람 속 흔들리는 안테나
저 하늘 끝까지 손짓한다.
충만한 전원의 비상처럼 끓어오르는 열망,
전류가 흐르고,
나의 가슴도 함께 뛴다.
모든 것이 자유롭고
넘치도록 충분한 밤,
슬리핑백을 덮은 별빛 속에서
나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자유로 존재한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나의 세계,
그 안에서 가슴은 다시, 힘껏 뛴다.
# 10 구례 반곡 마을 풍경 # 1
길섶마다 이끼 낀 바위틈엔
할머니 무릎베고 들었던
옛 이야기 스며있고
노오란 산수유 붉은 열매엔
할매 손길 닮은 사랑이 곱게 익어간다
반쯤 내려앉은 양철지붕 아래
돌담길은 어머니가 손 흔들 던 고살
마을 끝 장독대에선
묵은 장맛처럼 그리움이 깊어진다
언덕 위 고개숙인 느티나무 가지에
지는 해가 걸려 하나절 쉬고
지리산 마루턱에 내려앉은
백설은 동네 어르신 은빛처럼 고요하다
# 11 구례 반곡 마을 풍경 # 2
서시천 무지개다리 아래
도랑물 졸졸 흐르며 속삭인다
“ 한나절 쉬었다 가소”
논둑길 벼 이삭 거둔 자리엔
새 봄을 품은 흙내음이 묻어나고
이끼 낀 바위는 반쯤 발 담근 채
논둑길 벼 이사 거둔 자리엔
새봄을 품은 흙내음이 묻어나고
이끼 낀 바위는 반쯤 발 담근채
계곡물에 발 씻으며 세월을 잰다
꽃담길 끝 비탈진 돌길을 따라
반곡마을 굽이굽이 이어지고
멀리 섬진강 푸른 물결 바라보며
둥그런 바윗돌 하나
물가에 털썩 누워 지난 날을 꿈꾼다
# 12 버들강아지의 외출
뒤늦은 봄날
시샘하는 눈송이 흩날리면
심술쟁이 꽃샘바람도
장난치듯 불어와요
세상밖으로 수줍게 얼굴내민
버들 강아지
봄 빛 한 모금 꿀꺽 마셔요
연한 황금빛 얼굴
살며시 내미는
갯버들 남매가 속삭여요
이젠 정말 봄이 왔어요
# 13 찬란한 이별
눈부신 등단이었건만,
그 찰나의 반가움은 너무도 짧았네
뜨거운 환호 속에 웃었지만
그 미소는 허공에 흩날리는 신기루
만남은 늘 아쉽고
숙명은 비바람을 품고 찾아와
서늘한 막을 내렸네
꽃비처럼 흩어진 삶의 조각들
길바닥에 내던져진 찬란함은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리
끝났는데, 세상은 태연히 돌아서고
애써 냉정을 흉내 내네
미련 없는 척하지만
털끝만 한 애련도
이젠 사치라면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반가웠던 연민조차
망각과 갈등의 틈에 사라지고
내 안엔 번민만이
덜컥, 한 줌의 초라함으로 남았네
철쭉이 피고, 라이락이 흐드러지고
아카시아가 향기 날리더라도
그 따스함이 이 상처 위에
덮을 수 있을까
내년 봄이 올 때까지
이 아득한 겨울을
나는…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 14 라일락 길
대공원 공중화장실 앞에서
짙은 향수로 마음을 감싸며
은은한 향기 속에 잠든 기억을 깨운다.
아파트 공동물품보관 앞에서
소중한 물건을 찾는 주인에게
조용히 기다리며 미소 짓는다.
가평 호수길에 줄지어 선 길손들
반갑고 아쉬운 마음으로
꽃가지 흔들며 인사를 건넨다.
소래로 가는 이면길
온갖 차 소리 무심히 흘러가도
가득 피어난 꽃들은
소음과 매연 속에서도
애처롭게 향기를 뿜어내며
자연의 숨결을 전한다.
매년 함께 피던
비련의 상사화,
그 기다림 속에 또 다시 피어나기를 바라며
# 15. 노년의 가출
고향도 없이 태어난 몸,
그저 떠도는 그림자처럼,
붙잡힐 데 없는 이 삶의 곁,
잠들 곳조차 찾지 못한 채,
고철처럼 녹슬어 버린 차 한 대가
유일한 벗이 되어 버린 세상.
사람을 믿지 않는다,
눈곱만한 자존도 내려놓고,
남은 생, 십 년의 무게를 짊어지고,
미련 없이 길 위에 선다.
돈도, 무리도, 말도 모두 떨쳐내고,
허기조차 잊은 채 떠나며,
책임 없는 자유의 늪으로
그저, 그저 미끄러져 간다.
누구도 막지 않고, 누구도 말리지 않는 이 길,
절룩이는 다리 끌며, 무조건 떠난다.
지금, 여기서, 그저 떠나가는 길.
첫댓글 # 1 돈대의 뿌리
강화의 땅, 망향돈대의 뿌리에서
돌 하나가 바람에 말을 건다
시간의 비늘을 덧입은 그 침묵
서해 끝자락에서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옛 물결 따라 피어난 숨결 하나
조용한 증인처럼,
강화의 역사 위에 우뚝 선 돌
망향의 바람 속에서도
돈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바람과 풀, 그리고 이름 모를 이들의 기억으로
쌓아 올린 벽,
그 위에 얹힌 수많은 꿈들
흙먼지 밟은 발자국마다
사랑처럼, 사라지지 않는 울림이 있다
# 2 돈대의 노래
밤마다 깃발을 바라보며
적막을 견디던 병졸들의 숨결
그 고요한 절규는
이제 노래가 되어 흘러온다
저녁노을이 돌벽을 감쌀 때면
한 시대가 붉게 타오른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 눈 감는 것일 뿐
노을 아래, 상암돈대는 오늘도
말 없이 품는다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처럼
# 3 흔들리지 않는 돈대
사라짐조차 끌어안는
돈대의 고요한 의지
바람은 그것을 스치며 배운다
돌에 스민 세월,
돌틈에 핀 들풀 같은 삶,
조용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것들
누군가는 떠나가도
80일을 쌓
# 1 돈대의 뿌리
강화의 땅, 망향돈대의 뿌리에서
돌 하나가 바람에 말을 건다
시간의 비늘을 덧입은 그 침묵
서해 끝자락에서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옛 물결 따라 피어난 숨결 하나
조용한 증인처럼,
강화의 역사 위에 우뚝 선 돌
망향의 바람 속에서도
돈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바람과 풀, 그리고 이름 모를 이들의 기억으로
쌓아 올린 벽,
그 위에 얹힌 수많은 꿈들
흙먼지 밟은 발자국마다
사랑처럼, 사라지지 않는 울림이 있다
# 2 돈대의 노래
밤마다 깃발을 바라보며
적막을 견디던 병졸들의 숨결
그 고요한 절규는
이제 노래가 되어 흘러온다
저녁노을이 돌벽을 감쌀 때면
한 시대가 붉게 타오른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 눈 감는 것일 뿐
노을 아래, 상암돈대는 오늘도
말 없이 품는다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처럼
# 3 흔들리지 않는 돈대
사라짐조차 끌어안는
돈대의 고요한 의지
바람은 그것을 스치며 배운다
돌에 스민 세월,
돌틈에 핀 들풀 같은 삶,
조용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것들
누군가는 떠나가도
80일을 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