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선집 『허물벗기 연습』
실존과 사랑의 아픔
주 경 림
(시인. 문학평론가)
허물을 벗는다.
흙먼지 하늘 가득
진눈깨비와 섞이는 날은
한 까풀씩
껍질을 깍아내는
아픔이 남는다.
하루에 열 두 번은
맨살 할퀴는 바람이 불고
피흘리며 벗겨도
다 벗지 못하는 우리의 허물
제 자리에 서 있으려는
끈끈한 핏기 위에서
날마다
허물을 벗어야 하리.
살아가는 연습을 위해 - .
--「허물벗기 연습」 전문
'피 흘리며 벗겨도 다 벗지 못하는 허물'을 벗기며 새로운 껍질이 아물지 않는 또 다른 허망에 이름이 김송배 시인의 시쓰기 작업이다.
허망에서 피어올리는 시의 꽃들이 눈물겨운 아름다움으로 흔들릴 때 시를 읽는 이들도 덩달아 허물을 벗고 순화된다.
제6회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한 김송배 시인이 이미 출간한 다섯 권의 시집에서 미로에서 자신을 찾기 위한 마지막 증언 같은 시편들을 골라 시선집을 묶었다.
그의 시들은 꽉 찬 결실의 보람을 노래하기 보다는 「폐광의 그림자」, 「폐수론」, 「폐가 앞에서」에서 보여주듯 폐허 속에서 허전함을 달래며 시대적인 아픔을 체념 섞인 목소리로 엮어 '천년을 두고 삭지 못하는 갱목하나' '무디어진 나의 언어' '좀처럼 걷히지 않는 어두움'으로 남는다.
나는 지금 이쯤에서 망설여야 하리라 붉은 벽돌 틈새로 아직 여물지 못한 희망은 잠시 창문으 로 흐르는 불빛으로 말려야 한다.
구름처럼 떠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못내 아쉽게 뒤돌아보는 행적이지만 용케도 기어오른 삶의 줄기가 현기증으로 나불댄다.
뻗어나간 욕망만큼 무거운 사색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조심스러이 다시 기어올라야 하는 창살에 는 불이 꺼졌다.
아아, 지금쯤에서 지혜를 예비하는 옷깃을 잠시 손질하고 태초에 씨앗으로 묻혔던 땅바닥을 돌 아볼까
그대 머리위 내리는 한 줌 별빛만 줏으며 끝내 돌아보지 말아야 할 어지러운 벼 랑 끝 아스라 한 바람소리 .
--「담쟁이」 전문
‘담쟁이’의 기어오르기와 기어오른 행적의 되돌아봄이 인간 세상의 일과 흡사하다. 마침내 벽을 타고 벼랑 끝에 이르러 별빛과 바람소리를 듣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담쟁이의 벽타기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구름처럼 떠 있는 방랑의 현기증과 뻗어나간 욕망만큼 무거운 사색으로 주르르 흘러내리게도 된다.
그의 시 「담쟁이」는 시를 읽는 즐거움에 흠뻑 젖어볼 수 있을 만큼 구성과 어휘의 선택이 빼어나다.
「안개꽃 시대」 세 편의 작품에서는 우리의 삶이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예측할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도 항해를 계속해야 하는 인간 실존의 고통이 잘 나타나 있다.
물안개 속의 '찢겨나간 돛폭'과 '흔들리는 등대불빛', '멈춰선 나침반'등의 시어가 암시하듯 서울하늘의 안개비를 맞으며 무엇 하나 성취하지 못한 채 풀무질 같은 고달픈 삶이 계속된다.
개체 개체 물방울들이 모여 묶여지듯 우리들도 낯선 얼굴끼리 어우러져 안개꽃 세상을 연다.
‘존재의 슬픈 확인’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그릇, 몇 가지 실험」의 시편들은 다소 관념적이기는 하나 지성과 감성의 조화미를 이루어 시의 격이 높아진다.
태초에 흙으로 빚어진 육신으로 불가마에 달구어지듯 신열로 감싸여 눈물 한 움큼도 담지 못하는 허전한 심연이 되는 시인의 자화상을 대하는 듯하다.
먼지 낀 우리의 영혼을 헹굼질하고 이빨 빠지고 찌그러진 그릇들을 모아 비우는 작업을 통하여 태초의 흙으로 돌아간다.
어리석음을 잉태한 자는
바람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우둔하고
흔들림을 몸으로 느낀 자는
눈물이 멈춰도 떨림의 끝은 없었다.
누가 이승의 술잔을 비우고 떠났을까
지금 시리도록 차가운 사랑을 안고
달빛 속으로 걸어간다.
조심스런 어리석음으로 내딛는 발걸음
내 가슴을 관통하는 여린 사랑의 눈매로
저 황량한 떨림의 끝을 향해
아아 저승으로 넘나 든 영혼의 빛줄기
어느 지점에서 빈 술잔으로 뒹굴고
처절하게 무너진 달빛만 껴안는다
참으로 어리석음과 떨림을 함께 풀어
그냥 삼키는 이승의 술잔이여.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14」전문
거울 속에 앉아 스스로를 단근질하며 불투명한 '안개꽃 시대'를 지나 '허물벗기 연습'으로 제자리로 돌아와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의 서정에 이른다.
벗어나 보려했던 어리석음조차 있는 그대로 껴안고 실존과 사랑의 아픔으로 떨며 흐느끼는 듯한 그의 서정시들은 송진 냄새처럼 가슴쓰린 향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94.10.『꿈과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