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영화, 역사를 말하다
한국 기독교 영화?
한국에 영화가 처음으로 들어오게 된 매개 가운데 하나는 선교사였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영화는 일반 영화의 역사에 비해 짧고 또 단층적이다. 그만큼 서구 기독교 영화가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기독교 영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가 아직 없기 때문에, 기독교 영화의 성격 규정이나 일정한 경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보통 기독교 영화라 함은 소재적인 측면에서 명백히 기독교적인 색깔이 드러난 것을 일컫는다. 성경 이야기나 교회사에서 신앙적으로 모범적인 족적을 남겼거나 또는 그런 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의 생애나 삶의 단면들이 부각된다.
80년대부터 시작된 기독교 문화 운동은 90년도 후반부터 영화 장르에서 두드러졌는데, 최근에는 소재보다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기독교 영화를 정의하려는 시도들이 많아지고 있다. 제작 의도가 명백히 기독교적인 가치를 지향하거나, 혹은 다뤄지는 내용이 기독교(신앙적, 교회사적, 성경적, 신학적) 주제의식에 따른 것을 포괄하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정의로 볼 수 있다. 예컨대 <크로싱>이나 <바보>가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앞서 말한 것은 좁은 의미의 정의라 말할 수 있다.
기독교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해서 기독교 영화라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단지 소통의 맥락에서 영화를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일 뿐 기독교화를 지향하지는 않는다. 제작 의도와 주제, 그리고 소재를 전혀 무시하고 해석의 가능성만으로 정의 안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필자는 넓은 의미의 정의를 선호하지만,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좁은 의미의 정의에 제한하겠다.
한국 기독교 영화의 특징
한국 기독교 영화의 특징은 첫째, 인물 중심이라는 데에 있다. 진정한 순교의 의미를 묻는 영화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부정하는 대사로 인해 교계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던 유현목 감독의 <순교자> 같이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물 중심의 영화제작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있는 현상이다. 기독교 영화의 대부분이 선교용으로 혹은 신앙을 권장하고 강화시키며 그리고 신앙의 모델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7의 예술인 영화가 대체로 오락과 교훈이라는 두 가지 방향을 함께 지향하는 점에 비춰볼 때, 한쪽으로 편향된 점이 없지 않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신앙인의 삶에서 오락을 지양하는 경건주의적인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와 더불어 영화를 설교와 교육의 연장선에서만 보려고 하는 보수적인 경향도 읽어볼 수 있다. 물론 역사적인 인물들을 조명함으로써 신앙인들의 자기성찰을 자극할 수 있겠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의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는 역부족하다. 이는 2010년도를 기해 활기차게 제작되고 있는 기독교 다큐영화의 관객동원의 수가 비록 저예산 독립영화로서 볼 때는 놀랄만한 만한 일이지만. 전체 교인 수에 비해 턱없이 적은 이유로 꼽힌다. 이 문제는 제8회 서울기독교영화제에서 열린 포럼 “한국영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서도 지적되었다. 오늘날 세상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문화사역의 중요한 매개로 평가되는 영화에 대한 관심은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이고 또한 기독교인과 비신앙인들의 문화적인 욕구충족에 대한 고려를 함께 요구한다.
둘째, 기독교 영화에 속하진 않지만 ‘영화 속 기독교의 이미지’를 통해 기독교 영화제작의 필요성을 높여준 것이다. 이런 영화들은 신앙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해주었다. 1960년대 신상옥 감독의 <상록수>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김약국의 딸들>(1963) 등이 있고, 그 후에 제작된 대표작으로는 비기독교인감독이 기독교적 경험을 다룬 <할렐루야>(신승수, 1997)와 <밀양>(이창동, 2007)을 들 수 있다. 그 밖의 경우에는 기독교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있어서 기독교 이미지는 단지 영화 속의 의미를 구성하는 기호로만 등장한다. 여기에 속하는 영화들은 많은데, <투캅스>(강우석, 1993), <박하사탕>(이창동, 2000), <4인용 식탁>(이수연, 2003), <무산일기>(박정범, 2011)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영화들은 기독교 영화에 포함시킬 수는 없지만 기독교인의 영화적 경험과 한층 더 나아가서 신앙적인 자기 성찰에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한국 기독교 영화의 역사-연대기적인 기술
한국 기독교 영화는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로 1948년에 제작된 최인규 감독의 <죄없는 죄인>에서 출발한다. 이 필름은 보존되어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알 길이 없다. 그 후에는 1965년 유현목 감독의 <순교자>가 있었을 뿐, 작품 제작은 주로 1980/90년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2010년도 이후부터는 다큐 영화 제작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80년대에 집중된 이유는 교회의 부흥을 기록했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영화계가 유신정권의 검열로 인해 소위 호스티스 영화에 전념하고 있었던 시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것은 <별들의 고향>(1974) <어둠의 자식들>(1981)과 같은 호스티스 영화로 유명했던 이장호 감독이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를 제작할 정도가 되었는데, 비록 대종상을 수상하긴 했어도 제작 당시에는 제작 의도와 관련해서 많은 의문에 휩싸였던 영화였다.
<사랑의 원자탄>(1977)을 만든 강대진 감독은 극적인 표현보다는 당시의 현실과 삶의 단면을 표현해왔는데, 이 영화에서도 일제의 신사참배 문제로 6년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고 또 여수의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여순 반란 사건에서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 청년을 오히려 양아들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조명하면서도 당시의 현실과 삶의 단면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안이숙 여사의 생애를 조명하는 <죽으면 살리라>를 만들었다. 안이숙 여사는 1982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교직에서 쫓겨난 후에 제74회 일본제국회에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전단을 뿌리다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선구적인 현대여성이었다. 이 영화는 『죽으면 죽으리라』에 바탕을 둔 것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81)는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조명한 작품으로 제작은 1977년도에 끝났지만 유신정권의 검열로 인해 개봉되지 못하다가 1981년에 비로소 개봉된 작품이다. 영화관이 부흥회를 방불했었다고 하는데, CBS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임원식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는 공식적으로는 3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교회를 순회하며 상영된 것을 포함하면 그 이상일 것이다. 기독교 영화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밝혀준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임 감독은 1986년에 한국 최초의 목사이며 최초의 선교사로서 제주 지역에서 사역했던 이기풍 목사의 신앙과 삶을 다룬 다큐드라마 형태의 <순교보>를 만들었지만 이것 역시 검열문제로 개봉관을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 교회 상영으로 끝나야 했다.
이미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서 기독교 영화의 흥행을 경험한 분위기에서 이장호 감독은 호스티스 영화에서 불현 듯 이청준 원작을 영화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된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인데, 안요한 목사가 맹인교회를 설립하게 되기까지의 삶의 과정을 그린 영화로 당대에 대종상은 물론이고 18회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80년대에 제작된 영화로는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의 장모인 최자실 목사의 자서전적인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김수형, 1982), 김병섭 장로와 전 연대총장 박대선 박사가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8.15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교회의 실상을 다룬 <하늘로 가는 밝은 길>(김성호, 1982), 그리고 70년대 청계천 빈민을 대상으로 활빈교회를 세우고 사역한 김진홍 목사의 수기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영화 <새벽을 깨우리로다>(이기원, 1989)가 있다.
90년대는 난봉꾼으로 살다 기독교에 귀의하였고, 목사 안수 후에는 만주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으로 그곳에서 20여개의 교회를 설립했던 최봉석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예수천당>(홍의봉, 1991) 이외에 많은 투자비용을 통해 과감하게 해외로케이션까지 시도해 많은 관심을 모았던 <무거운 새>(곽정환, 1994), 한국 최초의 맹인 박사인 강영우의 전기를 그린 영화 <빛은 내 가슴에>(이기원, 1995), 성경 인물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왕후 에스더>(김청기, 1996)와 <예수>(정수용, 1997) 등이 제작되었지만 흥행에서는 저조했다.
2000년도에는 기독교 극영화의 제작은 <포도나무를 베어라>(민병훈, 2007)를 제외하면 한편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에 대한 극적인 표현은 오히려 앞서 언급한 ‘영화 속의 기독교’라는 맥락에서만 다뤄졌다. 이에 비해 오히려 다큐멘터리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는데, 물꼬를 튼 역할을 한 것은 김우현 감독의 2003년의 <팔복 1-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인데 최춘선 할아버지의 전도인의 삶을 조명한 것이다. 김우현 감독은 이외에도 팔복 시리즈<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등을 계속해서 제작, 무료로 보급하여 기독교 다큐 영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이것을 발판 삼아 2009년도에는 신현원 감독의 <소명>이 개봉되었다. 관객의 반응은 기독교 다큐의 가능성은 물론이고, 기독교 영화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2010년에 개봉된 작품으로는 <소명2>(신현원), <회복>(김종철), <잊혀진 가방>(김상철), <지라니 이야기>(이창규), <희망의 별-이퀘지레템바>(이홍석), <용서>(김종철>, <울지마 톤즈>(구수환)등이 있고, 2011년에는 히말라야의 오지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는 강원희 선교사 부부를 다룬 <소명 3-히말라야의 슈바이처>,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를 조명한 <바보야>(강성옥)가 개봉되었다. 물론 장편이외에도 많은 단편들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교회용으로 자체 제작되거나 기독교 영화사에 위탁되어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 영화의 전망과 과제
한국기독교 영화의 역사를 정리해보는 것은 오늘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기독교 영화의 미래를 위한 과제와 전망을 모색해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 영화의 역사를 3가지 방향(정의, 특징, 연대기적 기술)에서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80년대 이후 정체되어 있다가 21세기에 다시금 기독교 영화가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데에는 2003년에 처음으로 시작된 ‘서울 기독교 영화제’가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와 세상의 소통을 목적으로 시작한 서울 기독교 영화제는 선교를 위해서만 제작하는 관행에서 탈피해서 신앙인의 자기 성찰이 가능한 영화를 소개했고, 또한 기독교 영화제작을 사전제작 지원이라는 방식을 후원하고 또 관련 영화들을 소개함으로써 기독교 영화에 대한 관심을 높였기 때문이다. 포괄적 의미의 기독교 영화에 대한 정의 역시 이 영화제 안에서 처음으로 수렴되었다.
한편, 기독교 영화의 역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현상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활발해진 글쓰기 작업이다. 이것은 단행본이나 기독교 잡지 등을 통해서 발표되었는데, 영화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높여주었다. 영화 설교의 영역을 개척한 하정완 목사를 위시하여 각종 형태로 출판된 영화에세이와 영화 설교, 영화를 기독교적으로 성찰하면서 비평하는 영화비평, 그리고 기독교 대학이나 교회에서 이뤄진 영화교육 등이다.
그리고 ‘파이오니아21연구소’ 같은 기독교 영화 전문 제작사가 설립된 것이나 기독교 영상컨텐츠 개발을 위한 학과가 대학에서 설립하게 된 것도 기독교 영화 발전과 관련해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끝으로 한국 기독교 영화의 활성화를 위해 필자가 제안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 영화는 대안영화로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둘째, 기독교 문학의 활성화는 물론이고 시나리오 발굴이 시급하다. 이는 극영화 제작의 가능성을 높인다 셋째, 신학교에서 영화교육이 필요하다. 넷째, 영화제작에는 영상미학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성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섯째, 기독교적인 이미지 계발이 시급하다. 여섯째, 영화비평의 장이 만들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