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좋은 목자는 내면의 그리스도 음성을 듣고 깨닫는 자는 다른 예수의 음성을 구별한다.
2) 어릴 때는 몽학 선생 아래서 훈련을 받아야 하지만, 장성하면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
3) 비유로 오역한 파로이미아(비사)는 감추어진 것, 수수께끼 비밀의 뜻을 가지고 있다.
4) 구약의 파로이미아(비사)는 파라볼레(비유)가 임해야 깨닫게 된다.
나. 본론
1) 좋은 목자는 내면의 그리스도 음성을 듣고 깨닫는 자는 다른 예수의 음성을 구별한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5)”
“그들은 다른 이(거짓 목자)를 전혀 따르지 아니할 것이다. 도리어 저희로부터 도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이(거짓 목자)의 그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목자인 그리스도 예수의 음성을 내면에서 듣기 시작하면 다른 예수(뱀)를 구별하게 된다. 저희는 많은 무리가 가는 그 길을 진리의 길로 생각한다. 참 목자가 인도하는 길은 아버지와 하나(모노게네스) 되는 길로서 이 길은 좁은 문이므로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
2) 어릴 때는 몽학 선생 아래서 훈련을 받아야 하지만, 장성하면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 7:13)”
거짓 목자들은 크고 넓은 문으로 이끌어 간다. 이처럼 생명의 빛(진리)은 많은 사람이 연구하고 습득하는 학문과 전통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학문은 마음으로 자기 믿음을 굳건히 세우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몽학 선생 아래서 훈련을 받지만, 장성하여선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 그동안 몸 담아 왔던 정든 그 몽학 선생에게서 벗어나기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장성할수록 이 몽학 선생이 뱀으로 변하여 유혹하기 때문이다. 좋은 목자의 일(에르가)은 모두 깊은 내면에서 곧 카르디아(마음)를 넘어 서 있는 누스 안의 몸 된 성전 안에서부터 다루어지는 일이다. 누스는 골방 안에서도 깊은 곳에 있다.
3) 비유로 오역한 파로이미아(비사)는 감추어진 것, 수수께끼 비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요 10:6)”
(타우텐 텐 파로이미안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 에수스. 에게노이-데 우크-에그노산 티나 엔 하 엘라레이 아우토이스)
“그 예수가 그들에게 이 파로이미아(비사)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지(기노마이, 하나 되다) 못하였다.”
비유로 오역한 파로이미아는 비사다. 감추어진 것, 수수께끼, 비밀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여전히 그에게 감추어져 있는 수수께끼에 불과한 비밀이다. 파로이미아는 반드시 파라볼레(비유)가 임해야 그 뜻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파로이미아다.
4) 구약의 파로이미아(비사)는 파라볼레(비유)가 임해야 깨닫게 된다.
구약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파로이미아 곧 감추어진 말씀이다. 예수와 하나 되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성경 말씀을 풀어낼 수가 없다. 파라볼레(비유)가 임해야 한다. 구약을 모르면 새 언약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백 번 천 번 읽어 보아야 헛일이다. 파로이미아(비사)를 푸는 열쇠는 파라볼레(비유)다. 이처럼 구약 성경은 파로이미아로 되어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
구약 성경 말씀 곳곳에 이 파로이미아를 열 수 있도록 마샬(비유)을 기록해 두었다. 이것을 깨달아 알았던 자들은 하나님과 하나 된 생명의 빛을 소유한 믿음의 선진뿐이다. 그러므로 파로이미아와 파라볼레는 이론이 아니라 지성소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빛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로 있었던 믿음의 선진들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 이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열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이들은 평생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이다. 연구하면 할 수록 더더욱 귀머거리가 되고 장님이 된다. 이는 겉 사람의 세계를 통해 열릴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파라볼레가 내면에 임하게 되면 몸과 마음을 뒤집어쓰고 있는 현상에 속지 않는다. 보는 나, 듣는 나, 느끼는 나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