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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을 돌아보면서
2024년 06월 12일 비원노인복지관에서 실시하는 지역사회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인 자서전 교실 ‘나다운 삶을 위한 치유 글쓰기’ 교실에서 달성공원 답사가 있었다.
방종현 지도 강사의 초청으로 유정곤 문화 해설사의 달성공원 소개가 있었다.
대구 달성공원은 대구 중구에 위치한 공원으로, 조선시대 왕족이 머무르던 곳으로 유래한다.다. 달성공원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산책로 휴식 공간 등을 제공하여 많은 시민이 즐기는 공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구는 신라 때 達句火縣(달구 화현)이라고 불리다가 8세기 중엽인 경덕왕 때에 “대구” 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달성의 옛 이름은 이 達句火(달구화),達弗城(달불성)에서 유래된 것이다. 달성은 경주의 月城(월성)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築城(축성)한 것이 특징이다. 달성은 청동기 시대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이 생활 근거지에 쌓은 城郭(성곽)이었건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 아래층에는 조개무지 유적이 있고 木柵(목책)의 흔적도 있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 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정해왕 15년(261)에 달벌성을 쌓고 克宗(극종)을 城主(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 합병된 뒤에는 군사 요충지로 중시되었으며. 고려 공양왕 2년(1390) 토성에 석축을 더했다. 조선 선조 29년(1596)에 석축을 더하고 경상감영을 이곳에 두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주위 길이는 약 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달성공원은 호랑이를 비롯해 25종 90마리의 포유류. 비단잉어 등 2종 940마리와 어류, 타조 등 59종 435마리의 조류가 있는 동물원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조류 (8종―23) 달성공원 동물원은 대구 유일의 동물원이지만. 전문가들은 그것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 사직인 나라의 대표적 토성 안에 동물원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옮지 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구시에서는 이른 시일에 수성구 쪽으로 옮겨 간다) 또, 달성 토성이 공원화한 것도 조선 말기에 일제가 민족정신을 흐리게 하려고 획책한 정책의 결과로 본다. 달성공원에는 나무도 많아 수목원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향나무 등 60종5.236그루의 喬木(교목) 류가 서로 어울려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대구 달성공원 수운 최재우 선생님 대화여 알아보자
최제우 선생님은 경주 태생으로서 대구에서 서거했다. 최제우(1824-1864)는 동학을 창시한 敎祖(교조)이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 외래종교에 밀려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민족종교 동학을 창시한 인물의 동상이 어째서 이곳 대구에 우뚝 건립되어 있을까. 이순신 장군 동상이 전국 방방곡곡의 초등학교마다 세워진 것과는 비교할 일이 아니므로, 최제우의 동상이 달성공원에 세워져 있는 것은 새삼 눈이 가는 일이다.
조교에서 교조의 죽음은 큰 의미가 있다. 동학도 최재우 순교 이후 敎勢(교세)가 크게 늘었다. 그런데 그는 대구에서 죽었다. 경주 龍堂(용상)정에서 경상감영으로 끌려와 있던 중 41세인 1864년 3월 10일 대구에서 “등불은 물 위에 밝게 어리되 물과 어긋남이 없고. 기동은 말라 보이나 힘이 남아 있다”면서 “높이 날고 멀리 뛰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그가 최후의 시간을 보낸 처형장은 당시 대구 읍성의 정문인 영남제일관 맞은 편의 언덕 위였다.
약전골목 맞은편 적십자병원 바로 되가 그의 처형장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觀德亭(관덕정)”의 터에 1991년 웅장한 건물이 섰는데 어떤 이들은 지붕이 마치 亭(정) 자처럼 보이는 그 건물 때문에 그곳을 관덕정이라 부르는 중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건물은 최제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천주교들의 순교를 가려 건립된 기념관 일 따름이다.
관덕정 일대는 별로 높은 지대가 아니지만, 교통과 이동 수단이 사뭇 달렸던 예전에는 상당한 언덕배기로 여겨졌을 터이다. 실제로 그곳의 옛 지명은 峨眉山(아미산)이었다. 아미산은 조선 시대에 군사 훈련장이자 죄인들을 처형하는 장소였는데, 잘못된 종교로 바른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엄청난 죄목을 가졌던 思想犯(사상범) 수운도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수운이 그렇게 대구에서 죽었으니, 그의 동상이 대구에 세워진 것도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니다.
최제우의 동상은 관풍루 바로 아래 향나무 숲속에 세워져 있다. 마치 “높이 날고. 멀리 뛰라!”. “‘사람이 곧 하늘이다.” 하고 목청껏 외치는 듯 그는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공원 입장객들 상당은 수운을 만나지도 못하는 채로 멀리 사라져 간다.
그들이 동물 구경에 여념이 없고. 동상 자체도 말끔하게 자란 향나무들로 좌우가 옹호하게 가려져 있는 탓이다. 민족종교 동학이 세를 잃어 교조가 처형당한 자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실정이니. 탄생지도 순교지도 안 달성공원에나마 동상이라도 세워진 것을 두고 “그나마 대행”이라고 할 일인가.....
순종은 경상감영에서 처형장인 아미산으로 끌려가는 날, 많은 사람들의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처형장이. 아미산 관덕정 자리가 아니라 지금의 대구병무청 뒤 전동 일대였다는 주장도 있다. 수운을 아미산까지 압송하다가는 운집한 추종자들에게 탈취당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경상감영 바로 앞 軍營(군영) 자리에서 형을 집행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관덕정 자리를 수운의 처형장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그나저나, 어찌 사람들만 그의 처형을 지켜보았을까! 지금의 병무청 주변에서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고목들도 그의 마지막 날을 생생히 보았을 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무청 뒤편의 종로초 교정에 버티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에 “최제우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제우는 물론 그와 같이 옷도 울었던 당대의 남녀노소도 모두 사라졌지만. 이 고목만은 여전히 그의 죽음을 증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운이 죽자, 제자들은 그의 주검을 거두어 경주 용담정 아래에서 장례를 지낸다. 그 날이 3월 17일 邪敎(사교)를 일으켜 민심을 혼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던 그에는 이어진 그의 人乃天(인내천) 사상은 식민지와 황금만능 세상을 거치며 앙상하게 뼈만 남아버렸다. 봄이 오면 사람이 곧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은 과연 올 것인가.
대구의 출생 항일운동가 민족시인 이상화 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대구 출생 항일운동가 중에서 가장 널리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아마도 민족시인 이상화일 것이다. 이는 특히 격정의 절창”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긴 덕분이기도 하다. 1901년 4월 5일부터 1943년 4월 25일까지 이 세상 사람이었던 상화가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상화 고택“ 은 약전골목의 끝에. 형인 이상정 장군 고택과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 고택에 인접하여 남아 있다. 달성공원에 있는 강화 시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詩碑(시비)로 이름이 드높다. 그의 묘소는 대구시 달서구 대곡동 산 9번지에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무대는 수성구 두산동과 상동 일대. 죽 수성못 아래의 너른 벌(속칭 들안길)로 알려져 있다.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을 배회하면 시인은 망국으로 울분을 목청껏 토로했다. 하지만 지금 그 들판에 가보면 민족자주의 혼적은 자취도 찾을 길 없고, 식당과 술집의 불빛과 취객 호기만이 허공을 찌르고 있다. 빼앗긴 들에 서면 이상화는 교과서에서 배웠으니 이름이나마 알겠지만, 이상정. 이윤재. 이시영. 서상일 백기만 등 항일 투사들의 노고
는 누가 기릴 것인가! 하는 탄식이 저절로 일어난다.
사정이 그러한데, 과연 상화 묘소의 위치를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대구가 낳은 독립운동가 이시영을 기리는 기념탑도 앞산 큰골 초입에 있지만 찾는 이 드물고, 조선어학회 사건 때 옥사한 한글학자 이윤재의 무덤도 달성군 다사면 금호강변 산비탈에 버려진 듯 초췌하게 누위 있다. 대구 시민의 노래 가사를 짓고 <상화와 고월>을 저술하여 이상화와 이장희를 한국 문학사에 남긴 백기만 등 숱한 독립운동가들의 고명한 존함들도 모두 잊힌 지 오래다.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로서 민족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 이상정 이상화 형제, 이시영. 이윤제. 서상일. 백기만 등등 뜨거운 불덩이와도 같은 독립투사를 낳음으로써 다른 어느 지역에 비해도 부끄럽지 않은 이름을 얻었다. 늦었지. 지금이라도 항일 지사를 기리는 시민 운동을 힘차게 펼쳐 대구를 ” 빼앗긴 들“을 되착았으니 이제는 그 초록빛 들판에 고식을 심고 나무를 심자!
대구 지역 출신인 이상화(李相和)[1901~1943]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민족주의 시인으로서 식민 지배에 처한 민족적 울분과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바탕에 두고 시를 썼다. 1919년 3·1운동 시위 행사를 준비하였고, 1921년 박종화(朴鍾和)와 만나 『백조』 동인이 되었으며 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이 있다. 대구광역시의 이상화 시비는 1948년 3월 14일 죽순 문학회 주최로 ‘상화시비’라는 이름의 시비가 처음 세워졌다. 「나의 침실로」의 일부를 새겨 넣은 상화 시비는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시비이다. 이 외에도 이상화의 시를 새긴 시비가 대구광역시 여러 곳에 있다.
다음 이야기는 달성서씨 이야기로 한다.
달성서씨 유허비
달성서씨 유허비 뒤의 봄나무 새잎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이 비가 공원 안에 세워진 것은 달성 일대가 본래 서 씨 문종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귀암서원 徐 (서침) 선생을 제사 지내는 서원이다. 서 침 선생은 세거지인 달성을 정부 땅과 바꿔주면 후손들에게 대대로 혜택을 베풀겠다는 조정의 제안이 들어오자. 그 대신 대구 사람들이 정부에 빌렸다가 갚아야 하는 還穀(환곡)의 이자를 대폭 줄여달라고 청함으로써 가난한 민중들을 살린 실천하는 선비였다.
사람들은 그를 기려 1665년 여귀산에 기암 서원을 세웠다 그 후 서원은 1995년 지금의 자리 移建(이건) 된다. 또 달성공원에 가면 서 씨 유허비와 순종 나무 사이에 울창하게 치솟아 있는 희화 나무 한 그루를 불 수 있는데 나무에는 시침 나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대구 달성공원에 있는 시침 나무/ 300년 된 회화나무, 학자 수 이다.
"서침 나무" 나무라고 들어보셨나요? 대구 달성 공원에 가면 특이한 이름을 가진 회화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서침(徐沈이란 사람이 누군지? 왜? 나무에 사람 이름을 붙이는지? 그 유래가 항상 궁금하였는데…. 먼저, 달성 공원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달성 공원은 처음부터 공원이 아니었다. 삼한시대에는 부족 국가 달구벌의 성터였으며, 고려 중엽 이후 달성 서씨의 사유지였다. 조선 세종 때 서 씨 일문이 헌납하여 국유로 귀속되었다가, 1905년 일본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67년 5월에 이르러 대구시가 종합공원으로 본격 조성계획을 세워 현재의 대공원으로 만들어졌다. 달성 공원은 사적 62호 문화재다.
달성공원 안에 순종 나무를 아시나요?
이정웅 저<대구 경북의 名目(명목)을 찾아서>게 따르면. 일본인 귀여워 아사와의 저술 <대구 물어>에 순종 황제와 진흙 히로부미의 1909년 1월 12일 대구를 방문하여 달성공원에 기념식수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가이스카향나무는 나무높이 10~15m 정도까지 자라며 나무껍질은 얇게 세로로 벗겨진다. 잎은 끝이 둥글며 드물게 끝이 바늘 모양인 것도 있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각각 다른 그루에 피는 단성화이다. 암꽃은 둥글며 지름은 1.5㎜이고 황색이다. 길이 3㎜의 타원형 수꽃은 연한 자갈색이며 4월에 꽃이 핀다. 구 과로 맺는 둥근 열매는 검은빛을 띤 자주색이며, 10월에 익는다.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가 달성공원에 나무를 심었는데, 이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1930년대의 문헌 기록이 확인되어 현재의 향나무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대구는 언제부터 대구였을까
삼국사기에 보면 261년(신라 첨해 이사금 15)에 達伐城(달 발성)을 축조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는 대구 지역을 지칭하는 地名(지명)을 확실하게 증언해 주는 최초의 기록으로 벌성 축조 이전에 대구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대구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인 2만 년 이전부터였다 그리고 청동기 유적이 유난히 많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 대구(달성) 지역 거주집단은 세력이 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칠기가 유입되면서 그 세력은 더욱 막강해졌을 것이며,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작은 나라를 세웠을 터이다.
그 소국은 변한 12국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세력이 강성한 나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3세기경부터는 신라 문화권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대구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 그 이전까지는 무엇이었는지 불확실하고. 침해 이사금 때의 달 발성 명칭이 비로서 확실하다는 뜻이다.
신라 시대에 대구 지역은 撻罰(달벌) 達句伐(달구벌) 달불 達句火(달구화) 등으로 불렸다. 달 벌과 달구벌의 벌 은 평야 들판 등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다. 이는 백제 사람 중 유일하게 동상을 남긴 계백 장군이 전사한 황산벌의 벌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그리고 달 불의 弗(불)과 달구와의 火(화)는 벌과 같은 소리로 보면 된다.
그러던 중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꾸는 경덕왕(743-764)년 재위 때 달구화현은 大丘(대구) 현으로 이름이 바뀐다. 달구와의 달 이 대구의 大(대)로 달구와의 구가 대구의 丘(구)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대구의 지형을 큰大(대) 언덕丘(구)로 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달月(월)은처럼 둥근모양. 언덕은 산을가르킨다고 보면 많은大(대) 산丘(구) 으로 둥글게 돌러싸인 들판-분지에 大丘(대구) 라는 이름을 붙인 조어 방식은 대략 이해가 된다. 어쨌든, 달구의 달이 大丘(대구)의 大(대)로 바뀐 까닭은 불분명하지만, 대구가 大丘(대구)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757년(경덕황 16)부터이다.
다시 大丘(대구)는 大邱(대구)로 바뀐다. 1750년(영조 26)에 대구 사람 이양 채가 왕에게 상소를 올려 大丘(대구)를 大邱(대구)로 바꾸어 옳다고 주장한다. 丘(구)가 공자님의 이름에 쓰이는 글자이므로 지명에 써서는 안 된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다음 지명에도 丘(구)를 쓰는 곳이 많고. 이미 삼백 년씩이나 써온 것을 구태여 바꿀 필요가 없다는 종론에 밀러 임금의 윤허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 와중에, 大丘(대구)와 大邱(대구)가 뒤섞여서 쓰이는 상황이 되고. 1780년 정조 초기 무렵부터는 주로 大邱(대구)가 애용되었다. 추로자향울 자칭 하는 대구 지역의 분위기가 결국 자신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 이후, 1949년 지방자치법 개정되면서 대구시로. 1981년 대구광역시로. 1995년 대구광역시로 대구는 그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러나 ”대구시“든 ”대구지할시“‘든 그것은 매한가지이니 오늘날의 이름 大邱(대구)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결국 조선 정도 때부터라고 하겠다.
달성공원의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달성공원은 대구의 대표적인 공원 중 하나이다. 이 공원은 조선시대에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 성곽인 달성에서 비롯되었다. 1899년, 일본은 한국 침략을 위해 달성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일본군 병영을 설치하였고. 이후 1905년에는 달성공원으로 개장되었다. 이후, 일본인들은 달성공원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고. 예를 들어, 그들은 달성공원을 군사적 훈련과 오락 공간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한국인들은 다시 달성공원을 되찾았습니다. 이후, 한국인들은 달성공원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달성공원을 문화적, 정치적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오늘날, 달성공원은 대구의 대표적인 공원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합니다. 그동안 몰랐던 역사를 다시 한번 뒤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이번 자서전을 쓰면서 달성공원을 직접 발로 걸으면서 유명하신 해설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가 역사적인 대구시민의 발자취를 걸어보는 산 교육장이 된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은 서적에 또는 인터넷에서 역사를 잘 아시는 존경스러운 선생님 말씀들을 모아서 쓰고 또 쓰고 하였음.
그리고 공원 견학하는 날 점심 식사는 비원 복지관에서 제공하고 식당은 역사가 60년이나 된 한우곰탕 식당에 맛있게 먹으면서 식당 역사가 60년 내가 少(소) 시적 내 나의 위에 대신분들은 꼭 이곳을 찾곤 하였고. 그 당시는 아주 씩씩하신 할머니가 식당을 관리하고 지붕은 내가 기억으로는 초가집으로 기억이 되며 식당 주인 할머니가 내가 자주 주위분들하고 자주 가니 장가는 갔느냐 이런 농담도 하시던 그때 할머니!. 지금은 할머니 아들 내외도 없고 손자 부부가 식당을 경영하는 것 보고 세월의 무상 함을 느끼면서 달성공원을 답사하면서 감회가 새롭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