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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때 기방에서 기생의 기둥서방에 크게 곤욕을 치를 뻔했던 세조의 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세조가 왕자 시절이던 14세에 창녀집에서 잤다. 그런데 밤중에 창녀의 기둥서방이 문을 두들겼다. 놀란 세조가 발로 벽을 차 넘어뜨리고는 밖으로 도망쳤다. 기둥서방은 도망치는 세조를 뒤쫓아왔다. 4㎞ 가까이 추격전이 벌어졌다. 세조는 오래된 버드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세조의 종적을 찾지 못한 사내는 욕을 해대면서 되돌아갔다.
얼마 뒤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와 하늘을 바라보더니 "자미성(紫微星)이 유수(柳宿·동방의 28개 별자리 중 24번째 별자리)를 거쳤으니 임금이 버들에 의지한 상이다. 매우 이상한 일이군"이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세조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사람은 관상감(기상대)에 근무하는 관리였다. 후일 왕이 된 후 이때의 일을 기억해 관상감 관리를 찾았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대신 자손에게 후하게 상을 내렸다.
세조의 최측근인 홍윤성(1425~1475)은 왕의 총애를 믿고 극악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청했다. 홍윤성은 땅을 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에 숙부는 "나의 도움으로 10여 년이나 잘 먹고살았는데도 벼슬 하나 안 주냐"고 따졌다.
화가 난 홍윤성은 숙부를 때려죽이고 산속에 묻어버렸다. 숙모가 억울한 사정을 관청에 고소했지만 형조, 사헌부 모두 홍윤성의 권세를 겁내 사건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숙모는 세조가 온양온천에 거둥하기를 기다렸다가 사건의 전모를 고해바쳤다. 세조는 크게 화를 냈지만 홍윤성을 처벌하지는 않고 대신 그의 하인 10명만 벌줬다.
사대부들로부터 성군으로 받들어졌던 성종은 술을 즐기고 놀기를 좋아했다. 성종은 독한 소주를 주로 마셨다. 내시 한 사람이 왕의 건강을 위해 소주에 물을 타 올렸다. 술맛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왕이 주위에 자초지종을 묻고는 내시를 내쫓아버렸다.
성종은 큰 옥잔을 늘 곁에 뒀다. 매번 임금이 거나해지면 옥술잔을 가져와 신하들에게 술을 하사했다. 한 종친과 술을 마실 때 임금이 평소처럼 옥술잔을 가져와 마시라고 권했다. 이 종친은 술을 마신 뒤 옥잔을 옷소매에 넣고 춤을 추다가 거짓으로 땅에 엎어져 깨뜨렸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임금에게 술을 멀리할 것을 권고하려는 의도였다. 성종은 종친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성종은 바깥세상에 자주 행차하는 것을 두고서도 입방아에 올랐다. 바깥에 나갔다가 경치가 아름다우면 가마에서 내렸고 심지어 땅에 주저앉아 경치를 감상했다. 어떤 때는 악사에게 악기를 연주하게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대간들은 궁궐 밖 나들이를 중단하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귀를 막았다.
임금은 바깥행차에서 만난 다수의 선비들을 과거에 합격시켜주기도 했다. 성종이 밤에 밖에서 놀다가 삼각산에 불빛이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확인해보니 한 서생이 등불을 켜고 글을 읽고 있었다. 서생에게 물어보니 "과거에 급제하고 싶다"고 했다. 임금이 불러 절구 짓기를 명한 뒤 급제시켰다.
아버지가 왕의 노여움을 사 옥에 갇히자 상소를 올려 특사하게 할 만큼 문장에 재주가 있었던 13세 아이의 이야기도 전한다. 성종 시절 큰 가뭄이 닥쳤다. 나라에서는 신이란 신은 모두 섬겼다. 임금도 친히 경회루 연못가에서 기도를 올렸다.
그러기를 12일째, 주변에서 갑자기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렸다. 임금이 물으니 방주감찰(사헌부 우두머리 감찰)이 연회를 벌이는 것이라고 했다. 임금은 크게 노해 "내 스스로 정무를 피하고 음식을 줄이면서 백성을 위해 여러 날 빌고 있는데 녹을 먹는 무리가 감히 음악을 벌여 즐긴다 말인가"라며 모조리 하옥하라고 명했다. 그렇게 잡아들인 사람이 24명이었다.
이들의 아들들이 대궐로 몰려와 상소를 올리고 아버지를 풀어달라고 애걸했다. 왕은 더욱 화를 내면서 "예절이 없다"며 체포를 지시했다. 그러자 모두 도망가고 어린아이 한 명만 남았다. 임금이 아이에게 "왜 달아나지 않았느냐"고 묻자 "죄를 받기를 각오했는데 어찌 감히 도망가겠나이까"라고 답했다. 상소는 누가 지었느냐고 하자 아이는 자작했다고 했다. 임금이 아이를 시험하기 위해 글제를 제시하자 막힘없이 글을 술술 지어 올렸다.
임금은 글씨 잘 쓰고 글도 잘 짓는 이가 드문데 아이는 둘 다 막힘이 없다며 칭찬했다. 그러면서 나이와 이름을 물었다. 아이는 열세 살이며 이름은 김규라고 답했다. 임금은 "너의 그 효성을 충성으로 옮기라"며 24명 모두 특별 사면했다. 김규는 후일 문과에 합격해 벼슬이 정이품에 이르렀다. 김규는 임금의 기제가 있을 때마다 사흘씩 울었고 달이 바뀔 때까지 고기도 입에 대지 않았다.
▲ 개성 연복사탑 중창비. 연복사 오층목탑의 건립내력을 담은 비석이다. 일제강점기 개성에서 서울 용산으로 옮겨졌으며 비문은 권근이 짓고 글씨는 성석린이 필체를 새겼다. 현재 코레일이 보관하고 있다.
저자는 송도(개성) 출신이다. 송도와 관련된 다양한 일화를 전한다. 고려 시대 개성에 있었던 300여 개 절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연복사도 거론된다. 연복사에는 5층 목탑이 우뚝 서 있어 장관을 이뤘다.
고려 멸망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1563년(명종 18) 당시 송도 유수가 사위를 맞기 위해 사람을 시켜 횃불로 비둘기를 잡게 하는 과정에서 불똥이 떨어져 대와 비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타버렸다. 차천로는 "내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지만 불꽃이 밤에 하늘로 치솟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떠올렸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꼽혔던 화담 서경덕(1489~1546)은 동시대 인물로 많은 사대부들의 스승이었다. 차천로 역시 그의 문하였다. 서경덕은 청빈했다. 서경덕은 그를 존경하는 고관대작들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그와 친분이 있었던 황해도 관찰사의 초청을 받아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관찰사가 많은 노자와 종이, 붓을 선물로 줬지만 서경덕은 모두 사양하고 단지 쌀 닷 되만 받았다. 전국을 유람했지만 준비한 식량이 자주 떨어져 여러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다.
서경덕은 늘 저염분에 채소 위주의 담식(淡食)을 했다. 고기를 멀리했지만 유독 말린 밴댕이만큼은 즐겨 먹었다고 기술한다. 장시간 글읽기와 사색에 소모되는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 단백질원이었던 것이다.
▶차천로(1556~1615)=호는 오산이다. 1577년(선조 10)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했지만 1586년 고향 사람의 답안을 대신 작성해 장원급제시켜준 일이 발각돼 유배됐다. 문장과 글씨가 독보적이었다.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의 대부분을 작성해 명나라에서 동방문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통신사 황윤길 일행으로 일본에 가서 4000수가 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저서로 오산설림초고 외 오산집, 강촌별곡이 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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