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6
제법부동본래적의 본래적(本來寂)이다.
본래적-본래 고요하다는 뜻이다.
‘적’ 은 적멸의 준말이며 적멸은 열반의 의역이다.
우리 불교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의지하여 열반을 추구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기에 이 뗏목에 의지하여 강을 건넌 후에는 그 뗏목을 버려야 한다.
금강경 제 6분에 끝에서도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이라 했다.
뗏목과 관련하여 우리가 지난법 반야심경 수업에서 공부했다.
그 내용을 잠시 기억해 보자,
반야심경에서 ‘ 공중(空中)에는 전제를 제시한 오온,12처,18계,12연기,사성제,지혜와 얻음을 부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지만 이 모두는 열반의 언덕에 도달하기 까지의 도구이고 방편인 뗏목과 같은 것이기에
내려놓아라! 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법 (색수상행식)을 통해 무아를 체득하여 자아가 열반에 들어야 하겠지만 그런 법도 열반에 들어야 한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원래 자아가 없다는 점, 무아임을 알아야 하고(아공), 법에도 실체가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법공) 제법 무자성이다.
또 예를 들어보자
자동차 부품들이 모여 있다, 이들 하나 하나 조립해서 모아서 무엇이 되었나?
자동차가 되었다. 자, 자동차라는 법이 실체가 있다면 그럼 자동차 부품 하나 하나를 제거하고 나면 뭐가 남나?
실체가 있다면 당연히 ‘자동차’가 남아야지!
그런데 없다. 자동차는 어디에도 없다. (실체가 없다)
바로 법공이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다.
오온(색수상행식)에서 하나하나 제거하면 ‘내’가 남아야 하는데 있나!
없다. 나는 그 어디에도 없다. 바로 아공이다.
제법 무자성이다. 아공 법공이다. 법은 본래 적멸이다. 제법은 적멸이다.
제법 적멸은 법의 공성이다.
이렇게 아공,법공을 통찰하게 되면,
모든 법에 실체가 없어 공하고, 고요하다는 점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부처님과 다를 게 없다.
바로 열반이다.
열반은 ‘모든 번뇌의 소멸’을 의미 한다.
탐욕,분노,교만,어리석음과 같은 번뇌들이 모두 사라지면 열반을 체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법’에 대한 집착이 아직 남아 있다면 ‘무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뗏목을 버리지 않는 이상 최종 목표인 완전한 열반을 체득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원래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면,
공적하며 적멸이다. 본래 고요하다 ‘본래적’이다.
이 본래고요한 이유에 대해 ‘무이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이름 없고 모습 없어 모든 것이 끊겼으니
무명- 이름 없고
무명, 이름이 없다. 모든 법은 이름이 없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들은 원래 모두 이름이 없다.
살펴보자,
오온 각각은 정체불명이다.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색수상행식이 그런대로 구분이 간다. 그러나 현실에서 오온 낱낱의 실례를 들려면 난감해진다.
교재에서 예로 들어난 꽃병을 가지고 색수상행식을 통찰해 보자
하나의 꽃병이 색도 되고, 수도 되고, 상도 되고, 행도, 식도 된다.
이 오온의 순서는 차례도 없다. 섞어도 된다.
꽃병은 색,수,상,행,식으로 정리되는데 우리가 집중하는 것만 보인다.
이걸 우리는 어떻게 표현하나?
‘언어가 무너졌다’, 고정관념이 사라진다, 지혜다
앞선 스님들의 표현을 빌려보자,
‘부처님은 마른 똥막대기다’,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온 이유는 뜰 앞의 잣나무다’ 와 같은 화두(話頭),공안(公案)의 경지다. 하고 했다.
화두(話頭)는 뭔가? 말머리, 말 이전의 소식, 화두가 깨지면 답이 나온다.
공안(公案)은 공변될 공, 책상 안의 공안은 모두의 방안, 누구든지 할 수 있는 방안, 누구든지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다. = 화두와 같은 말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을 설명해 주셨다.
왜 깨달으려고 하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무슨 괴로움인가?
몸의 괴로움(감성의 괴로움), 정신적 괴로움(인지의 괴로움)이다.
감성의 괴로움은 배고프면 먹으면 되고, 병나면 병원가면 되고...
불교의 괴로움은 인지의 괴로움을 말한다. 지적인 괴로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태어났을까? .. 괴로워 하는 사람 있나?
이런 의문은 잘 품지 않는다.
이런 의문이 생기는 우리는 머리를 굴려 ‘망상’을 만들어 낸다.
이게 왜 망상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 ‘법성원융무이상’이라고 했는데 ..
나는 누구인가? 의문자체가 잘못됨을 알아야지!
무아다. 의심을 품는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러니 잘못된 의문을 아는 것,
흑백논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실재 세상과 무관하다는 것을 아는 것,
이 모두가 망상임을 알아야 한다. 의문 해소가 최고의 답이다.
그러니 불교는 뭘 얘기 하는 것인가?
이걸 제대로 알기 위해 뗏목을 타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 수행하다 보면 뗏목에서 저절로 내려야 함을 알게 된다.
이게 바로 화두다.
우리는 부처라는 상을 가지고 있다.
이 자체가 잘못되었다.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 라는 이 자체도 상이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진리는 뭔가? 진리가 없는 곳이 있나? 이 진리가 작동되지 않는 것이 있나? 말 그대로 연기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있나?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모든게 연기의 작용이다. 그러니 모든 게 부처다.
마른 똥막대기도 부처다.
화두는 내 생각을 깨주는 것이다.
이렇게 색수상행식이 실재 세계에서는 동치(같은 말)로서 상즉한다.
실재세계에서는 색.수.상.행.식을 별도로 분리해 낼 수 없는 것이다. 별도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래서 무명(無名)이다.
십이처와 십팔계 낱낱은 정체불명이다.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의 12처의 열두가지 낱낱요소들이나, ‘안계 내지 의식계’의 십팔계의 18가지 낱낱요소들 역시 고유한 특성을 갖지 않는다.
모든 감각기관의 생리학적 본질과 우리의 주의집중 기능을 엄밀히 분석해 보면 감각대상을 지각하는 과정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더 자세히 안식에 대해서 보자,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내 눈동자에 뚫린 동공으로 들어와서 망막에 비친 영상을 보는 것으로
안식이 발생하기 까지 ‘ 빛 – 시각대상 – 동공 – 망막 – 간상세포,원추세포- 시교차 – 후두엽의 시신경망’ 등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안식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안식을 발생 시키는 조건, 즉 인연들이다.
더 분석해 들어가면,
우리의 시야에 무엇이 보일 때 우리는 그 시야전체를 한꺼번에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의(念)가 짧게 요동하면서 시야를 훑음으로써 시각인식, 즉 안식이 발생한다.
더 더 더 분석한 결과 잘게 자르면 사실은 한 찰나만 존재하는 하나의 점이다.
앞의 시간에서도 언급했듯이 모든 게 점-찰라다.
매 찰라 명멸하는 점의 변화로 인해 안식이 발생한다고 말 할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원래 하나의 점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도 한 순간만 존재하는 하나의 점일 뿐이다. 점속에 점이 산다.
더 엄밀히 말하면 ‘점으로서의 마음’은 ‘점으로서의 세계’와 일치한다.
이렇게 안식을 통찰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식들을 훑으면 매 찰라 한 점의 촉감만 존재하고,
청각도 마찬가지로 찰나적인 변화일 뿐이다.
냄새,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 주의를 따라서 1차원적으로 이동하는 찰나적인 변화일 뿐이다.
안이비설신의의 여섯지각은 그 발생과정에서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눈이 눈이 아니고, 귀가 귀가 아니고, 코가 코가 아니고, 혀가 혀가 아니며, 몸이 몸이 아니고, 생각이 생각이 아니다.
이렇게 여섯가지 지각기관이 그 정체를 상실한다.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아울러 이들 지각기관에 대응하는 ‘색성향미촉법’역시 정체를 상실한다.
십이처가 무너지고 십팔계가 무너진다.
모두 원래 이름이 없다. 무명(無名)이다.
일화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