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졸년] 이두연『李斗然, 1595년(선조 28) ~ 1645년(인조 23)』
[세 계] 임실 출신 국당공후 문정공파
정리당 이공 행장(靜履堂李公行狀)
사미헌 장복추 찬(四未軒 張福樞 撰)
증 숭록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사 예문관대제학 행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 겸 동지성균관춘추관사 시문정공 정리당 이공 행장(贈崇祿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事藝文館大提學行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成均館春秋館事諡文貞公靜履堂李公行狀)
공의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두연(斗然)이며 자는 건백(建伯)이고 호는 정리당(靜履堂)이며 본관은 계림(鷄林=慶州)이다. 시조의 휘는 알평(謁平)으로 신라 개국좌명대신(開國佐命大臣)이 되었다.
좌복야(左僕射) 휘 핵(翮)과 문희공(文僖公) 휘 세기(世基)를 지나 문효공(文孝公) 휘 천(蒨)과 문경공(文敬公) 휘 정견(廷堅)에 이르러 양 대에 걸쳐 월성군(月城君)에 습봉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후(後)는 이조참의를 지냈고 휘 세남(世南)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휘 이(苡)는 직장(直長)을 지냈고 휘 수담(壽聃)은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휘 임(任)은 이조참의에 증직되었고 휘 숭문(崇文)은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휘 위(緯)는 예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호는 서계(西溪)로 훌륭한 문학과 행실로 추중을 받았는데, 선조(宣祖) 기축(己丑)의 화에 동강(東岡) 김 선생(金先生)과 함께 회령(會寧)으로 귀양을 갔으니, 곧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충헌(忠獻)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28) 12월 12일에 흰 학을 꿈꾸고 임실현(任實縣) 구고리(九臯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겨우 3세에 정유재란을 만나 백련봉(白蓮峯) 아래 암석사이에 피난하였는데 학이 날개로 덮어주니, 서계가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12세에 활재(活齋) 이대유(李大㕀) 문하에서 배웠다.
23세에 정 한강(鄭寒岡)에게 배워 마음의 본원을 함양하는 것으로 덕을 진척시키는 기틀로 삼고, 성리(性理)를 궁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학업을 닦는 근본으로 삼았는데, 정 선생이 매양 칭찬하였다.
정사년(1617, 광해군 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여러 해 동안 반궁(泮宮=成均館)에 있으면서 세 번이나 국빈(國賓)에 충원되었다. 광해군이 윤리를 손상시킨 일이 있은 이후로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책을 읽으며 스스로 즐겼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 2) 이괄(李适)의 변란이 있자, 임금께서 공주(公州)로 행차하셨다. 공이 동지들을 창도하여 병사와 군량미를 모아 전쟁터로 달려가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과 함께 합세하여 난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어가를 호종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그해 봄에 성균관 학록(成均館學錄)으로 추천되어 승진하였다.
이때 임금께서 바야흐로 경학(經學)에 뜻을 두고 현량(賢良)한 선비들을 탐방하였다.
정 우복(鄭愚伏)과 정 동계(鄭桐溪) 두 선생이 자주 공의 이학(理學)을 칭찬하니, 임금께서 즉시 강연에 참가하도록 명하였는데, 강연에서 물흐르듯이 응대하자 임금께서 마음을 비우고 앞으로 자리를 바짝 다가앉아 경청하였다.
6월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되었다. 10월에 우레가 울리며 비가 내려 하늘이 경계함을 보이니, 공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빠른 우레가 울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것은 바로 하늘이 경계함을 표현함이니, 하물며 이런 순곤(純坤)의 달[10월]에 발생함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옛사람이 천변(天變)을 인애(仁愛)의 발로라고 생각한 것은 대개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여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여 위망(危亡)의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2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전근되자 부모님의 봉양을 빌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을축년(1625, 인조 3) 임금의 부름에 나아가 곧바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나라의 기강을 세워 부지하는 뜻을 진술하였다. 6월에 사헌부가 관노(館奴=성균관 노비)를 형신(刑訊)하는 일로 또 상소하였는데, 전후로 올린 소차(疏箚)의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 4) 다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해에 청나라 적들이 화의를 청하자 공이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마땅히 포로병을 참수하여 대의(大義)를 밝히고 명나라 조정에 알려 토벌을 청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말씀이 가을 서리같이 늠연하였다.
7월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고 9월에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호조참의로 전직되었다.
12월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었고 가선대부 품계가 더해졌으며 동지성균관춘추관사(同知成均館春秋館事)를 겸하게 되었는데, 체직을 빌었지만 윤허되지 않았다.
정묘년(1627, 인조5) 정월에 청나라 기마병이 변경을 침략하자 임금의 수레가 강화도(江華島)로 행차하였다. 공이 수찬(修撰) 이상형(李尙馨), 좌랑(佐郞) 오섬(吳暹)과 함께 창의하여 공주(公州)에서 세자를 호종하였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또 학가(鶴駕 세자의 수레)를 호종하여 강화도의 행재소에 이르렀다.
병자년(1636, 인조 14) 청나라 기마병이 갑자기 도성으로 침략해오자 어가가 남한산성으로 옮겨갔다. 왕의 교서(敎書)가 적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나오니, 공이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맹서하고 서계공에게 우러러 품의하였다.
서계공이 말하기를 “충효는 바로 우리 집안의 일이니, 너는 늙은 아버지가 있음을 염려하지 마라. 또 전쟁을 하는데 용기가 없음은 효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명령을 받고서 삼가 두려워하면서 옥과(玉果) 이흥발(李興浡), 세마(洗馬) 조평(趙平), 한림(翰林) 양만용(梁曼容), 찰방(察訪) 유즙(柳楫)과 함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리며 군량미를 모으고 병사를 모집하였다.
창의군이 과천(果川)에 이르렀을 때 화의가 이미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계(桐溪)와 함께 차자를 올려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성수산(聖壽山) 가운데 별도로 삼가정(三佳亭)을 지은 뒤 스스로 대명(大明)한 구역을 만들고 자취를 거두어 세상에 숨었다.
갑신년(1644, 인조 22)에 명나라가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충분(忠憤)을 이길 수 없어 앉을 때 북쪽으로 향하지 않았으며 연경(燕京)의 물건은 하나도 몸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을유년(1645, 인조 23) 10월 16일에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께서 애도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서 관리를 보내어 부의를 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그 다음 해 2월에 임실현 서쪽 수산(壽山) 아래 군의곡(羣議谷) 을좌(乙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영조 을미년(1775, 영조 51)에 숭록대부(崇祿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경연사(知經筵事)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증직되었고 문정(文貞)의 시호가 내려졌다. 교지(敎旨)에 숭정(崇禎) 연호를 특별히 써서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보였으니, 대개 세상에 드문 특별한 대우였다.
아! 공의 업적을 뽑아보면 임금을 섬김에 충성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시기적절하게 겨울에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렸다. 시렁 위의 맛있는 음식〔瀡滫〕과 상자의 옷가지는 반드시 몸소 조사하고 친히 검열하여 부모님의 입에 맞고 몸에 편하게 하기를 힘썼다.
부모님의 상을 당하여는 습(襲), 염(斂), 장례, 제례를 한결 같이 예제(禮制)를 따랐으며, 삼년간 여묘 살이를 하면서 슬퍼하여 몸이 야위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도 그해가 다가도록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새벽에 일어나 사당을 배알하는 일을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만두지 않았다.
자질(子姪)들과 고을의 인재들을 가르치면서 일찍이 말하기를 “천지가 이미 생긴 뒤로 도가 성인(聖人)에 있게 되었다. 성인은 이미 시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도는 남겨놓은 경서에 있으니, 도에 뜻을 둔 사람은 이 경서를 버리고 어찌하리요.”라고 하였다. 믿고 따르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져 모두가 가정(佳亭) 선생으로 추중하였다.
공의 하늘에 근본 하는 효도와 적개심의 용맹 같은 것은 정성껏 후학을 인진(引進)하는 방법이니, 참으로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학문을 좋아하며 죽음으로써 지키면서 도를 잘하는〔篤信好學守死善道〕’ 자가 아니겠는가.
부인은 선산김씨(善山金氏)로 군수를 지낸 윤휘(胤輝)의 따님이니, 묘소는 공과 같은 언덕에 있다.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지평(持平)을 지낸 영후(永厚), 양자로 나간 영하(永夏), 자식이 없는 영석(永奭)이며 딸은 이시화(李時華)와 진사를 지낸 김진룡(金震龍)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낳은 아들은 영신(永新)과 영무(永茂)이고 딸은 조기하(趙器夏)에게 시집을 갔다. 손자와 증손자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9대손 종택(鍾澤)이 그의 사촌 동생 종길(鍾吉)을 시키니, 그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4백 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나에게 와서 행장을 부탁하였다.
내가 늙고 피폐하여 고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서술하기를 위와 같이 하여 부지런한 정성에 색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