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22
ㅡ 주몽과 고구려 출현 ㅡ
고구려(高句麗)!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웅장한 기상!
중국 중원까지 아우르던 광활한 영토를 가진 우리 '한민족' 영원한 꿈인 고구려!
KOREA!
전 세계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명 '코리아'는 '고려'에서 나왔다.
우리가 여기서 모르는 사실이 있다.
'고구려'가 '고려'로도 불리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고구려(高駒驪), 구려(句麗), 구려(駒驪), 고리(高離)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고구려(高句麗) 빈도가 가장 높았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 되어 서는 '졸본부여'나 '맥'(貊)으로 불리기도 했다.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편이나 '삼국유사' 고구려 편, 이 두 기록에 따르면 '동명성왕'은 처음엔 국호를 '졸본부여'로 한 것으로 나온다. 반면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는 아예 처음부터 국호가 '고구려'로 정해진 것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한 역사서에서도 국호가 다르게 표기된 것은 당시 국호가 '졸본부여' '고구려' 두 가지로 다 부르지 않았나 한다.
그러나 이후 4세기 장수왕 때 부터는 '고려'(高麗)로 불리기 시작한다. 5세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라는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고려'로만 불리게 된다. 하지만 현대 우리나라는 '왕건 고려' 와 구분하기 위해 여전히 '고구려' 라고 부른다.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 대조영이 세운 발해,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 그리고 왕건이 세운 고려, 언급한 네 국가 모두 궁예가 기분 내킬 때 바꾼 '태봉'을 제외하면 다 '고려'가 정식 국호였다.
이만큼 '고려'는 우리 한민족 국호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고조선' 즉 '조선'도 우리 민족 뿌리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고려'가 더 우리 민족 고유 국호로서 웅장함을 선사한다.
사실, '조선'은 이성계가 중국 명나라에 '화령'과 '조선' 두 가지 국호를 올려 '조선'으로 하사받은 국호이다. 이때부터 우리 한민족 역사 시작인 조선은 '고조선'으로 부르게 된다.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은 국호 탄생부터 명나라가 선택해주는 사대주의가 쩔어 있어 썩 내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국 명나라는 조선과 화령 중 왜 조선을 선택했을까?
중국이 화령과 조선 중 조선을 선택한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째, '조선'은 한자로 朝鮮, 즉 "아침의 고요함"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명나라 측에서는 이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동이(동쪽오랑캐)가 가장 골치아픈 중국으로서는 아침의 고요함처럼 가만 있어주는 것을 상징하는 국호가 더 맘에 들었을 것이다.
둘 째, '조선'은 고조선과 관련된 이름으로, 한반도 역사 연속성을 강조한다. 즉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해 거의 식민지화 한 것을 이 상징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당시 이성계 일파는 명나라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조선은 명나라의 승인과 지지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명나라 황제가 선호한 국호를 따르는 것이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교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조선'이 또 탄생 했고 원래 '조선'은 '고조선'이 된 것이다.
이야기가 조금 샜지만 다시 '고구려'로 돌아 가자!
'고구려(高句麗)' 라는 명칭은
중국역사가 '반고'(32~92)가 지은 '한서지리지'에 최초로 언급되어 있다. 한서지리지 기록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구려가 아니라 한사군 중 현도군에 속한 현인 '고구려현'(高句驪縣)을 소개한 것이다.
'高句驪' 란 뜻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높은(高) 언덕(句)의 마을(麗)"이라는 의미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마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해석된다. 즉 '현도군 고구려현'이나 '주몽 고구려'가 높은 곳에 위치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 국호를 현도군 고구려 현을 본따 만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주몽이 부여계 유민을 중심으로 졸본에 도읍을 세웠을 때 '고구려'라는 국호로 사용할 때 현도군 '고구려현' 이 먼저 있긴 했다. 주몽 고구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고구려현 이름은 계속 남아 있다가 서기14년 고구려 유리왕에게 흡수 당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고구려 를 공격하여 복속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주몽에 의해 건국되어 668년까지 존속했다. 현재의 북한과 중국 동북부 지역을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다.
'주몽'은 고구려 '고'자를 따서 '고주몽'이라고 부른다. '고'씨 성이 처음으로 나온 것이다. 원래 주몽은 '해모수' 아들이기에 '해'씨 였다.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하고는 '동명성왕' 불리었다.
[시조(始祖)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며 이름이 주몽(朱蒙)【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이다....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牟 一云衆解】...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이처럼 주몽은 추모, 중모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도 고구려 시조로 '주몽'이 아닌 '추모'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주몽, 추모, 중모>가 동일인이지만 한자 음차를 읽는 차이로 보고 있다.
어쨌던 이 셋 이름 모두는 당시에 명궁 또는 명사수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게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은 본명이 아니라 별명 내지 칭호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주몽'과 '동명성왕'의 '동명'이 동일인이 아니라는 기록도 있다. 보통은 주몽과 동명(東明)을 동일시하지만 당대 기록인 702년 〈연남산 묘지명〉에서는 '동명'(東明)과 '주몽'(=추모/중모)을 별개 인물로 보고 있다.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 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
〈연남산 묘지명〉 中
이처럼 고구려때 까지는 '동명'과 '주몽'이 별개였으나, 삼국시대가 끝난 뒤 훗날 고려시대 이후 시점에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추모왕'이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즉 부여 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 '동명성왕' 건국설화가 거의 똑같다 보니 혼선이 왔다는 것이다.
우리 한반도 고대국가 건국설화는 대부분 '난생설화'이다. '고조선'과 '백제'만 아니다.
'난생설화'는 나라를 연 시조나 영웅탄생을 신비화하고 초인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시조나 영웅이 알에서 태어났다고전하는 민족설화를 말한다.
<부여 동명왕, 고구려 동명성왕, 신라 박혁거세, 가야 김수로왕> 모두 난생설화로 태어났다.
이런 난생설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주몽, 동명성왕이 마치 신화 속 인물로 생각도 하지만 실존인물이라는 것은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같은 난생설화 주인공들인 부여 동명왕 신라 박혁거세 가야 김수로왕도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단군신화에 나온 단군은 실존인물인지에 대해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통 학교나 특정 위인과 관련이 깊은 지자체에는 위인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유독 단군상만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뉴스에서 목이 잘린 단군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일부 극단적 개신교 신자들에 의한 '반달'
(문화유산이나 공공재산등을 파괴하는 행위)이 나타내기도 한다. 극단적 개신교인들 관점에서 보면 민족 조상신으로 숭배되기도 하는 단군 상은 실존인물이 아닌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불교 부처상도 공격한 경우도 있다.
이는 종교적인 것을 떠나 역사적으로만 보자면 유태인들이 자신들 시조로 모시는 '야훼'를 섬기기 위해 우리 한민족 시조 '단군'을 우상이라고 때려 부수는 진짜 못난 짓이다.
역사적 시각으로만 보았을 때 그런다는 것이고 일부 극단적 개신교인들이 그랬다는 것이니 종교적으로는 오해없기 바란다.
또 이야기가 잠시 샜다.^^
우리에게는 난생설화 주인공 고주몽이 아주 오래된 신화 속 인물로 생각되지만 중국 역사 속이나 세계사 속 인물들과 비교하자면, 공자보다는 500년, 맹자보다는 300년, 진시황, 한고조 유방, 항우보다는 200년 이후 인물이다. 그리고 동명성왕 사후 200년 정도가 지나면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조조 유비 손권' 삼국지의 무대가 시작된다. 또 동명성왕은 유럽쪽으로 눈을 돌리면 고대 로마 제국 '시저'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거의 동시대 살았던 분명한 실존 인물이다.
그러나 현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중국 '초한지'나 '삼국지' 속 인물들, '시저'나 '아우구스투스' 등은 노련한 정치가였던 이들은 역사적 실존 인물로 인식되고, '고주몽'은 알에서 태어난 신의 아들로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인물로 인식된다.
이는 우리 고대사가 중국이나 로마에 비해 규모에서 질적 양적으로 뒤쳐져 있다보니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시조를 미화시키어 권력을 집중하기위한 '난생설화' 등 신화적 요소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단군신화'도 마찬가지이다. 단군은 실제로 존재했던 분명한 실존 인물이다.
단지 전편에서 말했듯이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2000년 가까이 살았다고 말해 지나치게 신격화 해 버렸을 뿐이다, 단군은 황제나 왕처럼 호칭에 불과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단군 47명 계보가 나온다. 이 점은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해도 단군을 실존 인물로 인식 시켜준 기록으로서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현존하는 한국 고대사가 기록이 중국이나 로마에 비해서 훨씬 적고 후대인 조선시대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한국은 고대 기록이 상당히 풍부한 축에 속한다. 그리고 건국설화를 빼고는 아주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본기 나 구삼국사의 난생설화등 몇가지 신화적 요소만 빼면 기록은 현실적이다.
그런데 부여시조 '동명왕' 탄생설화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고주몽) 탄생설화가 거의 같다고 볼 만큼 흡사하다.
그 이유는 글이 길어져 다음 편으로 넘어가겠다.
이어서 '고주몽 탄생설화' 편이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