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녀는 누구인가
그는 데비 무어와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영화 ‘폭로’를 떠올렸다. 마이클 더글라스가 직장 상사인 데비 무어의 성관계 제안을 거절하고, 데비 무어가 오히려 자신이 성희롱을 당했다며 그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전화녹음으로 인해 결국 진실이 밝혀진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원작 소설이다.
그는 혹시 그녀가 자신을 강간하러 온 건 아닌지 의심해본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범하려 한다면 그는 어찌할 것인가 생각했다. 그는 피학증 성애자는 아니었다. 머릿속으로는 오르가즘에 대한 쾌감을 기억하고 있으나 몸은 그것을 잃은 듯했다. 정확히 잃은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하체에 힘이 빠지고 다시는 기력이 살아나질 않았다. 그것은 절망이었고 어떤 희망도 그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녀가 은밀히 자신을 범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부끄러운 일말의 기대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님을 알아채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서둘러 휠체어를 밀어 주방으로 가서 찬물을 마셨다.
-컥컥
사래 들려 기침을 하다 컵을 떨어뜨렸다. 바지가 젖어버렸다. 회색 운동복이었다. 허리 고무줄이 늘어나 입고 벗기가 편한 바지였다. 그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없는 듯 있었다.
-저기요.
그가 불렀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봉사자면 봉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녀는 여전히 느린 동작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그를 바라봤다.
-옷이 젖었군요.
한참 무엇인가 골똘히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다 젖은 옷을 갈아입혀줘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기다리다 못한 그가 휠체어를 밀고 주방을 나왔다. 28평 아파트였고 방 두 개, 주방과 남향으로 난 거실이 있었다. 문턱 때문에 휠체어가 방으로 드나들기 어려워 길거 두터운 카펫을 문턱에 걸쳐놓아 임시로 드나들 수 있게 해놓았다. 그녀가 그의 휠체어를 잡았다. 그리고 옷장이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의 지시에 따라 서랍에서 검은 운동복을 꺼냈다. 바스락거리는 얇은 원단이었다.
-지금 입기엔 추울 것 같은데요.
-집안에선 괜찮아요. 그리고 그것밖에 없어요.
남자는 안방의 침대로 데려달라고 했다. 거기에 누워서 혼자 갈아입을 수 있다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 오래 걸렸다. 눕는 것도, 갈아입는 것도.
그가 그녀를 불렀다. 침대에 누운 채로. 휠체어에 앉는 걸 돕기 위해 그의 겨드랑이에 그녀가 팔을 넣었다. 땀 냄새가 났다.
-씻어야겠네요.
-내일요. 그리고 그쪽도 뭘 좀 먹어야지요. 마시든가요. 여기 온 후로 먹은 것도 마시는 것도 하나 없었잖아요. 혹시 로봇이세요?
그는 웃었다. 스스로의 유머감각에 감탄했다. 그러나 여자는 웃지 않았다. 다만 진지하게 대답했다.
-로봇이면 좋겠네요. 먹지 않아도 되고.
싸늘한 분위기가 둘을 감쌌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와 아몬드우유, 그리고 맥주가 있었다. 먹다 남은 오래된 치킨과 말라비틀어진 피자가 있었다. 김치와 깍두기가 있었다. 김치 통에 ‘정숙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복지사가 가져다 놓은 것이리라. 냉동실에는 고기와 통밀식빵, 초코아이스크림과 딸기아이스크림이 있었다. 식탁위에는 오트밀과 콘푸라이트 라이트슈거가 통째 올려져있었다. 그녀는 떨어졌던 물 컵을 정리하고 물을 한잔 마셨다. 그리고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또다시 인형처럼 앉아있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배달음식 먹을래요?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골똘히 생각하는 듯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게 그렇게 고민할 일인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좀 이상한 여자임엔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녀가 이곳에 왔는지, 어째서 봉사를 하지도 않는지, 질문에는 대답을 제대로 하지도 않는지.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저기요. 제가 죽든 살든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집에 가보세요.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렇게 말해버렸다. 그녀가 마음에 상처를 입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심정이었다.
그녀는 텅 빈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곧 어둠이 둘을 감쌌다. 맞은 편 아파트 불빛이 드문드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돌아갈 집이 있어 행복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집으로 가기 싫지만 어디 갈 곳이 없어 무거운 발걸음으로 귀가하기도 할 것이다. 아파트 방송이 켜졌다.
-아아, 경비실에서 알려드립니다. 경비실에서 알려드립니다. 코로나 시국에 어려움이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분리수거를 철저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폭발적으로 재활용 쓰레기가 엄청시리 늘어나고 있습니다. 분리수거에 만전을 기해주시기를 한 번 더 당부 말씀드립니다.
그는 주방으로 향했다. 커다란 그릇을 꺼내 우유를 붓고 콘푸라이트를 부어 먹었다. 저 깊은 마음 한구석에서 그의 마음이 소리쳤다. 죽는다더니 잘도 처먹네. 이쪽의 다른 마음이 대답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말도 못 들어봤냐.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있는 동안은 먹어야지. 주거니 받거니 혼자의 대화가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졌다. 초저녁이지만 한밤 중 같은 분위기였다. 사방이 조용했다. 코로나 시국의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