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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초기에 조심성 있는 발전을 하게 된 기초적 이유
I. 어떤 명백하게 주저하게 된 기초적인 이유들
1. 완고한 사람들: 강한 개성들
이 지점에서 이유를 찾기까지 충분히 오래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여러 해 동안의 배경을 되돌아 본 후에-처음에 신조의 어떤 영역에서 왜 견해 차이가 계속되었는가, 우리 신앙의 어떤 특성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상당히 오래 걸렸다. 왜 이점들에 대해 그때에는 속히 결단을 내리지 못했는가? 왜, 예컨대 조직, 교파의 이름, 신앙의 선포(고백)등을 주저(지체)했는가? 그리고 특히 왜 초기에는 그렇게 구원의 원칙들, 준비들 (구원의) 신성의 개체들에 관하여 서로 다른 견해들이 지속되었는가? 그 문제에 빛을 던져주는 이유 혹은 여러 이유들이 있다. 그대 환경을 돌이켜 보고 그 기초적인 이유들을 찾아내자.
그 중에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기초를 놓은 조상들이 강한 개성을 가진 개인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저들은 먼저(첫째) 저들의 모 교회를 끊어버리고 Millerite 운동에 가담했고 다음에 거의 세계적인 대 실망 후에 오해와 조소를 견디고 우리 교회의 계속되는 운동에 가담했던 것이다. 저들은 여러 다른 견해를 가진 여러 교회에서 나왔다. 각자가 자기 자신의 견해와 확신(신념)이 있고 다른이에게 굴복할 만한 성질을 갖지 않았다. 저들은 거대한 논쟁적 견해 중에서 저들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를만한 타파된 신학적인 일이 없었다. 저들은 저들의 길을 찾아야 했고 실제로 여러 해-때로는 수십년-(어떤 점에서 합의(만장일치)되기까지에는-)이 걸렸다. 이것이 모든 환경의 빛에 보면 이해될만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신념에 대한 기본적인 존경과 자유가 있었다. 1888년의 위기를 통과한 사람에 의하면 (배경을 잘 아는) 수년간 영원한 진리들에 관한 다른 견해들은 다른 사상을 추방하지 않고 각자 자유에 맡겼다. 그것이 많은 것을 해명하는 관대한 태도와 기질이다.
2. Millerite는 교회를 세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1844년 전에는 기본적인 사실이 있었다. 밀러주의자들은 새 교회를 조직할 의향이 결코 없었다. 시간이 너무 짧아 보였으며 새로운 조직을 위한 그럴듯한 필요성이 없었다. 저들은 주님께서 오심과 매우 속히 오심을 믿었다. 저들의 이전 교회에서(교파) 쫓겨난 Millerite는 (1844년 가을에)-50,000-100,000 강력한- 어떤 조직된 질서에 의하지 않고 단순하고 평범한 소망의 줄로 함께 뭉쳤다.
그런 환경-그렇습니다. 매우 필연적인-에서 저들이 저들에게 부당하게 대했던 것과 같은 여하한 교회 조직 형태에 대해서도 깊이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실망 후에 재림신도들의 주류(主流) 단체(안식일, 성소, 예언의 선물 부인하는 자들)는 여러 다른 교훈과 맞지 않는 지도자들에 의하여 갈라지기 시작했다. 독립과 불화는 혼돈을 증가시켰다.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여러 갈래의 반역적인 무리가 발전되었다. 1844년 이후의 Millerite는 무질서한 광경을 보여주었다.
3. 기성교회에서의 추방은 반동을 일으킴
우리 교회 지도적인 조상들이 중대한 역할을 한 짧고 강력한 때때로 밀러운동의 열광적 시대 동안에 많은 사람들은 1844년에 임박한 재림과 심판의 기별을 고백한다는 이유로 기성 교회들에서 강제로 추방당했다. 엄격한 신조를 가진 교회들로부터 추방될 때 저들이 새로 발견한 신앙에 대해서 성경으로 답변할 기회도 주지 않고 변명할 기회도 때때로 주지 않았다. 이런 독재적인 허리는 그런 교회 조직에 대하여 강력한 반발을 일으켜 모든 조직체의 주관을 축출하게 되었다. 그런 전제적인 처리는 모두 교회(교권적) 전제정치로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조직은 저들이 쫒겨나온 ‘바벨론’에 한 부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저들은 다른 교회를 조직하는 것이나 어떤 제한하는 신조 혹은 특별한 신앙의 고백하는 말까지도 본능적으로 반대하게 되었다.
4. 공통적인 소망에 의하여 함께 뭉침
Millerite운동을 돌이켜보면 저들은 강력하고 유효한 ‘사랑의 줄’과 공통적인 소망과 기대로 함께 뭉쳐졌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대 실망 후 10년간은 그 같은 자유로운 관계가 Millerite운동에 가담했던 모든 이들 중에서 단체적으로 크게 우세했다. 이 단체는 조직된 교회가 아니라 한 친교였다.(본질적으로)
우리 교회의 최초의 사상은 ‘진리의 신조와 그리스도인 사랑’으로 일반화 되었다. 남들이 칭찬하듯이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우리 교회의 첫 10년은 오히려 무질서(혼돈)하였고 여러가지 점에서 상당한 혼돈으로 특징되었다. 이리하여 조직에 대한 반대는 조직은 ‘Babylon’ 형성의 요인이 된다는 Millerite의 주장에서 생겨났다(R & H, 10. 9-23. 1860). 어떤 이들은 국법하에 법인 조직을 하는 것은 ‘사도적인 규약’에서 이탈하게 되고 실제로 교회와 국가의 연합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이 두려움을 저들은 거침없이 표현했다.
Ⅱ. 어떠한 신조의 말뚝 안으로 몰아 넣는 것을 거부함
1. 여하한 저지하는 규정을 두려워함
진리는 자연적으로 정지해 있지 않고 발전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성경 진리는 끊임없는 연구와 신령하신 지도를 통해서 계속 공개되지 않으면 안 됨을 명백히 인식했다. 이점에서 저들은 옳았다. 저들은 어떠한 저지하는, 무효로 하는 신조나 엄격한 형식을 두려워했다. 저들은 어떠한 경계선을 만드는 말뚝이 되는 어떤 신조도 만들지 말자고 결정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고 더 이상 가지 말라고 말하듯이 저들 주위에 있는 신조로 얽어 매인 교회들의 비극적인 상태는 오류와 무익함의 분이 되었다.
그리고 저들은 어떤 기초적인 중요한 점에 관하여 아직 일치되지 못했다. 신성의 각위(各位)와 관계 등이 포함되는 영원한 복음의 어떤 특징(중요한 점)에 관해서 처럼 세째 기별의 ‘상세한 면’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이 일들에 관해서 느낌과 확신(추측)은 깊어갔다. 그러나 저들은 이점들에 관해서까지도 저들은 피차 상대편을 강제하지 않아야 한다고 느꼈다.- 배경들이 다르기 때문에 피차 상대편의 견해들과 확신에 대한 피차의 사랑이 우세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그런 문제들은 미결중에 있게 되었다. 성취해야 할 것은 많았다. 그리고 많은 점에 일치되었으며 저들은 이점들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의견이 다른 문제들은 나중에 생각한 후에 적당한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 논제들은 미래를 위해 있었다.
2. 첫 10년간에 자유스런 관리
우리의 지도적인 목사들은 저들이 Millerite운동에 가담할 때 저들이 쫓겨 나온 교회들에서 이미 안수를 받았다. 예컨대 James White과 Joseph Bates는 크리스챤 Cornection(종파)의 목사였다. Frederick Wheeler는 감리교 감독교회에서 안수 받았고 John Byington은 감리교에서 받았다. A. S. Hutohuis는 자유침례교 목사였고 J. G. Matteson은 침례교 목사, Roswell F. Cottrell은 제칠일 침례교 목사였다. 그리고 우리가 교파 이름을 들만한 재료가 없는 다른 이들도 있었다. Millerite 안식일 지키는 목사들의 종교적인 모습은 Ⅷ장에서 나올 것이다.
우리 교회 초기에는 규칙적인 교회의 기록-교인들의 명단까지도 없다.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저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인정되었다. 처음에는 교회 직원을 규칙적으로 선택도 하지 않고 목사 안수식도 없고 경제적인 조직체도, 재산 유지 기관도 없었다. 관리는 초보적이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어떤 분야에서 발전을 방해했지만 그 때에는 충분했다.
3. 목사 증명서와 체계적인 지원
오래 전에 이것은 혼돈을 증가시키고 부조리가 증가되었다.
조직의 첫 단계는 1850년에 E. G. White의 계시 후에 1851년 New Hampshire, Washigton에서 있었다. 복음의 목사로서 하나님의 부르심 받은 증거로서 신앙의 공중 교사인 것을 증명하는 어떤 신임서를 발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1853년에 시작되어 사기꾼을 막았다. 그런 신임서는 두 지도적인 목사-보통 James White과 Joseph Bates 외 세명이 있었다.
집사들과 지방 교회 장로들은 1853년에 Massachasetts주 Fairhaven에 있는 Bates의 교회에서 선정했다. 정식으로 인정받은 복음사역자들을 위한 적당한 부양은 1854년에 발전되었다. 그 다음에 광범위한 공중전도가 이행될 때 목사들은 전적인 봉사를 할 수 있게 되고 많은 자들이 전에 할 수 없이 하던 것 같은 외부 고용으로 자양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1858년경에 J. N. Andrews의 지도 하에 한 연구단이 ‘십일조 원칙에 의한 조직적 자선’라고 부르는 한 계획을 고안했다. 이것은 1859년에 Battle Creek 교회에서 채택했다. 그러나 이 단순한 발전도 투쟁 없이 된 것은 아니다.
Ⅲ. Millerite 사상에서 온 유산이 장애물이 되었다
1. 강력한 지도력이 먼저 group을 함께 모음
처음에 안식일 지키는 재림신도들을 함께 연합시킨 것은 James White과 Joseph Bates의 강력한 지도력과 Ellen White의 권면이었다. 그러나 1850년대에 신자수의 급격한 증가는 교회 명칭과 법인체 조직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것은 재산 유지의 합법적 문제와 목사의 선택지도, 부양 광신자들을 주관함에 독단과 분파에서 보호하는 것들을 포함한다.
White과 다른 이들은 복음 질서와 완전한 연합을 고취하고 지방 교회 지도자들을 선택하고 문제 일으키는 자들을 출교시키자고 주장했다(R & H, 1851. 11. 25). 그는 자격을 갖춘 목사의 권위와 연합을 위한 안수를 주장했다(R & H, 1853. 12. 6). Ellen White은 이와 같이 1854년에 복음진리를 위한 탄원을 했다(EW 97-101).
2. 단순한 초대 교회의 언약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847년대 James White이 선언하기를 “성경은 완전하다. 완전한 계시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례이다”(A Word to the Little Flock, p. 13). 그리고 1849년에 Presen Truth에 그가 재 강조하기를 “성경은 우리의 도표-우리 안내서이다. 그것은 우리의 유일의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다. 면밀히 추종해야 한다(1849. 12). 그러므로 1861년에 교회를 조직한자들이 창립 서약에 싸인 했는데 아래와 같이 단순하다.
“제칠일 재림교인들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기로 언약한다(R & H, 1861. 10. 8). 이 배경은 후에 제시하겠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조직적인 발전은 매우 서서히 되었다.
3. 건강기별을 받아들임도 매우 서서히
예로 건강기별을 들어보자. 1844-1854년까지 10년은 형성기이다. 1848년에 White부인은 담배, 차, 커피의 해로운 영향에 관심을 기울였다(CDF 495, 496 보라). 그러나 차, 커피, 담배의 해로움을 일반적으로 인식함은 점진적이었다. 돼지고기 사용은 아직도 어떤 이들은 계속했다. 1850년에 James White이 그런 일을 신속히 해결하라고 주의했다(현대 진리, 1850, 1850. 11월).
1858년에 White 부인은 그 당시 그 문제에 연합하자고 권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가능한 한 속히 진리를 알고 행하도록 인도하신다고 주장하셨다. 그러나 그녀는 ‘천사들보다 앞서 달려가지 말라’고 흥미있는 권면을 했다(1T 206, 207). 사실로 1863년 전에는 기본적 건강기별을 주시지 않았다.- 6월 6일 otsego, Michigan에서 계시- 확실히 우리 백성들은 이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전진할 준비가 그 전에는 되지 않았다. 다른 문제들의 앞서 있어야 했다.
Bates는 건강 강조에 선구자였다. 1855년에 James White과 1856년에 J. N. Andrews가 각각 그 문제를 취급했다. 또 J. H. Waggoner도 그 다음에 육적 건강이 영적 건강에 미치는 관계에 관한 명백한 빛이 왔다(E. G. White, 1863. 4. 편지 D. E. Robinson 저 Our Health Message pp. 56-69). 이것은 1864년과 1865년에 발전하였다. 이 분야에 있어서 빛의 명령과 확증은 점진적이었다. 1860년대 중반까지는 건강개혁이 일체화되지 못했다.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것은 밀러 운동 때 동안에 그 계열 말에서 일지라도 거론되었다.
Ⅳ. 신조 문제에 관한 힘든 문제들
10월 22일의 쓴 실망 후에 저들은 오는 매우 속히-아마 몇 개월 혹은 늦어도 몇 년(2-3년)후에 오실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1850년대가 되면서 어떤 종류의 조직의 필요불가결한 필요성이 점차 명백해졌다. 이것은-60년대에- 먼저 출판사업을 조직하게 되고 그 다음에 교파 이름을 정하고 그 후에 지방 교회를 조직하고 그 후 주 대회 조직- 그리고 최후로 대총회를 조직했다.(1863년)
1. 성경의 최상권과 신조 논쟁
지방교회의 조직의 절차를 취함에 따라서 기록된 신조의 문제가 점차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단순한 조직이 형성됨에 따라서 신자들이 고백할 수 있는 어떤 기본적인 것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저들은 결정하기를 안식일 지키는 재림신도들은 대부분 쫒겨났던 개신교회의 오류를 번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 다른 교회들은 저들의 신조의 말뚝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그 때를 위한 더 밝은 빛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예컨대 재림의 임박성과 관련된 점들-그런 교회들은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저들의 기존 신조에 어긋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곳(신조)에는 1844년의 예언상 남자,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과 세계의 파멸적 종말이 있을 곳이 없었다.
2. 1861년에 단순한 보편적 계약 조항
이미 언급한 배경을 주목하라. 1861년 10월에 의자(의장)에 앉아 있는 Bates에게 집회시에 그 문제가 제기되었다. Review and Herald 10월 8일자의 보고에 “처음에 제시된 문제는 교회의 조직 이었다”고 했다. James White은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 대회는 아래의 교회 언약을 추천하기로 결의했다.
“우리(사인한 자들)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지키기로 서약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로서 여기에서 우리 스스로를 결성 한다”(R & H, 10. 8. 1861. p. 148).
동의가 제창된 동안 전체가 투표하지는 않았다. White은 더 이상의 토의 없이 이것을 결의하는 것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모호한 태도보다 더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그는 재고하기를 제의했다. 환경이 그를 그 문제로 검토하도록 한고로, 그는 어떤 명확한 확신을 발전시켰다.
3. 신조는 전진하는 길을 막는다
여기에 성서와 ‘선물(은사)’와의 관련성에 대한 성경 진리에 대한 James White의 말이 있다.
엡 4:11-13에 보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주셨다고 했다. 여기에 우리는 교회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 나는 신자들이 그 은사와 직접 반대된다는 근거를 찾는다.” 한 예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 점과 저런 점에 꼭 그대로 믿는다는 한 신조를 만든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에 관한 참고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사들도 역시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 그 은사를 통하여 우리 신조와 일치되지 않는 어떤 새 빛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면 만일 우리가 그 선물에 참되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즉시 우리 신조를 전반적으로 친다. 신조를 만드는 것은 말뚝을 박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미래의 발전의 길을 막는다. 하나님께서는 크고도 선하신 목적을 위하여 교회에 선물을 주신다. 그러나 교회를 지도하는 자들이 전능자가 개입하실 길을 막아버린다. 저들은 주께서는 신조에 표시된 것 이상을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시지 말아야 한다고 사실상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조와 은사는 (이런 이유로) 피차 직접 상반된다. 한 백성으로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성경이 우리의 신조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신조의 형태에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성경과 성령의 은사를 취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리는 신조형성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고 있는 모든 것에서 Babylon형성을 향해서는 한 계단도 취하지 않는다(R & H, 1861. 10. 8 p. 148 1SM 416을 보라). 그것은 수정같이 명백하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조이다. 우리는 인위적인 신조가 없다. 그리고 고백신조형성에 반대한다. 이것이 1861년의 White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좀더 토론하면 제안된 단순한 교회 언약에 서약하는 것은 신조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대회에서는 그 결의안을 받기로 만장일치로 투표했다.
V. 교회에서 대회→대총회로
1. 합법적인 조직 형성이 긴요함
적당하고 질서 있는 방법으로 발전하는 교회의 문제들을 처리함은 건물과 재산을 위한 모종의 합법적인 조직이 요구된다. 그런 움직임에 관하여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떤 이들은 여하한 조직을 형성함도 Babylon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사숙고를 위하여 제안과 반대 의견을 모두 Review에 실었다. 1860년 가을에 Review and Herald 출판소- 그 다음에 우리 교회 지도적 기관-가 맨 처음 합법적인 기관이 되었다. 5명의 위원이 그런 법인단체를 구성하는 데에 서명했다.
2. 이와 같이 교파의 이름은 필요 불가결이었다
이것은 이 기관이 봉사하는 그 교파의 이름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명칭-이미 여러 단체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이 제의되었다. 또 어떤 이는 적은 무리, 남은 백성, 안식일 준수자들 등이 제의됨. 그러나 제칠일 재림교회라는 명칭이 맘에 들어 채택되었다. 그리고 그 채택은 White부인의 증언으로 승인되었다(1T 223). 따라서 제칠일 재림교회 출판협회가 1861년 5. 13일에 조직되었다. 그것은 큰 단계였다.
3. E. G. White은 조직에 관한 권면
1851년과 1855년에 White부인은 조직에 관해 기록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달려가서 간과되고 등한시되어 왔던 복음 질서를 확립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를 신앙으로 연합시키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필요하다(그리스도인 경험과 견해들 에 대한 부록, pp. 18-19). “신자들 중에 만연된 독립정신(개인주의)이 너무 많이 있다. 이것은 제거되야 하고 하나님의 종들은 함께 뭉쳐야 한다. ? 연합하라. 연합하라”(1T 113, 114).
하나님께서는 한 백성을 인도하고 계신 데 여기저기에서 이것저것을 믿는 소수를 따로 따로 된 소수가 아닌 백성을 인도하신다(상동 207). 질서가 꼭 있어야 한다. 질서를 유지함에 있어서 단체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틈 탈것이다(상도 210, EW p. 97을 보라). 이 예리한 권면은 비중이 크다.
4. 지방 교회 조직은 1859년에 발효되다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 했다. 약정과 계획에 관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목회자들의 감독이 있어야 한다. 1859년에 James White은 7월 21일자 Review지에 “각 주에 있는 교회들은 다음 해를 위하여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연례 회의를 가져야 한다고 제의했다. 그것은 찬성을 받았다. 1860년부터 시작되어 충분한 신자수가 있는 곳에서는 그런 회집을 개최했다. 이리하여 이 권면을 위한 비공식 회집들이 규칙적으로 대표자들과 지도자들을 선정하는 단체로 조직되었다. 조수는 바뀌었다.
5. Michigan Conference(대회)가 1861년에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들은 적당히 조직되었다. 1861년에 지방교회들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하여 Battle Creek에서 대회가 모였을 때 효과적인 대회조직을 위한 White 부인의 호소가 있었다. 그 대회에서 Michigan에 있는 교회들은 다음 해 10월에 협의회를 위한 날짜를 정하고 배대회로서 조직하자고 제의했다. 교회 대표자들이 공식적으로 대회로 모일 수 있을 때까지 의장, 서기, 대회 행정위원이 피선되었다(R & H, 1861. 10. 15). 그리하여 Michigan 대표 위원이 1862. 10. 4에 회집하여 의장, 서기, 3개의 자문위원을 선정했다. 17개의 조직된 교회가 그 대회에서 받아들여졌고 저들의 수효는 투표로 받았다. 목사들을 위한 주급은 시간과 경비를 보고토록 하고 정식으로 개시되었다(R & H, 10. 4. 1862. p. 157).
6. 대총회는 1863년에 형성되었다
지방 대회들로부터-‘대회 conference’란 감리교 방법에 따라서 ‘협의하다’(confer)는 뜻이다.-대총회는 한 계단에 불과하며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 단계는 1863년 5월 20-23일에 Battle Creek에서 정식으로 피선된 대표자들과 위원들로 취해졌다. 헌법 기구가 채택되고 사무실 직원이 피선되었다. James White은 1881년 1. 4일자 Review지에 그가 죽기 몇달전에 회고록을 썼다. 그것은 ‘행동의 연합’을 확보하고 ‘사기꾼에서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신약시대 교회의 단순성 위에 기초된 것이었다.
7. 조화, 형제, 조직
백성은 인식된 필요를 발전시켜야 하는 성공적인 조직을 형성할 수 있기 전에 조화가 있어야 된다. 신앙의 일치에 달할 수 있기 전에 먼저 형제애가 있어야 된다. 그 다음에 조직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일어난 것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조직을 형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다만 신자들이 연합하여 협력하며 전진하도록 하기 위한 준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불안정한 상태에서 Ellen White은 요점 있는 권면을 받았다. 우리는 어떤 일반적 교회 조직도 교회적 권위도 없다. 예언의 신이 참으로 최고의 훈계하는 기구였다.- 신실한 자들을 고무하고 호소의 최후 법정이 되었다(Spalding 저 “근원과 역사 1권 p. 293). 여기에서 우리는 그 선물의 작용에 있어서 또 다른 면모를 본다. 한편 어떤 것들은 미결 중에 두었다.
Ⅵ. 진리의 인식에 있어서 시간과 인과적인 연쇄
1. 진리의 인식을 위해 시간이 요한다
강조해야 할 것은 진리의 인식에는 시간이 요한다는 것이다.- 특히 다른 사상(견해)들이 있었던 어떤 기본 진리들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다른 것들은 빨리 인식되고 신속히 채택된다. 세째 천사의 구조적 진리들 혹은 명백한 특수 진리들- 안식일, 성소, 예언의 신, 조건적 불멸설, 기타 -속히 그 대략 개관을 알 수 있고 첫 10년간에 즉시 확립되었다. 다른 진리들은 점진적으로 인식하고 서서히 받아들여졌다. 그 중 어떤 것들은 비교적 적은 문제요 어떤 것들은 매우 큰 문제들이다.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우리가 교파의 명칭을 채택하고 대회 조직을 구성하는 데 거의 20년이 걸렸다. 배경이 되는 경험들과 견해들 그리고 일정한 두려움과 선입관념 등은 모든 자들의 태도에 있었고 극복해야 했다. 이것들은 물론 다만 조직상의 정책과 절차요 주요한 신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 긴요한 것은 형제들이 함께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시간이 요했다.
2. 부정한 음식과 적은 문제들
언급한 바와 같이 부정한 음식- 특히 돼지고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다만 점차적으로 취해졌다. 거의 20년이 지난 1860년대가 되기까지는 우리 선조들은 이 점에 있어서 일치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개개인이 실천할 문제로 여겨지고 구원하는 믿음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 다음에 매일, 북방 왕 같은 해석상의 문제에 우리는 보통 각자 자유로(임의대로) 하도록 개인이 결정토록 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적은 문제들이다. ‘기본적 신조’에 속하지도 않고 구원의 예비(필수) 조건도 아니다.
3. 1888년의 논쟁이 있기 전에 40년이 흘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우리에게 참으로 중대한 논쟁점이 되기까지는 1844-1888년까지 44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의 지연은 의미심장하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항상 어떤이들이 경험했고 대부분이 이론상으로는 안다고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Mineapolis(총회)시 까지는 맨 첫자리에 오지 않았고 ‘신성의 모든 충만함’을 가지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변화시키는 구속의 기초로서 거론되지 않았다.
그리고 1888년에 강력히 제시되었을 때에도 그것은 다수결 혹은 전체로 채택되지 못했다. 그것은 널리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단지 점차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모든 세대(6000년)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원칙이요 준비이다.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 작용에 있어서 영원한 복음이다.
4. 속죄의 두 국면에 대한 혼돈
속죄의 두 국면-십자가에서의 행위와 하늘에서 속죄의 은혜와 준비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적용-의 충분한 이해와 관련성의 균형 등도 역시 13세기 중반이 되기까지는 이해되지 못하고 채택되지 못했다. 그때에도 10년간은 주저, 토론, 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준비는 재림신앙의 기본적인 것중- 지게표, 기초들, 기둥들 기타 하나로 포함되었다. 이 명백한 진리의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게 지체된 것은 우리가 오늘날 명백히 이해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늘날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한 견해의 조정은 그 당시에는 많은 이들에게 고통스럽게도 어려운 것이었다. 다시 시간이 요했고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인간적인 전도의 더딤이다.
5. 최고의 계시인 영원한 진리들
그 당시 어떤 영원한 구원의 진리들-구속의 놀라운 계획을 구상하시고 승리로 이끄시는 최고의 존재들(삼위일체 역자) = 인격자들, 지성적 존재들에 중심된 -느리게 밖에 인식되지 못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교회의 배경과 비상사태를 생각하고 그것에 관한 분리된 견해들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우리의 최초의 가조 세째 기별의 구조적 특수 교리들에 최초로 강조하고 모든 다른 도움이 되는 사실들을 생각할 때 이것은 많은 시간이 요한다. 이 분야-이상하게 충분히-는 우리 교회 전역사에서 하나 되기 위해서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영원한 복음의 영원한 진리들은 확실히 모든 시대를 위하여 신령한 진리의 계시와 강조면에서 최고(절정)를 이룬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한 백성을 최종적으로 준비시키는 이 마지막 시대에 있어서 최고로 중요하다. 이것들은 모든 인류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의 선포의 절정이요 완성이다.- 예언된 구원하는 ‘예수의 믿음’의 완성이다. 이것들은 맨 앞에 와야 한다.
6. 구속의 최상의 준비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그 모든 것의 핵심이 있다.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각각 열렬하게 효과적으로 활동하시는 신성의 삼위의 개체가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재를 중심하여 성령의 완성시키는 역사와 늦은비와 큰 외침에서 나타날 성령의 최고의 역할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동시에 인류의 시련 시기가 끝났을 때 마지막 칠재앙을 통과하도록 한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교정할 수 없는 악인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때 중보자 없이 구원받은 자들이 서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확실히 최고로 중대하다. 그러나 구원의 이 최고의 준비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때에 가장 긴 시간이 걸렸다.
인격적, 경험적 기독교 신앙은 단지 지적 이해와 이지적 승인만 요한느 이론적 진리들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가장 미묘하고, 체험적이며, 중요(생명적)하고 구원하는 믿음의 모든 준비 중에서 가장 영광스런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둘러쌓여 있는 것이다. 참으로 ‘예수의 믿음’은 최고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의 충분한 인식과 더 깊은 의미에 있어서 관련된 시간적 연속성은 인식하고 이해하는 시간에 따라서 연속성에 질서(순서)대로 되었다 (하나님의 계명은 쉽게 이해되고 그 후 예수의 믿음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7. 예정된 강제를 위한 특별한 시간
전지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기볹덕 진리들의 특별한 강조를 위한 특별한 시간이 분명히 있다. 1844년은 다른 교회와 다른 특수 교리들과 함께 하나님의 계명을 공개적으로 인식하도록 소개했고 일정한 개혁을 요구했다. 이것은 방법에 있어서 부정적이었다. -너희는 하지 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고 끊어 버림을 당하리라는 것 같은 것이었다.
1888년 이후에는 예수의 믿음을 좀더 충분히 중심하는 구원하는 진리에 관한 하나님의 완성시키는 선포를 위해 최후로 정해진 시간으로 특징된다. 이것은 잃어버린 사람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준비의 절정이다. 그것은 특별히 적극적이다. -그리스도의 흠 없는 의의 옷을 입으면 최고로 거룩하신 분 앞에서 너희가 영원히 살리라는 것이다.
‘신성의 모든 충만함을 가지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말 중에서 충분히 모두 이해된다.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으로서 믿는 것, 그것은 영원한 복음의 절정을 이룬다. 그것은 각 시대를 통해서 너무 자주 간과되어 왔고 지금 이제 완전히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Ⅶ. 위로 향한 길을 회고하는 살핌(성찰)
1. 좀더 빛이 들어오도록 길을 열어 두라
우리 선구자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 앞으로 인도하시도록 길을 열어 놓으려고 애썼다.-때때로 새로운 계시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예언의 신의 선물에 의하여 도움을 받고 확증을 받아서 이것은 교회를 자유케 놓아두었다. -그리고 그 본분대로-계속 연구하여 저들에게 명백하게 될 경우에는 발전하는 빛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실제 생활에 응용된 종교의 자유의 원칙도 역시 존중했다. 어떤이들에게는 저들이 받아들인 종교적 무리의 조상의 배경과 성경 해석으로부터 유래된 매우 귀한 점들(사랑스런)이 있었다. 저들이 속한 교리적 신조중의 가납된 기본 원칙 위에 저들이 서있고 연합되어 있는 동안에 저들 개인적인 견해와 확신을 견지할 자유가 있어야 함은 자명한 일이다(R & H, 1855. 12. 4 p. 80). 이것들을 드문 일이나 기본적인 것이다.
2. 교리적 성장의 고통의 시기(해산 고통)
우리가 지금 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치는 더 중한 빛으로 오늘날 평가해 볼 때 우리는 어떤이들이 취한 제한된-그리고 실제로 잘못된- 그 영향이 항상 도움이 되지 못한 어떤 견해를 본다(CW 75, 82). 우리는 교리적 성장의 고통의 시기를 통과했다(진통기). 그러나 선구자들은 세 천사의 기별 선포의 기본적 대상과 저들이 주님의 오심을 촉진시키는 일에 연합되었다.
제칠일 안식일은 저들이 강조한 중추(pivotal)였다. 저들은 일반적으로 속죄의 사업에서 최고봉인 그리스도를 보았다(알았다). 저들은 주님의 재림을 갈망했다. 다른 곤란한 일들은 미결 중에 두었다. 그 태도는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의견(견해)이 다른 견해에 대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을 인격 면에서 헌신을 원하여 저들의 제한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아래에 있는 통로가 된 사실을 인하여 존경한다. 저들은 진리의 기본적인 ‘광맥’을 파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역경에서 두려움 없이 결정적으로 전진했고 그 당시 저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 때를 위한 ‘기별’을 선포했다. 우리는 저들이 남겨둔 것을 이행한다. 더 많이 훨씬 더 많이 우리가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잘못이 있는 사람들을 사용해 오셨다. 저들의 제한성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사용하셨다.
3. 진리의 점진적인 이해
이렇게 우리의 기초를 놓은 선조들은 진리를 인식함에는 명확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신조에 관한 토론에서 이점은 훌륭했다. 저들은 진리의 인식과 최종적인 채택에 있어서 전진을 위한 길을 열어 놓았다. 저들은 이것이 긴요함을 느꼈다. 어떤 중요한 일에 의견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그것은 비교적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로 일치하고-저들이 깨달은 대로 저들 위에 놓여진 큰 임무를 어깨를 같이 하여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여러가지 다른 개인적인 견해를 정기간행물과 어떤 책에 어떤 논제를 통해서 쓴다는 것은 자연스럽고-인간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저들은 오늘날 완전한 방벽이 되지는 못한다. 초기의 R & H의 난에는 정책적으로 다른 견해들을 표현하도록 공개되었다.-공개토론 순서에 따라 그 때는 형성시기였고 그 사실은 그 당시에는 받아들일만한 일이 없다.
4. 최종적인 입장에 영향을 끼침
그렇지만 이 모든 것과 동시에 Ellen White의 pen으로부터 그녀에게 계시된 진리를 충실히 제시한 기별들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벌써 다른 이들이 말씀에서 파낸 주요 원칙들의 양상에서 본 것이요 훨씬 앞서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 기별들은 S.D.A가 받아들인 최후의 해석, 최종적 견해를 형성하는 영향을 끼쳤다. 많은 자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기별) 전의 그릇된 견해들을 교정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 선물의 복된 사명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빛 가운데에서 우리교회의 초기 수십년간에 있었던 우리 선조들이 취한 견해 차이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떤 낱말은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뜻으로 사용했고 다른 사람에게는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때로 의미론의 문체가 한 몫을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오늘날 믿고 가르치는 것과 다른 견해를 일단 취하여 표현한 사람들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취하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 교회 초기의 입장에 빛을 던져줄 어떤 배경이 되는 영향에 관하여 간단한 회고의 고찰을 취하기에 충분할 만큼 곁길로 가자. 이 일은 미래의 명백한 이해를 위하여 필요하다.
Ⅷ. 밀러주의 안식일 지키는 목사들의 종교적 배경
1. 밀러주의자들은 압도적으로 삼위일체론자들이었다
밀러 운동의 안수목사들의 종전의 압도적인 삼위일체론적 종교적 유대의 도표-거에서부터 우리 교파 선조가 나왔으니-는 아래와 같은 것을 계시한다(나타낸다). Prophetic Faith 4권에 제시된 것을 주의 깊이 연구해 본 William Miller는 침례교인이었고 그의 첫번째 두 신입회원 안수목사(Joseph Litch 와 Charles Fitch)는 감리교와 장로교-회중교인, 존경받는 모두 삼위일체론자였다. 교파적인 배경에 의하여 그룹을지어보면-지도적인 목사들은 일반적으로 계승된 순서대로-다음과 같다.
① 침례교인 목사(9)-Miller, 다음 Whiting, Cook, Broun, Galusha, Bernard, Robinson, Crosier, Winter(Miller의 개인 신앙 고백은 그가 믿는 것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신성에는 삼위(인격적)가 계시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PF 4권 p. 466을 보라)
② 감리교(11)-Litch, Stons, Robinson, Lindsey, Hale, Munger, Hutchinson, Cox, Smith, Stockman, (그리고 Ellen Harmon)
③ 장로교, 회중교회(2)-Fitch, Hawley
④ 회중교회(3)-Jones, Bliss, Snow
⑤ 크리스챤 교회(5)-Himes, Fleming, Bates, White, Cole
⑥ 감독교(1)-Ward
⑦ Methodist Protestant(1)-Jacobs
⑧ 자유의지 침례교(3)-French, Preble, Bowles
⑨ Protestant Episcopal(1)-Sabine
⑩ Christian(2)-Marsh, Cole
그 외에 화란 개혁교, 루터교, 제칠일 침례교 목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5며의 유명한 목사들이 있었다.-Southard, Barry, Skinner, Squires, Gross-이들의 종전의 교파의 유래는 emistian Connection이 아닌 것 외에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Deduction(추론, 연역법)-이 증거는 최소한 유명한 삼위일체론자 목사 38명이 있었고 5명의 유명한 Arian파 Christian Connestion목사들이 있었다.-7:1의 비율이요 이것은 압도적인 다수이다.
이것이 지도적인 밀러주의 목사들의 교리적인 배경으로서 빛을 주는 것이다. 우리 교회 기초를 놓은 조상들의 대다수가 역시 확실히 삼위일체론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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