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나두리를 할 수 있다"는 표현에서 **'네나두리'는 '시의 실재와 만나는 것' 또는 '사물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다소 비유적이거나 문학적인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 표현은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며, 특정 문맥, 특히 시(詩)와 관련된 글에서 사용된 용례가 확인됩니다.
의미:
한 블로그 게시물에 따르면, 일상의 고요함과 그늘의 힘을 이해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시의 실재와 '네나두리'를 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사물의 깊은 의미나 본질적인 측면과 접촉하거나 교감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어떤 깊은 이해나 깨달음을 통해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나두리'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표준어는 아닙니다. 다만, 문학 작품이나 특정 지역의 방언 등에서 **'너나들이'**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거나, 혹은 '네(너의)'와 '나(나의)'를 합친 표현으로 유추될 수 있습니다.
'너나들이'와의 연관성 추정: '너나들이'는 서로 '너', '나' 하고 부를 만큼 허물없이 친한 사이를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네나두리'도 이와 비슷한 어감을 가지고 있어, 매우 가까운 관계를 표현할 때 쓰이는 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학 작품에서의 용례: 과거 가사(歌辭) 문학 작품에서는 "네나 나"와 같이 '너'와 '나'를 지칭하는 표현이 사용된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화자(話者)와 청자(聽者)를 가깝게 묶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네나두리'는 공식적인 표준어는 아니지만, 문맥에 따라 '매우 친한 사이' 또는 '너와 나, 우리 둘이서' 정도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의미나 유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당 단어가 사용된 구체적인 문장이나 출처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밥 나이, 잠 나이 - 윤석산
지금까지 나는
내 몸뚱이나 달래며 살아왔다.
배가 고파 보채면
밥 집어넣고
졸립다고 꾸벅이면
잠이나 퍼 담으며
오 척 오 푼의 단구,
그 놈이 시키는 대로
안 들으면
이내 어떻게 될까보아
차곡차곡 밥 나이 잠 나이만
그렇게 쌓아 왔다.
시집 뒷표지에서 정진규 선생이 이렇게 썼다.
"윤석산을 새롭게 상면한다. 병후 그나 그의 시詩가 지니는 삶에 대한 고뇌의 침강沈降, 그 모서리가 적지 아니 마모되어 있음을 본다. 둥글다. 눈물이 난다. 어디나 부딪쳐도 윤석산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따뜻한 위무의 탄력을 전달받는다.
병이 참으로 호되었구나. 그 호됨을 딛고 일어선 자의 체념이 아닌 넉넉함이라 믿고 싶다. '밥 나이, 잠 나이', 그 일상 속에서 그저 들고났을 뿐임의 회한을 말하고 있지만, '서 있다 그냥 서 있다'고 겸허를 보이고 있지만 나는 안다.
그가 '성성적적星星寂寂'의 별 하늘 하늘 한 자락을 그의 성천性天에 드리우고 있는 그 '고요의 그늘'을 냄새 맡을 수 있다. 작위가 없다. 심심하기까지 하지만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번지고 있는 이 '고요의 그늘'이 지니는 힘은 쉽사리 체득體得된 것이 아니다.
이를 예부터 음예陰翳라 하여 큰 나무 그늘이라 하는데, 이 그늘을 알게 되고서야 시의 실재와 비로소 '네나두리'를 할 수 있다 하였다.
맨날 가슴 치고 얼굴 찡그리고 코털 뽑는 것만이 시의 긴장은 아닌 것이다. 구부리고 닫아걸고 색칠해서 만든 상징보다 훨씬 더 넓고 넉넉한 품새로 구석구석 제 모습 지니고 사는 삶의 긴장과 와해를 윤석산의 시들은 그렇게 짚어 가고 있다. '밥 나이, 잠 나이'가 공연한 나이가 아니다."
*음예라는 말...陰翳
시집을 다 읽고
저 음예라는 말에 닿고 보니
죽비가 정수리를 치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