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옷깃 여며 여며 질마재로 가옵신 님!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귀촉도’ 중에서
한평생 소년이기를 원했던 미당 서정주. 시 한 수로 만인을 울리고 웃게 했던 언어의 마술사 미당이 돌아올 수 없는 길, 머나먼 동천으로 떠났다.
오랫동안 병고로 시달렸던 미당 서정주 선생이 12월 24일 강남 삼성병원에서 85세의 나이로 별세한 것이다. 그의 아내 방옥숙 여사가 떠난 지 불과 2개월만에.미당은 한국 현대시의 역사 자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그리고 그의 그림자 속에 있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할 정도로 한국 시문학계의 거대한 산맥이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으로 등단한 후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며 시작활동에 천착했던 그는 첫 시집인 ‘화사집 ‘(1941) 이후 60여 년간 시집 15권, 약 10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한 편 한 편의 시가 모두 대표작으로 평가될 만큼 그의 시에는 감히 다른 시인이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생명력과 민족적 정서, 가락을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선보여 왔다. 이로 인해 그의 시들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고 노래로 만들어졌으며, 노벨 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추천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타계는 20세기 한국 현대시사의 한 장을 마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당과 불교
마지막 가는 길, 그의 손에는 염주가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굵은 알의 염주는 단순히 그의 종교가 불교라는 것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의 삶, 그의 시속에 녹아있는 미당의 세계가 불교를 향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당이 불교를 접한 것은 그의 고향이 선운사가 자리잡고 있는 고창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불교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석학 석전 박한영 스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다. 승려이기도 했던 그의 친구인 배미사(裵眉史)가 석전 스님에게 미당을 소개했고, 1933년 겨울 미당은 동대문 밖 개운사 대원암에서 머물며 석전 스님에게서 능엄경을 배우게 된다.
당시 석전 스님은 조계종 종정이자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이었다. 석전 스님과의 인연을 시로 그린 ‘석전 박한영 대종사의 곁에서’에서 미당은 스님의 선견지명과 중앙불교 전문학교에 가도록 권유한 것, 또 그로 인해 시를 계속 쓰게 될 수 있었다는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또 그의 자서전 《천지유정》에서는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이분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것과 춘원이 이분에게서 삭발한 것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권고를 받아들여 그곳에 한동안 머물렀다.”고 밝히고 있다.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한 미당은 다음 해인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벽’으로 등단하게 된다. 이후 해인사 원당암에서 생활하며 느낀 산사의 체험은 ‘귀촉도’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59년 그는 동국대 교수로 재직하며 70년대 초 불교문학가협회를 창립해 최초로 불교시만을 모은 《한국불교시선》(1973)과 《영혼을 사르는 헌화가》(1979)를 출판하는 등 불교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미당 시와 불교적 세계관
미당의 시는 수많은 문학평론가들이 이미 언급했듯이 가장 한국적이며 가장 서민적인 정서와 언어가 녹아있다. 그리고 미당의 그러한 시 세계에는 불국토를 지향했던 신라와 《삼국유사》의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미당이 《영혼을 사르는 헌화가》(불교문학가협회편, 1979)에서 밝히고 있듯 “인류사회가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불교의 육바라밀 정신이 제시하는 것 같은 완전한 정신의 영생의 길이다. 감각과 욕망과 지각을 통일해 통각을 만들어 원만하게 각성된 생의 매력과 법열(法悅)을 사람들에게 갖게 하는 일인데 이 일을 문장으로 탐색하기에는 불교의 문학표현 이상이 없을 것이고, 이 일을 위한 시문집의 출간은 인류정신사적 의의를 가진다.”고 밝힌바 있다. 즉 그는 시와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을 분리해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번 가선 소식 없던 그 어려운 주소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화사집》 ‘부활’),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서정주시선》, ‘춘향유문’), ‘이별하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동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물론 《신라초》 를 비롯한 수많은 문집과 다수 시에서 무(無)의 미학과 완성과 궁극에의 염원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흐르는 이런 불교적 세계관은 사실 오히려 불교적이기 위함이 아니라 《삼국유사》에서 반영되고 있는 한국인의 정신적 뿌리로 신라의 세계관을 생각한 것이고, 전통적인 정서와 어우러져 있기 때문으로도 해석된다. 우석대의 송하선 교수는 “《신라초》는 《삼국유사》에 나타나 있는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해명하는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세와 내세까지의 거리를 동질의 관념으로 처리한 것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진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한다. 동국대의 윤재웅 박사도 “그의 시에 내재된 공은 만물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과 영원에 대한 관심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고 강조했다.
시인은 시로 천년을 산다. 비록 그는 갔어도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켰던 주옥같은 그의 시들은 한민족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
공선림 기자
knw@beopbo.com
동 천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엇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미당의 연보
▲1915 전북 고창 출생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 입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壁)’ 당선, 시인부락(詩人部
落) 창간
▲1941년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
▲1946년 제2집 ‘귀촉도(歸蜀道)’
▲1954년 예술원 회원. 서라벌예대 교수
▲1959년 동국대 교수
▲1968년 제5집 ‘동천(冬天)’
▲1976년 제7집 ‘떠돌이의 시’
▲1977년 문인협회 이사장
▲1988년 제 12집 ‘팔할이 바람’
▲1993년 제 14집 ‘늙은 떠돌이의 시’
▲1994년 ‘미당 전집’(전 6권) 출간
▲1997년 15집 ‘80소년 떠돌이의 시’
▲예술원상(1966)대한민국문학상(1984)등 수상1941년 ‘화사집’을 시
작으로 1997년 ‘80소년 떠돌이의 시’까지 모두 15권. 미발표작까지
편수는 1000편이 넘는다.
내가 본 미당 “그는 詩仙이자 酒仙이었다”
녹원 스님(동국대 이사장)- “미당 선생님은 민족시인으로 국제적으로
도 공인받은 분이었는데 타계하셔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분의 주
옥같은 시는 민족 역사에 영원히 빛을 발할 것이고, 후예들의 표본이
될 것입니다. 불교에 대해 해박하셨고 불교를 통한 생활을 평생 실천
해 오셨습니다. 20여일 전 카톨릭 병원에 병문안 갔을 때도 단주를 돌
리고 계셨는데…그 때 “노벨상 받으실 때까지 건강하시도록 기원합니
다.”라고 했고, 미당 선생은 “그러겠습니다.”하셨습니다. 그런데 갑
자기 타계하셔서 섭섭합니다.”
신경림(시인)-“탁월한 시인이셨는데…. 미당 선생에 대해서 말이 많
았지만 순수한 사람이었어요. 선량하고 타고난 시인이었죠. 반쯤은 스
님이었구요.”
목정배(동국대 교수)-“1958년 입학했을 때 미당 선생님이 국어를 가
르치셨습니다. 그의 시는 우리나라 순수 향토적인 사투리를 써서 영원
성과 부드러움을 나타내고 동시에 힘이 드러납니다. 인품은 시골 할아
버지 같았습니다. 엄한 듯 자상한 면이 있으셨죠.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평소 말씀하실 때도 시적인 운율이 있었어요. 보통
사람들이 술을 마신다고 한다면 선생은 술을 시처럼 음미하셨습니다.
늘 잔을 들고 말씀하셔도 쏟지 않으셨고 말하면서도 술을 마셔도 홀짝
거리는 소리도 안났지요. 시선(詩仙)이기도 하지만 주선(酒仙)이기도
했습니다. 사모님을 그리워해 일찍 가신 것은 시인이니 가능한 것이겠
죠.”
문정희(시인)-“제가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36년전 이었습니다.
진명여고 3학년 학생이었을 때 동국대 문학콩쿨에 나갔다가 장원이 되
었고, 선생님은 심사위원이셨죠. 그때부터 선생님을 알게되었고 선생님
의 추천으로 시인이 됐습니다. 주례도 서주셨고요. 미당 시는 대표작이
따로 없이 천 여편 모두 다 절창이고 대표작입니다. 그 중에서 꼽는다
면 사람들은 국화옆에서를 대표작으로 생각하는데 60년대에 쓰셨던
‘동천’에 대해서 특히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어요.
선생님의 시는 모두 불교적 색채가 나죠. 신화와 고향을 소재로 하고
서구 상징주의 영향을 받은 《화사집》이 있지만 거의 전부를 불교적
범주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제일 큰 스승으로 좋아하셨어요. 불교에 대해서 알
게 된 것은 선생님을 통해 부처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선생
님 말씀을 들으면서 불교를 모르고는 한국문학을 모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마지막에 병석에 계실 때에도 염주를 가
지고 계셨어요.”
첫댓글 좋은자료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