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재기의 여정
배정규, 김연수 (2013). 잡초인생, 저서의 6장
“재기는 비록 자신의 증상을 책임질 수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것을 의미한다.
(William A. Anthony)
좌절과 극복
1. 자연치유 효과 : 비닐하우스 효과? 누에고치틀기?
1) 우울한 게 당연하다
파란마음센터에서는 매달 한 번 가족모임이 열린다. 김연수 소장에게 상담 받는 또는 받은 가족들의 모임이다. 이번 달에는 쿠키가 ‘다시 일어서기까지’라는 제목으로 2시간 특강을 했다. 쿠키가 가장 강조한 건 자신이 첫 발병 후 퇴원하고 2년간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는 거다. “아무리 자도 계속 잠이 와요. 하루 20시간씩 잤어요. 20시간씩 자보셨어요? 20시간씩 2년간 잠만 잤어요.” 그런데 눈치를 보니 대다수 가족들이 한쪽 귀로 흘려듣는다.
“병이 나으려면 반드시 심한 우울증 기간을 거쳐야 해요. 중요한 건 절대 재촉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냥 내버려둬야 해요. 지켜보기만 해야 돼요.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 기간을 못 참아요. 어떻게 해서든 움직이게 하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요. 억지로 세우면 일어났나 싶어도 다시 쓰러져요.”
쿠키는 이를 ‘비닐하우스 효과’라 했다. 나는 ‘누에고치틀기’를 연상했다. 또 ‘리모델링’ 비유도 떠올랐다. 혼란에 빠진 뇌가 안정을 되찾으려면 한 동안의 시간이 필요하다. 몸이 지치면 피로가 오는 것처럼, 마음이 지치면 우울이 온다. 우울은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우울하면 푹 자고 푹 쉬어야 한다. 충분히 자고 충분히 쉬고 나면 마음은 다시금 기력을 회복한다. 쿠키가 말한다.
“잠자는 사이에 뇌가 안정을 되찾듯이 심한 우울기간 동안 뇌가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아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신경전달물질 분비가 저절로 제 자리를 잡게 되는 것 같아요. 일종의 자연치유효과죠.”
쿠키가 이종찬에게 묻는다. “종찬씨도 심하게 우울한 적이 있었나요?”, “세 번째 퇴원하고 엄청 우울했어요. 발병한지 3년째였죠. 하루 20시간씩 잤어요. 8개월 동안 잠만 잤어요. 요즈음에도 봄, 여름 6개월간은 우울해해요. 그래서 봄, 여름에는 아르바이트는 안하고 공부만 해요.”
내 제자의 경우를 떠올렸다. 대학 마치고 미국 유학 가서 1년인가 2년 만에 포기하고 돌아왔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많이 힘들었죠. 새벽에 아르바이트 끝내고 돌아오는데 정면에서 해가 떠올라요. 떠오르는 해를 마주보며 운전하는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돌아오는 2시간 동안 내내 눈물이 났어요. 왜 그런지 몰랐어요. 슬픈 것도 아닌데 이유 없이 눈물이 났어요. 그 길로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죠. 그 날부터 8개월을 누워만 지냈어요. 계속 잠만 잤죠.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날 수 없었어요. 아무리 해도 힘이 차려지지 않았어요.”
그 제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지 않았다. 다행히 좋은 목사님을 만났다. 가정의학전문의이기도 했다. 그 분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단다. 신학전공으로 대학원 진학을 하려 했다. 그 분이 신학을 하기 전에 먼저 심리학 공부를 하라고 권해주셨다. “그래야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어.” 하셨단다. 그래서 내 제자가 됐다.
본인 자신의 경험 때문인지 석사논문을 ‘외상후 성장’이라는 주제로 썼다. ‘외상경험’하면 흔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 제자는 달랐다. ‘힘든 경험이 오히려 성장의 발판이 된다.’고 생각했다. 힘든 경험을 한 사람들의 단점을 말하기보다 오히려 ‘결과적으로 무엇을 얻게 되었는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2) 바닥을 치고 일어나다.
쿠키는 2년간 잠만 자다가 어느 날 털고 일어났다. 내가 물었다. “계기가 뭐죠?”, “갈 데까지 간 거죠. 바닥을 쳤죠. 바닥을 쳐야 다시 올라올 수 있어요.” 맞다. 미국 환자들의 수기가 생각났다. 수기를 쓴 사람의 절반이 ‘바닥을 쳤다. 그게 전환점이다.’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이 글을 읽어본 어떤 당사자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저도 20시간씩 자본 적이 있습니다. 깨어나고 또 자고 그러다가 정신이 들었을 때 얼마나 비참하던지... 바닥을 쳐봐야 극복을 한다. 사람도 아파본 사람이 배려심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질환을 겪어본 사람이 치유가 되면 배려있는 사람이 되는 거 같습니다. 몇 안 되는 강점이지요.”
쿠키가 말을 이었다. “걷기를 시작했어요. 하루 2시간씩 걸었어요. 그리고 유도도장에 등록했어요.” 쿠키는 이전에 한 번도 유도를 해본 적이 없었다. “체중을 20킬로그램 뺐어요. 10년간 유도를 했어요.” 지금은 검은 띠다. 몇 단인지는 모르겠다. “운동으로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의사가 약을 줄여보자 권했어요. 약을 줄이면 몸의 컨디션이 좀 더 좋아지고, 그렇게 몇 년 간격으로 조금씩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 같아요.”
그리고 걷기를 시작한 지 얼마 뒤,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를 봤단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현증 환자 ‘존 내쉬’라는 인물에 대한 영화다.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도 봤다. 그날부터 2년간 수시로 비디오를 빌려보기 시작했다.
“영화를 통해서 세상살이를 배웠어요. 경찰, 은행원, 교수, 학생, 친구, 가족, 아무튼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사는지,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웠어요. 그리고 영화를 통해 감정도 배웠어요. 처음에는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 한 방울도 안나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코미디 영화를 봐도 하나도 웃기지 않았어요. 아무런 느낌도 느껴지지 않았죠. 그러다가 어느 날 눈곱만큼 눈물이 찔끔 나와요. ‘아! 이게 슬픈 건가?’ 싶었죠. 그렇게 영화를 보다가 어느 날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깔깔 웃기도 했죠.”
3) 재촉하지 말고 믿고 기다려야 한다.
모임에 참석한 가족들이 “참 대단하네.” 하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한 어머니가 칭찬한다. “의지력이 대단하네. 낫겠다는 생각도 확실했던 거 같고. 우리 애가 그 반만 돼도 좋겠는데. 우리 애는 도대체 이해가 안 돼.”, “저도 그랬어요. 저도 아무런 목표도 의지도 없었어요. 그렇게 2년을 지냈죠. 믿고 기다리셔야 해요.”, “그래도 뭔가 다르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털고 일어난 거지. 우리 애는 전혀 희망이 안 보여.” 쿠키가 재차 말한다.
“기대를 내려 놓으셔야 해요. 그냥 내버려 두셔야 해요. 지켜보기만 하세요. 모든 걸 본인이 알아서 하도록 해주세요. 방 청소도 해주지 마세요. 본인이 알아서 할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세요.”
어머니가 대꾸하신다. “그걸 어떻게 내버려둬. 방이 먼지구덩인데. 건강에 안 좋잖아. 내가 답답해서 안 돼. 우리 애도 생전 방청소 안 해서 잠시 화장실 간 사이에 내가 들어가서 치워. 그러면 애가 화를 내고 그래. 그래도 치워야지 그걸 어떻게 그냥 둬?” “저도 엄마가 제 방 청소해서 대판 싸운 적이 있어요. 당시에 저는 뭔가를 계획했다가도 10분만 지나면 기억할 수가 없었어요. 10분이면 모든 걸 다 까먹어요. 뭘 하려 했는지, 뭘 했는지 아무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 메모를 했죠. 아무데나 메모해서 머리맡에 던져뒀어요. 그런데 엄마가 그걸 다 내다버린 거예요. 저한테는 너무나 소중한 거였는데. 친구들 전화번호며 약속날짜며 그걸 다 기록해 둔건데. 그걸 엄마가 버려 버린 거예요. 그래서 ‘내 방에 들어오지 마.’ 하고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었죠.” 쿠키가 그렇게 말을 해도 어머니는 여전히 못 알아들으신다. “그러면 그걸 그냥 내버려둬? 그래선 안 되지.” 하신다. 어머니께서 한숨을 푹 쉬신다. “도대체 이해가 안 돼. 멀쩡한데 벌써 몇 년을 저러고 있어.”
4) 부모가 기대를 내려놓아야 자녀가 일어나기가 쉽다.
특강 후 2주쯤 지나 쿠키가 파란마음쉼터에 들렸다. 원고를 보여줬다. “제가 왜 쿠키죠?”, “자네가 요즈음 협동조합 설립해서 인터넷으로 ‘콩비지 쿠키’ 판매하겠다고 동분서주하잖아. 그래서 내가 쿠키라고 자네 별칭을 지었어.” 씩 웃는다. “원고에서 엄마가 제 방 청소해서 제가 대판 싸운 부분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엄마 사랑을 치료방해로 오해하지 않게 쓰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제가 원래는 엄마한테 화내는 성격이 아닌데 그땐 화를 많이 냈어요. 그건 제가 병을 이겨보려는 몸부림이었어요. 병을 이겨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죠. 엄마의 간섭, 엄마의 도움을 멀리하려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더 많이 화를 냈어요.” 그러고는 말을 잇는다.
“제가 볼 때 당사자 어머니들은 자녀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게 아픔의 계기도 되지만 나중에 다시 일어설 때 큰 힘이 되기도 해요. 그래서 ‘완전 잘못됐다.’는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어머니들이 내려놓아야만 해요. 부모의 기대감이 자녀에게는 엄청 부담을 줘요. 부모님이 기대를 내려놓아야만 자식이 어깨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어요. 그래야 자녀가 일어서기 쉽죠.”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역시 겪어본 사람이 다르다.” 싶었다. 핵심을 짚어서 말할 뿐만 아니라, 정말 알아듣기 쉽게 말한다.
2. 쓰러지면 다시 일어난다.
첫 입원 이후 꾸준한 외래진료만으로 재발 하지 않고 잘 지내는 환자들도 있다. 때로는 치료가 잘 되어 수년 후 약물복용을 끝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 환자는 몇 년 간격으로 재발과 재입원을 수차례 반복한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다시 일어난다. 한 쉼터 회원의 예를 들어보자.
첫 입원 후 퇴원하고 경과가 좋았다. 국비지원 제과제빵학원도 다녔고 교회에서 전단지 배포도 했다. 초등학생 가르치는 학원 강사도 하고 방과후교실 교사도 했다. 의사의 권유로 약을 끊었다가 얼마 후 재발했다. 그래도 다시 일어섰다. 몸무게가 20킬로그램 불었지만 강도 높은 운동으로 20킬로그램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병원 보조직원으로 일하고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도 했다. 결혼하고 애를 가지려고 약을 끊었다. 다시 재발하여 재입원했다. 남편과 이혼했다. 또 다시 일어섰다. 매일처럼 산책하고 운동했다. 경과가 좋았다. 의사의 권유로 또 다시 약을 끊었다가 또 재발하여 재입원했다. 그래도 다시 일어섰다. 3개월 입원 후 퇴원하여 운전면허를 따고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을 1년 다니고 또 다시 재발하여 3개월 재입원했다.
1년 휴학하고 복학했다. 한 과목만 A학점이고 나머지 전 과목을 A플러스 받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계속 장학금을 탔다. 교내 글짓기에서 우수상을 타고 자신의 글이 학교 홈페이지에 한동안 게시되었다. 수업시간에 교수들이 학생들 앞에서 칭찬했다. “이 친구가 가장 모범적이야. 교수가 될 자질이 충분해. 단지 똑똑한 게 아니라 성실하고 노력하잖아. 이렇게 하면 돼.” 초등학생 때 IQ검사가 잘못되어 자신의 지능이 남보다 떨어진다는 열등감이 있었는데, 대학생활을 통해 그 열등감을 떨쳐버렸다. 대학 졸업할 때 학과장이 취업추천을 해줬지만 거절했다. 꽤 괜찮은 직장이었다. 욕심도 났지만 겁이 났기 때문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무리하면 재발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거절했다.
하지만 몇 달 후 사소한 일로 재발했다. 다시 3개월 입원. 내 생각에는 아마도 대학생활 잘하려고 너무 무리했던 것 같다. 마치 피로가 쌓이는 것처럼 부담감과 긴장감이 쌓였던 게 아닐까? 그래서 재발한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회복되고 있는 중에 비염과 천식이 심해졌다. 항정신병 약물용량이 늘어서 몸에 전체적으로 무리가 가서 비염과 천식이 심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내 생각이다. 아무튼 몇 차례 호흡기내과 입원. 근 1년을 고생하고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하고 있다. ‘산책과 운동.’ 다시 일어날 때는 항상 산책과 운동부터 시작했다. 3개월 내지 6개월 하고나면 그때부터는 독서와 공부를 추가한다.
마르티노는 몇 번 재입원했는지 모르겠다. 대구에 있는 사회복귀시설을 5~6년 다녔다. 호덕이는 지금까지 29번 입원했다. 우리는 “한 번 더 입원해서 30번 채우지 그래.” 하고 놀리곤 한다. 호덕이는 “실제 재발해서 입원한 건 3~4번이에요. 나머지는 재발조짐 오면 제 발로 병원 가서 ‘며칠 쉬었다 갈게요.’ 하고 예방차원에서 입원한 거예요. 때로는 겨울에 집에 있으면 추워서 겨울 따뜻하게 나려고 입원하기도 했어요.” 한다. 호덕이는 대구에 있는 사회복귀시설을 10년 이상 이용했다. 사회복귀시설 터줏대감인 셈이다. 요즈음에는 파란마음쉼터만 이용한다. 마르티노도 호덕이도 이제는 사회복귀시설을 졸업한 셈이다.
호덕이와 마르티노를 보고 내 제자가 묻는다. “저 정도면 멀쩡한 것 같은데, 취업만 하면 될 것 같네요.”, “아니. 정식취업해서 하루 8~9시간 일하면 못견뎌내. 하루 2~3시간 정도 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있으면 딱 좋지. 그렇게 시작해서 하루 4~5시간 정도 일하는 데까지 늘리면 되지. 그리고 일하다가 재발조짐 느끼면 ‘제가 몸이 안 좋아서요. 며칠만 쉴게요.’ 하면 자유롭게 쉴 수 있는 직장이어야 해. 그런데 우리나라에 그런 직장이 없어. 그래서 일 못하는 거야.” 마르티노와 호덕이는 자기 증상이 뭔지 잘 알고 있다. 재발조짐도 안다. 그래서 재발조짐을 느끼면 하루, 이틀, 또는 사흘 푹 자고 푹 쉰다. 그러면 괜찮아진다.
3. 다시 일어서는데 도움이 된 방법들
당사자들은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각자 나름의 방식을 사용한다. 원고를 읽어 보더니 쿠키가 힘주어 말한다.
“운동을 더 강조해야 해요. 운동이 뇌의 신경전달물질을 정상적으로 만들어요. 약물보다 더 강력해요. 제 경험으로는 건강을 되찾으려면 운동을 꼭 해야 해요. 체력과 정신력은 비례해요. 체력이 약하면 정신력도 약하고, 체력이 강해지면 정신력도 강해져요. 운동을 하지 않고는 신체건강도 정신건강도 되찾을 수 없어요. 운동이 곧 건강이에요.”
쿠키는 동의보감에서 오행이 몸에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되면서 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심장을 튼튼하게 해야 하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강심장을 만들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하루에 7~8km를 걸었다. 그리고 유도도장에 등록했다. 쿠키는 자신의 명함 뒷면에 태극기를 새겨뒀다. 그러고는 명함을 주면서 사람들에게 음양오행과 병의 관계를 설명하곤 한다.
쿠키는 자신이 지금처럼 될 수 있었던 게 좋은 주치의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감사해한다. 2년간 수시로 비디오를 빌려서 영화를 본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다. 영화를 통해 사회생활방식과 감정을 배웠단다. 또한 5년 정도 인터넷카페 ‘우기모임’ 카페지기를 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한다. 당사자와 가족들이 올린 글에 일일이 댓글을 달아주면서 병과 재기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단다.
노래가 도움이 되었다는 당사자도 많다. 상당수 당사자가 노래듣기를 좋아한다. 몇 년간 수시로 노래방에 다니며 부르고 싶은 노래를 실컷 불렀던 게 도움이 되었다는 당사자도 있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한 당사자는 ‘트로트 치료’로 자신이 재기했다고 말하곤 한다. 수년간 매일 몇 시간 씩 트로트를 불렀단다. 그래서 자신이 사용한 방식을 스스로 ‘트로트 치료’라고 작명했다.
시치료 또는 작문치료라 해도 좋은 방법을 사용하는 당사자도 꽤 있다. 이종찬은 시인이 되겠다는 꿈이 있고, 호덕이는 수필을 쓰고 있다. 또한 정식 시집을 출판한 당사자도 있다.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며 힘든 시기를 이겨낸 당사자도 있다. 산책을 거론하는 당사자들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답은 당사자마다 다른 것 같다. 산책, 운동, 등산, 노래, 영화, 시, 수필, 그림, 인터넷 채팅, 독서, 운전, 영어공부, 수학공부, 정신보건센터, 사회복귀시설, 공동작업장, 아르바이트 등이 흔히 거론되는 방법들이지만, 무엇이 도움이 될지는 당사자의 취향에 달린 것 같다.
쿠키는 “당사자 스스로 자신의 병이 다 나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라고 강조한다. “그게 엄청 중요해요. 그런데 굉장히 어려워요. 제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렇게 확신하기까지 1년 6개월 걸렸어요.” “좀 더 자세히 말해줄래?”, “단계가 있어요. 제 경우에는 네 단계였어요. 처음에는 ‘나는 나을 수 있을까?’ 제 자신에게 매일처럼 질문했어요. 그 다음에는 ‘나았으면 좋겠다.’고 매일 기도했죠. 그 다음에는 ‘나을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매일 다짐했어요. 끝으로 ‘나는 다 나았다.’고 매일처럼 제 자신에게 말했죠. 1년 6개월 동안 매일 제 자신에게 심리적으로 주문을 걸었어요. 그게 필요해요. 스스로 자신에게 계속 물어보고, 다짐하고, 주문을 걸어야 해요.”
관점의 변화
1. 재활모형의 등장
과거에 비해 치료법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고 치료효과도 크게 좋아졌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좋은 약물들이 새로 많이 개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은 과제가 있다. 만일 치료법만으로 충분했다면, 재활이나 재기와 같은 관점들은 애초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 유럽과 미국에서 입원치료 위주의 정책을 시행한 적이 있었다. 정신병상수가 급격히 늘었다. 그들은 전체 인구의 1% 이상을 정신병원에 수용하여 평생 먹여 살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1950년대에,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정신병원 입원환자를 과감하게 퇴원시키고, 정신병상수를 적극적으로 줄여나가는 정책을 펴게 되었다. 이를 탈원화 또는 탈시설화 정책이라고 한다. 또한 정신질환자가 병원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가도록 하는데 초점을 둔다 해서 지역사회정신보건정책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퇴원한 환자들 중 상당수가 거리의 노숙자로 전락했다. 또한 입원치료를 통해 증상을 말끔히 없앤 환자들조차 지역사회 내에서 버텨내지 못하고, 또 다시 재발하여 재입원하곤 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그들은 지역사회 속에서 버텨내지 못하는가? 새로운 관점이 필요했다. 이전의 관점, 즉 ‘병이다. 증상을 없애야 한다.’는 관점만으로는 그들을 지역사회에서 생활하게 만들 수가 없었다.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병이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치료만으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병이 단순히 병에 머물지 않고, 또 다른 문제, 즉 장애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신체질환의 경우 종종 장애가 초래되는 경우가 있다. 예로써 다리가 아파서 보행장애가 초래되는 경우다. 이 경우 아픈 다리를 치료하려는 노력만이 아니라 보행장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개인에게 목발이나 휠체어, 또는 의족을 제공해야 하고, 사회적으로는 그들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엘리베이터나 슬로프를 설치해줘야 한다.
장애란 ‘사회적 장애’의 줄임말이다. 즉 장애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라는 뜻이다. 장애는 의료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개념이다. 따라서 의료적 개입이 아니라 사회적 개입을 필요로 한다.
앤쏘니(William A. Anthony)는 정신질환의 후유증을 4단계 정신재활모형으로 설명했다. 손상, 기능저하, 역할장애, 그리고 불이익이 그것이다. 정신질환은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 손상이란 뇌의 해부학적 또는 기능적 이상을 의미한다. 손상이 초래되면 기능저하가 온다. 주의집중기능, 일상생활기능, 대인관계기능, 학업기능, 직무수행기능 등이 이전보다 못해진다. 기능저하가 오면 역할장애가 생긴다. 학생, 직장인, 친구, 또는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고 백수로 전락한다. 역할장애가 생기면 불이익을 받는다. 사회적 약자의 처지가 된다. 주변사람들로부터 낙인, 편견, 차별을 받게 되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손상은 질병 자체의 문제지만, 그 이외의 문제들은 질병의 후유증, 즉 질병의 결과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손상에 대해서는 치료개입이 필요하지만, 나머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재활개입이 필요하다. 기능저하에 대해서는 기능증진을 위한 다양한 교육훈련이 필요하고, 역할장애에 대해서는 재활상담과 기회제공을 비롯한 각종 지원이 필요하다. 사회적 불이익에 대해서는 권익옹호 활동과 바람직한 법률과 정책을 도입하도록 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목적은 분명하다.
“정신재활의 목적은 장기적인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의 능력을 높여서, 본인이 원하는 환경 속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최소한으로 받으면서 성공적이고 만족스럽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앤쏘니, 손명자(역), 「정신재활」에서 인용)
미국에서 1970년대에 등장한 정신재활은 상당한 성과를 가져왔다. 다양한 교육훈련과 지원 방법이 개발되었고 법률과 정책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의료모형은 약물로써, 재활모형은 교육훈련과 지원으로써 당사자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의료모형은 증상에, 재활모형은 장애에 초점을 둠으로써, 증상과 장애를 겪어내는 그들의 주관적, 심리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2. 재기모형의 등장
같은 병을 앓더라도 병을 잘 극복하고 일어서는 사람도 있고 좌절감 속에서 인생을 헛되게 낭비하는 사람도 있다. 오랜 세월 전문가들은 이를 치료나 재활의 성과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수기와 자서전을 통해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그들 중 한 사람인 디건(Patricia E. Deegan)의 글을 인용한다. 그녀는 조현증을 앓으면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미국에서 정신보건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자동차가 정비되고, 텔레비전이 수리되는 것처럼 재활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재활과 재기의 의미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활이란 장애인이 이용하여 사회에 적응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하는 서비스와 기술을 가르친다. 재기란 장애문제를 수용하고 극복해가는 실생활의 경험을 뜻한다. 동일한 현상에 대해 재활은 ‘외부세계적 측면’을, 재기는 ‘자기주체적 측면’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재기과정을 토대로 해서만이 재활서비스의 효과가 가능하다...
단순한 양질의 서비스 이상이 필요하다...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약물로 인한 무감각하고 지친 마음을 떨쳐버리고 옷을 차려 입은 다음 과감히 재활프로그램 장소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하며, 재활프로그램에서 실패하리라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이렇게 정신장애인이 자신의 재활방안에 적극적이며 용기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재기과정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재기과정은 재활노력의 결과가 결정되는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현상이다. 때문에 전문과학학술지에서 이에 대하여 다룬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놀라울 뿐이다.”(디건의 수기, 스패니올과 쾌러의 책에 수록된 내용,「가족협회보 6호」, 26쪽에서 인용)
디건의 말처럼, 치료와 재활의 성과는 전문가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전문가가 당사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전체 영향력의 일부분일 뿐이다. 전문가뿐 아니라 가족, 친척, 친구, 그리고 사회가 당사자를 대하는 방식이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치료와 재활의 성과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사자가 자신의 병과 장애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또한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이다.
당사자들의 수기와 자서전을 보면 그들은 단지 병이나 장애가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두고 투쟁하고 있다. 또한 병이나 장애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을 뒤바꿔버린 엄청난 인생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치료나 재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한 인간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만족스럽고 가치 있게 사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당사자들이 자서전과 수기를 많이 발표했다. 앤쏘니가 그 글들을 읽어보고 깜짝 놀랐다. 전문가들이 미처 몰랐던 중요한 내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 앤쏘니는 「재기의 전망」이라는 논문을 통해, 전문가와는 달리 당사자들은 재기 관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 그에 대한 학술연구를 촉구했다.
“재기는 소비자/생존자 문헌으로부터 출현한 개념이며, 심한 정신질환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혁시킬 수 있는 전망이다. 그동안 소비자/생존자들이 재기를 경험해 왔지만, 또 보다 소박하게 재기에 대하여 저술하고 언급해왔지만, 전문가들은 이제야 재기의 전망(vision of recovery)의 의미와 시사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앤쏘니의 「재기의 전망」에서 인용)
앤쏘니가 미국 정신재활분야에서 워낙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이후 재기에 대한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결과 이전의 치료모형 및 재활모형과 뚜렷이 대비되는 새로운 관점이 등장했다. 재기모형이다.
3. 소비자/생존자/이용자라는 용어
당사자를 지칭하는 용어에 대해 잠깐 설명해야겠다. 현재 미국 정신재활분야에서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환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정신장애인(persons with psychiatric disabilities)이라는 용어를, 정신질환을 겪는 당사자들은 소비자 또는 생존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1980년대부터 미국의 당사자들은 다수의 단체를 결성하여 미국 정신보건분야를 개혁하려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소비자(consumers)라는 용어는 온건단체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정신보건 서비스 소비자’로서 정부와 정신병원, 전문가, 그리고 일반국민들로부터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존중받아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은 ‘정신질환’이라는 개념과 약물치료를 포함한 제반 의학적 서비스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다만 서비스 내용과 제공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즉 자신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고, 전문가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최대한 친절한 방식으로 제공해달라는 입장이다.
한편 생존자(survivors)라는 용어는 급진단체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이들은 ‘정신질환’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며, 자신들을 정신질환자로 낙인찍고 차별하는 사회적 편견이 문제라는 입장을 취한다. 생존자란 ‘병으로부터’가 아니라, ‘부당한 사회적 낙인과 편견, 그리고 차별로부터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약물치료를 포함한 일체의 의학적 서비스가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며, 자신들이 치료받아야 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을 부당하게 처우하는 사회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일본의 당사자들은 이용자라는 뜻의 유저(user)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용어는 생존자/소비자라는 용어와 비교할 때 ‘정당한 권리주장’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고분고분하고 수동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당사자와 가족들이 사용하는 용어 자체만을 보더라도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미국에 비해 소비자운동이 덜 활발함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우리의 경우 소비자운동이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운동이라는 용어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생존자/소비자/이용자 등의 용어 자체가 생소하다. 이러한 이유로 환자나 환우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고, 정신장애인이라는 용어가 뒤를 잇고 있다. 정신보건센터와 사회복귀시설에서는 회원이라는 용어를, 예외적으로 광주성요한병원에서는 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당사자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해 왔고, 문맥에 따라 환자, 정신질환자, 정신장애인, 회원 등의 용어를 때때로 사용했다.
4. 재기의 정의
아직까지 재기라는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합의된 정의는 없다. 다만 앤쏘니가 내린 정의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재기는 개인의 태도, 가치, 감정, 목표, 기술, 그리고/또는 역할이 변화하는 개인적인, 즉 개인특유의 과정으로 묘사되고 있다. 재기는 질병으로 인한 제약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만족스럽고 희망적이며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방식이다. 재기는 개인이 정신질환의 파국적 영향을 극복하며 성장함에 따라 자신의 삶의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발달시키는 것을 포함한다.”(앤쏘니의 「재기의 전망」에서 인용)
1) ‘재기는 개인의 태도, 가치, 감정, 목표, 기술, 그리고/또는 역할이 변화하는’
여기에서 ‘병’이나 ‘증상’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사자는 질병으로 인해 파생된 수많은 문제들에 직면한다. 예로써, 병원과 전문가들과의 부정적인 접촉경험, 부당한 처우, 낙인과 오점, 사회적 차별, 기회의 부족, 경제적 빈곤과 같은 문제들이다.
“병 자체보다 병의 결과를 극복하기가 더 어렵다.”(앤쏘니, 「정신재활」에서 인용)
병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당사자들은 자신의 삶을 두고 투쟁한다. 병으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문제들과 투쟁하는 가운데, 질병과 장애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다. 개인의 태도, 가치, 감정, 그리고 인생목표가 바뀐다. 환경에 대처하는 개인의 대처방식이 바뀐다. 환경 내에서 수행하는 개인의 역할이 바뀐다. 설혹 병이나 장애, 또는 상황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처하는 개인이 바뀌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그게 재기다.
2) ‘개인적인, 개인특유의 과정으로 묘사되고 있다.’
재기과정은 개인마다 서로 다른 경과를 밟는다. 따라서 그 경과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당사자가 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하다. 예로써, 병을 비참하게 여길수록, 위협적으로 느낄수록, 병이 그의 생활을 뿌리 채 뒤흔들어 놓을수록, 그의 꿈과 인생계획을 산산이 부수어 놓을수록, 재기는 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인내를 필요로 한다.
“대다수 우리 장애인에게 재기란 하나의 과정이며, 생활방식이자 태도이며, 문제에 다가가는 방식이다. 이것은 완전히 직선적인 과정은 아니다. 때로 과정이 잘못되면서 우리는 비틀거리고 주춤하지만 몸을 추스르고 다시 시작한다.”(디건의 수기, 「가족협회보」6호, 29쪽)
재기과정에는 성장과 후퇴가 있으며, 변화가 거의 없는 시기와 급격히 변화하는 시기가 있다. 전반적인 경향은 상승하는 것이지만, 순간순간의 경험은 방향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사자는 희망과 좌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통찰과 성장의 시기는 예상치 못한 때에 일어난다.
이 과정은 끝없이 이어지고 반복된다. 수기와 자서전에서 당사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길, 경로, 여정, 또는 과정 등으로 표현한다. 재기는 종착점이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다.
“나의 이 길은 끝이 없는 길인 것 같다.”(이종찬, 당사자)
이 표현 속에는 질병과 장애, 그리고 삶의 수많은 난관들과의 투쟁이 끝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지만, 굴하지 않고 그 길을 묵묵히 갈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3) ‘재기는 질병으로 인한 제약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만족스럽고 희망적이며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방식이다.’
재기는 완치(cure)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완치란 병의 증상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 즉 발병 이전의 건강상태를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재기는 병과는 관계없는 용어다. 비록 질병이나 장애 또는 현실적인 상황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더라도,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중요하다. 증상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재기는 가능하다.
“예로써 척수손상으로 인하여 하반신 마비가 된 사람은 비록 척수손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에서 재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신질환을 지닌 사람들도 비록 정신질환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에서 재기할 수 있다.”(앤쏘니의 「재기의 전망」에서 인용)
치료와 재기는 서로 상호작용한다. 증상이 경감되면 재기과정이 수월해진다. 또한 반대로 재기를 위해 노력하게 되면 증상이 경감된다. 당사자가 인생목표를 새롭게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면, 증상이 보다 덜 빈번하게 나타나며,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생활에 지장이 덜하고, 증상이 보다 빨리 사라진다. 그는 증상으로 고통 받을 때라도 참고 견디면 그것이 지나간다는 것을 안다. 그는 증상에도 불구하고 덜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을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재기는 비록 자신의 증상을 완전히 책임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것을 의미한다.”(앤쏘니, 「재기의 전망」에서 인용)
4) ‘재기는 개인이 정신질환의 파국적 영향을 극복하며 성장함에 따라’
당사자에게 질병과 장애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파국적인 인생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즉 자신의 인생을 뿌리 채 뒤흔들어 놓은 또는 완전히 바꿔버린 끔찍한 삶의 재난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병이 낫는다 하더라도, 모든 난관을 잘 극복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이 뒤바뀌어 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재난으로부터 성공적인 재기를 했다는 것이 재난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영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성공적인 재기는 개인이 변화하였다는 것을, 그래서 그러한 재난이 개인에게 주는 의미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난은 더 이상 그의 삶을 지배하지 못한다.”(앤쏘니의 「재기의 전망」에서 인용)
개인이 변화했다는 것. 성장했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 인간은 질병과 장애, 그리고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존재다. 개인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지속적으로 변화, 발달, 성장해간다. 당사자들은 오랜 재기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이 이전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transformation)했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 정도로 당사자들에게는 커다란 변화와 성장이 일어난다. 재기과정은 한 인간의 끊임없는 변화과정, 성장과정이다.
5) ‘자신의 삶의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발달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재기는 병이 낫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적응 또는 사회복귀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발병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새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재기는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무너지는 시기에 당사자들은 발병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한다. 그때와는 다른 자신과 자기 인생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노력도 해보고, 안타까워하고, 화내고, 발버둥치고, 괴로워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을 지켜보며 당사자들은 심한 우울과 절망에 빠진다.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터널처럼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희망과 수용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 디건의 수기를 살펴보자.
“그러던 어느 날, 무엇인가가 우리를 변화시켰다. 연약하고 작지만 희망의 불빛이 우리를 비추어 암흑 밖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약속해 주었다... 이는 미스터리와 같았다. 이는 신의 은총이었다. 신의 사랑으로 태어난 희망의 탄생이었다. 어떠한 논쟁이나 정신과적 기술, 심리학, 사회사업, 과학으로도 이 희망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기한 우리는 이 같은 은총이 현실이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직접 겪었다. 이는 우리만이 나눌 수 있는 비밀이다.”(디건의 수기, 「가족협회보 6호」, 28쪽)
디건의 수기에서 보듯이, 희망과 수용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전환점이다. 당사자들이 절망의 바닥에 있을 때,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어렴풋이 희망이 찾아오는 것 같다.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뭔가 나아질 것 같은 느낌. 당사자들은 이러한 느낌을 의지적인 게 아니라 저절로 찾아오는 것으로 묘사한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창문을 열어둬야 한다. 그것이 수용이다. 희망은 수용을 바탕으로 또는 수용과 동시에 찾아온다.
“사실상 우리의 재기는 우리의 한계를 마음깊이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은 절망할 때가 아니며, 우리 자신의 한계성이 진정한 가능성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는 재기의 역설이다. 즉 우리가 할 수 없거나 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될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디건의 수기, 「가족협회보 6호」, 28쪽)
수용이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게 바뀌어버렸고 그것을 되돌리기에는 자신이 역부족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수용이 되지 않을 때 당사자들은 괴로워한다. 하지만 수용이 되고나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다. 수용은 마음의 평화로 경험된다.
“재기란 고통이나 투쟁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기란 고뇌가 고통감수로 바뀌는 일이다.”(디건의 수기, 「가족협회보 6호」, 29쪽)
당사자는 편안한 느낌을 느낀다. 더 이상 괴로워하거나 몸부림치지 않는다. 더 이상 화내거나 우울해하지 않는다. 모든 걸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고뇌 속에서 그와 나는 희망 없이 지냈다. 우리는 고뇌가 헛된 고통인 것, 즉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고통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희망을 품으면 고뇌는 진정한 고통의 감수로 변화된다. 고통을 감수하는 일은 내면의 평화로 나타난다. 즉 비록 아직은 고통이 클지라도 이 고통이 우리를 새로운 미래로 인도하리라는 사실을 아는데서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디건의 수기, 「가족협회보 6호」, 29쪽)
현실은 바뀐 게 없다. 자신의 삶은 여전히 별 볼일 없고, 하루하루를 버텨내기가 만만치 않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당사자는 모든 것을 원망 없이 불평 없이 달게 겪어내기 시작한다. 외부적 상황이 아니라, 내면이 바뀐 것이다. 당사자는 현재의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새로 시작한다.
“그 수없는 절망을 헤쳐 나온 어느 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였다. 재기의 주춧돌, 즉 희망, 의욕, 그리고 책임 있는 행동을 딛고 일어서서 우리의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디건의 수기, 「가족협회보 6호」, 28쪽)
지금까지 재기의 정의를 살펴보았다. 이 용어를 흔히들 회복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경우 의미전달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기의 본질을 왜곡하게 된다. 회복이란 용어는 병으로부터의 회복과 발병이전 상태로의 복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뜻들은 재기개념과 관계없고 오히려 상반된다.
5. 재기모형의 시사점
앤쏘니에 의하면 재기모형은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갖고 있다.
① 재기의 주체는 정신장애인 본인이다.
② 재기는 그를 아껴주는 사람에 의해 촉진된다.
③ 재기는 증상의 빈도와 기간을 줄여준다.
④ 재기는 오랜 세월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⑤ 병 자체보다 병의 결과로부터 재기하기가 더욱 어렵다.
⑥ 재기의 결과는 자아정체감과 통제력의 회복이다.
이러한 시사점은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예로써 ‘재기의 결과는 자아정체감과 통제력의 회복이다.’는 시사점은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한 가지 목표는 자아정체감의 회복이다. ‘병 중심적인 자아정체감’을 버리고 ‘병과는 무관한 자아정체감’을 갖는 일이다. 즉 자신에게는 나름의 강점이 있으며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과, 자신의 인생에는 병이나 장애보다 더 중요한 어떤 일이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또 다른 목표는 통제력의 회복이다. 즉 당사자가 자신을 능동적 존재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인생이 병이나 장애, 현실적 어려움, 또는 타인들의 의사결정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와 선택, 결심, 그리고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일이다.
‘재기의 주체는 정신장애인 본인이다.’는 시사점을 통해 우리는 모든 활동에서 당사자의 욕구와 경험, 그리고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목표와 방법을 결정할 때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당사자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 일의 추진과정에서도 당사자가 주도적 입장에서 일을 추진하도록 배려해야 한다. 전문가와 가족, 그리고 주변사람들은 지원자 입장에서 당사자를 도와야 한다. 그리고 당사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이 다른 어떤 활동보다 더 중요하다. ‘재기의 주체는 당사자 본인이다.’는 시사점에는 이러한 많은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듯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관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재기모형은 당사자 스스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전문가와 가족들은 당사자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등의 질문에 대해 이전의 치료모형이나 재활모형과는 전혀 다른 답을 내놓고 있다. 그 차이는 자연과학에서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뀐 것만큼이나 엄청나다. 저자들은 당사자, 가족, 그리고 전문가를 비롯한 우리들 모두가 재기모형의 시각에서 자신이 해왔던 지금까지의 생각과 활동들을 한번쯤 새롭게 조명해 보기를 권한다.
재기의 버팀목
1. 마음속의 시 한 편
이종찬은 발병 후 첫 3년간 매년 1번씩 3번 입원하고, 근 20년째 재입원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첫 입원 후 퇴원하고 어머니가 일하는 식당에서 식당일을 도우며 공부해서 6개월 만에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막노동을 했다. 그러다가 재발하고 재입원했다. 퇴원 후 주유소, 노래방, 식당, 전단지배포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시 재발하고 재입원. 이후 대학에 입학했다가 3학기 만에 휴학하고 결국 자퇴했다. 그러다가 8개월을 꼼짝 않고 누워만 지냈다. 계속 잠만 잤다.
“어떻게 거기서 빠져 나왔나? 계기가 뭔데?” 물었다. “어느 날 병원에 외래진료 받으러 갔는데 1년 전에 저보다 못했던 환자가 저보다 나아져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한다. 그래서 노력하기 시작했다. 밤 9~10시에 자고 아침 5~6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했다. “저는 봄, 여름에는 안 좋아요. 우울해요. 그래서 그 기간에는 공부만 했어요. 도서관에 아침 7시쯤 가서 오후 5시까지 주로 영어독해 공부했어요. 그러다가 가을, 겨울에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하고. 제 돈은 제가 벌어서 썼어요. 아껴 쓰면 월 10만 원 정도면 생활하니까.”
이종찬은 20년째 재발 않고 잘 지내고 있다. 요즈음에는 6개월 과정의 국비지원 컴퓨터학원에 다니고 있다. 첫 번째 등록하면 매달 30만 원쯤 정부에서 교육비 명목으로 돈이 나오는데, 지금은 세 번째라 매달 10만 원쯤 돈을 받고 있다. 이종찬은 부지런하다. 아침 일찍, 또는 9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학원수업 듣고 나면, 파란마음쉼터에 와서 청소하고 간다. 시인이 되겠다는 꿈이 있다. 솟대문학에 시가 2번 실렸다. 한 번만 더 실리면 정식 시인이란다.
이종찬에게 원고를 읽어주고 물었다. “너는 20년째 재발 않고, 공부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보통사람보다 훨씬 더 부지런한 것 같아.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의미 부여를 하는 거죠. 제 마음 속에는 시가 한 편 있어요. 힘들 땐 늘 그 시를 생각하죠.” “어떤 시?” 이종찬이 시 한 편을 출력해 온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내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리(I shall not live in Vain)’라는 시다.
내가 만일 누군가의 애타는 가슴 달랠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된 것이 아니리.
내가 한 생명의 아픔을 달랠 수 있다면,
혹은, 괴로움을 위로할 수 있다면,
헐떡이는 한 마리 울새를 도와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리.
I
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e Pain.
Or help one fainting Robin
into his Nest again,
I shall not live in Vain
19살 방황할 때 학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시란다. “그때부터 삶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삶이란 게 겪어보고 아파보고 그런 것 아닌가? 먼저 아파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라는 게 아닌가? 그래서 견뎌낼 수 있었어요.” 대단한 말을 한다. 잠시 후 자기가 쓴 ‘재기’라는 글을 출력해서 준다. 내용은 이렇다.
“정신병원 입원 3차례. 그 후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묵묵히 젊은 시절의 의무를 다하며 살았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주홍글씨처럼 어디를 가든 마음 한 구석에 작은 열등의식이 있었다. 그 후 여자를 사귀었다. 그녀는 우울증 환자였다. 순수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1년 6개월 교제 후 그녀는 공무원 직업을 가진 남자와 중매결혼 했다. 청춘의 순정을 몰라주는 그녀가 미웠다. 내가 하고 싶고 살고 싶고 누리고 싶은 삶을 살 수 없었다. 주위의 기준에 맞추어야 했다.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가슴 속에 묻어 둔 작은 시를 생각하며 어둠속에서 하나의 촛불이 되고 싶었다. 영어회화와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장애등록을 하고 사회복귀시설에 다녔다. 철학을 공부했고 일주일에 2시간씩 영어포럼에 참석했다. 영어포럼에는 은퇴한 교장, 은퇴한 외교관, 카이스트 휴학생, 화교목사, 자칭 컨트리맨이라는 어르신, 의사, 외무고시준비생이 멤버였다. 그들은 나를 매력적이라 했다. 영어포럼에 8년간 참석했다. 나는 사회복귀시설에서는 별 볼일 없는 장애인이었고 포럼에서는 수재로 통하는 시인 지망생이었다. 나는 사랑과 일에 모두 실패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나는 열정과 자애, 그리고 패기를 지닌 목적지향적인 사람이다. 이렇게 밖에서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는 극과 극이고 아주 달랐다.
내가 이렇게 모든 것이 무너진 불행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내 마음 속에 한 편의 시가 있기 때문이다. 19살 방황할 때 선생님께서 가르쳐 준 에밀리 디킨슨의 시. 나도 언젠간 이 사회에 작게나마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작은 촛불이 되고 싶었다. 나는 초라할 때나, 선택의 순간에, 그리고 자기 전에 이 시를 읽는다. 비록 힘든 질병과 외로움, 사회의 낙인 속에 살아가야 하는 정신장애인의 삶이지만, 마음속에 묻어 둔 작은 시 한편이 있었기에 나는 버틸 수 있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 위로받고 도움 받을 수 있다면, 비록 초라하지만 내 삶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정신장애인이 외롭지 않고, 병도 생기지 않는 꿈결 같은 세상을 꿈꿔본다. 나의 이 길은 끝이 없는 길인 것 같다.”
방황하던 시절 선생님이 가르쳐 준 시 한 편이 이종찬의 삶에 버팀목이 되었다. 힘들 때 그 시를 암송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꿋꿋이 버텨내는 이종찬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 선생님! “당신은 잊어버리셨겠지만, 당신이 소개해 준 시 한 편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살아 있습니다.” 한 사람의 따뜻한 관심, 격려의 말 한마디가 때로는 큰 힘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종찬이 자신이 쓴 시 한 편을 책에 실어주기를 희망했다. ‘평등’이라는 제목의 시다.
누구나 영혼의 행복은 추구할 수 있다
아마 이 세상에선 더 없는 선물이다
현재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런 행복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번쯤 사랑하고
두 번쯤 사랑하고
아마 파도란 행복의 선물이다
그런 선물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람이 막힘이 없고 흘러가듯이
그렇게 바람을 닮는 것이다
이종찬에게 물었다. “갑자기 파도가 왜 나오지?” 이종찬이 뭐라 하는데 퍼뜩 알아챘다. ‘인생의 우여곡절’, ‘이런저런 시련들’ 그걸 파도라고 표현했구나. 그것마저도 하늘의 선물이란 뜻이구나.
2.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인터넷 ‘다음’의 ‘파란마음 하얀마음’ 카페에 재기경험담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환우생활 9년, 그리고 직장생활과 결혼생활’이라는 제목의 답글이 왔다. 그 중 재기과정 부분을 소개한다.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직업을 가지고 꾸준히 사회생활을 하고 제 자신의 욕심을 버렸던 것이 결정적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어느 날 재발해서 폐쇄병동에 있었을 때입니다. 상담심리사 선생님과 우연히 책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장자’와 ‘도덕경’을 읽어보라는 권면을 받게 됩니다. 퇴원 후에 장자를 읽었는데 제 마음에 딱 들어오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물은 절대로 거꾸로 흐르지 않고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말이었습니다. 순리대로 겸손하게 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말을 곱씹으면서 법정 스님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의 글들 중에서 우화가 나오는데 어느 노승이 제자를 불러서 마지막 말을 해줍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이 말씀도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학 4학년에 발병해서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은 했지만 취업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의 권유로 친구와 같이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친구와 일하면서 평소 내성적이던 성격으로 인해서 친구로부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서 해소되지 못한 채 폭발해버립니다. 그러면 또 입원을 하게 되고… 그렇게 3번의 재발을 하게 됩니다. 보다 못한 제 큰형님이 친구와 일을 못하게 해버려서 6개월을 큰형님 집에서만 지냈습니다.
6개월을 바깥출입을 안 하고 살다가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서 독립을 결정하게 됩니다. 쌍둥이 작은형과 같이 큰형 집을 나와서 원룸에서 생활하면서 다시 친구와 일을 하게 됩니다. 친구와 다시 일을 하면서 달라진 점은 장자와 법정스님의 책들을 통해서 얻은 진리를 적용하면서 점차 제 자신의 스트레스를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친구가 돈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는 것이 저에게 너무 스트레스가 되었는데 다시 일하게 되면서 제 자신에게 최면을 걸면서 스트레스를 다스립니다. ‘친구는 어릴 때부터 어렵게 살아서 돈에 집착하지만 나는 나고 친구는 친구야! 내가 친구의 일거수일투족으로 인해서 상처 받을 필요는 없어. 비록 같이 일하고 있지만 친구의 인생이 있고 나의 인생이 있는 거야. 나부터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려버리자.’라고 주문을 걸면서 친구를 대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차츰 스트레스도 덜 받고 친구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친구와 일한지 10년이 되어갑니다. 처음 3~4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친구가 꾸준히 저를 믿어주고 저도 꾸준히 같이 일하면서 재활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라온데다가 종교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편협한 시각으로 사람을 대하고 거기서 스스로 상처받고 했던 것이 발병하는데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환우들마다 발병요인이 틀리겠지만 제가 봤을 때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서 살아가는 것도 발병하게 되는 하나의 요인으로 보입니다. 제 경우에는 종교적 독선과 독단이 제일 위험했던 것 같고 이것을 극복하면서 차츰 병으로부터 자유로워 진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에는 결혼도 해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아는 분의 소개로 같은 조현병을 앓고 있는 여성을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결혼생활에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환우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병에 걸리는 것은 불가항력으로 발생하지만 병을 이기는 것은 각 사람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다고 보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게 욕심 부리지 마시고 차츰 자신의 옛 과거를 돌아보시면서 자신의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스스로 힐링하다 보면 분명히 좋은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했던 말 중에 ‘이것도 반드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마음에 되새기며 하루하루 포기하지마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며칠 전 이 글을 쓴 다솜이 집들이를 했다. 2년 전 결혼하고 대구 북구 칠곡에 살았는데 최근에 파란마음쉼터 근처로 이사를 왔다. 쉼터 식구들 십여 명과 함께 집들이에 참석해서 재미있게 놀다왔다. 다솜은 ‘물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말을 접하고 자신이 바뀌었다는 말을 한다. 욕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살게 되었단다.
3. 잡초인생
호덕이는 지금껏 300편이 넘는 수필을 썼다. 물론 습작이다. 호덕이의 글은 인터넷 다음의 ‘파란마음 하얀마음’ 카페의 ‘조나단의 문학세계’라는 게시판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 한 편을 소개한다. 제목은 ‘잡초인생’이다.
벌써 나뭇잎이 눈치 없이 떨어집니다. 열정의 마음도 고개를 숙이며 자연의 본연 앞에 숙연해집니다. 고독한 중년, 가을남자의 마음도 함께 고개 숙입니다. 외로움이 가슴 가득 인생의 파도 되어 고독한 나를 깎아 내립니다. 처~얼썩, 처~얼썩 파도 되어 씻기고 씻깁니다. 병든 몸 끌고 여기까지 와서 뒤돌아보지 않음은 계절의 이탈이겠지요. 유년기 자연과 일치했던 동심에 물들어서 잊혀지지 않는 본연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아내와 손잡고 가까운 운동장을 돌다가 한쪽 구석에 초라하게 핀 흔한 잡초를 보면서 인간 본연으로 되돌아갑니다.
'잡초야 외롭지?'
'겨울은 어떡할래?'
'우리 집에 함께 살래?'
장단지가 아프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외로움도 고독도 묵묵히 이겨내는 너의 삶, 침묵은 내가 가야 할 미래의 길이었습니다. 주어진 여건에 충실 하는 미물에 부끄러워 잠이 안 옵니다. 생김새 하나하나 잊혀지지 않고 생생한 흑백 사진되어 내가 됩니다. 어두운 곳 외로움마저 이겨내는 힘이 생겨야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인생 졸업관문을 정식 통과한 것이리라 짐작합니다.
내일 뿌리가 뽑혀도 밤을 지키는 이 시대 그늘의 많은 소수들의 고독은 언제나 잡초처럼 침묵으로 자신의 자리에 있습니다. 미련스러울 정도의 우직함이 사회를 지탱하는 참 아름다움일 것 입니다.
'잡초야 내일은 수필 강의 가니까 모레 보자.'
'겨울엔 우리 집에 가자.'
이틀 후 또 잡초를 보러 갔습니다. 두 포기가 짓밟혀 있었습니다. 축구하는 애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발자국 선명합니다. 저 많은 것을 다 옮기자니 자리도 없고 지나치게 선(善)한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잡초의 인생 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 그렇게 위로도 합니다.
나는 어디에 피어 어떠한 꽃인지? 향기는? 생김새는? 자신의 마음을 채찍질합니다. 절대 선(善)의 뚜렷한 관념, 가장 큰 화두로 남을 선(善), 그래도 버리지 못함의 절대 선(善), 저는 그래서 넘지 못할 운동장 담 너머 세상을 갈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운동장 한 켠에 있어도, 뿌리가 뽑혀도, 묵묵히 살아가는 비참한 이유 없는 최후라도...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음지의 인생도 잡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아침 해가 뜹니다.
본래 풀은 모두 동등했고 잡스러운 풀은 없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잡초가 되었고 하찮은 잡초가 없으면 인간도 살아 갈수 없음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삽니다. 잡초가 점점 사라져갑니다.
과거 인간에게도 등급을 매기던 세상도 있었습니다.
벌써 이른 아침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자신도 잡초가 될 수 있음을 화두로 던집니다. 마음의 회초리가 새벽하늘을 날아 곡선을 그리는 망상. 그리고 환청이 엄습합니다. 회초리의 소리가 마음에 문신으로 새겨집니다.
호덕이는 우리 모두가 ‘인생대학 일상심리학’ 전공자라고 말하곤 한다. 그럴 듯한 표현이다. 지난 5월말에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하고 원고를 던져뒀었다. 지금이 10월말이니 그새 5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호덕이는 많이 좋아졌다. 사고정지 증상도 없어졌고 쉽게 흥분하고 화내던 습관도 거의 없어졌다. 잠도 잘 잔다. 내 생각에 좋아진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병원을 바꾸고 약을 대폭 줄인 덕이다. 매일 클로프프로마찐 250mg을 먹었는데 100mg으로 줄인 게 벌써 3개월이 지났다. 또 하나는 마음이 안정된 덕이다. 병원에 입원했던 호덕이 아내가 퇴원해서 전보다 호덕이를 따뜻하게 대해준 게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호덕이가 세차장 출근을 시작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한다. 출근 첫 날 내가 너무 기뻐서 호덕이 내외에게 저녁을 한 턱 내며 당부했다. “호덕아, 잘하려고 너무 무리하지 마. 반짝 잘하는 건 소용없어. 꾸준히 지속하는 게 중요해.” 호덕이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준 당사자가 한 마디 거든다. “제 경우에는 한 번씩 고비가 찾아오던 데 그 시기를 잘 넘기는 게 중요해요.” “그게 언제쯤이지?” “제 경우에는 일 시작하고 2달이나 3달째가 고비예요. 그 시기 넘기면 괜찮아요.” 호덕에게 “1주일 지나면 또 한 턱 낼게. 그리고 1달 지나면 또 한 턱 낼게.” 약속했다. 1주일 지났다. 고기 파티를 벌였다. 파란마음쉼터 회원들 십여 명이 참석해서 다 함께 기뻐했다.
호덕이가 출근을 시작하고부터 호덕이 아내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요즈음 아침밥 해주신다면서요? 호덕이가 너무 좋아하대요.” 하니, “당연하죠. 같이 노력해야죠. 일하려면 아침 먹어야 해요. 많이 힘든 일이라서 배가 든든해야 해요.” 한다. 호덕이 아내 착한 바보도 지난번 입·퇴원 후에 많이 좋아졌다. 3개월 입원치료 하느라 다니던 학교는 휴학했다. 입원기간 중에 클로자핀으로 약을 바꿨다. 그 때문인지 그토록 심하던 환청이 떨어졌다. 퇴원 후에도 계속 잠이 많았는데, 호덕이가 출근하면서부터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호덕이 아침밥을 챙겨주고 부족한 잠은 낮잠으로 보충한다. 늘 우울한 표정이었는데 웃음이 많아지고 얼굴에 화색이 돈다. 희망이 생긴 모양이다.
4. 정신장애를 극복한 위인들
“사람들은 정신장애와 함께 한다. 정신장애와 함께한 그들의 삶은 풍요로웠다. 아래의 사람들은 조현증, 조울증, 주요우울장애 등과 같은 주요 정신장애 중 하나를 경험한 사람이다. 링컨, 버지니아 울프, 유진 오닐, 베에토벤, 도니제티, 실비아 플레쓰, 미켈란젤로, 처칠, 비비안 리, 패티 듀크, 로버트 슈만, 톨스토이, 니진스키, 존 컷스, 윌리암스, 빈센트 반 고흐, 뉴튼, 헤밍웨이, 지미 피어셀, 찰스 디킨스. 문의 미국정신질환자가족협회(NAMI)"
이처럼 미국정신질환자가족협회(NAMI)는 정신장애를 앓은 위인들의 명단을 포스터로 만들어서 초·중·고등학교에 보내어 복도에 게시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그 명단이 여기저기 소개되어 있다. 쿠키가 메일을 보내왔다. 인터넷에서 정신장애를 앓은 위인들의 이름을 검색했단다.
“그 외에도 프리드리히 니이체, 사무엘 존슨, 조나단 스위프트, 테오도어 루즈벨트, 올리버 크롬웰, 존 스튜어트 밀, 로버트 로웰, 그레이엄 그린, 존 베리맨, 앤 색스톤, 후앙 미로,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등도 정신장애를 앓았어요. 각 사람들마다 증상이나 병명을 알아보고 조사하면 흥미로울 듯한데, 그것까진 못했어요.”
내가 알기로는 베에토벤, 링컨, 처칠, 헤밍웨이, 쇼펜하우어는 심한 우울증 환자였고, 고흐는 조울증 환자였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존 내쉬는 조현증 환자였다. 미국현대정신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설리번(Harry Stack Sullivan, 1892~1949)도 조현증 환자였다. 그는 조현증의 핵심문제가 대인관계장애라는 독창적인 이론을 내놓은 세계적인 학자다. 국내에서는 싸이코드라마로 유명한 정신건강의학전문의 김정일 박사가 자신의 조현증 병력을 공개한 바 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유명한 음악가, 미술가, 과학자, 정치인 중에는 조울증이, 유명한 소설가 중에는 심한 우울증이 많다고 한다. 특히 처칠이 일생을 우울증과 열등감에 시달렸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처칠은 자신의 우울증을 ‘검은 개’라고 불렀다. 이처럼 자신의 증상에 친근하고 약간 우스꽝스러운 별칭을 붙여주는 것도 증상을 다루는 좋은 방법이다.
증상이 때로는 창조성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남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의 연관성을 생각하는 게 때로 훌륭한 과학적 발견을 가져오기도 하고, 훌륭한 문학작품을 낳기도 한다. 시중 서점에는 이와 관련된 책들이 판매되고 있다. 예로써, 「천재들의 광기」, 「천재적인 광기와 미친 천재성: 정신질환과 천재성 사이의 교차점」, 「천재인가 광인인가」, 「열정의 천재들, 광기의 천재들」, 「천재 광기 열정」, 「신이 내린 광기: 짧고도 찬란했던 천재들의 삶」등의 책들이 있다.
증상이 괴롭기는 하지만, 증상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정신장애로 인해 망가진 삶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 삶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병이나 장애에 달린 게 아니라, 각자의 선택과 결심에 달렸다. 위인이 되지 않아도 좋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않아도 좋다. 누가 뭐라 하든, 각자 자기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삶,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면 되지 않을까?
5. 선택의 중요성
재기는 신체장애인이나 정신장애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살이에서 심각한 좌절을 경험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모든 재기경험은 같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재기경험은 전문가나 가족들에게 낯선 경험이 아니다. 재기는 진정으로 통합된 인간 경험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혼, 심각한 질병 등과 같은 인생의 재난을 경험하며, 따라서 재기해야만 하는 도전에 직면한다.”(앤쏘니의 「재기의 전망」에서 인용)
모든 사람의 삶에는 우여곡절이 있다. 고비가 있고 난관이 있다. 가벼운 고비도 있고 심각한 고비도 있다. 때로는 죽을 것 같은 고비도 있다. 너무나 힘들어서 실제로 죽기도 한다. 또한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을 살기도 한다. 하지만 끝내 이겨내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고비나 역경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가? 하는 것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정신질환이나 정신장애, 부모, 타인, 그리고 주변 환경을 탓하지 않는 게 좋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이성적으로, 현실적으로, 효과적으로 적절히 대처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가치관, 사고방식, 생활습관, 대인관계방식 등을 점검해야 한다. 모든 재난과 역경은 개인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전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앤쏘니는 재기는 당사자 본인의 과업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전문가와 가족은 당사자를 도와줄 수는 있다. 그러나 당사자를 재기시킬 수는 없다. 재기는 오직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본인이 재기하기를 선택하는 일이다.
“변화 자체는 어려운 것인지 몰라도 변화를 시작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쾌러의 수기, 스패니올과 쾌러의 책에 수록된 내용,「가족협회보 5호」, 16쪽에서 인용)
첫댓글 본 카페의 [자료실 함께 만들어가기] 메뉴에 있는 <촛불저서> 게시판에 들어가시면, 이 책 (잡초인생: 정신장애인의 삶의 여정) 전체를 무료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단 회원가입을 하셔야만 됩니다. 가입신청 즉시 정회원으로 가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