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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안의(咸陽安義) 화림동(花林洞) 계곡 일원 탐방 안내
(거연정,동호정,농월정계곡-함양선비탐방길)
[개관]-좌안동(左安東)에 비견(比肩)하여 우함양(右咸陽)으로 일컫는 이곳은 지금의 거창군 일부, 옛 안의(安義) 고을을 포괄하며 특히 정자(亭子) 문화의 진수(眞髓)를 보여주는 곳으로 100여 처의 정자로 유명하다. 이곳의 이름난 승경(勝景)인 심진동(尋眞洞, 용추계곡) 심원정(尋源亭), 원학동(猿鶴洞, 수승대계곡) 수승대(搜勝臺), 화림동(花林洞, 농월정/거연정/동호정계곡) 농월정(弄月亭) 등을 삼가승경(三佳勝景)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 등과의 인연으로 현재는 이 지역에 “선비문화탐방길”이 조성되어 있다.
■ 1. 주요 도정
(1) 거연정휴게소[대공원역에서 126km, 1시간 45분]-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거창→전주간 26번 국도상의 육십령 길 중간의 휴게소, 황석산 등행 기점.
(2) 선비문화관-구 봉전교에 개설한 함양 선비탐방길 안내 자료 기타 전시
(3) 거연정(居然亭)과 군자정(君子亭)
(4) 봉전교(鳳田橋)와 영귀정(詠歸亭)[군자정, 봉전교에서 300m, 도보]
(5) 다곡마을 및 다곡교[영귀정에서 700m, 도보], 함양군 서하면 다곡리,
차는 다곡교 입구 대기[거연정휴게소에서 860m]
(6) 동호정(東湖亭)[다곡교에서 1.5km, 승차],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7) 호성마을과 경모정(敬慕亭)[동호정에서 1.2km, 도보]
(8) 람천정(藍川亭)[경모정에서 0.6km, 도보],
(9) 황암사(黃巖祠)[람천정에서 1.5km, 도보],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차는 황암사 주차장 대기[동호정에서 2.9km, 3분]
(10) 농월정(弄月亭) 국민관광지[황암사에서 1.2km, 승차?],함양군 안의면 뤌림리
(11) 중식[농월정에서 4km, 7분]:안의원조갈비집/광풍루 인근-함양군 안의면 광풍로 127-2[안의면 당본리 12-1]. ☏055-962-0666
(12) 광풍루(光風樓)[중식처에서 100m,도보]
(13) 정온(鄭蘊)선생가옥 고택[광풍루에서 17km, 22분],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14) 귀구[정온선생 고택에서 115km, 1시간 40분]
■ 2. 주요 문화재 소개
(1) 거연정(居然亭)-서하면 봉전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천의 암반 위에 건립되어 있는 1동의 건물로, 2005년 10월 13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3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옛 안의(安義) 3동의 하나인 화림동 계곡으로서, 농월정과 용유담, 그리고 거연정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고려 말의 충신이며 정선전씨(旌善全氏)의 파시조인 전오륜(全五倫)의 7대손 동지중추부사 전시서(全時敍)가 1640년(인조 18) 경 서산서원을 짓고 현 위치에 억새로 만든 누정을 처음으로 지었으나, 1853년(철종 4) 화재로 서산서원이 불타자 이듬해 복구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자 1872년 전시서의 7대손 전재학(全在學) 등이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재건립하였으며, 1901년에 중수하였다.
(2) 군자정(君子亭)-1802년 정선 전씨(旌善 全氏) 입향조(入鄕祖)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 공의 5대손인 전세걸(全世杰), 전세택(全世澤)이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는데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으나 내용을 알 수 없다. 군자정이 있는 새들(봉전)은 정여창 선생의 처가가 있던 마을로, 정여창이 처가에 갔을 때에는 현재 군자정이 세워진 유영대에 자주 들렀다 한다.
(3) 영귀정(詠歸亭)-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지번(李之蕃, 1469-1522)을 위한 정자, 호는 송계(松溪), 자는 성중(盛仲)으로 본관은 성주이고 이지활의 손자이며 현감을 지낸 이문현의 아들로서 병곡면에서 태어났다. 학문을 배움에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깨우쳐 논리를 터득하여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당대의 명사들인 표연말, 유호인, 최한후등과 교류하였다 1492년 천거되어 시독관과 사간을 지낸바 있으며 무장(지금의 고창지역)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는데 당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주민간의 불신 및 곳곳에 도적이 많아 민심이 흉흉하였는바 부임한지 한달만에 모든 폐단을 깨끗이 청산하는 명현감으로 이름이 높았다. 조정에서는 그 명성을 인정하여 수안(지금의 황해도 지방)군수로 승진시켜 지방관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게 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가 발생되자 어지러운 조정에서 더 이상 관직생활을 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영귀정에서 책을 벗삼아 세월을 보내다가 1522년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830년(순조30) 송호서원에 제향되었다.
(4) 동호정(東湖亭)-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에 중수가 있었다. 동호정은 남강천 담소중의 하나인 옥녀담에 있으며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강 가운데에는 노래 부르는 장소(영가대), 악기를 연주하는 곳(금적암), 술을 마시며 즐기던 곳(차일암)을 포함하며, 차일암이라고 불리는 수백평의 널찍한 암반이 있어 이 곳이 풍류를 즐기던 곳임을 알 수 있다.
(5) 경모정(敬慕亭)-유래 미상
(6) 람천정(藍川亭)-유래 미상
(7) 황암사(黃巖祠)-황암사는 절이 아니고 호국선열들의 사당이다.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에 있다.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에서 순국한 곽준(郭䞭, 1551~1597), 조종도(趙宗道, 1537~1597) 등 3,500명 선열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714년(숙종 40) 황석산 아래에 사당을 짓고‘황암사’라는 사액을 받아 봄가을로 위령제를 지내왔으나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1985년 김재연 등의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황석산성순국선열추모위원회를 발족 하여 해마다 추모행사를 지내왔다. 1987년 황석산성이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제322호로 지정되자,1998년 사당복원계획을 세워 2001년 호국의총(護國義塚)을 정화하고 사당을 중건하였다. 해마다 음력 8월 18일에 순국선열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낸다. 향사 인물 곽준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 양정(養靜), 호 존재(存齋), 본관은 현풍이다. 임진왜란 때는 김면 등과 함께 출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1594년에는 안음현감으로 부임, 외침에 대비하여 황석산성을 축조하였다. 이후 정유재란 때는 황석산성에서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에 맞서 싸우다 두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조종도는 자 백유(伯由), 호 대소헌(大笑軒),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1558년(명종13) 생원시에 합격한 뒤 안기도 찰방(察訪), 금구(金溝) 현령, 장악원 첨정 등을 거쳐 함양군수로 재직하였다.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 곽준과 함께 황석산성에서 왜군과 싸우다 성이 함락되자 순절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이상 자료출처 : 네이버백과)
(8) 농월정(弄月亭) 국민관광지-함양의 농월정(弄月亭)은 정자가 많기로 유명한 함양을 대표하는 정자이다. 함양에는 남덕유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화림동계곡을 따라 정자들이 줄지어 있는데, 이 화림동계곡의 정자들 중 가장 경관이 좋은 곳에 마지막으로 들어앉은 정자가 농월정이다. 화림동계곡이 이 농월정 앞에서 거대한 너럭바위를 만나 바위 위를 급하게 타고 흐르는데, 이 계류의 흐름이 아주 멋지다. 이 농월정 앞의 너럭바위가 월연암(月淵岩)이다. 농월정(弄月亭)이 달을 음미한다는 의미이고 월연암(月淵岩)이 달의 연못이란 의미이니, 옛날부터 농월정에서 하늘의 달과 월연암에 흐르는 달빛을 즐겼던 것 같다. 농월정은 정자라기보다는 누각에 가까운 규모이다. 화림동계곡 옆에 자리한 농월정은 정자 자체도 반듯하지만, 계곡 건너편에서 화림동계곡의 월연암과 함께 바라보면 그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농월정은 화재로 소실되고 아직 복원이 되지 않은 상태이나 그 주변이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9) 함양 허삼둘(許三乧) 가옥/윤씨고가-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주택. 상량(上樑)한 묵서명(墨書銘)에 ‘歲在戊午九月上樑(세재무오 9월상량)’이라 되어 있어, 1918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집은 당시 재산을 모은 토호가 지은 집으로 집주인과 대목의 의사가 일치되어 호사를 다하였다. 안채는 ㄱ자형이다. 보통의 ㄱ자형이 아니라 고패된 부분을 {{#010}}형으로 한번 접은 형상이고 꺾인 좌우가 거의 대등한 규모이다.
부엌이 중앙에 있다. 부엌으로 출입하는 통로가 전퇴(前退)를 열고 토상화(土床化)한 것이어서 그 구조가 매우 특이하다. 거기에다 부엌문이 앞으로 나와 있어서 이 부분의 구성은 흥미롭다. 부엌은 거의 정방형(16×15.8척)인데, {{#010}}형으로 꺾인 부분이 모가 죽어 일그러져 있지만, 내부에는 기둥이 두개만 서 있어 넓게 보이는 공간이다.
부엌을 중심에 두고 사랑채 쪽으로 방 2칸이 부엌에 이어져 있다. 두줄박이 겹집형인데, 앞퇴에 연한 방은 크고(7.9×7.5척) 뒷방은 작다(7.5×6.0척). 이 방 다음이 4칸 대청인데, 앞퇴까지 합하면 5칸 규모이다. 다음에는 다시 크고 작은 방과 앞퇴가 있다. 부엌의 남쪽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부엌 다음과 다음 칸이 방이다. 역시 크고 작은 방이 겹줄인데, 큰방은 2칸을 터서 널찍하게 쓰고 작은 뒷방은 각각 칸을 막아 사용하였다.
역시 앞퇴가 있다. 다음 칸은 앞퇴를 넓게 하여 마루방이 되고 다음에 방, 그리고 작은방에 이어진 부분에 다시 마루를 깐 마루방이 있다. 크게 보자면 남측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 셈이고, 동측은 정면 4칸에 측면이 3칸인 평면구성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평면이 {{#187}}형인데 정면 7칸으로 구성되었다. 동향하였는데, 그 남쪽 끝칸은 방이다. 전퇴가 있는데, 기루(起樓)하듯 고설(高設)하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다음 칸도 방인데, 앞퇴가 한단 낮아졌고 난간은 여전하다.
다음 칸 역시 방인데, 이 방부터는 앞퇴가 정상높이가 되고 난간이 없으며 뒤퇴가 첨가되기 시작한다. 다음 2칸은 대청으로, 앞뒤퇴가 다 있다.
사랑채 북쪽 부분은 앞부분부터 2칸 두줄박이의 4칸 대청인데, 내루형(內樓形)이며 밖으로 쪽마루를 달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그 뒤로 2칸이 방인데, 북쪽편에 퇴를 두어서 뒤퇴와 연결되게 하였다.
이밖에도 사랑채 오른쪽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바깥행랑채가 위치하며, 또한 사랑채 왼쪽에는 안채를 향하여 북향한 안행랑채가 있다. 안행랑채는 대문간을 포함하여 정면 6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안행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동향한 2칸의 곳간채가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안채·사랑채·안행랑채·곳간채 등에 의하여 집의 전체형상은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이 집의 특색은 무엇보다 안채의 평면구성이 특출하다는 데에 있으며, 이러한 것은 국내에서는 거의 유일한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한옥이 어떻게 변모되었는가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10) 안의(安義) 광풍루(光風樓)-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49-19. 시도유형문화재 92호. 안의면 초입의 남강변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처음 짓고 선화루라 이름 지었던 것을 세종 7년(1425)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다고 한다. 그 후 성종 25년(1494)에 일두 정여창 선생이 다시 짓고 광풍루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1) 정온(鄭蘊)선생 가옥-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중요민속자료 제205호. 조선 중기의 문신 정온 선생 후손들이 그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 건축물. 선생의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정유명(鄭惟明)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정인홍(鄭仁弘), 정구(鄭逑)의 문인. 정인홍이 대북(大北)의 영수로서 권신이 되자 절교하였다. 1601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이 분노하여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하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정현감 김정원이 서재용으로 지어준 두 칸의 집에서 지방 유생들을 가르쳤고, 지방 사람들에게 예를 가르치고 애로를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유배된 송상인(宋象仁)·이익(李瀷)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자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을 때는 인조반정 공신들의 비리와 병권 장악을 공격하였다.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중시하여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 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청나라군에 함락당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죽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서 은거하다가 1641년(인조 19) 73세를 일기로 서세하였다.
★ 인터넷에 소개된 글 한 편
[경남 함양]
크고, 높고, 후덕한 지리산을 품은 경남 함양군은 정자의 고장이자 계곡의 고장이기도 하다. 함양 읍내를 중심으로 위쪽에는 용추계곡과 용추 자연휴양림이 기백산 자락에, 또 남강 줄기를 따라 화림동계곡이 발달해 있고 아래쪽에는 지리산 북쪽 자락에 칠선계곡과 그 들머리인 추성동, 한신계곡과 그 들머리인 백무동계곡, 지리산자연휴양림 등이 들어서 있 다.
▲높이가 15m에 달하는 용추계곡의 용추폭포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해 피서철 여행길도 어렵지 않다 . 용추계곡과 화림동계곡부터 가려면 지곡나들목, 지리산 방면의 계곡이 나 휴양림부터 찾으려면 함양나들목 또는 산청나들목을 빠져나가는 것이 편하다.
먼저 안의면 용추계곡부터 찾아가보자. 지곡IC-농월정-안의면소재지를 지나 용추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기백산 자락으로 4㎞ 들어가면 심원정유원지를 만난다. 이곳에서부터 용추자연휴양림이 있는 곳까지 7 ㎞에 걸쳐 용추계곡이 형성돼 피서객들을 불러 모은다. 거창과 경계를 이루는 금원산(1352.5m)과 기백산(1330.8m)이 만들어 낸 계곡이라 수량 이 풍부하고 길이가 길어 웬만큼 사람들이 몰려도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 준다.
용추계곡 최고의 명당자리는 포장도로가 끝나고 주차장이 만들어진 곳 . 용추사와 용추폭포 가는 길 안내판이 그곳에 서 있다. 폭포까지는 불 과 4백m 거리. 폭포 밑에 서면 용추사 스님의 독경소리와 폭포의 물소리 가 한데 어울려 다른 세상을 찾은 듯한 느낌이 든다. 용추폭포는 높이가 15m가량 되며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 역시 수심이 십여m를 넘는다. 폭포 아래 물가에 단 몇 분만 앉아 있어도 옷이 푹 젖을 만큼 수많은 물방울 들이 분무된다.
안의면과 서상면을 잇는 서하면의 26번 국도는 남강 상류와 나란히 달 린다. 그 물가에 농월정을 비롯해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 등의 정자가 줄 을 잇는다. 강변 정자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풍취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 함양에는 모두 약 150여개의 정자와 누각이 있고 이 중 화림동계곡 을 ‘정자문화의 1번지’로 손꼽는다. 현지 사람들은 농월정에서부터 거 연정에 이르는 경치 좋은 골짜기를 통털어 화림동계곡이라고 부른다.
골짜기 폭이 넓고 물의 흐름이 급하지 않은 데다가 기암괴석이 널린 풍 치는 좀체로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애초 화림동계곡에는 ‘팔담팔 정’이라고 해서 여덟 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와서 는 아쉽게도 농월정 등 네 개의 정자만 남아 있다. 정자들은 한결같이 도로변에서도 쉽게 감상할 수 있으며 정자 아래 물가는 현대인들도 물놀 이를 즐기기에 좋은 명당자리. 화림동계곡을 찾은 피서객들은 그 정자들 누각에 올라서서 누구나 선비의 자세로 돌아가 음풍농월을 즐겨봄직하다 . 안의면 안의향교를 출발, 황석산을 바라보면서 육십령 방면으로 출발하 자면 제일 먼저 만나는 정자가 농월정이다. 1000평은 됨직한 너럭바위 위에 지어진 농월정. 정자 뒤편은 소나무가 울창한 산자락이다. 앞에 자 리 잡은 넓은 반석을 달바위(월연암)라고 한다. 달바위의 사촌형제쯤 되 는 반석들은 농월정 앞 강변을 가득 메워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풍광 이 이러하니 해마다 여름이면 농월정 앞 강변은 인기 피서지로 변모한다 . 농월정에서 발걸음을 떼고 3.5㎞가량 상류 방면으로 오르면 동호정 정 자가 기다린다. 정자 앞 계곡에는 길이 60m 정도의 바위가 섬처럼 떠 있 다. 차일암이라는 이름이 딸린 이 바위 역시 곳곳에 글씨들이 음각돼 있 는 것으로 미뤄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의 풍류처로 각광받았던 게 틀림없 다. 동호정에서 1.5㎞가량 더 오르면 군자정 거연정을 차례로 만난다.
화림동계곡은 하룻밤 묵기보다는 한나절 지나가는 길에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함양이 고향인 사람들은 타지에 살면서도 함양 상림이라는 숲을 늘 그 리워한다. 함양읍 운림리에 있는 이 숲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숲 으로 신라시대의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이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1100 여년 전 천령군(지금의 함양군) 태수를 지낸 최치원은 여름마다 위천이 범람해서 읍내가 물바다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둑을 따라 나무를 심 어 거대한 숲을 만들었다. 이것이 1000여년 동안 함양을 지키고 있는 상 림이다. 흙냄새 폴폴 풍기고 실개천 졸졸 흐르는 상림 중심부의 3000여 평 땅은 공설운동장으로 변모해서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함양군 남부는 지리산 연봉의 북쪽 사면이 차지하고 있다. 청정한 산줄기를 따라 칠선계곡과 추성동, 한신계곡과 그 들머리인 백무동계곡 , 벽소령과 지리산자연휴양림 등이 저마다 다른 빛깔로 여행자들을 맞이 한다. 지리산 벽소령 광대골 및 비리내골 일원에 들어선 지리산자연휴양 림(055-963-8133)은 지리산이라는 지명 하나만으로도 전국의 여행객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가족용 산막, 단체산막, 텐트를 치기 위한 야영데크 등 시설도 잘 갖췄고 개장한 지 몇 해 안 돼 시설물 상태도 양호하다.
휴양림을 관통하는 계곡은 벽소령과 그 주변 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그 대로 모여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청정미를 가득 선사한다. 이끼 낀 바위와 거침 없이 낙하하는 물줄기, 투명하기 그지없는 계곡수는 원시림 을 방문한 듯한 착각마저 들게 만든다. 계류는 잠시잠깐 손을 적시기만 해도 냉기가 뼛속까지 사무쳐든다.
◆여행 메모(지역번호 055):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함양행 버스가 하루 9 회 정도 운행된다. 숙박시설로 용추계곡 주변에 용추장여관(963-8055), 금은산장(962-4772), 안의면 소재지에 금성장(962-0267), 오아시스장(9 63-8170) 등이, 지리산자연휴양림 입구에는 벽소령모텔(962-5640), 노루 목산장(964-2035), 송죽가든민박(963-9955), 지리산방갈로(963-0755) 등 이 있다. 맛집으로는 함양읍내에 우대회관(숯불갈비, 962-3300), 안의면 소재지에 삼일식당(갈비찜, 962-4492) 등이 있다. <글·사진 유연태(여행작가, 옛돌 자문위원) kotour@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