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홍은원 洪恩遠( Eun-won Hong )의 대표작 : 여판사
출연 : 문정숙, 김승호, 유계선, 김석훈, 엄앵란, 박암, 방성자, 황정순, 복혜숙
진숙은 여판사라는 아내의 사회적 지위에 열등감을 느끼는 남편과도 점점 멀어지고 시어머니와 시누이 역시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하지만 진숙은 한 가정의 아내와 며느리로서 의무를 다하는 한편 판사라는 직책에도 충실한다.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시할머니의 죽음이 살인이라 밝혀지고 시어머니가 범인 혐의를 받게 되자 진숙은 그녀의 무죄판결을 위해 변론을 맡는다.
<여판사>는 당시 세상의 관심을 받았던 여판사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착안하여 제작된 영화이다.

홍은원(洪恩遠, 1922년~1999년)
본관은 풍산(豐山), 예명은 홍설아(洪雪娥), 홍진아(洪眞娥). 출생지는 전남 순천이다.
고조부는 증 의정부 좌찬성 홍희명(洪羲命), 증조부는 봉사 홍일모(洪一謨), 조부는 한성판윤 예조판서 전보국 초대총판을 지낸 홍철주(洪澈周), 부는 홍우만(洪祐晩)이다.
그는 스크립터로 출발해 조감독을 거쳐 시나리오작가, 작사가, 감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보인 충무로의 정통파였다.
실제로 스튜디오에선 언니로 통할 만큼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1950년대 중후반 그는 전창근, 유두연 감독과 허백년 평론가 등 영화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 나일구 다방에 자주 나타났다.
명동에는 이 다방과 함께 김승호, 김동원, 장민호와 같은 배우들이 드나든 동방살롱 등이 있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에서 명동 방향 골목에 있던 예술인들의 찻집이었다.
충무로에 스타다방, 청맥다방과 같은 영화인들의 휴식 공간이 미처 생기기 전에 나일구 다방에 자주 나타났고, 작고 가냘픈 몸매로 활달하고 정이 깊었다.
그의 두 번째 감독 작품 <홀어머니> (1964)였다.
1922년 9월 24일 은행가인 홍우만(洪佑晩)의 2남2녀 중 둘째 딸로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교육자인 어머니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거쳐 경기고녀(경기고등여학교, 現 경기여고)에 입학한 뒤에는 학과보다 오히려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해방전 경기고녀를 졸업했으나 집안 형편이 나빠지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하고 들어가게 된 것이 마루젠(丸善)주식회사였다.
다행히 서적부 소속이라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이곳에서 1년 3개월을 보내고 아버지를 따라 만주 신경(新京)의 반관반민의 직장으로 옮겼다.
1940년 초여름 새 직장에서 합창단원으로 뽑히고 다시 1년 만에 신경음악단의 홍일점 가수가 된다.
조선영화사에서 음악을 담당한 친지를 졸라 최인규 감독을 소개받은 것은 여름휴가를 얻고 경성(서울)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최 감독은 그에게 <태양의 아이들>이라는 시나리오를 건네주며 하고 싶은 역할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연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8·15 광복을 맞아 서울에 돌아온 것은 1946년 11월 초순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박계주 작가 일행을 따라 돈암동 최인규 감독 집을 방문했고, 최 감독은 그에게 다음 작품인 <죄 없는 죄인>(1947)의 스크립터 일을 제의했다.
이때 그가 촬영 현장에서 터득한 것이 영화제작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홍은원은 이 일이 끝나자 다섯 살 아래인 극작가 이용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양가 부모의 반대 속에 이루어진 부부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딸(이희재 숙명여대 교수, 박물관장 역임)을 낳고 4년 8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1953년 초가을 촬영기사 한형모의 권유로 조정호 감독의 <여군>에 조감독 겸 스크립터로 들어가 현장 감각을 익히고, 잇따라 전창근 감독의 <불사조의 언덕>(1955), <단종애사>(1956)와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 <사랑>(1957)의 스크립터 겸 조감독 일을 했다.
특히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 때/ 검은 머리 큰 비녀에 다홍치마 어여뻐라”로 시작되는 그의 작사곡 ‘백치 아다다’(김동진 작곡)는 여주인공인 가수 나애심이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홍은원은 그사이 시나리오에도 손을 댔다. 신경균 감독의 <유정무정>(1959)과 유두연 감독의 <젊은 설계도>(1960)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후 시나리오작가 유두연의 콘티뉴이티 담당 수석 조감독으로 들어가 그의 감독 데뷔작 <조춘(早春)>(1959)과 <사랑의 십자가>(1959)를 완성시키고 윤봉춘 감독의 <여인천하>(1962), <애정삼백년>(1962) 등에 참여하며 시대물을 익혔다.
그에게 메가폰을 잡을 기회가 온 것은 이 무렵이다.
1962년 4월 <사랑의 십자가>를 찍은 장환(張煥) 기사가 원고 한 뭉치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어느 여판사의 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여판사>(1962, 명보극장 개봉)였다.
뜻밖에 화폐개혁이 단행되는 악조건 속에서 어렵게 완성한 문정숙 주연의 <여판사>는 “여감독다운 섬세한 플롯의 전개에 명확한 커팅은 몇 사람의 중견감독을 조감독으로서 오히려 길러낸 숨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새영화 ‘여판사’, 「경향신문」)는 호평을 받았다.
이어 조미령 주연의 <홀어머니> (1964, 아세아극장)와 김지미주연의 <오해가 남긴 것>(1965)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 작품 이후 그에게 좀처럼 연출의 기회가 오지 않았고, 영화 현장에서 물러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앓다가 1999년 1월 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76세의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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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홍씨 따님들 대단합니다 풍홍의 자랑스러운 분들 많이 발굴하여 많은분들께 알려야 할것으로 생각됩니다
홍기택님 감사합니다 종친회 카페에도 올려주십시요
참고사항 : 이분(1922년생)은 추만공파이신데 증조부 洪逸謀는 족보상 洪一謨로 되어 있으며
이분의 직계분들 22세(植) 이후분들이 족보상 올라 있지아니하여 궁금하던차였읍니다
집안되시는분들 께서는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추만공파 종회장 홍기천 올림 전화 010-2936-0567
추만공파 맞고요? 이분들의 5촌 조카인 洪慶三(족보상 성명: 洪秉吉)씨가 미국 LA에 거주하다가 10여년전에 귀국하여 국내에 거주하고 있고 화가로 활동하고 있어 洪承業, 洪承一씨의 후손에 대해서도 혹시 연락이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문헌공 이판 홍열모 가문이신데 이분의 간찰 몇점이 경매에 오랫동안 나와있으며
홍경삼씨댁을 찾는 홍정식이라는 노대모(1922년생, 전화 서울02-904-2167 ) 가 계십니다
풍홍의 진면목이
돗보이내요
글과 문학에
조예가 깊은 집안
내력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