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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브레히트 이야기
1. 현실 변화의 실체
루카치(1885-1971)와 브레히트(1898-1956)는 우리 사회가 특히 역동적으로 변해가고 있던 시기에 문학계와 문화계 일각에서 심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들이 한목소리로 표방한 리얼리즘은 민족문학 내지 민중문학의 핵심원리로 대접받았다. 반공이데올로기의 위세 때문에 루카치의 실명을 공공연히 거론하며 논쟁하기 어렵던 시절에도 전형이나 총체성 혹은 리얼리즘의 승리 개념은 여기저기서 긍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구상을 어설프게 비난하다가는 문화운동 내지 변혁의지 자체에 대한 불경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당시에는 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꽤 널리 퍼져가는 추세였고, 그 목표지점으로는 현실사회주의체제도 제법 유력한 후보였다.
루카치와 브레히트가 존중받은 것은 무엇보다 변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현실사회주의체제 내부에 머물면서도 스탈린주의 내지 경직된 관료주의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지만, 당시에는 이 비판적 거리보다 사회주의 내부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이 더 중요한 매력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체제가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를 몰고 오며 붕괴했을 때, 루카치나 브레히트도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일시적인 알튀세르 유행에 이어 포스트주의가 이데올로기 시장을 휩쓸었다. 포스트주의의 홍수 이후로 리얼리즘에 대해 진지한 어조로 말하려면 문화적 보수주의 내지 지적 태만의 혐의를 각오해야 하는 분위기가 문학계나 학계 곳곳에 스며들었다. 운동경력에 대한 반성문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왕년의 쟁쟁한 리얼리즘 논객들조차 리얼리즘의 핵심개념들을 파괴하여 지적 유행에 편승할 자격증을 따내기도 했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이 그 반성문의 골자다.
분명히 세상은 달라졌다. 대통령을 향해 온갖 험담을 늘어놓아도 모처로 끌려가 두들겨 맞는 일은 없는 것 같다. 맑스나 레닌의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불안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러는 사이에도 자본주의의 주요 본성인 양극화는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50%를 넘나드는 비정규직은 노동운동의 양심을 시험하고, 유서 깊은 정경유착과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불문율은 변함없이 우리의 법치주의 수준을 조롱하고 있다. 평등주의에 대한 정치적 혹은 맹목적 알레르기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주류 이데올로기에 주눅들 필요 없이, 무엇이 달라졌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달라졌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지배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는지, 그저 지배의 효율성이 늘어나고 있을 뿐인지, 세계자본의 회전속도 혹은 욕망재생산의 가속도 때문에 근본적 변화를 향한 감각들이 일시적으로 마비된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하는 것이다. 아직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루카치와 브레히트를 미라로 만들어 역사박물관에 처박아두기보다 그들과 더불어 생각하는 쪽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그들을 함께 엮어서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에 직접적인 긴장관계가 존재하던 시점에 논의를 집중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2. 문화정치적 대차대조
이미 1930년대에 브레히트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을 형식주의라고 비난했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데도 루카치는 괴테나 발자크 혹은 톨스토이 식으로 글을 쓰라고 작가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때 브레히트가 지적하는 세상의 변화가 사회적 지배관계의 근본변화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브레히트도 파시즘과의 투쟁 혹은 계급투쟁이 첨예화되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그 변화는 지배와 저항의 양상이나 강도 등일 뿐인 셈이다.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에 대한 브레히트의 비난에서는 실제로 달라진 사회구조보다는 브레히트 자신을 사로잡았던 청산주의적 혹은 기능주의적 편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브레히트는 톨스토이나 발자크를 모범 삼아 전형의 형상화를 표방하는 루카치의 소설 중심 리얼리즘론에 맞서, 신문, 라디오, 영화 등 신흥 대중매체들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르포르타주, 몽타주, 의식의 흐름, 소격효과 등 현대적 예술기법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활용하려 했다. 맑스주의에 가장 접근했던 시절의 벤야민은 [생산자로서의 작가]에서 브레히트를 러시아의 문화운동가 트레챠코프와 함께 주인공으로 다룬다. 그들은 전통적인 예술장르들 사이의 경계선만 아니라 작가와 수용자의 경계선까지 허물려는 문화적 급진주의를 추구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예술과 일상의 경계선을 허물려고 한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과 친화적이었다. 그들의 예술관은 해방적 기능주의 혹은 좌파 실용주의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능주의에 근거해 브레히트는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이 계급투쟁으로부터 멀어지며 예술적 향유에 과도한 비중을 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새로운 매체와 예술기법들은 브레히트나 그의 친구들이 기대한 만큼 지배관계를 바꿔놓는 데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특히 매체들은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의 쌍방향 매체로서 해방의 무기로 발전하기보다, 얼마 후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 속의 ‘문화산업론’에서 신랄하게 서술했듯이 자본의 손아귀 안에서 대중기만의 도구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의 인터넷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라디오나 영화보다 벤야민과 브레히트의 기대에 훨씬 더 부응할 테지만, 인터넷의 해방적 기능에 대해서도 아도르노는 근본적으로 불신할 것이다. 매체들은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을 근본적으로 달리할 수 있을 텐데, 장악력의 측면에서 민중보다는 자본과 정치권력의 우위를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파시즘 시대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매체전쟁의 불필요성이 아니라 불가피성을 입증한다. 벤야민이나 브레히트의 매체에 대한 기대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미래진행형으로서 의미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루카치도 그렇게 비정치적인 예술론에 빠져 있는 예술지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우선 그는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자아비판 이후 레닌주의를 적극 받아들였고, 부르주아 유산에 대한 레닌의 긍정적 입장, 혹은 프롤레트쿨트의 청산주의에 대한 레닌의 비판(“좌익 소아병”)을 문학이론의 근거로 삼을 수 있었다. 또한 독일 프롤레타리아 혁명 작가동맹 내의 문학논쟁을 통해 그는 독일공산당의 문화정책노선에 부합되는 문학론을 구상했다. 그는 1920년대 말에 작가동맹에서 횡행하던 소재주의나 출신주의(조산원테제)의 편협성을 넘어서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현실의 본질적 모순들을 대중들이 생생히 체험할 수 있도록 형상화하라는 전형 요구도 대중들을 공산당 쪽으로 끌어당겨야 한다는 실천적 과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그의 리얼리즘론이 예술향유에 치중한다는 브레히트의 비판은 일종의 정치적 수사법인 셈이다. 전형에 대한 루카치의 원론적 요구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요구가 예술적 성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구체적 결과는 예술가들의 실천에 달려 있을 뿐이다. 작가들이 전형을 마음 한 쪽에서 염두에 둔다고 해서 그들의 활동공간이 위축된다고 미리 단정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전형의 형상화를 중심으로 하는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은 스탈린체제에서 독점적 지위를 얻게 된 사회주의 리얼리즘론과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또 루카치 자신이 다양한 현대적 예술기법들에 부르주아 퇴폐주의의 산물이라는 혐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는 표현주의의 반시민, 반폭력, 반전 운동을 사이비 투쟁 내지 ‘비판의 외관을 띤 기생주의’라고 처단했고, 르포르타주는 자신의 계급에 불만을 품지만 프롤레타리아적 실천과 투쟁에 가담하지 못한 소시민 작가들의 겉도는 문학형식이라고 정리했다. 서사와 대조되는 묘사의 평준화 성향에서 그는 현실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은폐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의도를 간파했다. 루카치의 비판을 예술형식 속에서 내용을 읽어내는 유물변증법적 예술론의 주요 성과로 평가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현대의 실험적인 예술을 대할 때면 루카치는 발자크나 톨스토이 혹은 토마스 만을 비롯한 부르주아 작가들을 평가할 때의 우호적이고 섬세한 논리를 대신해 가차 없는 비난의 언성을 높인다. 이런 경직성에서는 1930년대 반파쇼 변혁 문예운동 내부 노선투쟁의 절박성에 기인하는 과장법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레히트나 벤야민도 이러한 과장법 문제에서 결백하지는 않다. 이들의 글에서도 매혹적이지만 별로 현실적이지 못한 이론적 과장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래도 브레히트는 루카치보다 당의 문예정책노선과 좀 더 동떨어진 국외자의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과거 부르주아 유산에 대한 그의 경멸은 작가들에게 그다지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역학관계가 조성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벤야민과 브레히트는 예술기법의 ‘기능전환’ 개념을 통해 루카치에게 박해 받는 새로운 기법들에 시민권을 마련해주고자 했다. 현실을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유래한 기법들도 그 기능을 바꾸어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데에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사회주의 건설기의 다양하고 열정적인 예술실험들을 옹호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루카치는 기능전환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써먹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리얼리즘론이 기능전환을 처음부터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묘사기법이 서사형식 속에서 적절히 활용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의식의 흐름이 주인공의 의식세계를 입체적으로 밝혀주는 데에 유용할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문예운동 전략이었다. 즉 어떻게 해야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접근하여 이들을 근본적인 현실문제 해결에 끌어들이는 데에 예술적으로 기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루카치는 전형의 형상화가 효율적인 예술적 실천의 핵심조건이라고 보았고, 브레히트는 톨스토이나 발자크에게서 모범적으로 이루어지는 전형의 형상화를 낡아빠진 할머니의 이야기방식이라고 조롱했다. 부르주아 유산들 가운데 루카치는 부르주아 상승기의 유산들을 프롤레타리아들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보았고, 브레히트는 루카치가 퇴폐주의로 분류한 현대의 산물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의 차이는 정치적 계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이 좌파 메시아주의에 빠져 있다는 레닌의 비판에 직면한 후 점차 현실감각을 기르며 레닌주의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현실감각은 「블룸테제」에서도 상당한 수준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당대 헝가리의 정치상황을 분석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불가능성을 진단하고 민주세력의 결속을 통한 반파쇼투쟁의 절박성을 지적했다. 이는 레닌의 민주독재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이었으며 비교적 적절한 판단이었지만 코민테른으로부터 우편향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루카치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시 독일에서 공산당은 사민당을 파시즘의 쌍둥이라고 비난하고 사민당은 공산당을 소련의 하수인쯤으로 깎아내리고 있었다. 반파쇼 대동단결은 생각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파시즘의 집권과 위협에 직면한 소련은 인민전선을 표방하면서 반파쇼세력의 결속을 추진한다. 「블름테제」로 정치일선에 물러나 문학과 미학 연구에 몰두하던 시기의 루카치는 이미 대중들의 자생성을 비판하고 의식성을 강조하는 레닌의 관점을 적극 수용하고 있었다. 그의 소설 중심 리얼리즘론 혹은 작품중심주의는 전문적 혁명가의 위치에서 대중들을 의식화하려는 레닌의 전위주의와도 부합된다.
반면에 브레히트는 작가와 독자 간의 엄격한 구분을 부르주아적 소유권의 유물이라고 보아 불신했고, 수용자를 창작과정 내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했으며, 민중들의 정치의식에 대한 신뢰를 천명했다. 그의 예술론은 루카치의 작품중심주의에 비할 때 작가나 작품 못지않게 수용자 쪽에 많은 비중을 둔다. 이 점에서 브레히트는 루카치보다 훨씬 더 문화적 민주주의 내지 대중노선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루카치가 “옳든 그르든 나의 당”이라는 입장에서 스탈린의 오류들을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다고 이해한 데에 비해, 브레히트는 좀 더 스탈린주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망명지 소련은 그에게 무심했다. 그의 친구 카롤라 네어가 스탈린의 테러정치에 희생될 때에도 그는 속수무책이었으며,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망명지를 옮겼다. 그는 극좌 편향 때문에 독일 공산당에서 제명된 코르쉬에게서 맑스주의를 배웠고, 반파쇼 대동단결을 추진하던 인민전선 기간에도 민중성을 계급적 관점과 결합시키면서 계급투쟁의 구호 아래 루카치를 비난했다. 이는 당에 대한 조직적 의무를 짊어질 필요가 없었던 국외자의 원론적 구호일 뿐이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코르쉬의 변증법적 사고방식이 브레히트에게 끼친 영향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선된 세계를 개선하고 사회주의를 사회주의화하자는 브레히트의 요구는 공산사회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선전하는 스탈린주의와 어울릴 수 없었다. 이차대전 후 루카치가 소련, 동독, 헝가리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정착할 수 있었던 데에 반해, 브레히트의 동독 행은 자의 반 타의 반의 강요된 선택이었다.
3. 피억압자를 위한 진실 투쟁
정치경력이나 문예이론 상의 차이들 이상으로 중요한 공통점이 없다면 루카치와 브레히트를 묶어서 논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파의 눈에는 두 사람 모두 별로 다를 바 없는 스탈린주의자들이었으리라는 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그들이 공히 사회주의와 리얼리즘을 자신의 이론적 예술적 실천의 구심점으로 설정했던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루카치가 전형 개념으로 현실의 본질적 모순들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듯이, 브레히트도 다양한 현대적 기법들 자체를 물신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동원해 현실의 근본문제들을 변혁적 관점에서 인식하는 데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은 표피적인 디테일에 매달리는 자연주의를 한목소리로 비판했으며, 정태적 현실파악에 대해서는 누가 더 적극적으로 반대했는지 판정하기 어려울 정도다. 브레히트가 제시하는 다음의 리얼리즘 개념 가운데 루카치가 원칙적으로 거부할 부분은 별로 없을 것이다. “리얼리즘적인 것은 사회적 인과관계의 복합체를 발견하며, 지배자들의 관점이 지배자들의 관점이라는 점을 폭로하며, 인류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포괄적인 방안들을 마련하는 계급의 관점에서 글을 쓰며, 발전의 계기를 강조하며,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루카치와 브레히트가 같은 자리에 앉아 논쟁을 벌여서 위의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브레히트는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에 형식주의 내지 관념론의 혐의를 씌우는 맥락에서 위의 규정을 정리했다. 설혹 두 사람이 합의를 했더라도 그러면 구체적으로 “사회적 인과관계의 복합체”가 어떤 것이며, “가장 시급한 문제들”이 무엇인지 따지고 들어가면 다시 논쟁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본질적 모순들의 형상화’라는 전형 개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무엇을 본질적인 모순들로 볼 것인지는 작가나 독자마다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루카치가 표현주의를 가혹하게 비판한 데에 반해, 블로흐는 역시 리얼리즘을 들먹이면서 현실의 균열상태를 근거로 표현주의를 옹호하고 루카치의 입장을 관념론이라고 비판했다. 루카치도 이런 비판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는 않았고 블로흐가 근거로 삼는 현실의 균열상태라는 것이 무반성적 체험의 산물, 곧 블로흐의 주관적 관념일 뿐이라고 응수했다.
이와 같은 논쟁상황은 몇몇 시끄러운 맑스주의 문예이론가들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반복되고 있는 일반적 상황이다. 루카치에게 현실인 것이 블로흐에게는 관념론적 구성물이 되기도 하며, 루카치가 본질적 모순들이라고 여기는 것을 브레히트는 꼭 본질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일반적 상황을 확인한다고 해서 진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무의미하다고 보는 회의주의나 진리는 각자 보기 나름이라는 식의 상대주의에 얼른 귀의할 필요는 없다. 루카치든 브레히트든 또 벤야민이든 블로흐든 절대적이고 영구적으로 타당한 현실인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 어떤 인식이든 오류와 논박과 수정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루카치나 브레히트가 원론적으로 이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공통으로 받아들이는 유물변증법적 인식론에 의하면 인식은 무궁무진한 대상에 접근해 가는 무한한 과정이며, 완전하게 완결된 인식은 성립될 수 없다. 우리는 현재의 인식능력과 검증장치로 논박할 수 없을 만큼 상당히 타당한 인식들을 진리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특정한 현실인식을 참이라고 내놓는 사람은 자신의 인식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루카치나 브레히트가 모든 인식의 오류가능성을 원론적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내 주장도 틀릴 수 있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며 논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관념론자로 몰아갈 수는 없다. 자신의 인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는 것은 논쟁주체의 천성이다. 문제는 그렇게 제시된 인식의 객관적 가치다. 인식주체가 절대적임을 표방한다고 해서 그 인식이 절대적으로 타당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현실과의 대질(실천)을 통해 객관적으로 유효한 한에서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무한히 복잡하고 가변적이며 현실과의 대질 역시 끊임없이 새롭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현실과의 이러한 긴장관계를 견딜 수 없어 절대성에 대한 요구를 실재와 혼동할수록 관념론에 빠질 위험은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절대성에 대한 요구 자체를 죄악시할 이유는 없다. 그 요구에 대한 책임을 묻고, 제시된 인식이 그러한 요구에 부합되지 않을 때, 즉 현실과의 대질에서 부적절한 부분이 드러날 때에는 인정할 부분만 인정하고 부적절한 부분은 비판하고 수정하거나 경우에 따라 폐기하면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루카치나 브레히트 혹은 그 이전의 레닌이나 맑스 엥겔스의 권위 내지 독선적 논조에 현혹될 필요가 없다.
현실인식이 주체의 입지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는 사실로 인해, 당파성을 진리의 방해요인으로 보아 진리와 깔끔하게 분리하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진리가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 즉 진리 효과의 당파성을 염두에 둔다면, 리얼리즘이 만인의 환영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납득할 수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중요한 진실들, 예컨대 은폐되거나 묵살되고 있는 지배관계의 역사적 실상을 들춰내는 것은 그 지배관계를 초역사적 인간조건으로 굳히고 싶어 하는 지배자들에게 몹시 달갑지 않은 일이다. 반대로 피지배자들은 그러한 폭로를 지배관계의 변혁으로 향하는 첫걸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 점에서 리얼리즘은 원칙적으로 피지배자들의 예술이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리얼리즘과 민중이 자연스럽게 결합된다고 보았다. 루카치가 리얼리즘 작가들에게 프롤레타리아적 혹은 민중적 실천을 기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브레히트에게 당파성은 결코 당에 대한 조직적 의무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점은 당조직에 깊숙이 관여했던 루카치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브레히트가 루카치의 모더니즘 비판을 염두에 두며 작가들의 자유를 요구했듯이, 루카치도 당의 지시에 일일이 따르는 것이 작가의 의무는 아니라고 보았으며, 당 노선에 대한 작가의 의무와 자율성 사이에서 접점을 찾고자 했다. 이 접점을 그는 ‘빨치산’이라는 비유로 요약했다. 작가는 당의 노선을 존중해야 하지만, 투쟁 속에서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환경 조건들을 활용하여 독창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당이 오류를 범할 때 당의 판단과 거리를 둘 최소한의 가능성을 작가들에게 열어주는 셈이다.
루카치에게는 무엇보다 −우여곡절을 겪지만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현실을 충실히 드러내는 일, 곧 문학적 진실이 당파성의 요체였다(객관적 당파성). 스탈린 시대에 강조되었던 혁명적 낭만주의에 대해서는 ‘국유화된 낙관주의’라고 보아 거리를 두었다. 그는 당파성을 당 조직과 떼어놓았듯이 작가의 주관적 입장(경향)과도 구분했다. 프롤레타리아를 위하겠다는 작가의 주관적 의도가 고스란히 작품으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작품을 통해 발현되는 당파성이라는 것이다. 엥겔스가 제기한 리얼리즘의 승리 문제를 루카치가 세밀히 검토한 것은 이러한 작품 중심 객관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효과 내지 기능을 중요시한다면 독자들의 영역에까지 논의를 밀고 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루카치는 이와 관련해 멀리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면 바람직한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듯하다. 물론 전형에서도 독자들이 생생한 체험을 통해 본질적인 현실문제들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관건이며, 따라서 전형 개념에는 효과에 대한 문제의식이 함축되어 있는 셈이기는 하다. 브레히트는 루카치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독자들의 의식변화를 추구했다. 교육극과 서사극, 그리고 소격효과 개념 등이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데에 머무는 자연주의 연극에 대한 반감의 산물이었다. 즉 브레히트는 소격효과를 통해 등장인물들에 대한 관객들의 환각적 동일시효과를 파괴하고 자동화된 사고방식을 뒤흔듦으로써, 관객들이 무대 위의 사건에 대해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고 변혁적 현실인식에 도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험담처럼 브레히트의 기발한 극작품들은 그저 ‘구원 받은 자들에 대한 설교’가 되었거나 연극창작방법의 가능성을 조금 넓히는 데에 그쳤을 수도 있다. 실제로 브레히트 극의 현실인식 효과 내지 정치적 효과는 낡은 소설 기법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태백산맥에 한참 못 미칠 것이다. 그가 혐오한 동일시 효과도 독자들을 사로잡는 강력한 무기로서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고 있다. 브레히트는 작품이 자아내는 감동이라는 것이 현실인식을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보았고 눈물이 아니라 웃음을 권장했지만, 수용자들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인식만이 아니라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이 함께 동원되어야 한다. 거리감을 유지해야 할 인물이나 사건이 있고(대개 풍자의 대상들) 공감 내지 동일시를 권장할 만한 인물이나 사건이 있는 것이다. 어느 하나를 유일한 정답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현실이 간단하지는 않다. 위대한 작품들은 그 양면을 적절한 배율로 구성함으로써 현실의 복합구조를 따라잡고 있다는 환각도 유발한다. 브레히트의 주요 작품들은 대개 긍정적인 변혁운동을 내부로부터 그려내기보다 지배적 편견들을 폭로하는 데에 장기를 보인다. 현실은 부정되어 마땅한 것들로 넘쳐나며 이 점에서 브레히트의 진실 투쟁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태일을 비롯한 민중들의 무수한 생존권투쟁․인권투쟁, 그리고 찬란했던 순간의 민주화투쟁에 비판적 거리를 둔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 물론 그러한 운동 속의 부정적 요인들․국면들에 대해서도 냉정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점을 묵살한다면 그만큼 리얼리즘적이지 못하다.
현실 속의 운동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충돌 속에서 운동의 해방적 성격을 고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복잡하게 변해갈 것이다. 리얼리즘은 이러한 복잡성을 감당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리얼리스트는 자신의 문학행위를 통해 야기될 결과들에 대해서도 의식할 필요가 있다.(맥베스 효과) 이 경우 총체성의 개념이 의미심장해진다.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루카치는 총체성을 사물화된 의식, 즉 파편화되고 정태적인 사고에 빠진 의식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제시했다. 총체성의 관점을 취한다는 것은 사물들의 연관관계들에 주목하고 그 속에서 인간관계를 간파하며 그것들이 주체의 노력을 통해 변할 수 있다고 보는 역동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의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 자아비판을 하지만 이 총체성 개념은 버리지 않았다. 이를 작품의 유기적 구성에 대한 강요 따위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유기적 구성의 환상을 열심히 깨고 싶어 했던 브레히트도 사물화에 맞선 루카치의 투쟁에 흔쾌히 동참할 것이다. 총체성 개념에서 어떤 신적 전지전능을 연상하지는 말자. 총체성에 대한 요구는 가능한 한 포괄적인 맥락에서 본질과 비본질의 경중을 따지면서 사태를 이해하자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에 불가피하게 따르는 일면성에 쉽게 굴복하지 말자는 고무의 말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실천적 위치를 빼먹고 현실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경고로 해석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총체성을 맑스주의의 요체로 부각시킨 루카치도, 그와 대립각을 세우며 그의 리얼리즘론을 넘어서고자 했던 브레히트도 초역사적 총체적 진리를 남겨놓지는 않았다. 그들이 평등사회로 나아가려 고투하며 남긴 인식들은 역사적 조건의 산물들이기도 하다. 그 속에는 과장과 왜곡과 일면적 이해들이 산재해 있다. 그들의 투쟁흔적에서 합리적 핵심을 끄집어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도 물론 우리의 몫이다.
2006. 8.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