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지키신다!
빌립보서 4:4-7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과학자들이 로켓을 더 크게 만들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기술력이 부족하거나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로켓을 더 크게 만들 수 있는 기술력과 예산은 있다.
그럼에도 더 크게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미국에서 우주선을 만드는 공장은 유타주에 있다.
그리고 로켓을 발사하는 우주국은 플로리다주에 있다. 공장에서 우주국까지 로켓은 철도로 옮긴다.
철도는 터널과 다리를 지나야 하므로 이를 위해서 로켓은 철도의 크기에 맞춰서 제작한다.
로켓의 크기는 철도의 폭에 따라 결정된다. 기차선로의 폭은 4피트와 8.5인치이다. 약 143cm이다.
미국의 선로의 기준이 된 것은 영국의 석탄 운반용 철로이다. 이 철로는 당시 영국의 길의 넓이를 맞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영국의 길의 넓이는 2000년 전 로마 사람들이 만든 길로서 로마 전차의 폭에 맞추었다.
로마의 전차는 말 두 마리가 이끈다. 따라서 로마의 길은 말 두 마리의 엉덩이 폭에 맞췄는데, 약 4피트 9인치이다.
결국 지금 우주선크기는 로마 사람들이 말 두 마리의 엉덩이의 폭에 맞춰 만든 도로의 넓이에 따라 결정되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는데, 그 길은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길이다.
만약에 로마 사람들이 좀 더 넓게 도로를 만들었다면, 우주 왕복선의 크기도 더 커졌을 것이다.
로마 사람들은 우주선을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자신들에게 필요한 도로를 만들었을 뿐이다.
로마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도로가 지금 첨단 과학을 결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어떤 일이든지 간에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사람이 만드는 길이나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주선과 같은 물건을 만드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일이 있을 때에 무엇으로 시작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의 크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믿음의 크기도 달라진다. 믿음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크기가 달라짐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의 크기만큼 임하기 때문이다.
삶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달라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작은 사람이 아닌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큰 사람이란 키가 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큰 사람이란 누구인가? 멀리 보는 사람이다. 멀리 보지 못하는 사람은 키가 커도 작은 사람이다.
멀리 보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멀리 본다는 것은 공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말한다.
지금만이 아니라 내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지금만 보면서 살아간다면 오늘은 웃을 수 있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는다.
반면에 내일을 보는 사람은 오늘은 울 수 있지만, 내일은 웃을 수 있다.
멀리 내일을 보면서 살아야 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특히 삶에 어려움이 있을 때에 내일까지 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보는 사람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누리는 큰 사람이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5-6)
눈물이 나는 고통의 자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탄식하며 주저앉는다. 이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나 큰 사람은 다르다. 눈물의 자리에서 주저앉지 않고 씨앗을 뿌린다. 그런 사람은 기쁨의 단을 거둔다.
눈물이 나는 어려움이 있을 때에 사람들은 염려한다. 염려란 말은 마음과 나누다가 합쳐진 것이다.
즉, 염려란 마음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해야 할 것은 있는데, 그 일이 너무 힘들어서 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해야 함을 알지만 하지 못하고 있고, 하지 않고 있으니 염려는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사실 염려는 삶의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태 6:27)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빌립보 교회의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6절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사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지역에 있지 않다.
같이 있지 아니한 바울이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해 보인다. 다른 사람의 일이므로 쉽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문제와 염려거리에 대해선 염려하지 말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똑같은 문제를 당하면 어떤가? 자신이 했던 말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입으로 누구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일은 쉽지 않는 일이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 바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립 1:13)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자리인 옥에 갇혀 있다.
옥에 갇혀 있다는 것은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자유가 없고 만나고 싶은 만날 자유가 없다.
이렇게 옥에 갇힌 바울에 비하면, 지금 빌립보 교회에 겪고 있는 어려움은 크다고 할 수 없다.
지금 더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하는 말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치 몸살에 걸린 사람이 힘들다고 하다가도 암에 걸린 사람 앞에서는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바울 자신이 더 힘든 자리에 있으니 자신 앞에서는 힘들다거나 염려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옥에 갇힌 몸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였다.
옥에 갇혀 있었기에 평소에 자신과 가까이 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바울을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랐다. 그 누구도 옥에 갇힌 바울과 함께 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과 함께 하셔서 그의 삶을 밝혀주셨다.
그렇기에 바울은 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삶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보통 사람들이 염려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자리인 옥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가까이 하심을 경험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지금 많은 염려를 하고 있는 빌립보 교회를 가까이 하심을 알았고 믿었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 아무 갓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기 전에 4-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중요한 것은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이다. 주님이 지금 염려를 하고 있는 빌립보교회와 가까이에 계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빌립보교회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이 가까운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염려하는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니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과 달리 하나님은 모든 일에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기에 찾으면 찾을 수 있고, 빌립보교회와 마음이 가까워서 아픔을 함께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이유 무엇인가? 자신의 삶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 도움을 구한다.
힘들 때에 기도하는 사람은 대부분이 자신의 일에 집중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빨리 얻기 위해서 기도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중심이 되는 기도를 한다.
자신이 중심이 되면 자신과 다른 하나님을 자신도 모르게 탓한다. 원망과 불평을 한다.
이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응답을 하실까, 아니면 응답하지 아니하실까?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신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스라엘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 후에 광야에서 원망했다.
이런 원망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다.
그러나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시편 106:15)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중심이 되어 기도하는 사람은 영혼이 쇠약하게 된다. 기도하지만, 하나님과 멀어지고 만다.
사람으로 말하면 만나면 만날수록 관계가 좋아져야 하는데, 관계가 나빠지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광야의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자신이 중심이 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바울은 기도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감사함으로 아뢰라”라고 한다.
즉, 감사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염려할 일이 있는데 어떻게 감사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염려거리가 있음에도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염려거리가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실 은혜가 있음을 믿기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다니엘 6장을 보면, 총리인 다니엘이 나온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바사왕국에서 왕 다음의 자리에 있었다.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왕에게 30일 동안 왕이 아닌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넣을 규례를 만들었다.
늘 하나님께 기도하던 다니엘이 어떻게 하는가? 다니엘 6장 1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은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감사했다. 염려거리가 있지만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기 때문에 감사의 기도를 했다.
하나님의 인도가 어떤 모양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기에 감사했다. 그런 다니엘을 하나님은 사자굴에서 건져주셨다.
다니엘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울도 경험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절)
“모든 지각에 뛰어난”은 사람으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공동번역),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새번역)의 뜻이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기에 감사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지키신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기에 염려거리가 있음에도 감사의 기도를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키신다.
생각과 마음을 지키시고, 삶을 지키신다. 염려거리가 있어도 감사하기를 바란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당신을 지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