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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59. [역경의 열매] 송경용 (1-27) 소외된 이웃, 그들과 나눈 삶의 이야기
2006년 초, 어머니께서 석 달밖에 못 사신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영국 런던에서 런던대 교목과 성공회 한인교회 사제로서 일할 때였다. 나는 다급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아직은 기력이 있으실 때 편지, 아니 보고서를 드리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쓰다보니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만나 온, 함께 일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내 지난날을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다행히 얼마 후, 어머니는 좀 더 사실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한 지인이 “기왕 쓰기 시작한 글인데 책으로 내라”고 권했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 펴낸 것이 ‘사람과 사람’(생각의나무)이다. 지나간 시절이라고, 편치 않은 기억이라고 꺼내기 싫어하는 이야기, 그래서 잊혀지고 무시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저변에서부터 지탱한 사람들, 내게는 가난을 알려주고 예수께로 인도해 준 사람들이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서도 내 자신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들의 삶을 조금 더 알리고 싶어서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이 뜻하셨고 우리 사회에 나타내신 일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겪은 서울 강남 룸살롱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연세대와 성공회대에서 만난 친구들, 선배들, 교수님, 신부님들 이야기를 할 것이다. 서울 상계동 야학에서 만났던 여리고도 강했던 젊은이들, 상계동 봉천동 ‘나눔의집’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 방황하는 청소년들, 사랑에 굶주린 어린이들, 장기수 선생님들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들에게 엄마가 친구가 선생님이 돼 준 동료들, 나를 깨우치고 자극을 준 스승과 도반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왜 지금까지 ‘나눔’을 화두로 일해 왔는지, 내가 구현하려 한 나눔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다. 모든 과정 안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말할 수 있다.
딱 이맘때인 1979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지금처럼 덥지는 않아 봄꽃이 찬란했던 연세대학교 교정. 전공 책을 옆에 낀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어대며 스쳐 지나는 벤치에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강남 신사동으로 향했다. 발밑으로 축축 늘어지는 그림자로 시간을 가늠하며 룸살롱 ‘천지문’으로 들어간다. 불을 켜고 청소를 하다보면 이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속속 들어선다. 번호로 이름이 매겨지는 아가씨들, 조직폭력배들, 주방 아주머니들, 밴드, 웨이터, 보조….
조명이 다 켜지면 그 공간은 얼마나 호화롭게 변모하는지. 웨이터 보조 중 말단인 나는 ‘ㄷ’자로 늘어선 ‘룸’들을 바라보는 위치에 서서 주방에서 나오는 안주와 술을 각 방 웨이터에게 전달했다. 덩어리 얼음을 잘게 부수어서 양주 담을 통에 넣는 일도 했다. 정신없이 얼음을 깨다 보면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기도 했다.
나중에 대한민국이 다 아는 ‘깡패’가 된 인물도 그곳 조직 말단이었다. 이들과 사회 저명인사, 판검사, 회장 사장들이 흥청망청 어울렸다.
어느 날이었다. 룸 하나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났다. 웨이터 몇 명과 함께 뛰어 들어갔다. 그땐 전혀 몰랐지만 내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준 하나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역경의 열매] 송경용 (1) 소외된 이웃, 그들과 나눈 삶의 이야기
* [역경의 열매] 송경용 (2) 웨이터 일하며 만난 세상이 날 깨우다
* [역경의 열매] 송경용 (3) 가난… 가족과 생이별… 할머니와 생활
* [역경의 열매] 송경용 (4) ‘열정의 16세 소년가장’과 운명적 만남
* [역경의 열매] 송경용 (5) 나눔을 꿈꾸던 소년의 석연찮은 죽음
* [역경의 열매] 송경용 (6) 가난한 곳에 더 절실한 ‘탁아소’ 시작
* [역경의 열매] 송경용 (7) 신앙에 눈 뜨던 때 군종병 귀중한 경험
* [역경의 열매] 송경용 (8) 방황의 끝에 성공회 전도사를 만나다
* [역경의 열매] 송경용 (9) 방 두칸 전셋집서 ‘나눔의 집’ 시작
* [역경의 열매] 송경용 (10) 9명의 야학교사와 더불어 희망찬 출발
* [역경의 열매] 송경용 (11) '또 다른 나눔의 집' 세움으로 첫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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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송경용 (18) 갈 곳 없는 비전향 장기수들에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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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송경용 (25) 세계 사역자들의 철저한 헌신을 배우다
* [역경의 열매] 송경용 (26) 영국서 선교단체·대학·한인교회 사역
* [역경의 열매] 송경용 (27·끝) 한 코가 소중한 그물 같은 사회를 향해
◇약력=1960년 전주 출생. 1986년 상계동 ‘나눔의집’ 설림. 1990년 봉천동 ‘나눔의집’ 설립. 1993년 대한성공회 신부 서품. 청소년·노숙자·위기가정 쉼터, 자활후견기관, 푸드뱅크 등 창설 및 운영. 2006∼2009 영국 런던대 교목·런던 성공회 한인교회 주임사제. 현 사단법인 나눔과미래 이사장. 걷는교회 사제.
***[역경의 열매] 송경용 (2) 웨이터 일하며 만난 세상이 날 깨우다
1979년 어느 날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룸살롱. 손님들이 방마다 꽉 차 있고 모두 바쁘게 움직이는데 갑자기 한 방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울렸다. ‘77번 아가씨’였다. 곧이어 남자의 욕설과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선배 웨이터와 함께 방으로 뛰어 들어가자 옷이 다 찢어진 아가씨가 한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문 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물 좀, 얼음 좀 주세요!” 하기에 얼음물을 입에 부어줬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독한 양주를 얼마나 먹였기에…”라고 중얼거리는데 손님들이 방에서 나가려 했다. 아가씨는 얼른 몸을 일으켜 한 명의 바지를 붙들었다. “팁 주셔야죠, 팁!” 애원하는 아가씨에게 손님은 “못 줘!”라며 발길질을 해댔다. 내 손에는 좀 전까지 얼음 덩어리를 깨던 송곳이 들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팔뚝에 힘을 주는데 누군가 팔을 들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선배 웨이터가 그 손님 멱살을 부여잡고 어서 팁을 주라고 으르자 기막힌 광경이 펼쳐졌다.
손님이 지갑에서 지폐를 한 움큼 꺼내더니 박박 찢어 공중에 날린 것이다. 아가씨는 “내 돈, 내 돈!” 하면서 흩날리는 돈 쪼가리들을 모으려고 두 팔을 허우적댔다.
33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눈에 선한 장면이다. 마치 영화로 찍어 꾸준히 꺼내 봐왔던 것만 같다. 세상의 부조리를 죄다 모아 놓은 듯한 그 순간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입학을 앞두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들어가 1년 가까이 일했던 룸살롱을 그날로 그만뒀다. 그동안 화려하고 바쁜 공간 속에서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남루한 사람들에 대해 분노와 연민을 앓는 한편, 서서히 체념하고 안주해 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대학생인 것을 부럽고 대견하게 봐 준 선배 웨이터 택수 형에게 책을 권해주고 함께 읽으면서 독서모임도 만들었다. 영업이 끝나면 주방 아주머니와 아가씨들까지 끌어들여 번듯한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다. 학교에 가면 땅 밖으로 고개를 내민 두더지처럼 어지럼증을 느끼고, 여기 들어오면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나는 대충 내려놓고 싶었던 짐을 다시 짊어지기로 결심했다. 손님들이 먹다 남긴 술과 안주를 놓고 직원들과 침울하게 둘러앉아 있는데 마침 택수 형이 “경용아, 너도 대학 다니니 저런 인간들처럼 살 거냐? 그럴 거면 다 때려치워라!”고 외쳤다. “형, 나도 더 못 있겠어. 나 나갈래. 미안해요, 형!” “그래,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나도 열심히 살 테니 너도 공부 잘해서 확 갈아엎어버려!”
택수 형은 봉투를 쥐어주고 손수 택시까지 잡아줬다. 택시 좌석에 기대 앉아 신사동 로터리를 지나 제3한강교를 지났다. 뺨에 닿는 바람이 상쾌했다.
그 뒤로 두어 달은 학교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여름방학에는 부천 공사장 잡부로 일하고, 농촌봉사활동, 수련회도 쫓아다녔다. 그러다 9월 28일, 당시는 알지도 못했던 하나님으로부터 신호가 당도했다. 선배 두 명이 만나자고 하더니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우리 야학 같이 하지 않을래?”
나는 “지금 바로 가면 안 될까요?”라고 묻고는 선배들과 함께 신촌의 식당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상계동으로 향했다. 상계3동 적십자회관을 빌려서 하던 학교에 들어선 것은 밤이 이슥한 시간이었다. 그곳의 냄새와 분위기, 사람들의 눈길은 내게 “아,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속해 있었던 곳 같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곳이 내 인생이 됐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3) 가난… 가족과 생이별… 할머니와 생활
살면서 가장 외로웠던 때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 2학년까지 4년여 간이다. 집안 사정으로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 가면서 나만 전주 할머니 댁에 남겨졌었다. 할머니와 단 둘이 연탄불도 없는 방에서 겨울을 나고, 봄꽃이 피어나기 시작할 때면 서러움이 사무쳤다.
집 옆 철길을 따라 서울로 향하는 기차 꽁무니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근처 벽돌 공장에 쌓아놓은 벽돌 더미 속으로 들어가 한참 울어야 그 울적함을 견딜 수 있었다.
어디서 온 것인지 할머니댁 방바닥에는 푸른 표지의 기드온 신약 성경이 굴러다녔다. 내용도 모르면서 스륵스륵 넘겨보곤 했다. 눈에 띄는 부분을 몇 줄 읽다 덮는 식이었는데 그런 중에도 ‘평안함’이라는 이미지를 느꼈다. 지금은 어느 대목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유독 그런 부분만 눈에 띄었던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가 아니었을까.
그 이후 서울로 올라가 가족들과 살면서도 울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론가 떠나는 기차 꽁무니를 보며 “여긴 내 자리가 아닌데” 중얼거리던 그 마음은 밑바닥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공부 잘 하고 가난한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던 서울 유한공고 재학 시절, 나는 일찌감치 취직 시험을 봐서 대기업 여럿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담임선생님은 야간대학이라도 들어가길 권하셨지만 나는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어떤 방향을 바라봐도 “인생을 걸어보자”는 열정을 품을 수가 없었다.
대학에 진학한 것도 내 의지를 넘어서는 일들이 연속된 결과였다. 선생님의 끈질긴 권유로 여러 학교에 시험을 쳤는데 하필 학비도 비싸고 장학금도 받을 수 없는 연세대 건축학과에 합격했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면접날 청량리역으로 가서 춘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가 출발 전 ‘삑’ 하고 경적을 울리는데 어머니가 떠올랐다. 지겹게도 고생하시면서도 곱기만 한 어머니 얼굴, 그 얼굴에 슬픈 표정이 어릴까 두려워져 기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 길로 신촌까지 몇 시간을 걸어갔지만 끝내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다음날에야 나는 연세대 건축학과 학과장 이경회 교수님실로 쭈뼛쭈뼛 찾아갔다. “면접 끝났다”는 말이 날아올 것을 알고서, 그로써 마음을 정리하러 간 것이다. 그런데 교수님은 내 초췌한 몰골에서 알아채셨는지 대번에 “네가 송경용이지?” 하셨다.
교수님은 다짜고짜 나를 승용차에 태우시더니 본관 학적과로 데려가셨다. 그리고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어서 등록하라”고 재촉하셨다. 알고 보니 대학원 시험문제 출제를 위해 합숙소에 들어가는 길이셨다. “너, 몇 분만 늦었으면 입학 못했을 줄 알아. 3월에 보자!”
그 몇 분은 어떤 의미였을까. 몇 년 후 성공회대 편입을 위해 이 학교를 그만뒀으니 큰 의미는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곳에 다닐 때 인생의 전환점과 귀한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학비를 벌기 위해 일했던 서울 강남 룸살롱의 화려함과 캠퍼스의 발랄함 양쪽에서 모두 이질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던 나는 대학 선배들의 소개로 상계동 적십자 청소년 야학에 가서야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해졌다. 조금만 나가도 불암산과 과수원, 논밭이 펼쳐진 환경 때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릴 때의 벽돌 공장과 똑같은 공장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봉제공장 ‘시다’ 여학생들, 새카만 얼굴에 눈만 반짝이던 남학생들, 너무나 성숙해 말 걸기도 어려웠으나 참으로 친절했던 ‘누나 학생’들 덕분이었다. 그중에서 ‘나의 작은 예수님’ 창우를 만난 일을 잊지 못한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4) ‘열정의 16세 소년가장’과 운명적 만남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 역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 ‘작은 예수님’이다. 그의 이름은 노창우. 상계동 적십자 청소년 야학에서 만난 학생이다.
상계동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에, 밤이면 멀리서 봐도 집안이 훤히 보일 정도로 얼기설기 지어진 집. 지독한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남동생과 여동생을 위해 창우가 끓이던 수제비. 거의 비어가던 밀가루 포대와 쭈그러진 냄비. 눈보라가 매서운 날에도 양말을 신지 않았던 창우의 발. 그런 기억들과 대비되는 형형한 눈빛과 밝은 미소….
창우는 액세서리 도금 공장에 다녔는데 출근은 오전 7시, 퇴근은 오후 8∼10시였다. 툭하면 ‘조출’과 ‘철야’, ‘특근’을 해야 했다.
나이는 불과 열여섯이었다. 만성 영양결핍으로 치아가 부실하고 키도 아주 작았다. 공장에서 쓰는 화공약품 중독으로 늘 두통과 콧물을 달고 살았다. 그의 공장에는 열둘, 열넷 소년들도 허다했다.
오전 5시에 시작했던 야학의 검정고시 특별반에 나오고, 40분가량의 점심시간마다 야학까지 뛰어와 라면을 얼른 먹고 공장으로 돌아가고, 저녁이면 아무리 늦어도 야학에 들렀던 창우. 그 작은 소년이 어떻게 견뎌냈는지.
한번은 창우와 함께 옆동네 야학에 놀러갔다. 그때 권투경기가 유행이었는데 창우는 혹시 그쪽 친구들과 경기를 하게 될까봐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개울가 공터에서 경기가 열렸다. 창우도 글러브를 대충 찾아 끼고 나섰는데 3분이 채 안 돼 얼굴이 노래지고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상대에게 머리를 한 대 살짝 맞았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쓰러진 창우의 모습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내 가슴에 날카롭게 박혔다. 열여섯 꿈 많은 소년이 기름때 낀 시커먼 옷과 낡은 운동화, 벌어진 입 사이로 누렇게 썩어가는 이를 내보이며 축 늘어져 있었다. 밝은 웃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아니, 내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던 그의 현실과 남루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견뎌 온 ‘가난’의 모멸감과 마주하고 있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그 깊고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서 나는 늘 죄인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비참하고 가련한 창우를,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로부터 어떻게든 가려주고 덮어주려 안절부절못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을 향한 행동이었다.
얼굴에 찬물을 부어주고 흔드니 한참 만에 창우가 깨어났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예의 그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창우는 그 후 초등·중등·고등 검정고시를 전국 상위 성적으로 2년 만에 합격했다. 일요 독서모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덩치 큰 학생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리더십을 보였다.
야학 교사들은 그가 대학에 가기를 바랐고 도와줄 의향도 있었지만 그는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전 조금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가난한 내 형제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그것이 제게 주어진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결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 뒤 그는 서울 구로공단으로 갔다. 공장 일을 하며 어린 노동자들을 돕고,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했다. 이후 안산으로 옮겨가서도 열심히 일할 뿐 아니라 앵벌이 아이들을 불러다 자취방에서 돌보고 공부도 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5년여 후, 상계동 도깨비시장에 ‘나눔의 집’을 연 뒤인 1986년 10월 어느 늦은 밤. 누가 부른다기에 나가보니 골목 저 끝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서 있는 폼만 봐도 창우였다. 그날 본 것이 마지막 창우의 모습이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5) 나눔을 꿈꾸던 소년의 석연찮은 죽음
“형, 다시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친구들에게 듣고 얼굴이라도 잠깐 보려고 열심히 왔는데 너무 늦었네요. 차 시간 때문에 돌아가야 하니까 다음에 만나서 꼭 막걸리 한 잔 합시다.”
1979년 서울 상계동 적십자 청소년 야학에서 만난 창우. 군을 제대하고 상계동으로 돌아와 ‘나눔의 집’을 시작한 직후인 86년 10월 어느 늦은 밤 찾아와 불쑥 이렇게 말하고는 돌아서 갔던 창우. 그대로 영영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 창우.
그 이듬해 그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늦은 밤길 회사 앞을 걷다 회사 견인차에 치였다고 한다. 사고라기엔 석연찮았다. 하지만 그 시절은 진상을 밝히기는커녕 그 죽음에 대해 말하기도 어려웠다. 몇몇 친구와 동료 야학교사 등이 조촐한 장례를 치러줬다.
그러나 나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10주기가 되도록 나는 그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 그와 했던 수많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가 품었던 꿈들이 사방천지에서 움터오는 ‘부활’을 보지 않으면 찾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10년 동안 상계동 삼양동 봉천동 ‘나눔의 집’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대낀 후, 불현듯 나는 그를 찾아갔다. 함께 보낸 날들을 반추하며 찾은 무덤에는 그를 닮은 작은 비석이 있었다. “가난한 노동자의 친구, 노창우 여기 잠들다.”
나는 그의 무덤에 막걸리를 뿌리며 “주님, 제가 사는 동안 이 친구를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 같은,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없는, 실상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던,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던,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었던 어미 양(사 53:2, 4∼7)을 생각했다.
그가 꿈꾸던 아름다운 ‘나눔’의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이뤄가는 것이 내 사역의 길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창우는 내게 영원한 ‘작은 예수’다.
야학 여학생 ‘민들레’ 이야기도 하고 싶다. 물론 가명이다. 만지면 부서질 듯하지만 어디로든 날아가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민들레 홀씨를 닮은 소녀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뺨을 때린 사람이기도 하다. 왜 그랬을까. 하루 12시간씩 몸이 부서져라 재봉틀을 돌리고, 때론 졸음방지약까지 먹어가며 철야를 했던, 늘 술에 취해 있던 어머니 대신 어린 두 동생까지 돌보던, 나보다 몇 배는 열심히 살던 그 아이를 왜 때려야 했을까.
그 아이도 열여섯이었다. 늘 명랑했고 단정했으며 공장 일에도 성실했다. 머리도 좋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나는 그 친구가 어떻게든 공부를 이어가도록 돕고 싶었다.
그 귀여운 웃음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그때는 몰랐다. 여학생들과의 작은 불화로 야학에 빠졌던 소녀는 한참 만에 다시 나타나 “나 그만둘래요. 찾지 마세요!”라고 했다. 내가 뺨을 때린 것은 그때였다.
“힘들어요, 선생님. 정말 힘들어서 그래요. 이러다 죽을 것 같아요!”라고 절규하는 그 애 앞에서 나는 앵무새처럼 “그래도 해야지. 나약해지면 안 돼, 포기하면 안 돼”라는 말만 반복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가 계속 공부하기를 그토록 바란 것은 실은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품고 있던 분노가 그 순간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 이후 야학에 나오지 않고 길을 가다 만나도 방긋 웃고만 지나치던 민들레는 한 달 후쯤 찾아와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6) 가난한 곳에 더 절실한 ‘탁아소’ 시작
공사장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사고로 죽은 지 며칠 후, 3남매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버스와 기차를 탔다. 내린 곳이 청량리역이었다는 사실도 그때는 몰랐다. 어머니는 그 근처에 자리를 잡고 막일을 했고, 큰딸 인 소녀는 남의 집 식모로 갔다. 동생들은 껌을 팔았다. 소녀는 주인 식구들이 밥을 다 먹고 설거지가 끝나면 자기 밥과 반찬을 비닐주머니에 담아 가 역 앞에서 기다리던 동생들과 나눠 먹었다. 얼마 후 가족들은 상계동 중에서도 후미진 곳으로 이사 갔고, 소녀는 공장에 들어갔다. 동생 하나를 학교에 보낼 수 있어 일이 힘든 줄도 몰랐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어머니가 ‘새아버지’를 소개했다. 소녀는 너무나 놀랐고 분노했다. 공사장에서 아버지를 밀쳐 죽게 만들었던 바로 그 남자였기 때문이다. 새아버지는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삼남매를 밖으로 내몰았다. 눈 쌓인 마당에서 맨발로 오들오들 떠는 동생들을 보며, 새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멍든 얼굴로 술을 퍼마시던 어머니를 보며 소녀는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했다.
상계동 적십자 청소년 야학에서 만난 ‘민들레’가 편지로 들려 준 자신의 삶이다. 그제야 그 소녀의 명랑한 웃음 뒤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이 숨어 있었던 것을 알았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야학에 나왔고 다행히 친구들과도 화해했다. 그러나 삶은 달라진 게 없었다. 어머니가 취해 있는 날이면 소녀는 아주 미안한 표정으로 야학에 동생들을 데려와 맡기고는 조금만 늦어도 반나절치 임금을 깎아버리는 공장을 항해 바삐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민들레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나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내게 ‘가난’의 실체를 확실하게 알려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난이 사람에게 어떤 모멸감과 좌절을 주는지, 왜 그 굴레를 쉽게 벗을 수 없는지를 말이다.
또 다른 의미도 있다. 몇 년 후인 1986년 상계동 ‘나눔의 집’을 시작할 때, 이 지역에서 가장 필요한 활동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던 때에 민들레는 어린이집, 당시 용어로 탁아소의 필요성을 일깨워 줬다.
그때 민들레는 이미 두 아이를 둔 엄마였던 것이다. 끝없이 반복될 듯한 가난과 가족의 사슬을 벗는 길로 그는 열여덟 나이에 결혼을 택했던 것이다. 동네 ‘잘 생긴 오빠’와 단칸방에서 살림을 차려 한동안 재미나게 사는가보다 했는데 3년쯤 후 만나 보니 표정이 완연히 어두워져 있었다.
불성실한 남편 대신 일을 하고 싶어도 두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민들레를 위해, 같은 처지의 여성들을 위해 상계동 나눔의 집이 탁아소를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보란 듯이 예전의 전투력을 되찾아 두 아이의 당당한 어머니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일어섰다. 수년 전 다시 만났을 때 민들레는 한결 환한 모습으로 두 아이가 얼마나 공부를 잘 했고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들려줬다.
그 밖에도 야학에서 만난 학생들, 복잡한 사연들로 툭하면 가출하는 바람에 교사들이 산으로 다방으로 찾으러 다녀야 했던 소녀들, 걸핏하면 술 마시고 쳐들어와 욕설을 퍼부었지만 자기 이름이 적힌 야학 출석부를 몰래 가져가 소중히 간직했던 소년, 그렇게도 속을 썩이더니 나중에 자리 잡고 상계동으로 돌아와 지금은 나눔의 집 봉사를 도맡아 하고 있는 친구…. 이들 모두와 헌신적인 선배, 동료들은 내 삶의 동기가 됐고 목표가 됐다. 또한 나를 신앙으로 이끌었다. 연세대 건축학과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편입한 것도 나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7) 신앙에 눈 뜨던 때 군종병 귀중한 경험
그저 스쳐 지나갈 것 같던 인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대한성공회 서울 대학로교회와의 인연이 그렇다.
1980∼81년 당시 긴박했던 시국에서 야학연합모임과 야학교사들을 위한 교육모임이 그곳에서 자주 있었다. 우습게도 나는 그때 그 건물이 교회인지도 몰랐다. ‘성 베다 관’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주변에 많이 있던 회관 중 하나인 줄로만 생각했다.
야학 동료들과 회의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잠깐씩 눈을 붙이기도 하면서 드나들었던 그곳이 몇 년 후 나를 신앙생활로 이끌었고, 신학교에 갈 결심을 하게 했고, ‘나눔의 집’의 출발점이 됐던 것이다.
당시 야학에 대한 정부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고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갔다 풀려나는 일이 반복되자 나와 상계동 동료들은 야학을 접을 결심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을 위해 수유리로, 쌍문동 동대문 면목동으로 안전한 야학을 찾아다녔다. 학생들이 공장 근무 끝나고 갈 만한 거린지, 공부 내용이나 분위기는 적합한지, 받아줄 여력은 있는지 묻고 다녔다.
그러다 문득 “사랑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그렇게도 절실하던 때에 영원히 함께할 것처럼 서로 의지했던 선배와 동료들이 곧 흩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야학 친구들을 더 책임질 수 없는 현실에 마음이 쓸쓸했던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의문으로 나는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서울 동대문감리교회 목사님께 감화를 받아 몇 달 동안 그 교회 예배와 성경공부, 청년회 모임에 나갔다. 천주교 미사에도 나가 봤다.
달빛 아래 밤길을 동료들과 걷다 보면 찬송가나 성경 구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그래, 사랑은 이렇게 함께 걷는 거야!”라는 깨달음이 왔다. 두 달 가까이 이런 ‘함께 걷기’를 계속하는 동안 그간 자세히 몰랐던 동료들의 사정을 알게 되고, 왜 그렇게 야학에 헌신해 왔는지를 이해하면서 사랑에 대한 그 철학도 굳어졌다.
재미있는 일도 생겼다. 목사님의 추천으로 군종병이 된 것이었다. ‘반쯤 신자’에 성경책이 몇 권인지도 몰랐던 내가 말이다. 어설프고도 무식해서 용감했던 ‘군종병 보조’ 보직은 석 달 만에 밀려났지만 여러 가지로 귀중한 경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내게 사역의 길을 예비하셨던 것 같다.
1984년 제대 직후 상계동으로 가 보니 야학 자리는 폐허가 돼 있었다. 주변 지역 재개발 바람에 허물어졌던 것이다. 나는 그 폐허를 기억하고 싶어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두었다. 사진은 잘 둔다고 뒀다가 잃어버렸지만 내 기억 속엔 선명한 사진이 남아 있다. “주님! 이 자리를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 자리로 어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던 기도와 함께.
제대할 때쯤 대학 선후배들로부터 노동운동을 위해 사회단체나 공장으로 가자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가난한 사람들과 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방향은 정할 수가 없었다. 젊다는 것이 힘들고 그냥 살 수는 없다는 압박감이 무거웠다. 대학 선배 누나의 신혼집에 염치 불구하고 들어가 골방 하나를 차지한 채 ‘면벽 고민’에 빠졌다. 수많은 상념들이 용솟음쳤다 스쳐 가고 또 솟구치는 가운데 하나의 생각이 점차 선명해져 갔다. “기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8) 방황의 끝에 성공회 전도사를 만나다
“기도를 하고 싶다!”
돈이 돈을 벌고, 가난이 가난을 낳는 세상 속에서 채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소년 소녀들이 삶에 떠밀리고 때로는 죽어 가는 부조리를 생각했다. 그들의 가장 밝았던 순간, 가장 청명했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가난이 주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열패감 속에서 그들이 하나둘 꿈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났다. 한편으로는 그런 압박감을 견디기 어려웠고 내 자신이 초라했다.
문득 간절히 기도를 하고 싶어졌다. ‘내가 봐온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자, 철저하게 사람의 문제에 매달리자’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내가 기댈 곳은 신앙, 내 결심을 지켜 줄 이는 오직 예수님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두드려야 할 문을 하나님은 아주 가까운 데 준비해 두고 계셨다. 내가 한 달째 골방을 빌려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집의 주인, 그러니까 내 대학 선배 누나의 남편이 대한성공회 윤정현 전도사(지금은 대전교구 사제)였던 것이다. 그분의 권유로 대학로교회에 나갔고, 시작하자마자 대학생모임 청년회 등 온갖 모임에 참여했다. 그러다 윤 전도사로부터 신학 공부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박경조 주교님을 찾아가서 상의한 뒤 결심을 굳혔다. 비로소 그동안의 많은 우연들이 이 길을 위한 필연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1986년 3월 나는 당시 서울 구로구 항동에 위치해 있던 성공회대에 편입학했다. 곡절 끝에 들어간 연세대를 그만둬야 했지만 아쉽지 않았다. 세상의 가치들은 이미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이전 야학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위치에 ‘나눔의 집’을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와 같은 이름도, 구체적인 구상도 없었다.
단지 ‘빵과 영혼이 같이 가야 한다’는 신념과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든 들어와 라면 끓여먹고 눈 붙이고 공부하고 쉬다 갈 수 있는 ‘사랑방’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었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반 사회의 관점에서는 물론 독재 타도와 혁명, 이념 논쟁에 몰두해 있던 운동권으로부터도 순진하다는 핀잔을 들었다. 한국에 들어온 초기부터 학교, 병원, 보육원, 나환자 정착촌 등을 설립하며 사회선교를 활발히 해온 성공회 교회 안에서도 내 시도는 무모하게 비쳤다. “운동권 학생이 신학교에 잠입해 교회를 기지화하려고 한다”는 오해도 받았다.
그러나 편입 문제를 상의 드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잘해 보세요”라고 격려해 주셨던 박경조 주교님, 신년사목교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교’를 핵심으로 내세우시고 두고두고 내가 ‘나눔의 집’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정신적 지주가 돼 주셨던 김성수 주교님(당시 서울교구장), 새로운 교회상을 갈망하던 교회 청년과 대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눔의 집’ 이름을 지은 과정에는 신비한 체험이 있다. 교회 청년들과 함께 성공회 사회선교에 대한 자료들을 모으고 상계동 지역에서 설문지를 돌리며 어떤 활동을 할지, 어떤 이름을 지을지 고민하던 때였다. 주일 미사의 성체성사 시간에 박 주교님이 빵을 ‘딱’ 쪼개시는 순간 내 등짝이 쫙 쪼개지는 것 같은 아픔과 전율을 느낀 것이다. 이어서 포도주가 나오는데 생생한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이렇게 쪼개셨구나, 쪼개고 나누어서 우리에게 주셨구나!” 그때 ‘나눔’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9) 방 두칸 전셋집서 ‘나눔의 집’ 시작
신학을 공부하며 다시 서울 상계동 야학 자리로 돌아갔다. 이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자는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신비한 경험을 했다. 미사의 성체성사 시간에 예수님의 살과 몸이 쪼개지는 느낌을 내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그 경험으로 나는 예수님 사랑의 핵심과 결정은 ‘나눔’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했다.
준비 작업으로 몇몇 청년들과 회의를 할 때 ‘나눔의 집’이라는 이름이 언급된 적은 있었다. 당시는 ‘나누다’를 명사형으로 쓰는 예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경험을 하고서야 나는 그 이름이 이미 내게 주어졌고, 내 사명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집’을 얻는 일만 남았다. 교구에서는 반대 여론 때문에 공식 사업으로의 채택을 미루고 있었다. 예산을 배정받을 수도 없었다. ‘맨 몸으로, 천막을 치고 시작해야 하나보다’ 생각할 때 뜻밖의 길이 보였다.
교수로 계셨던 이대용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전에 서울 약수동교회 야학을 지원하려고 WCC(세계교회협의회)에 요청해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야학이 문을 닫는 바람에 얼마간 사용을 못했어. 아직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남아 있을 테니 가서 부탁을 해 보지.”
그 길로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찾아가니 “성공회를 위해 쓰기로 한 돈이었는데 마침 잘됐네요”라며 간단한 서류 작업 후에 450만원을 내주었다.
그 돈으로 상계동 도깨비시장 부근에 방 두 칸짜리 집 전세를 얻었다. 이후 모든 ‘나눔의 집’ 운동의 밀알이 돼 준 고마운 돈이었다.
1986년 9월 28일 드디어 ‘나눔의 집’ 문을 열었다. 옛 야학 때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었다. 공장 일 끝나면 모여서 밥 먹고 이야기하고 동네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토론했다. 공장에 나가기 전 새벽 5시에 모여서 버스정류장에 나가 설문지를 돌리기도 했다.
다섯 식구 정도 생활하기에도 좁은 집에 많을 때는 40여명까지 들어찼다. ‘새마을 보일러’는 수시로 터져 냉골일 때가 많았고,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배설물이 넘쳐흘렀다. 문짝은 다 떨어지고 방바닥도 곳곳이 움푹움푹 파였다. 어쩌다 20㎏ 쌀 포대를 들여놔도 2∼3일이면 떨어져 끼니는 거의 라면으로 때웠다.
그래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은 라면 박스 위에 십자가를 올려놓고 성경을 돌아가며 읽고 묵상하던 시간이었다. 그 감동은 소란이 잦아들어 주위가 조용해진 자정쯤에나 맛볼 수 있었다. 모인 사람들 중 태반은 신앙에 대한 기본적 이해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진지하게 동참해 준 것은 내가 신학교에 갔다는 것, 곧 사제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준 것이다. 내 일이라면 뭐든지 함께하겠다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벌써 ‘나눔’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실무자를 찾는 것이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쉽지 않았다. 대학생들은 학생운동에 바빴고, 더군다나 빈민 밀집지역은 철거용역회사와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는 곳이어서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매일 교회로 대학으로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 와중에 신학교 수업도 들어야 했고, 상계동 친구들도 챙겨야 했으며 돈과 먹을거리도 구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나날이 지나는 가운데 한 명, 한 명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10) 9명의 야학교사와 더불어 희망찬 출발
서울 상계동 ‘나눔의 집’에서 처음 나와 함께 일한 동료는 모두 아홉 명이었다. 다 같이 둘러앉으니 좁은 방이 꽉 찼다. 교회 소개로 온 친구, 멀리 강화도에서 왔다는 예비교사,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친구 따라 온 사람도 있었다.
예상과 달리 차분한 성격이 많았다. 평소 접했던 말 많고 똑똑한 사람들보다 이렇게 조용해도 속 깊은 사람들이 진짜배기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소개와 인사를 나누고, 당장 시작해야 하는 야학의 과목을 나누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눈물이 났다. 다 돌아간 후 나도 모르게 기도가 터져 나왔다. “하나님, 이 멀고 보잘것없는 곳에 아홉 명이나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이들 중 한 명은 후에 내 아내가 됐다. 내 평생의 동료이자 스승, 아들 재걸이와 딸 재람이의 엄마인 한재숙이다.
그렇게 야학과 탁아소를 일단 시작했지만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참고할 모델이 전혀 없어 막막할 때가 많았다. 당시 민중교회들이 있었지만 우리와는 방향이 달랐다. 그나마 노동자 친구들의 전폭적 지지와 신뢰가 큰 힘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몸 여기저기에 원인 모를 상처가 나고 피가 터졌다. 살이 52㎏까지 빠져 뒤에서 보면 날씬한 여자인 줄 알 정도였다. 한 번은 김성수 주교님이 “너, 큰일 나겠다. 당장 병원에 가 봐라” 하시며 10만원을 주고 병원도 소개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약국에 가서 사흘치 감기약을 4500원에 짓고 나머지 돈으로 상계동에 가스레인지를 설치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큰 힘이 돼 준 이가 지성희라는 친구다. 상계동 적십자 청소년 야학 때 제자인데 고등 검정고시 합격 후 군에서 제대한 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아이를 내가 “함께 일하자”며 끌어왔다.
아무리 나를 봐서 뿌리치지 못했다고는 하나, 힘든 노동과 갖은 노력 끝에 겨우 안정적인 직장을 잡을 단계에 이른 청년이 다시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늘 웃는 얼굴로 나눔의 집 궂은일을 도맡아 해 주던 성희. 그와 함께 불암산에 올라 소나무와 평평한 바위가 있는 우리들만의 장소에서 서로를 ‘송암도사’ ‘지뿔도사’라고 부르면서 쉬던 시간들은 나를 재충전시켜 주곤 했다.
성희는 후에 성공회 사제가 됐고 노인 인력을 개발하고 취업을 지원하는 단체들을 조직해 이를 한국시니어클럽으로 발전시키는 등 한국의 사회복지에 크게 기여했다. 지금은 일본에서 사역 중이다.
상계동 나눔의 집 시절 나는 내 나름의 교회 상을 정립해 나갔다. 성서, 특히 복음서를 숱하게 읽으며 나는 예수님의 사역에 철저하게 매료됐다. 단순하게 읽을수록 예수님은 너무나 멋진 분이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똑바로 내려가신 분, 그들과 함께 밥 먹고 걷고 생각을 나누신 분. 싸매고 보듬고 눈물을 닦아주신 분. 그분이 한 대로 부족하나마 따라가는 것이 내 사역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1년간 휴학까지 하면서 3년여를 매달린 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운영해줄 후임자도 구해지자 나는 잠시 상계동을 떠나 학업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런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1989년에는 서울 삼양동에 나눔의 집을 만들어 반 년여 동안 터를 닦은 뒤 후임자에게 맡겼고, 반 년 정도는 서초동 법조단지 개발 피해 철거민들을 돕는 데 매달렸다. 그러는 동안 사제 서품을 앞두고 본격적인 목회지를 찾아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11) ‘또 다른 나눔의 집’ 세움으로 첫 사역
1990년쯤, 성공회대 졸업을 앞두고 본격적인 사역을 해야 할 시점에 이르자 고민이 시작됐다. 여러 가지 길을 생각해 봤지만 결론은 “내가 가야 할 곳은 기존 교회가 아니라 또 다른 나눔의 집”이라는 것이었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이셨던 김성수 주교님께 상의를 드렸을 때도 “네 소신대로 계속해 보라”는 격려를 해 주셨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의회(기빈협), 천주교도시빈민회(천도빈) 등에서 추천해 준 서울 봉천동을 낙점했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로부터 ‘봉천동 나눔의 집 설립’을 허락받은 것이 90년 9월. 다음 달부터 두세 달 정도 지역조사에 나섰다. 당시 그 지역은 이미 재개발 바람이 불어 10평도 안 되는 판잣집이 7000만∼8000만원을 호가했다. 셋집 구하기도 쉽지 않아 “천막을 쳐야 하나”라는 고민을 상계동 때에 이어 또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놀라운 도우심의 손길이 있었다.
그때 서울교구에 1억원에 가까운 선교 자금이 있었는데 김 주교님께서 내 쪽으로 돌려 주셨던 것이다. 그 돈으로 지금의 봉천동 나눔의 집 터에 있던, 그 동네에서 가장 큰 편이었던 방 5칸짜리 집을 9500만원에 구입했다. 그 바로 위에 7평짜리 집을 전세로 얻어 사택으로 쓸 수도 있었다.
서울교구에 그만한 선교 자금이 있었던 자체가 드문 일이고, 이를 요청하는 교회들의 원성도 대단했을 텐데 주교님은 온몸으로 다 막아 주셨다.
김 주교님은 당시 내게 가장 든든한 울타리였다. 상계동 시절에도 김 주교님은 종종 찾아오셔서 야학 학생들에게 100원짜리 자장면을 사주곤 하셨다. 좁은 방 안에서 무릎을 잔뜩 구부린 채 둘러앉아 자장면을 드시는 주교님을 학생들은 ‘자장면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봉천동 시절에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때는 비만 왔다 하면 지붕으로 올라가 장판과 비닐 치는 일을 해야 했다. 나눔의 집 옆에는 ‘가마니골’이라고, 지금은 교회가 된 자리인데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있을 만큼 물난리가 잦은 지역이 있었다. 청년들과 거기 들어가 장판 치는 작업을 하느라고 진땀을 빼고 겨우 집에 와 잠깐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 보니 주교님과 이정호 신부님이었다. 집 앞 계단으로 물이 콸콸 내려가고 있어 자칫 떠밀려 넘어질 수도 있는 곳에 주교님은 우산을 받고 서 계시다가 “괜찮냐, 안 떠내려갔냐”하고 물으셨다. 그냥 걱정이 돼서 와 봤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비가 더 많이 왔을 때도 나눔의 집에 들어찬 물을 퍼내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한 아이가 “밖에 할아버지 오셨어요” 했다. 설마 하며 나가 보니 이번에는 혼자 오셔서 “안 떠내려갔나 궁금해서 왔다” 하시는 것이었다. 칠순을 바라보시는 교회의 큰 어른이 그렇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데 힘을 안 낼 수 없었다.
다행히 그 기대에 부끄럽지 않게 봉천동 나눔의 집을 통해 맺은 열매는 적지 않았다. 공부방과 야학뿐 아니라 장애인 공동체, 청소년·노숙자·위기가정 쉼터, 푸드뱅크, 자활후견기관 등 지금 한국 사회 복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많은 아이디어와 모델이 거기서 나왔다.
그리고 귀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민영이, 추운 지하방에 죽은 듯이 돌아누운 모습으로 처음 만났던 소년을 잊을 수 없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12) 누워 있던 소년가장, 사회인으로 서다
1991년 본격적으로 봉천동 ‘나눔의 집’ 사역을 시작하고서 얼마 후, 동네 통장님인 복덕방 사장님이 찾아와 “아주 어려운 가정이 있다”면서 민영이네를 소개했다. 보증금 100만원에 9만원인 월세를 9개월이나 밀려 주인이 곧 내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찾아가 보니 바깥보다 더 추운 지하방인데 10대 남자아이 하나가 벽 쪽으로 누워 있었다. 말을 걸어 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옆방에 물어보니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세 식구인데 겨우내 불 한 번 때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남자아이는 석 달 넘게 누워만 있더라고 했다. 부엌을 보니 풍로와 작은 냄비가 있을 뿐 음식을 해 먹은 흔적이 없었다.
급한 대로 쌀과 연탄, 김치와 반찬을 들여 놓고 이튿날 다시 가 보니 다행히 음식은 좀 먹었지만 연탄은 여전히 때지 않은 채였다. 여동생이 있기에 물어 보니 “어떻게 불을 피우는지 몰라요”라는 것이었다.
복덕방 사장님을 찾아가 석 달치 월세를 건네며 “집주인께 잘 말씀 드려서 내쫓지 않도록 해 주세요” 부탁했다. 그러자 사장님은 “내가 주인이오” 하면서 즉석에서 영수증을 써 주는 것이다. 드물게 온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인연을 맺어 각별히 관심을 보였지만 유독 민영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자 간사님이 거의 매일 찾아가 지극정성으로 여동생을 돌봐 주자 석 달째쯤 비로소 부스스 일어나 인사를 건네었을 정도다. 막상 마주 대하니 얼굴도 준수하고 목소리도 또렷했다.
들어 보니 민영이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심한 우울증을 앓아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었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거기서 지내다가 다시 함께 살게 됐지만 어머니는 1년이면 몇 번씩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동생은 너무 어렸다. 민영이가 생계를 위해 염색 공장에 다녔는데 하루 열두 시간씩 일을 하다 만성 두통을 얻었다. 그 결과 불과 10대 중반의 나이에 자리를 지고 눕게 된 것이었다.
누워만 있으면 더 안 좋을 것 같아 “나눔의 집에 나와서 일을 도와주지 않을래?”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던 중 집주인이 보증금을 올려버려 쫓겨날 상황이 됐다. 봉천동 주민과 여동생의 학교 선생님들께 부탁드려 성금을 모았는데 한 푼 두 푼 모인 돈이 새로 방을 얻고 생활비 통장까지 만들어 줄 정도가 됐다. 그 어떤 기부보다 크고 따뜻한 산동네의 온정이었다.
그렇게 1년이 다 돼 가던 어느 날 나눔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당에 민영이가 서 있었다. “웬 일이야, 무슨 일이야?” 하고 묻자 민영이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저, 나눔의 집에 나올래요” 하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주님, 아멘!”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 다음 날부터 민영이는 나눔의 집에 출근하고 오후에는 검정고시 학원에 나갔다. 얼마나 성실하고 듬직했는지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시간이 갈수록 성격도 밝아졌다. 더 기뻤던 일은 매 주일 미사를 돕는 복사가 돼 준 일이다.
공부를 시작한 지 단 2년 6개월 만에 민영이는 검정고시를 다 통과하고 서울 시내 웬만한 대학을 다 갈 수 있는 성적을 받아냈다. 장학생으로 진학해 첨단공학을 전공한 민영이는 지금은 첨단 기계를 수출하는 회사에 다니는 당당한 사회인이 돼 있다. 나눔의 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달려와 양복 소매를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민영이, 그는 나눔의 집의 긍지이자 보람이다.
이렇게 좋은 만남도 있는 반면 마음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우는 인연도 있다. ‘봉천동 3남매’가 그런 경우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13) ‘청소년 쉼터’ 필요성 일깨워준 3남매
서울 상계동과 달리 봉천동에 ‘나눔의 집’을 하면서는 이용 대상별로 특성화된 쉼터와 공동체를 여럿 만들었다. 그 과정에는 다 필요성을 깨우쳐 준 사람들이 있었다. ‘청소년 쉼터’를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 삼남매는 되짚어 생각할 때마다 아픔을 주는 아이들이다.
1991년쯤 그 집에 처음 찾아갔을 때, 단칸방 안에는 소주병이 널려 있었고 부엌에도 문 밖에도 온통 술병이었다. 부모는 의외로 둘 다 공부할 만큼 한 사람들이었다. 한때는 경제적으로 괜찮은 가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사업이 어렵게 되면서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가정에 균열이 생겼다. 통상 그렇듯이 폭력이 뒤따랐다. 엄마는 폭력을 못 견뎌 집을 나갔다고 했다.
막내는 어딘가에 맡겨져 있고 두 아이만 이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 삶은 아버지 술심부름을 하거나, 얻어맞거나, 아버지의 상태를 살피며 벌벌 떠는 일상으로 꽉 차 있었다. 첫째 여자 아이는 얼굴도 예뻤고 그림도 잘 그렸다. 심성도 고와서 더 안쓰러웠다. 둘째 남자 아이는 나눔의 집에서 엄마 같은 선생님들이 보살펴 줄 때는 귀엽게 굴었지만 밖에만 나가면 봉천동 일대를 휘어잡는 ‘실력자’였다. 아홉 살 때부터 별명이 ‘봉천동의 작전부장’이었단다. 십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파출소 순경은 상대가 안 되어 경찰서 형사과에서 직접 관리하는, 그 세계의 ‘거물’이었다.
한 번은 우리 집에까지 들어와 결혼 예물이었던 14k 반지와 목걸이까지 가져갔고, 나눔의 집 물건들과 봉사자의 지갑도 수시로 털어 갔다. 불러다 혼내고 야단치고 품어주기도 했지만 다음날, 아니 한 시간도 안 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집에만 돌아가면 술 취한 아버지와 폭력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무언가 요구한다는 게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봉천동의 이른바 ‘문제 청소년’ 70여명을 다 겪어봤지만 이 ‘작전부장’처럼 속 썩인 아이도 없었다.
어느 날 삼남매의 막내가 등장했다. 누나 형과 같이 살기 위해 왔다고 했다. 비록 남의 집이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영양 상태도 좋고, 성격도 순하고 착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나며 형 누나처럼 표정이 변해갔고 옷차림도 남루해졌다. 형의 불량한 행동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무리를 따라다녔다.
그렇게 안타까운 하루하루가 지나고, 94년 새해 첫 날이었다. 영하 13도나 되는 몹시 추운 날, 이른 아침부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한시바삐 나눔의 집에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기도하면서 뛰다시피 대문에 들어선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린다.
대추나무가 있던 화단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삼남매가 쓰러져 있었다. 큰 아이 어깨를 잡는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쇄골이 부러져 있었다. 둘째도, 막내도 움직이기는커녕 눈도 뜨지 못 했다.
분노가 솟구쳤지만 수습부터 해야 했다. 1월 1일이라 도와 줄 사람이 없었다. 파출소에 전화를 해 봤지만 순찰차가 없다고 했고 택시를 부를 수도 없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나눔의 집 후원 모임인 ‘두레 벗’의 한 회원에게 연락이 닿았고 고맙게도 멀리서 차를 가지고 와 주었다.
다행히 문을 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 ‘사당의원’에 데리고 갔다. 찬찬히 살펴보니 상태가 이만저만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14) ‘위기의 청소년’ 보호 위해 쉼터 세워
알코올 중독 아버지에 의한 폭력 속에서 살아 온 ‘봉천동 3남매’는 1994년 1월 1일, 나눔의 집 마당에서 끔찍하게 다친 모습으로 발견됐다.
병원에 가보니 큰 어린이는 쇄골, 둘째는 갈비뼈가 부러졌고 막내는 머리가 터졌으며 얼굴에도 심각한 상처가 있었다. 셋 다 등과 배 곳곳에 허리띠로 맞은 자국과 주먹만한 멍이 수도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12월 29일 밤부터 2박3일을 작은 방에 갇혀 밥도 못 먹고 온갖 벌을 서면서 죽도록 맞았다고 했다. 1월 1일 새벽에야 겨우 탈출해 나눔의 집까지 기어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만일 휴일이라고 아무도 나가 보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방치돼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어린이들 상처를 살펴보던,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주로 진료하던 ‘사당의원’의 의사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신부님! 아이들 좀 살려 주세요!” 어린이들을 살려 달라고 데려온 나에게 의사가 도리어 애원하는 것이었다. 상처는 당장 치유할 수 있어도 이대로 두면 어린이들이 종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나는 그제야 어린이들을 그 집에서 데리고 나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 한동안은 내가 노력하면 아버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도 했었다. “기왕 술을 드실 거면 저하고만 드세요”라고 부탁도 해 봤고, 연락이 오면 술 한 병 들고 가기도 했다.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이야기를 들어준 뒤 기도해 주고 함께 찬송을 부르기도 했다. 어린이들에게 아버지가 술심부름 시키면 내게 이르라고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연락할 때 쯤이면 만취된 상태였고, 여전히 어린이들을 때리고 술심부름을 시킨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뒤로는 엄격하게도 대했다. 술병을 깨트려 버리기도 했다. 알코올 전문기관에 여러 차례 입소시켜도 봤다. 모두 소용없었다.
나눔의 집에 피신해 있는 어린이들을 찾으러 와서 간사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3년가량이나 겪고 나니 나도 알코올 중독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꼈고 한계도 절감했다. 그렇게 손놓고 있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3남매뿐 아니라 갈 곳 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자는 생각에 나눔의 집 후원 모임 ‘두레 벗’과 함께 8000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모금했다. 그해 5월, 상대적으로 더 위급한 상황에 있는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쉼터를 봉천동 작은 연립주택에 마련했다.
당시만 해도 ‘쉼터’라고 하면 고속도로 휴게소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고, 쉼터가 어린이들 가출을 부추길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어린이들과 24시간 생활하며 상처를 보듬고 교육할 수 있는 ‘전문 일꾼’을 찾는 것이었다.
다행히 남철관이라는 사회복지학 전공자를 소개받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우리에게로 왔던 그는 지금 나눔과미래 사회적기업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어서 귀한 인재들이 속속 합류해 여자어린이 쉼터 ‘행복한 우리집’이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 청소년 쉼터의 개념을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남자어린이를 위한 쉼터는 그로부터 2년 후에야 만들 수 있었다. 소극장과 노래방, 컴퓨터실 등 문화 시설을 겸비한 곳이었다. 그러나 쉼터가 3남매의 삶을 확 바꿔 준 것은 아니었다. 쉼터가 마련되는 동안 아이들의 삶이 기다려 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장 병원에서 나온 어린이들은 또다시 지옥 같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15) ‘무거운 십자가’로 남은 봉천동 3남매
1995년쯤 어느 날, 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에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 보니 사람은 없고 문간에 중국 요리 몇 가지와 흰 봉투가 놓여 있었다.
골목으로 뛰어 나가니 배달 오토바이를 탄 소년이 뒤를 돌아보며 씽긋 웃고는 가버렸다. ‘봉천동 3남매’의 막내였다. 신문 지국에서 생활하며 새벽에는 신문 돌리고, 낮에는 학교 가고, 저녁과 주말에는 중국집 배달 일을 했던 막내가 첫 월급을 탔다고 두고 간 것이었다. ‘헌금’이라고 정성스레 쓴 봉투 안에는 5만원이 들어 있었다.
94년 알코올 중독 아버지에게서 끔찍한 폭행을 당한 채 발견돼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3남매는 이후로도 한동안 그 집에서 살아야 했다.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상이 돼 버린 ‘지옥’속에서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견뎌냈다. 조금씩 커가면서 아버지의 폭력에 맞서기도 했고 위의 둘은 다른 동네로 독립해 나갔다.
중학생인 막내도 신문지국에서 생활하면서 반은 독립한 셈이었지만 동네를 떠나기에는 어렸다. 밝고 귀여운 성격으로 나눔의 집 선생님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지냈고 주일에는 미사를 돕는 ‘복사’역할도 했지만 실상 그의 삶은 ‘생존 투쟁’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두고 간 봉투를 보며 나는 목이 메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그처럼 손이 떨리고 가슴 벅찬 봉투를 받아 본 적이 없다. 그 주 주일에 그 봉투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미사를 드렸다.
95년 여자 아이들을 위한 청소년쉼터를 개설한 데 이어 97년 남자 청소년 쉼터를 열었을 때 막내는 잠시 그곳에서 생활했다. 쉼터의 대장이자 군기반장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군대에 다녀와서 쉼터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기도 하고,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며 공부에 열을 올린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말하자면 ‘고생 끝에 낙이 왔다’고 하기는 어렵고 ‘아직은 방황 중’인 편이다. 형과 시집 간 누나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직도 3남매는 내게 무거운 십자가다. 그 길고도 길었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돌아보면, 그들이 커서 아무리 환경이 좋아진다 해도 완전한 치유는 무리라는 생각도 든다. 살다가 문득문득 아픔이 살아나고, 자존감이 사라지고, 억울함과 울분이 터져 나올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으리라는 절망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아이들은 아직 바다에 이르지 않은 강물이라 믿는다. 강물이 바다까지 가려면 굽이치는 길, 좁은 길, 험한 길을 묵묵히 지나야 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어도 그렇게 가다 보면 결국은 바다에 이르고야 만다고 나는 믿는다.
3남매가 우리에게 청소년 쉼터의 필요성을 일깨웠다면 나눔의 집에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작업장이 설치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들도 있었다.
바람불면 훅 날아갈 것처럼 작고 가냘팠던 할머니, 우리가 ‘정현이 할머니’라고 불렀지만 실은 정현씨의 어머니였던 분. 30대 중반의 나이에 지능은 세 살 수준, 간질병까지 갖고 있던 정현씨를 일평생 돌보셨던 그분을 통해 나는 빈곤과 장애, 장애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16) 전국 첫 장애인작업장, 공동체로 이어져
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을 설립한 1990년대 초부터 그 동네 모든 집이 철거된 1999년까지 나는 봉천동 가장 가난한 동네 비탈길의 작은 집에 살았다. 그 바로 윗집이 어머니댁이었고 그 윗집에 ‘정현 할머니’가 사셨다.
정현 할머니는 오가다 어머니를 만나면 평상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세 한탄을 했다. 주로 30대 중반의 나이에 지능은 세 살 수준인 아들, 정현씨를 돌보는 어려움에 대한 것이었다.
길가 호떡집 앞에서, 장난감 가게 앞에서, 구멍가게 아이스크림통 앞에서 수시로 떼를 쓰는 덩치 큰 아들을 가냘픈 노인이 달래는 모습은 동네의 일상 풍경이자 보는 사람까지 숨 막히게 하는 무거운 현실이었다.
아내가 특수교육을 전공한 장애아동 교사이고, 교회와 시설 등에서도 적지 않게 장애인들을 접해 온 나였다. 그럼에도 이웃으로 매일 마주하고서야 “장애 당사자와 가족의 삶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절실히 깨달았다.
그렇게 가난했는데도 정현 할머니는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었다. 아들과 둘이 사는 손바닥만한 판잣집이 본인 소유였기 때문이다. 큰아들도 있었는데 울산에서 일용직 건설노동일을 했다. “아무리 아들이라도 그리 멀리 사는데 어떻게 부양하라고 해요. 시어미 입장도 그렇지. 어렵게 사는 며느리한데 부담 주느니 내가 고생하는 게 나아요.”
아무리 잘 만든 법률과 정책이라도 사각지대는 있겠지만, 이런 상황을 온전히 한 개인에게 맡겨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나는 할머니가 생활보호대상자가 되도록 동사무소와 구청, 복지부에까지 탄원을 했다. 그렇게 간신히 대상자가 됐지만 등급이 낮아 공공근로를 해야만 일당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날, 정현 할머니가 맡길 데 없는 정현씨 손을 잡고 동사무소 앞에 서 있다가 출결 검사를 받은 뒤 쓰레기를 주우러 가는 모습을 나는 몇 번이나 지켜봤다. 그나마도 예산이 삭감된 뒤로는 나가는 날도 줄고 받을 수 있는 일당도 줄었다.
정현 할머니는 늘 내게 “신부님, 우리 아들 같은 사람 돌봐주는 데 하나만 만들어 주셔요. 그럼 제가 빨래고 밥이고 다 해드릴게요”라고 했다. 내가 “그러지 마시고 무슨 무슨 동네도 있고, 시설에 맡겨 보시지요”라고 하면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멀리 보내놓고 제가 잠이 오겠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내 자식인데, 못난 어미 만나 고생하는데, 힘들어도 같이 살아야죠.”
넋두리는 늘 “그저 제발 저 녀석 먼저 보내놓고 바로 따라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로 끝났다. 팍팍하고 대책 없어도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게을러서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정현 할머니를 통해 분명히 알게 됐다.
그 깨달음이 밑거름이 돼 96년 나눔의 집 인근에 자활후견기관이 설립됐고 전국 최초로 장애인 작업장이 설치됐다. 99년에는 장애인 생활공동체도 마련됐다. 안타깝게도 정현씨는 그 전에 세상을 떠났다. 살던 집까지 철거된 뒤 아무 연고도, 정든 이웃도 없는 임대아파트로 이사 나가던 모습이 할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이 생활공동체와 작업장을 통해 나는 가난한 장애인들의 삶을 직면하며 충격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환한 웃음과 희망을 만나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17) 10년 만에 세상을 본 뇌성마비 장애인
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이 1999년 인근 무허가 주택을 얻어 설립한 장애인 공동체의 첫 번째 일원이었던 스무 살 남짓 아가씨, 진현이의 미소를 잊지 못한다.
“고작 7∼8m 나오는데 10년이 걸렸구나!” 진현이가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 나눔의 집 간사들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온 날 우리 심정은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참으로 복잡했다. 진현이는 나눔의 집 바로 건너편 다세대주택 지하 셋방에서 부모님과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7년째 병석에 있었고, 어머니는 배에 복수가 차오른 상태로 생계를 꾸렸다. 뇌성마비 진현이가 아버지 병수발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몇 계단만 나가면 밖인데도 진현이는 10년간 문 밖 출입을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세월을 살았을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만은 틀림없다. 밖에 나온 뒤로 한동안 진현이는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눔의 집 장애인 작업장에서 생전 처음 일을 하게 되자 나날이 표정이 밝아졌다. 비록 잡지 등을 봉투에 넣어 밀봉하는 단순작업이었지만 진현이는 인간이 기울일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을 다했다. 그렇게 한 달 일하고 받은 첫 월급봉투를 자랑스럽게 들어 보이며 “아빠한테 갖다드릴 거예요”라고 하던 그 미소. 영원히 잊지 못할 천사의 미소였다.
잊을 수 없는 장애인이 또 한 사람 있다. 그에 앞서 설명해야 할 일이 있는데, 당시 성공회 서울교구 신자들 중에서 나에 대해 비판적인 분이 있었다. “성직자면 교회 개척하고 전도하는 데 주력해야지 왜 그런 일을 하느냐” “빨갱이가 아니냐”고 강경하게 몰아붙이곤 하셨다. 한 번은 나눔의 집까지 오셨기에 나는 일단 동네를 한 바퀴 안내했다. 그리고 한 집으로 모셔갔다. 산동네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 판잣집 단칸방이었다.
“신부니임, 오셨어요오.” 중증 뇌성마비 여성 정숙이·정아 엄마가 바닥을 기다시피 나오며 인사를 했다. 집 안에는 알코올 중독과 수집벽을 앓는 남편이 주워 온 쓰레기, 폐품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초등학교 1, 2학년 여자 아이 둘이 고개를 내밀었다. 사 들고 간 과자를 아이들은 허겁지겁 먹었다.
“그만 갑시다.” 그분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그리고 그 뒤로 나눔의 집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셨다.
다만 그분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정숙이와 정아는 그 동네 또래 아이 누구 못지않게 밝고 행복한 아이들이었다. 턱이 높은 방과 주방을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리고, 아이들 도움을 받지 않으면 집 앞 가게에도 갈 수 없었지만, 매일 아침 머리를 단정하게 빗겨 주고,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보냈던 엄마의 사랑 덕분이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데 필요한 것은 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중증장애인도 얼마든지 가정을 꾸리고 훌륭한 엄마와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서 배웠다.
한편 나눔의 집의 역사에 함께한 또 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 92년 여름, 날카로운 인상의 두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장기수 두 분의 신변을 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역경의 열매] 송경용 (18) 갈 곳 없는 비전향 장기수들에 보금자리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한참 달리던 승합차가 한 건물에 도착했다. “이렇게 외진 곳에 요양원을 할 만한 건물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던 차였다. 도착하자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30년 넘게 감옥에서 생활한 분들, 겨우 석방됐다고 좋아했을 분들을 이토록 폐쇄된 곳에 살게 해야 하나!”
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또 하나의 그룹은 바로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이다. 1992년 여름 봉천동으로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노태훈 선생과 역시 장기수였던 권낙기 선생 두 분이 찾아오셨다. 얼마 전 출소한 두 분이 충남 아산에서 감옥에서와 다름없이 불편한 생활을 하고 계시니 모셔와야겠다는 것이다.
“신원보증을 ‘믿을 만한 종교인’이 서 줘야만 나올 수 있다고 해서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당시 ‘6·25전쟁 포로’, 더 흔하게는 ‘남파간첩’이라고 불렸던 장기수는 출소하더라도 물 위의 기름처럼 부유해야 하는 존재였다. 특정한 정치적 견해가 없는 사람들도 ‘무시무시한 사람들’ ‘빨갱이’로 인식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럽시다!”고 했다. 말하자면 ‘믿을 만한 종교인’이 되고 싶어서였다. ‘지금, 여기’에 약하고 의지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때, 이념과 인종과 이익을 떠나서 ‘보호’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종교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0.75평 독방에서 30∼45년을 살다 나와 연세가 일흔이 넘고 건강도 좋지 않아 혼자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감당할 수 없는 그들은 ‘나눔의 집’이 사명으로 돌봐 온 이웃들과 다를 바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분들이나 우리나 모두 지긋지긋한 전쟁과 분단의 희생자라는 생각이었다. 그분들이 감옥에서 보낸 긴 시간은 실은 우리 모두가 함께 졌어야 하는 역사의 짐인 것이다.
담당서인 온양경찰서와 전화로 상의한 뒤 길을 떠났다. 임시 거처는 당시 봉천동 주민운동에 열심이었던 분의 사랑방으로 정해졌다. 승합차를 제공하고, 손수 운전해 준 분은 나중에 이 이야기로 ‘송환’이라는 영화를 만든 김동원 감독이다.
요양원에 도착해 신분을 꼼꼼히 확인받은 뒤 우리는 복도 맨 끝방으로 안내됐다. 창문을 통해 햇살이 밝게 비추던 방 저쪽에 두 노인이 서 있었다. 역광 속의 실루엣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상황이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었다. 40여년 전,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고 헤어지던 그 비극의 시점에 그대로 멈춰 있는 사람에게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아득하고 어지러웠다.
“아, 환영합네다. 나, 김석형이외다.” “조창손이라고 합니다.” 백발인 김 선생의 눈빛이 얼마나 형형했는지, 악수할 때 조 선생의 손결이 얼마나 억셌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서울로 돌아오다 잠시 휴게소에 들러 음료수를 사 마신 때가 이분들에게는 첫 ‘남한사회’ 체험이었다. 김 선생은 여성들의 모습을 보다 “이거이, 다 서구화되었구만요!” 했다.
도착하니 봉천동 주민들이 환영을 나와 있었다. 깨끗하게 정돈해 둔 방으로 안내해 드린 뒤 푸짐한 저녁상을 차려 동네잔치를 벌였다. 훗날 어느 공안기관 담당자가 표현한 대로 관악구가 10년 동안 40여명이 넘는 ‘장기수의 아지트’가 되는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19) 봉천동엔 10여년간 ‘장기수촌’ 형성
1992년 비전향 장기수 조창손 김석형 선생을 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으로 모셔온 이래, 출소 후 찾아와 의탁하거나 인근에 집 또는 방을 얻어 산 장기수들이 40여명에 이르렀다. 2000년 이 분들 대부분이 북송될 때까지 10년 가까이 봉천동은 말 그대로 장기수들의 아지트였다.
그 중심은 아무래도 처음 모셔온 두 분이었다. 특히 북에 있을 때 고위직을 지냈다는 김 선생은 인텔리이자 전형적인 ‘이론가’였다. 늘 책을 가까이 하셨고 TV 뉴스와 신문도 빠짐없이 챙겨 보셨다. 국내외 정세와 인물평 등에 대해 토론하다가 젊은 사람들이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면 “허허, 그게 아니디요” 하면서 짚고 넘어가곤 하셨다.
장기수 ‘동지’들이 많아진 뒤에는 ‘규율반장’ 역할을 톡톡히 하셨다. 기강이 해이해지면 폐가 된다는 생각에 노심초사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원칙적이고 논리정연한 분이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숨이 차서 말을 못할 정도로 우셨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과 침을 옆에서 누군가 닦아줘야 할 정도였다. 우리 간사 한 명이 “에이, 선생님 또 우신다” 하고 어깨를 주물러 드리면 꽉 메인 목소리로 “내가 뭐이 울어” 하며 웃으시던, 그런 뒤 한참 동안 충혈 된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시던 김 선생. 늘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다하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하셨지만 내게 넌지시 “나눔의 집 같은 교회라면 북에도 동네마다 생기면 좋겠어” 하시던 선생은 북으로 송환된 지 5년여 만인 2006년 돌아가셨다. 북에서 보낸 5년간은 부디 가족과 함께 행복한 나날이었기를.
그런가 하면 조 선생은 ‘봉천동 최고 인기 장기수’셨다. 부드러운 성품과 부지런함도 돋보였지만 아이들을 특히 사랑하셨다. 북에서 나올 때 젊은 아내와 두 살, 네 살배기 아이들을 두고 나오셨다니 그러실 만도 했다. 아이들과 눈을 맞추거나 품에 꼭 안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보고 싶으시면’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때로는 엄마들이 바쁠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가게에서 과자를 한 아름 사주기도 하셨다. 엄마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밖에.
우리 가족과도 특별히 가깝게 지내셨다. 매운 김치를 못 드셔서 우리 어머니와 장모님이 만들어 드리는 물김치 백김치를 무척 좋아하셨다. 1960년대 초까지 북에 있던 기독교인의 모습에 대해 당신이 보고 경험한 범위 내에서 증언해 주시기도 했다. 북에서 고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기관사 일을 하셨다지만 말씀은 논리정연하고 힘이 있었다.
2000년 송환되시기 직전에는 내 아내를 동네 금은방으로 데려가 “여기서 제일 비싸고 좋은 반지 하나 주시오!”라고 해서 손가락에 끼워 주셨다. 출소 직후부터 노동일을 하며 모은 돈도 남은 동지들을 위해 쓰라고 남겨두고 가셨다.
북에 가셔서 다행히 생존해 계셨던 아내, 이미 결혼해 가정을 이룬 두 자녀, 손자손녀들과 함께 잘살고 계신다는 소식이 들려 와 기쁘다. 한편 마음대로 목소리 듣고 만날 수 있는 시대는 언제나 오는 것인지 답답해지기도 한다.
또 한 분, 금재성 선생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92년 9월 나눔의 집에 닥쳤던 화재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20) 불탄 나눔의 집… 재기 돕는 손길들
1992년 9월 29일 새벽, 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에 불이 났다. 비록 비가 새는 허름한 집이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애정을 쏟아 부었던 집이자 교회이며, 공부방이자 마을의 사랑방이 하루아침에 숯덩이로 변해 버렸다.
화재의 원인은 밝힐 수 없지만 어쨌든 이유 불문하고 책임자인 내 탓일 수밖에 없었다. 망연자실해 있는데 주민과 청년들, 후원자들이 속속 모여들어 같이 걱정하고 위로해 주었다. 뭐라도 남은 게 있나 폐허 속을 뒤져 보기도 했다. 그러나 건질 게 하나도 없었다. 나눔의 집 벽에 걸려 있던 나무 십자가는 가느다란 골격만 새까맣게 남아 있었고 미사 때 쓰던 성물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녹아 있었다. 그 상실감과 막막함은 그날 밤 나를 꼬박 그 자리에 앉아 있게 했다.
“그래도 힘을 내자, 함께할 사람들이 있지 않나!” 이렇게 다시 일어서도록 결정적인 힘이 돼 준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장모님이다. 어렵게 모은 적금을 깨서 거금 600만원을 가져오신 것이다.
당신의 외동딸과 손자들을 호강은 못 시킬망정 제일 가난한 동네를 골라, 심지어 물과 전기도 끊긴 곳에서 깡패들의 폭력이 난무하는 철거민촌이 될 때까지 살게 하는 데도 원망 한 번 않으시고 오히려 곁으로 이사 오셔서 기도하고 격려해 주신 장인 장모님. 두 분은 내 가장 큰 지원군이었다. 특히 화재 때 행여 내가 낙심할까 봐 서둘러 적금을 깨러 뛰어가셨을 장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또 다른 분은 봉천동 나눔의 집 인근에서 생활하신 장기수 중 한 분인 금재성 선생이다. 원래 남쪽 출신이나 해방 이후 북에 가셨던 분으로 북에서 대학교수, 군 여단장을 지낸 인텔리 출신이었다. 남쪽에 친척도 있었지만 부담을 줄까 봐 강남 연립주택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혼자 사셨다.
나눔의 집 재건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날 새벽, 폐허 위에서 미사를 드리고 난 뒤 마당에 내려가 보니 금 선생이 와 계셨다. 이미 목장갑을 끼고 쓰레기를 치우고 계셨다.
“직장은 안 가시고 어떻게 이렇게 나오셨어요?” “아니, 지금 직장이 문제요? 걱정하지 말아요. 뭐부터 시작하면 좋을지나 알려 주시오.”
선생은 일흔이 훨씬 넘은 몸으로 가장 힘들다는 질통 지는 일을 도맡아 하셨다. 그분뿐 아니라 장기수 선생들은 하나같이 “저러다 건강 상하실라” 소리가 나오도록 열심히 공사를 도와 주셨다.
비단 당신들이 신세를 진 곳이어서라기보다는, 진심으로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는 집으로서 ‘나눔의 집’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본다. 봉천동에는 그렇게 사상도 이념도 신앙도 다르지만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많았다. 그 넓은 마음들 안에서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금 선생이 내가 담장 위에 꽂아둔 까만 십자가를 바라보시다가 “제가 십자가를 새로 만들어도 될까요?” 하셨다. 왁자지껄하게 점심을 먹던 사람들이 일순 잠잠해졌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가, 그것도 북에서 내려온 ‘비전향 장기수’가 십자가를 직접 만들어 주겠다니 말이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21) 비전향 장기수 ‘화해의 십자가’를 만들다
“제가 젊었을 때 조각을 좀 배웠습니다. 허락해 주시면 한번 해 보겠습니다.”
1992년 9월 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이 화재로 전소된 후 한창 재건 공사가 진행 중일 때, 비전향 장기수 출신인 금재성 선생께서 “십자가를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여기서 ‘젊었을 때’라는 것은 40년도 더 전의 시절을 말한다.
“저희에게는 아주 큰 영광이죠. 꼭 부탁드립니다!” 기독교인이 아닐 뿐더러 정치적 신념을 꺾지 않아 30년이 넘게 좁은 독방에서 지내신 분이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는지 놀랍기도 하고 감사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우리가 서로 마음을 나누었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기뻤다.
그 이튿날부터 금 선생은 나눔의 집 바로 옆 ‘똘이 문방구’에서 1000원짜리 조각칼을 사서 공사현장의 나무 조각으로 연습을 거듭하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일해 온 역사를 조사하고, 십자가를 살펴보러 서울 시내 교회와 성당을, 좋은 나무를 고르기 위해 목재소를, 수십 군데도 넘게 다니셨다.
“조선의 예수, 일하는 사람들의 예수를 십자가에 새기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 한 달 이상 보이지 않으셨다. 시간이 흘러 나눔의 집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십자가를 가지고 오셨다.
‘조선의 예수, 일하는 사람들의 예수’ 그대로였다. 연꽃 문양이 들어간 받침대, 머리의 상투는 조선을,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깡마른 몸과 그에 대비되는 근육이 불거진 팔은 노동자인 예수를 표현하고 있었다. 40여 년 만에 조각칼을 잡으신 분이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십자가를 벽에 걸고 첫 미사를 드렸던 때의 벅참과 떨림이란. 30여 년을 감옥에서, 고난에 찬 인생을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땀과 정성이 배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상과 이념으로 갈라졌던 우리 민족이 십자가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화해의 상징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예수님이 그분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고자 하셨다고 믿는다. 그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 민족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방법은 오로지 ‘조건 없는 나눔’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십자가로 인해 나눔의 집은 해외 기독교계 손님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반드시 들르는 명소가 됐다. 그 내력을 설명해 주면 다들 감동을 받곤 한다.
금 선생은 본래 건강한 분이셨지만 원체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하셨던 탓인지 통일을 보지 못하고 남한에서 돌아가셨다. 병석에서 내 손을 꼭 붙잡고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셨던 것을 잊을 수 없다.
한편 나눔의 집 화재 사건은 내게 큰 시련이었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계기이기도 했다. 바로 국내 최초의 건설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사회적 기업’의 초창기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나레건설’을 만들게 된 것이다.
당시 등록된 주식회사 중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졌던 ‘나누며 섬기는 건설노동자 공동체 협동조합 나레건설’이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22) ‘전태일 평전’이 사역의 길 동기 부여
나는 살면서 희한한 일을 많이 겪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그게 뭐 희한해’라고 할지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A4용지 두 배가 좀 안 되는 크기의 종이가 한 장 있다. 연세대 재학 시절인 1986년 초, 서울 동교동에서 신촌로터리 방향으로 걷다가 길에 떨어진 걸 주운 것이다. 코팅까지 된 흰 종이를 뒤집어 보니 붓글씨로 ‘與主同行(여주동행·주님과 함께 동행한다)’이라고 쓰여 있었다. 누가 썼는지, 왜 썼는지 아무 정보도 없었지만 그때 내가 한창 하고 있던 고민에 답을 줬다. 그해 3월, 나는 연세대를 그만두고 성공회대에 편입했다.
서울 상계동 야학 교사 시절에는 길을 걷는데 책이 바닥에 떨어져 펄럭이고 있었다. 주워 보니 ‘전태일 평전’이었다. 그날 밤을 새워서 읽으며 만난 ‘인간 전태일’, 특히 그가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삼각산 기도원에서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은 내 신앙관을 또렷이 해 줬고, 내 사역의 방향을 정해주었다.
그 못지않게 희한한 일이 97년 보름 동안 미국을 여행한 일이다. 성공회 뉴욕교구의 마이클 캔달 신부가 나를 초청했는데 뉴욕 60개 교회와 기관이 할렘가에서 진행 중인 선교와 복지 사역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복지부 박수창 과장과 함께 가서 교회가 홈리스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사례, 저소득층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프로젝트 등을 두루 살펴봤다.
“여기까지 왔으니 캐나다도 가보라”는 제안에 즉흥적으로 토론토에 갔다가 마침 일정이 맞아 ‘유나이티드 웨이’라는 이름의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들러 자세한 설명을 듣고 왔다.
가는 곳마다 감탄이 나오긴 했지만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당시 내가 한국에서 진행하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역들에 비해 대상자의 범위가 넓었고, 정부와의 공조, 법적 근거 마련 등이 필요해 멀게만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해 말, ‘IMF 사태’가 터졌다.
97년 초부터 나는 심상찮은 징조를 느끼고 있었다. 4월부터 노동일을 하는 이웃들이 “일감이 통 없다”고 했다. 9월쯤 되자 일을 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지금도 경제 관료의 말이나 경제 전문기관이라는 곳의 발표를 잘 믿지 않는다. 그해 유달리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이 좋다’ ‘경제지표 호전 기미가 보인다’ 등 발표가 많았던 것이다.
11월이 되자 충격이 사회 전체에 ‘뻥’ 터졌다. 일시적 충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전과는 다른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은 서울 봉천동의 한 아주머니가 남편이 며칠째 안 들어온다며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TV 뉴스를 보니 서울역 광장에 노숙인이 넘쳐난다고 했다. 딱 감이 오기에 바로 나가서 뒤지고 다녀 겨우 그 집 아저씨를 찾아냈다.
그를 설득해서 집으로 데려 가기로 하고 문득 둘러보니 노숙자가 1000명도 넘어 보였다. 아찔한 광경이었다. 그대로 돌아설 수가 없었다. 바로 2박3일 동안 신문지를 덮고 자면서 사람들에게 왜 여기까지 나오게 됐는지를 묻고 다녔다. 그리고 잠깐 집에 들어오니 복지부에서 연락이 와 있었다. 당장 들어와 달라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23) 현장 경험 살려 ‘실직노숙자 대책’ 도와
IMF 구제금융 사태는 나를 이른바 ‘중앙 무대’로 나가도록 했다. 그때까지는 산동네에서 철거민, 노동자, 청소년, 노인, 장애인, 실업자, 장기수 선생들과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각종 단체나 기관, 조직 등의 초청을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곤 했다.
1998년 초 복지부에서 전화가 걸려 오자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나와 오래 알고 지내신 고 최선정 전 복지부장관이 당시 차관이셨는데 노숙자 대책 담당 국장에게 “송 신부랑 상의해서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달려가 보니 백지 한 장 꺼내 놓고 있었다. 당장 밥을 누가 해서 어떻게 나눠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예산이 얼마냐고 물으니 20억이라고 했다. “아이고, 지금 땜질식 처방 만들자는 겁니까? 200억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상황이 경제위기로 생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며, 앞으로 고용과 금융, 주거의 불안정성이 꾸준히 증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응급대책도 필요하지만 중장기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민간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지 않으면 안 되므로 종교·복지·시민단체들과의 협력 체계를 만들자고 했다.
이런 주장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사역을 통한 경험도 있지만 97년 중반 미국 뉴욕 할렘가에서 정부와 교회, 시민단체들이 노숙자 문제에 협력하고 있는 현장을 보고 온 영향이 컸다. 어떻게 그리 딱 맞는 시기에 그런 경험을 했던 것인지, 나를 통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생각에 전율이 일었다.
꽤 오랜 토론과 노력 끝에 예산이 200억원으로 늘었고 대책기구 이름은 ‘실직노숙자 대책위원회’로 정해졌다.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실직노숙자 대책 종교시민단체협의회’도 조직됐다. 이를 중심으로 전국에 대책반이 만들어져 응급 급식 사업을 했고 상담소, 중장기 쉼터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뜻 깊은 단체가 ‘한국 종교계 사회복지 대표자 협의회’다. 기독교계에서는 대한성공회를 비롯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구세군대한본영 등이 참여했고 이후에도 여러 교단이 합류했다.
이후로도 실업극복 국민운동, 공동모금회법 제정운동, 푸드뱅크 확산 및 전국협의회 조직, 각종 사회복지단체와 재단 설립 및 참여로 눈코 뜰 새 없이 밀려 다녔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98년부터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을 위한 연대회의’ 활동이다. 시혜의 대상으로 보던 생활보호대상자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권리를 가진 수급권자로 대우하고 가장 기초적인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자는 법률 제정 운동이었다. 노동·시민·여성·지역 단체 대표들, 학계, 정·관계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였지만 그 과정은 지난했다. 지금보다도 “복지보다 경제발전이 우선”이라는 논리가 강했기 때문이다.
1999년 드디어 이 법이 제정되고 2000년 시행되었을 때, 나는 그동안 만난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떠올렸다. 가난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던 사람들, 그럼에도 ‘생활보호대상자’라는 낙인 아래, 또는 그조차 얻지 못해 스스로를 부끄럽게, 쓸모없게 느껴야 했던 그들이 눈앞을 스쳤다.
보람도 크고 재미도 있는 일들이었지만 지나치게 바쁜 일정이 누적되자 결국은 몸에 병이 왔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24) 계속된 강행군에 몸 곳곳에 이상징후
늘 여기저기가 아프긴 했다. 1997년 IMF 사태 때 정신없이 지내던 중에는 특히 병원에 들러 주사 맞고, 약 한 움큼을 먹어야 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매일 2∼3시간밖에 못 자고, 철거민촌에서 깡패에게 맞아 머리가 터지고, 노숙인들 곁에서 골판지 깔고 잔 뒤 낮에는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결과였다.
98년 어느 날, 회의장을 나서는데 순간 앞이 안 보였다. 동료 신부가 나를 얼른 병원으로 데려갔다. 의사가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하기에 “신부입니다” 하자 “하나님이 살리셨네요” 했다. 뇌압이 빵빵하게 차올라서 혈관 어느 한군데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딱 1주일을 쉬었다.
얼마 뒤에는 새벽 조찬모임에 가려고 세수를 하는데 오른쪽 눈두덩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전날 저녁 서울역에 나가 있다가 새벽 2시 집에 들어와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난 참이었다. 찬물 찜질을 해도 가라앉지 않았다. 동네 의원에서 처방 받은 항생제를 1주일간 먹어 봐도 그대로였다. 하는 수 없이 삼성의료원에 가 보니 바이러스가 뼈 안으로 침투해 시신경이 감염됐다는 것이다.
“이틀만 늦게 오셨어도 실명할 뻔하셨네요.” 그렇게 해서 수술을 받았지만 오른 눈 주위는 지금도 좀 부어 있다. 이후 병원에 갈 때마다 “걸어 다니는 시체”라는 말을 듣게 되자 스스로도 건강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영국 CMS(Church Mission Society)라는 선교기관의 초청을 받았다. 영국 버밍엄의 크라우더 홀 칼리지에서 연수 받을 기회였다. 그때 내가 직접 맡았거나 이름을 걸어 놓은 직책이, 비슷한 것은 대충 합쳐도 23개나 됐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한발 물러서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2000년 9월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 버밍엄에서 40여개국 출신 친구들과 생활하게 됐다. 처음에는 날씨가 을씨년스럽고 말도 안 통해 괜히 왔나보다 후회가 됐다. 중학생 시절 서울에 왔을 때 느낀 ‘이방인’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들과 그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성직자들이 떠올라 뭉클해지기도 했다.
서서히 적응이 되자 건강도 조금씩 좋아졌다. 기숙사 친구들과 친해져서 함께 각국 음식을 해서 나눠 먹고, 각 나라 전통의상을 입고 토속 악기를 연주하며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중에서 내게 큰 깨달음을 준 이가 우간다에서 온 헬렌 신부다. 나이는 30대 중반에 육상선수처럼 깡마른 여성인데 툭하면 내 방 바로 옆 전화기를 붙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울다 웃다 하는 바람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 주말마다 여러 교회를 다니며 모금을 했는데 “교회와 집을 짓기 위해서”라고 했다. ‘교회는 그렇다 치고 왜 자기 집을 짓는데 모금을 하나’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쩌다 방을 들여다보면 옷가지, 상자 등이 정신없이 잔뜩 쌓여 있어 ‘정신이 온전치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동물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가만히 들으니 헬렌이 통화하는 소리였다. 성질이 폭발해 문을 열고 나가 뭐라고 하려다 보니 표정이 이상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은 텅 빈 것처럼 공허했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25) 세계 사역자들의 철저한 헌신을 배우다
2000년 연수를 갔던 영국 버밍엄 크라우더 홀 칼리지 기숙사에서 만난 여성 사제 헬렌은 알고 보니 고향 우간다에서 남편과 천막을 치고 24명의 어린이를 돌봐 왔던 사람이었다. 한밤중에 대성통곡을 한 것도 그 아이들 중 두 명이 장티푸스로 죽었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들은 다 누구예요?” “저희 언니와 오빠, 시동생, 이웃들이 모두 에이즈로 죽으면서 남겨 놓은 자식들이에요. 지금 장티푸스가 창궐해서 나머지 아이들도 시름시름 앓고 있대요. 언제 몇 명이 죽을지 몰라요.”
전쟁과 기아도 모자라 에이즈와 각종 전염병으로 한 순간도 인간답게 살아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들, 그 속에서 살아왔고 헌신해 온 사람이 내 앞에서 울고 있었다. 20년 이상 산동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험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오만함이 가슴 한켠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밖에도 인도의 불가촉천민 산족(山族) 어린이 700∼800명을 돌보다 온 삐띠 신부, 파키스탄 최 빈곤층 어린이들을 위해 일해 온 임란 신부, 인종차별정책에 항의하다 한쪽 팔과 눈을 잃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제, 밤사이 반군 테러로 가족이 포위됐다는 소식에 서둘러 돌아간 콩고 신부, 팔레스타인 소년병 출신 신학생 등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을 통해 내 사역의 의미를 깊이 묵상했고 가난이란 문명이 발전한다고 쉬 소멸될 현상이 아님을, 영원히 지속될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누군가는 헌신해야 함을 절감했다.
그들과는 지금도 간간이 연락하고 있다. 삐띠 신부는 산족 어린이들을 위한 벽돌집을 지으면 ‘나눔의 집’ 간판을 걸겠다고 했고 임란 신부는 운영하던 어린이 공동체 이름을 ‘나눔 공동체’로 바꾸기도 했다.
한편 2000년 겨울 두어 달 머물렀던 영국 남쪽 버클란드 모나코럼 지역 ‘성 앤드류 교회’의 그레이엄 신부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 지역을 “천국에서 딱 1㎝ 떨어진 곳이야”라고 설명하곤 한다. 그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웠는데, 꼭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부님이 새벽기도 이후부터 저녁까지 꼬박 하는 일은 마을에서 어려운 처지의 가정, 양로원의 노인들, 작은 단위 모임을 방문하고 교회에서 성경공부 및 기도모임을 가지는 것이었다. 누구를 만나도 일일이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었다. 길 가다 만난 사람이 밑도 끝도 없는 사정을 털어놔 일정이 지체돼도 결코 손을 먼저 놓거나 미소를 잃는 법이 없었다. 집에 오면 뭔가 문제를 들고 찾아온 사람들과 일일이 면담을 했다. 바쁘게 사는 데 이골이 난 나였지만 신부님을 따라다니다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 밖에도 교회 신자들의 관계, 가족들과의 관계 모두에서 따뜻하고 넉넉한 사랑, 두터운 신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번은 주민들에게 신부님은 어떤 분이냐고 물었다.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분, 격려하고 안아주시는 분, 늘 곁에 있는 분,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는 겸손한 분!” 할머니부터 어린이까지, 전직 해군 제독, 외교관, 왕립건축학교 학장 할 것 없이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아, 나도 저런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왜 우리 성직자들이 그만한 존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26) 영국서 선교단체·대학·한인교회 사역
2000년 9월부터 2001년 4월까지 영국 버밍엄 크라우더 홀 칼리지에서의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그 전과 마찬가지로 나눔의 집 여러 활동과 철거민 실업자 노숙인 등을 위한 정책 청원 활동 등으로 정신없이 바빠졌다.
IMF 사태 직후 가족 단위 노숙인를 위해 임시로 만들었던 쉼터 ‘살림터’를 서울 사당동에 제대로 다시 짓는 일은 지역 주민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9개월이나 지연됐다. 장애인공동체와 작업장 등이 들어갈 봉천동 ‘함께하는 세상’ 건물 공사 과정도 난관의 연속이었다.
이런 일들에 신경을 쓰다 다시 몸에 탈이 났다. 오른쪽 배에 극심한 통증이 오는데도 ‘어떻게든 다 해결될 때까지만 참자’고 하다가 급기야 밤새 데굴데굴 구르는 지경까지 갔다.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메추리알만한 결석이 대여섯 개나 나왔다. “무식하게도 참으셨네요”라는 의사에게 변명할 말도 없었다.
그때쯤 크라우더 홀 칼리지에서 강사 겸 연구원으로 2년간 와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거절하려 했는데 수술 직후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대로는 1년 이내에 모든 체력과 에너지가 소진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다행히 ‘살림터’와 ‘함께하는 세상’ 완공은 보고 갈 수 있었다. 동료, 후배 활동가들은 이미 각 분야에서 경험을 충분히 쌓은 전문가들이었기에 걱정되지는 않았다. 물론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럼에도 “최소 1년간 연락하지 마라”고 야박하게 말하고는 비행기를 탔다. 2003년 9월이었다.
영국 체류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크라우더 홀 칼리지에서는 예정보다 짧은 1년간 있었고 다음 1년은 영국 선교단체 CMS 런던 본부에서 동북아지부 컨설턴트로 일했다. 이 일이 끝날 때쯤 런던 대학 한국학생 담당 교목을 맡게 됐다. 동시에 런던성공회 한인교회 관할 사제도 맡아 2009년 11월까지 일했다.
그 6년가량은 20대 초반부터 쭉 정신없이 달려온 내게 주어진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지난 사역을 정리하고, 책도 쓰고, 가족들과 함께 평화롭게 보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떨어져 있어 보니 더욱 소중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하늘에 별이 총총한 밤이나 안개가 호젓하게 낀 오후, 상쾌한 공기 속에서 산책을 하다 보면 늘 떠오르던 ‘함께 걷고 싶은 사람들’이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를 이끌고 깨우치고 밀고 받쳐 준 동료들이었다.
지금도 뙤약볕 아래 길거리에서 또는 볕도 들지 않는 좁은 쉼터에서 노숙인, 장애인, 청소년, 집 잃은 사람들과 매 맞는 여성들, 몸 파는 누이들과 함께 있을 활동가들을 생각했다. 지치고 취하고 늘어진 육신과 영혼들을 부둥켜안고서 ‘한번 더 살아보자’고 씨름하다 함께 잠이 들었을 것이다. 산동네에서 지하도에서 길거리에서 밥을 짓고 퍼 나르고 있을 것이다. 의자도 책상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좁은 사무실 겸 식당 겸 회의실에서, 또는 동네 어느 식당에서 찌개 하나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내가 ‘가난과 예수’를 붙들고 살 수 있게 해준 모든 영성의 원천은 그들이라는 것을, 그런 ‘인복’ 속에 살아온 나는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송경용 (27·끝) 한 코가 소중한 그물 같은 사회를 향해
2009년 11월 영국에서 돌아와 서울 봉천동 나눔의 집으로 이르는 산동네 길을 오르다 그만 마음이 착잡해졌다.
고향집처럼 내내 그리워하던 풍경과 달리 여기저기 아파트들이 불쑥불쑥, 무심한 듯이 솟은 모습 때문이다. 봉천동 구석구석 서린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콘크리트 속에 묻힌 것만 같았다. 동고동락했던 사람들, 철거 용역 깡패들에게 얻어맞고 떠밀리고 쫓겨나면서도 삶의 터전을 지키려 고군분투했던 그들이 떠올랐다.
그렇게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뀌었다면 모르겠으나, 두서없이 높기만 한 아파트들 사이에서 ‘동네’ ‘마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 사람들 대부분은 떠나고 없었다. 서울 외곽 또는 수도권 변두리로, 더 싼 지하 셋방이나 연립주택, 그나마 나은 경우 임대아파트로 흩어진 뒤였다. ‘주거’가 상품이 되고 투기 대상이 되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이기적 욕망이 부풀려지는 사회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파편화되고 있었다.
그래도 ‘나눔의 집’을 모태로 한 일들은 활기차게 진행 중이었고 내가 없는 사이 더 전문화돼 있었다. 나는 사단법인 ‘나눔과 미래’ 이사장직을 맡았다. 노숙인 및 위기가정 쉼터와 임시주택 운영, 주거 및 재개발 상담 등 ‘주거 복지’와 관련된 일들을 전문화시켜 하고 있는 단체다. 1990년대 ‘나레건설’의 경험이 반영된 사회적 기업 ‘나눔 하우징’도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요즘 전념하는 일은 ‘위대한 유산 남기기 운동 100인 이사회’ 모집이다. ‘나중에’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부터’ ‘미리’ 조금씩 유산의 일부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물려주고 나눠줄 아름답고 위대한 100명의 사람들을 찾고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연락을 기다린다(02-928-9064).
사제로서는 ‘걷는 교회’(walkingchurch.net)를 시작해 지난해 초부터 이끌고 있다. 매 주일 서울 또는 근교의 8∼10㎞를 함께 걸은 뒤 야외의 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길, 또는 어려운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이어지는 길을 주로 걷는다.
또 내가 늘 마음에 빚을 품고 있는,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헌신하는 전국 활동가들을 위한 공제회,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전세자금 대출, 교육자금 지원 등을 하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어디서 무얼 하든 ‘나눔’이라는 말의 책임은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1986년 상계동 ‘나눔의 집’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귀에 설었던 이 단어가 이제는 사회 곳곳에서 유행어처럼 쓰인다. 초기 주창자로서 우려되는 것은 ‘나눔’이 돈 걷고, 자원봉사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나는 ‘나눔’이 사회 작동의 원리가 되기를 바란다. ‘네트워크’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네트워킹은 풀이하면 ‘그물이 일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하나님 앞에 동등한 것이다. ‘나보다 못 해서, 불쌍해서’ 돕는 것이 아니라 그물 한 코 한 코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코도 없이, 서로 동등하게 엮인 그물이 우리 사회의 작동 원리가 되는 것, 내가 생각한 나눔은 이런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먼 길이지만 든든한 동료들이 있기에 즐겁게 걸어갈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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